어휘 교육인가, 한자 교육인가!
-자기모순에 빠진 연구를 교육정책의 바탕으로 삼겠다니.
한희정(서울유현초)
1. 역사는 기록한다. 그리고 기억한다.
2016년 늦가을부터 휘몰아치는 이 엄청난 정국에서 하나 분명하게 배우는 것이 있다면 역사는 기록하고, 기억한다는 것이다. 오늘 이 토론회 자리도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다.
2015년 8월 26일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열렸던 공청회를 다시 떠올려본다. 2014년 9월 24일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 병기를 추진하겠다는 교육부 시안이 발표되고 일 년 가까이 싸워서 만들어낸 공청회 자리였다. 제대로 된 연구도 없이 밀실행정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교육부는 "교과서 한자병기 여부와 방식, 적정 한자 수 등에 대해 추가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찬반논란이 격한 상황에서 결정을 1년 미룬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와 결국 시간 벌기용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다. 역시나 교육부는 한자 병기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병기’를 ‘한자 표기 방안’으로 ‘기표’만 바꾼 채 한자 병기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의 정책연구 공고에 제시된 과제 내용은 ① 적정 한자 수 및 한자 선정(초등학교 5-6학년 수준에 적합한 200-300자 내의 한자 선정, 학습용어(개념어) 빈도수가 높은 한자로 한문교육용기초한자 1800자 중 추출), ② 교과서 한자 표기(풀이) 방안(교과서 밑단 또는 옆단 등에 효과적인 한자어 풀이 방안 연구) 였다. 이 연구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는가? 국민을 속이고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 기만이다.
2. 절차적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교육부의 정책연구는 국민의 세금으로 수행되는 연구다. 어떤 사설 단체에서 회비 모아서 하는 연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메일로 받았다.
외부로 절대 유출되거나 배포되어서는 안된다고, 열람 후 파기하라니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다. 교육과정에 개정에 따라 개발된 교과서 현장검토본을 받은 교사들에게도 외부 유출 못하게 서약서를 받는다는 소문이 있고, 한국사 국정화 교과서 집필진도 공개 안하는 깜깜이 집필에, 집필기준도 밝히지 않겠다고 하던 교육부가 하는 수준이다. 교육부 정책 연구 과정으로 진행되는 이 토론회 자리는 연구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절차다. 그렇다면 되도록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많은 이들이 의견을 내서 좀 더 깊이 있는 검토가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친절하게도 또 하나의 문서를 받았다. “교육부 정책 과제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표기 방안 연구> 토론회 안내”에 따르면 토론문 작성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제한해서 제시했다.
한자의 표시 원칙, 한자 목록의 적절성과 선정 기준, 교과서 표시 방법에 대한 의견으로만 토론문을 작성하라는 “토론 지침”는 누가 내려줬는가? 여러 토론회에 참여해 보았지만 토론자들에게 토론 지침을 내려주는 토론회는 경험한 적이 없다. 토론자는 연구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나 관점, 인식 등에 대해 창발적으로 사고하고 논의의 지평을 넓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토론이 살아나고 논점이 분명해지며 다양한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지난 2015년 8월 26일에 있었던 ‘공청회’에서의 찬반 논란이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것인가, 묻고 싶다. 아니면 시끄럽게 소리치는 공청회는 효율적이지 못하고 지성적이지 못하다고 보는 것인가. 이런 사회적 논란을 누가 일으켰는지 제발 돌아보길 바란다. 토론자가 보기에는 이렇게 토론 지침을 내려주고 토론회를 하라고 하는 것이 비효율, 비상식, 비정상이다.
우리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주제였기 때문에 더욱 투명하게 공개하고 절차적으로 문제가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정책 담당자의 기본적인 도리다. 이 내용을 유출하지 말고, 열람 즉시 파기하고, 토론 지침에 따르라고 토론자들을 협박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교육부는 다음의 내용을 밝혀야 한다.
첫째, 한자 병기 여부를 포함한 정책 연구에서 한자 표기 방안 연구로 결정된 과정을 밝혀라.
둘째, 이 정책 연구에 참여한 연구자들을 모두 밝혀라.
셋째, “내용 유출 금지, 열람 즉시 파기”라는 지침과 토론 주제를 한정하는 “토론 지침”을 내린 경위와 책임자를 밝혀라.
넷째, 연구비 총액과 집행 내역을 낱낱이 밝혀라.
