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집>은 부산에서 전설적인 외식 사업자로 명성이 높은 장석관(61) 씨의 ‘작품’이다. 고향인 경북 청송에서 음식과 숙박업에 종사했던 부친에 이어, 그의 아들까지 3대가 외식업을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장씨는 그 동안 수십 개의 식당을 운영했다. 손 대는 식당마다 성공을 거뒀다. 고깃집, 한식, 중식, 일식, 분식 등 업종이 다양했다. 그가 업종을 전문화하지 않고 다양화한 이유는 투자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장씨의 경영 스타일은 <송정집>에서도 재현됐다. 점포를 얻고 두 달간이나 꼼꼼하게 수리를 한 후 들어갔다. 입점 후 바로 영업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무려 22개월간 그 점포에 맞는 메뉴를 개발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100여 가지 메뉴를 점검해본 끝에 그 중 8~9가지 메뉴를 선정하고 만 2년 만에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장사도 안 하면서 직원들만 출근하는 이상한 식당을 무척 궁금해 했다. 혹시 마케팅의 일환으로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닌가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빈틈없이 준비해서 손님을 맞이하겠다는 주인장의 완벽주의의 소산이었을 뿐이었다. 수입이 ‘0원’이었던 이 기간 동안 직원 월급과 점포 임차료와 실험용 식재료비는 ‘수억 원’ 들어갔다고 한다.
<송정집>은 식당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세련된 인테리어나 내부 집기는 레스토랑에 가깝다. 하얀 벽에 따뜻한 조명과 통유리로 된 탁 트인 창을 보면 영락없는 고급 카페나 레스토랑이다. 아직 준비 중이긴 하지만 메뉴판의 낙지볶음덮밥, 돼지불고기덮밥과 송정비빔밥을 보면 한식당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국수나 김밥, 찐만두를 먹는 손님들을 보면 완전히 분식집이다. 주인장 장씨는 ‘업그레이드 된 분식집’일 뿐이라고 한다.
순한 맛의 비빔밥, 나물 잘게 썰어 먹기도 편해
들어가자마자 자리에 앉으면 스테인리스 보온병에 든 현미차를 내온다. 수저도 녹차 담긴 유리 주전자에서 깨끗이 소독된 상태로 손님을 기다린다. 더구나 식기들도 값비싼 것들을 사용한다. 접시나 물잔, 국그릇은 모두 자기이고 밥은 놋그릇을 쓴다. 하얀 고급 자기 잔에 따끈한 현미차를 따르면 ‘왠지 비싼 집에 들어온 느낌’이 밀려온다. 그러나 메뉴판을 펴는 순간 그 느낌이 기우였음을 깨닫게 된다.
송정비빔밥(6500원)은 이 집에서 손님들이 가장 많이 먹는 메뉴. 전주와 진주비빔밥을 분석해 장점만 따서 개발했다고 한다. 나물은 자꾸 손대면 손댈수록 물러지기 쉽다. 송정비빔밥은 주방에서 조리하는 손길과 손님이 먹는 손길을 최소화 한 메뉴다. 보기에 화려한 비빔밥보다 먹기 편하고 소화 잘 되며 몸에 좋은 비빔밥에 초점을 맞췄다.
콩나물, 애호박, 부추, 고사리, 묵나물, 한우 소고기볶음, 지단, 김 가루가 들어갔다. 가장 큰 특징은 나물들을 잘게 썰어 먹기 좋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비빌 때에도 잘 비벼지고 숟가락으로 떠서 먹기에도 편하다. 참기름 향이 강하지 않고 조미료 맛이 나지 않는다. 고추장도 그다지 맵거나 짜지 않다. 직접 담근 고추장과 구매한 고추장을 반씩 섞어 끓여 중화시킨 비빔밥 전용 고추장이다. 비빔밥 맛이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면서 수수하다. 쪽파를 썰어 넣은 따뜻한 국수용 멸치국물을 함께 내온다.
비빔밥의 중심은 역시 밥이다. 이 집은 ‘영호진미’라는 신품종 벼를 계약 재배해 1년간 쓸 물량을 확보해둔다. 이 품종은 쌀알이 맑고 투명하며 밥을 지으면 윤기가 돌고 찰기가 생긴다. 10℃의 항온으로 벼를 보관, 미질을 유지했다가 그때그때 직접 도정해 쌀로 만든다. 이 쌀로 여러 대의 압력밥솥에 실시간으로 밥을 짓는다. 갓 지은 밥맛이 퍽 좋은데 밥값은 따로 받지 않는다. 부족하면 양껏 먹어도 된다. 한편, 도정 과정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미강(쌀겨)도 원하는 손님에게 무료로 나눠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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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멸치국물에 자가제면 국수 말아내
<송정집>이 단순한 밥집이 아닌 것은 비빔밥 못지않게 면류인 국수의 인기가 높기 때문이다. 송정물국수(4000원)는 자가제면으로 뽑은 국수에 진한 멸치 육수로 국물을 냈다. 국물에 잘게 썬 쪽파를 넉넉히 넣고, 면과 숙주나물이 국물 위로 솟아올랐다. 이 모습이 마치 푸른 바다에 화산섬이 솟은 모양 같다.
면은 전분이나 첨가물을 넣지 않고 밀가루 100%로 반죽해 3단계로 숙성시켜 뽑았다. 혀에 닿는 국수 표면이 백옥처럼 매끄럽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소화가 잘 돼 노년층 손님들도 즐겨 먹는다. 국물에 충분히 넣은 쪽파는 국수 맛을 좋게 해주기도 하지만 멸치의 비릿한 맛을 완화시켜준다. 따라서 멸치의 진한 국물 맛을 즐기고 싶을 땐 쪽파를 건져내면 된다.
찐만두(4000원)도 <송정집>을 분식집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메뉴다. 만두피는 두께가 0.45~0.47㎜ 정도로 얇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야들야들한 만두피에 부추, 당면, 파, 숙주나물, 돼지고기가 실팍하게 들어찼다. 만두소 가운데 돼지고기가 단연 압도적으로 양이 많다. 돼지는 암퇘지만 사용한다.
찬으로 나오는 양배추김치는 새콤하게 익어 ‘노년기’에 접어들었는데도 아삭한 식감은 ‘청년기’ 그대로였다. 주인장 장씨의 부인이 친정어머니에게 배운 김치다. 양배추를 먹기 좋게 잘게 썰어 멸치젓과 새우젓을 넣고 담갔다. 사철 어느 때 먹어도 맛과 식감의 변화가 적다. 중국산 김치는 물론 웬만한 김치보다 맛이 괜찮고 이 집 음식들과 잘 어울린다.
밥 먹는 내내 딱히 정리할 수 없었던 이 집만의 맛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식사 후 건너편 찻집에서 바라본 <송정집> 너머로 살짝 봄 바다가 어른거렸다. 그제야 그것이 ‘봄 바다 맛’이었음을 깨달았다.
<송정집> 부산시 해운대구 송정광어골로 59 051-704-05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