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 요 1: 1 태초에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언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 마 5: 18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요 10: 35 -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 갈 3: 16 -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 딤후 3: 16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가 주장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해 많은 교회가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강해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
* 암 8: 11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에 벌써 하나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 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 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일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으로 충분하다. 성경 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성경 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다. 그는 열두 제자 중 예수님의 측근에 있었던 세 명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본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자신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하였다.
* 요 13: 23 -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 요 19: 26 -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 요 20: 2 -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 요 21: 7, 20 –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사도 요한의 제자로 폴리갑의 제자인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말하기를, “이후에 주의 제자, 주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요한이 아시아의 에베소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 친히 하나의 복음서를 내었다”고 했다. (김효성 이단 반박, 3. 1. )
정경에 대한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은 “제자 중 한 사람인 요한이 그의 동료 제자들의 권고로 복음서들 가운데 제4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라고 증언한다.
본서는 아마 주후 85-90년경 에베소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보충적 성격을 가진 복음서이다. 본서는 마태와 마가와 누가 복음서들에 있는 내용을 많이 생략하였고, 그 대신 거기에 없는 것들을 많이 보충하고 있다. 복음서 중 본서만이 유월절을 3번 언급한다(2: 13, 23. 6: 4. 11: 55).
요한복음 3: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과 마태복음 4: 12-13, “예수께서 요한의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라는 말씀을 비교하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생략한 예수님의 초기 사역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공관복음서들은 마지막 유월절 전까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만 증언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몇몇 부분(2: 1-12. 4: 1-54. 6: 1-71. 7: 1-9) 외에는 유대 지방, 특히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을 증언한다(1: 35, 43. 2: 13, 23. 3: 1, 22. 5: 1. 7: 14. 8: 1. 9: 7. 10: 23. 11: 1).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이므로, 요한복음은 목격자 증언의 내용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저자는 어떤 사건이 발생한 시각을 종종 언급한다. (1: 39. 4: 6, 52. 19: 14) 요한복음의 시간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 달리 로마 사람들의 시간 계산 방식을 따랐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 39에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라는 말씀에서 ‘열 시’는 유대인들의 시간 계산 방식대로 오후 4시를 가리키기보다 로마 사람들의 시간 계산 방식대로 오전 10시를 가리킬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제10시가 오후 4시를 가리킨다면, ‘그 날 함께 거하니’라는 말이 적절해 보이지 않으며, 또 안드레가 형제 시몬을 예수께 데려오는 것도 시간적으로 적절해 보이지 않으며, 또한 무엇보다 요한복음 19: 14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제6시에 심문하였다는 말씀과 마가복음 15: 25에 예수께서 제3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씀을 조화시키기가 매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로마 사람들의 시간 계산 방식을 따랐다는 생각은, 로벗슨의 말대로, 요한복음 19: 14과 마가복음 15: 25을 조화시킬‘유일한 해결책’이다. ( A. T. Robertson, A Harmony of the Gospels, pp. 284-87. )
또 요한은 베드로가 귀를 자른 대제사장 종의 이름을 ‘말고’라고 언급하였다. 본서에는‘증언한다’는 말이 34번, ‘증거’라는 말이 2번 사용되었다. 요한복음 21: 24에는“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라는 말씀이 쓰여 있다. 이 모든 점은 본서의 신빙성을 더하여준다.
다른 복음서들도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본서는 특히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1: 1,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8: 58,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10: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14: 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러나 본서에 예수님의 인성(人性)에 대한 증거들도 분명하다. 4: 6,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11: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9: 28, “내가 목마르다.” 물론, 공관복음서들도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가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심을 밝히 증언하였다.
특히 마태복음 11: 27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간의 특별한 신비적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것은 자신의 신성(神性)에 대한 명백한 증언(證言)이다.
본 강해는 종합 주석과 김효성 목사의 강해를 참고로 여러 교계의 휼륭하신 목회자, 청지기님의 설교를 참조하였다. 출처를 최대한 밝히도록 하였으나 불분명한 것도 있어 독자의 이해를 바란다.
덧붙여, 요한복음에는 기록의 목적이 제시되어 있다. 20: 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본서뿐 아니라, 모든 복음서의 공통적 목적이며 모든 성경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 딤후 3: 15-17 –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고 또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다.
1 장 : 사람이 되신 독생자
1. 말씀이신 예수 ( 1: 1-5 )
1 태초에 말씀(헬, 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또는 이기지 못하더라)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증언한다. 사람이 되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표현되었다.
‘태초’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맨 처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창조의 시작 때로 시간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계시니라’는 말은 ‘계셨더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 ( 헬라어 엔은 미완료과거 시제이다. 그것은 그가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음을 나타낸다. 물론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이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을 가리킬 뿐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시간 세계의 맨 처음에 이미 말씀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가능하다. ( ‘태초에 무엇이 있었느냐?’는 질문은 예로부터 철학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혹은 첫 번째의 질문이었다. 이것을 ‘존재론’(Ontology)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창세기 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을 보충한다.
시간 세계의 맨 처음에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음을, 즉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음을 전제한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 영원하신 분이심을 뜻한다.
이처럼 본 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고 말한다. ‘말씀’이라고 표현된 이 분은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고 그는 하나님과 똑같이 시간에 속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러나 본 절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또한 하나님과 구별되심을 증언한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두 번이나 말씀과 하나님을 구별하여 말한다.
여기에 두 분의 관계성이 드러난다. 주께서는 후에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 5).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창세 전의 관계로 영원적인 관계이며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물론 인격적 관계일 것이다.
본 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태초부터 계신 말씀, 즉 하나님과 구별되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한다. 이것은 말씀으로 표현된 그 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고 그가 인격이시라는 것은 내포되어 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되시는 것과 동시에 그 두 분이 본질적으로, 본체적으로 하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는 것은 구약성경 처음부터 신약성경 끝까지 성경 전체에 흐르는 기본 진리이다.
기독교는 다신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신비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하나님과 아들 간에는 신비하게도 숫자적으로 본질적 하나 됨이 있다.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일체의 신비이다. 이것은 성령과의 관계를 포함하여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이시라고 밝히 증언한다.
이사야는 신적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였다.
* 사 9: 6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
* 딛 2: 13 -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사도 요한도 그의 서신에서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라고 말했다. (요일 5: 2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셨다. 그는 태초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분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 즉 하나님과 구별되시지만,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 즉 참 하나님이셨다.
요 1: 1 태초에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1] 태초에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 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 하여, 사도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 때, 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태초'(*, 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점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2] 말씀이
원어 상 '말씀(*, 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1)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①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②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칙.
③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 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2)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를 의미한다.
* 시 147: 15 -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 도다.
* 시 148: 8 -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 히 4: 12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사 2: 1 -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 렘 26: 1 -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 딤전 5: 17 -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특히 요한은 본 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함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 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본서에서 '믿다'(*, 피스튜오), '사랑'(*, 아가페)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이 용어(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된 본서의 특성까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 (1: 1-18 주제 강해 참조).
3] 계시니라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을 사용하였다.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4]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나님과 함께'(*,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 '...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 엔;*, 메타;*, 파라;*,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 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 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5]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혹자는 본문에서 '하나님'(*, 데오스) 앞에 관사 '호'(*)가 없기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신약 서론, '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할 수 있다.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 따라서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 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밝히기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에서 '말씀(로고스)이 주어, '하나님'(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참 모습은20: 28의 도마의 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 절은 원문 구조상 '말씀이 계시니라'(* ...호 로고스 엔...)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 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 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