3. 내용적 정합성은 어디에 있는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면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설문에 응답자의 90% 이상이 사교육이 늘고 한자급수시험 응시가 늘어날 것 이라고 응답했다. 한자 능력과 학업 성취도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결과를 보면, 고교생의 학업 성취와 가장 높은 상관을 나타낸 것은 형태소 인식력이었고, 이어서 언어지능, 시각적 기술의 순으로 나타났다. 한자능력은 학업성취와 유의한 상관을 나타내었으나, 형태소 인식력, 어휘력, 시각적 기술과 비교하였을 때는 설명력이 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교과서 한자 병기로 한자 사교육이 늘어서 한자를 아는 학생들이 늘어나도 학업 성취도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선행학습으로 한자를 배운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의 격차, 선행학습으로 한자까지 배워야하는 학생들의 피로감과 심리적 부담, 이로 인한 경제적 부담, 선행학습을 한자를 배우지 못한 학생들이 느끼는 부담과 같은 부작용에 비해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반대의견을 무시하고 한자 병기를 추진한다고 해도 어휘 교육인지 한자 교육인지, 한자 교육인지 한자 병기인지, 연구 내부에 내적 모순이 발생해 내용적 정합성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다음의 내용에 대해서 교육부와 연구진이 분명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이 연구는 연구과제 설정의 정당성도, 연구 진행의 절차적 정당성도, 연구 내용의 합리성도 확보하지 못한 연구가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첫째, “교과서 본문에 무분별한 병기 발생”의 근거를 밝혀라.
교육부 과제의 목적 및 필요성에 따르면 “현재 초등학생의 발달수준에 맞는 적정한 한자 목록과 한자어 풀이 방안이 없어, 교과서 본문에 무분별한 병기 발생”이라고 한자 병기가 이미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호도하고 있다. 2011개정 교과 교육과정에 따른 초등학교 교과서에 무분별한 한자 병기 사례가 몇 건이나 있기에 무분별하다고 표현했는지 교육부는 밝혀야 한다.
둘째, 어휘 교육인가, 한자 교육인가, 한자 병기의 목적을 밝혀라.
이 연구는 한자 선정의 전제 네 가지 중 하나로 학교 교육의 질 개선에 기여하는 교육용 한자(어)를 선정하겠다고 했다. “학교 교육의 질 개선은 일상적 문자언어 생활의 고급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교 교육의 질 개선에 기여하는 교육용 한자는 일상생활과 학교생활의 질 개선에 동시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1쪽)고 밝히고 있다. 교육용 한자(어)를 통해 학교 교육의 질을 개선하겠다는 것이고, 학교 교육의 질을 개선하면 일상생활과 학교생활의 질을 동시에 개선할 수 있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그 근거가 너무나 취약하다. 교육용 한자(어)를 선정하지 않아서 학교 교육의 질이 개선되지 않았나? 교육용 한자(어)를 선정하면 학교 교육의 질이 개선된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은 구두언어와 문자언어 생활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문자언어 생활의 고급화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자에 대한 이해를 통해 국어 한자어를 알아 국어 어휘 능력을 확충할 수 있는 한자를 그 대상으로 하고자 하였다”(2쪽), “그동안 한자 교육은 초등학교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2쪽), “한자 교육의 목표나 내용 체계는 한자 교육의 큰 틀 안에서 새롭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언제 시작하고 어떤 내용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한자 교육 전문가들에 의해 추후 보다 깊이 있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3쪽)라는 기술을 보면 한자 교육이 우선이고 그로 인한 부수 효과가 어휘 교육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과서 표기용 한자 선정 단계를 보면 교육과정 및 교과서 검토를 통한 핵심 전문어 추출을 기본으로 이를 그룹화, 1차 추출, 2차 추출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과정은 한자 교육보다는 어휘(개념) 교육에 중심을 두고 접근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교과별 핵심 개념에 대한 학습을 위해 한자를 추출하고 한자 병기를 추진하는 근거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휘 학습이나 개념 학습이냐를 생각한다면 굳이 한자를 병기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질적 방법에 의한 교과서 표기 한자 선정에서는 어휘나 개념이 아니라 “전문어(교과 전문어, 핵심 전문어)”라는 낱말이 등장한다. 전문어는 “학술이나 예술 따위의 전문 영역에서 특정한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 이 책은 전문어가 많아 일반인들이 읽기에 조금 어렵다”는 용례가 나와 있다. 개념은 “어떤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뜻이나 내용”이다. “영희는 너무 어려서 아직 돈에 대한 개념이 없다”, “사회의 급속한 변모는 가족의 개념도 변하게 하였다”와 같은 용례가 있다. 뜻풀이로 본다면 전문어와 개념은 다르다. 2015개정 교육과정에도 각 교과별 핵심 개념(도덕과는 핵심 가치)를 제시하였지 ‘전문어’를 제시하지 않았다. 더구나 초등 교육은 기초기본 교육이다. 개념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전문어라는 용어를 사용한 근거가 무엇인가? 한자어 추출의 질적 과정은 양정실 외(2015)의 연구를 기반으로 교과서 수록 어휘 목록에서 출발한다. 어휘목록과 어휘망을 기초로 한자어를 추출하면서는 “개념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
전문어인지 개념어인지 개념인지, 이 개념어, 전문어, 개념은 한자어로 된 것만을 말하는 것인지, 한자 교육을 통한 어휘 교육인지, 한자 교육을 위한 어휘 교육인지, 어휘 교육을 통한 한자 교육인지, 어휘 교육을 위한 한자 교육인지, 그리고 이들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한자 병기의 목적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셋째, 중핵적 한자어에서 한자 선정의 근거를 밝혀라.
“교육과정의 내용 요소 및 학습 요소, 그리고 교과서의 어휘망을 참고하면 교과 이해에 필요한 중핵적 한자어를 추출할 수 있다”(10쪽). “추출된 한자어 중 여러 한자어가 공유하고 있는 한자 및 의미 관계 형성에 기여하는 한자를 선정한다”(11쪽)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은유법(隱喩法), 직유법(直喩法)에서 은(隱), 유(喩), 직(直)을 선정하고 왜 법(法)은 선정하지 않았는지, 습도(濕度), 습도계(濕度計)에서 도(度)는 선정하지 않고, 전도(傳導)-도체(導體)-부도체(不導體)에서 도(導)는 선정하였는지 근거가 불분명하다. 법(法)이 법(法)-헌법(憲法)-법률(法律)-법원(法院)으로 사회과에서 선정되었기 때문에 수학과에서는 제외한 것인지, 도(度)가 경도(經度), 위도(緯度)로 사회과에서 선정되었기 때문에 국어과에서는 제외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사전에 이를 어떤 기준에 따라 조정한 것인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물론 교과별로 중복되는 한자를 어떤 기준에 따라 삭제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삭제한 기준이나 근거 역시 찾을 수 없다. ‘교과별’로 각각 추출하고 중복된 것은 임의로 삭제하여 370여자를 맞춘 것은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게 된다.
넷째, 특정교과에만 사용되는 한자가 370개 중 292개로 79%나 되고, 5개 교과에서 모두 사용된 것은 0.27% 뿐이다.
370개 한자 중 5개 교과에 모두 나오는 것은 체(體) 하나 뿐, 4개 교과에 나오는 한자는 분(分), 직(直) 두 개, 3개 교과에 나오는 것은 20개, 2개 교과에 나오는 것은 49개, 한 교과에만 나오는 것이 292개다. 이것이 한자 병기의 실상이다. 한자가 뜻글자이기 때문에 의미 확장성을 갖는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다섯째, 국외 교과서의 학습 어휘 제시 사례 중 한자 병기처럼 라틴어나 어원을 병기한 것은 없다. 기표와 기의의 조응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교과서의 사례에서 Target Vocabulary 혹은 Vocabulary로 제시된 것은 어휘 학습을 위한 것이다. 라틴어를 비롯한 어원을 병기하지도 않고, 어원 풀이를 하면서 뜻을 설명하지도 않았다. context card 역시 어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낱말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의미를 학습하라는 의도가 더 강한 것이다. 어려운 어휘의 발음 정보를 주는 것은 ‘영어’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이것이 한자 병기의 근거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호주의 사례 역시 어휘 교육의 측면에서 어휘 표시의 변화를 줄 뿐 각주를 통해 풀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여섯째, 97명을 대상으로 했다는 설문조사는 한자 병기에 반대한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심 여년 가까운 교직경력을 지닌 토론자는“나는 학생들에게 교과서에 있는 어휘를 지도하다가 뜻 설명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는 질문에 매우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교과서에 있는 어휘를 학생들이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라는 질문에도, “교과서에 나온 어휘의 정의나 설명을 읽고도 학생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라는 질문에도 매우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응답이 있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정말 진지하게 묻고 싶다. 잘못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다. 교사 역시 10년이 되어도 20년이 되어도 늘 막히고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배우는 존재이다. 교과서에 나온 것을 읽고 바로 이해하면 ‘교사’가 왜 필요한가, 수업이 왜 필요한가. 의미의 구성은 사회적으로, 그리고 개인 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사회 구성주의(비고츠키 문화역사이론)의 기본적인 가정이다. 그러니 학교에서 배우고 일상에서 사용하면서 자신의 의미로 구성해가는 과정이다. 이것이 한자 병기로 해결된다는 것을 합리적인 근거로 설득할 수 있다면 이런 논란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교과서에 한자를 노출시키는 방안에 대한 선호방식에 대한 설문결과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