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38, 수원정을 말한다
서울의 용산에 소재해 있었던 세칭 동방교의 중심거점이었던 '수원정', 경부선과 경인선이 상호 교차하여 지나가는 지점에 위치하여 삼각이 철(鐵)로 감싸이고 막혀있다고 해서 악한 기운이 범접할 수 없는 중앙오토수(周易用語에서 차용한듯?)라고 선전하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세칭 동방교의 중심거점이었다.
유일한 출입문이 있던 서편 대문의 반대쪽, 즉 동편쪽으로는 조그만 도랑이 한강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하수처리시설이 엉망이던 시절이라 그 도랑위에 얼기설기 말뚝을 막아 널빤지를 덧붙여 화장실을 설치해 놓고 사용하면서 집안의 온갖 오폐수를 수챗구멍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장마철이 되어 한강의 수위가 올라가게 되면 오폐수가 역류하여 '수원정'의 마당이며 마루에 까지 화장실의 오폐수가 넘쳐나고 분뇨 덩어리가 물위에 떠 다니기도 했다. 바지를 한껏 걷어올리고 이리저리 물살을 헤집고 다니던 기억도 생생하다. 물이 빠지면 엉망진창이 된 '수원정'의 내부를 정리하고 청소하고 오폐수를 걷어 낸다고 '수원정'에 상주하던 대기자들이 말할 수 없이 곤욕을 치루었음은 물론이다.
(수원정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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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용산에 소재했던 ‘수원정’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왜정 때 지은 전형적인 구(久) 일본식 건물인데 적산가옥(敵産家屋)인 듯하다. 외벽 사방으로 견고한 나무기둥의 틀을 만들고 주름함석(경양철)을 덧붙여 거기에 검은 콜타르를 칠해서 사람 키보다 훨씬 높게 방벽을 둘러 싸 놓았다.
서쪽으로 나 있던 유일한 대문은 항상 잠가 놓은 채 조그만 쪽문을 통하여 출입하고 대문 안쪽에는 24시간 경비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인은 물론 도둑도 절대 침범할 수 없는 철의 장막 같은 곳이다. 밖에서 ‘똑,똑’하고 두드리면 안에서 누구냐고 묻고 밖에서 ‘성민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신분이 확인되면 쪽문을 열어주어 출입하는 방식이다.
대지가 100평(坪) 정도 되었을까, 외벽을 따라 ‘ㄷ 자’로 연결된 좁은 통로에 협소한 마당이 가장자리를 따라 조성되어 있고 대지의 한가운데 40, 50평 정도의 단층 목조건물이었다. 내부는 여러 개의 방과 복도로 구성된 일본식 내부 구조를 개조(리모델링)하여 수십 명의 신자들이 모여 예배나 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툭 트이게 만들어 놓았다.
유일한 출입구인 서쪽 대문을 제외한 세 방향은 건물 주위를 돌아가면서 이어붙인 골방들이 몇 개 있었다. 북쪽의 부엌과 붙어있는 골방에는 항상 여자 대기자들이 거주했고, 동쪽 골방에는 남자 대기자들이 있었고, 또 남쪽에 별도로 있는 골방 하나는 고위간부들의 회의장소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10여 평 될까 말까 하는 정도의 예배실, 즉 제2성전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 창고로 사용하던 곳을 개조한 작은 공간인데, 주로 지인이나 친구를 통하여 포섭된 새 신도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곳이었다.
이 제2성전을 출입하는 새 신도들은 이곳 이외의 장소로는 절대 기웃거리거나 쳐다보지도 못하도록 엄히 교육하고 단속했다. 발걸음도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두 손을 합장하여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제2성전에만 출입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신심(믿음)을 인정받게 되면 그 때부터 본 성전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이 내려지는 것이다.
새 신도들은 본 성전 출입이 허락되도록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는지 모른다. 이 수원정에서는 낮, 초저녁, 심야로 구분지어 예배를 보는데, 낮과 초저녁은 일반 신도, 심야(深夜)에는 그야말로 정예(精銳) 성도들이다. 그들은 전국에서 뽑힌(빈집초월 한)자들로서 신분상의 위상(位相)과 계급이 일반 신도와는 천지(天地) 차이가 난다. ]
(문정열자서전 샬롬요엘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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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빈집초월’(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기위해 무단가출하여 집을 나오는 것을 말하는 세칭 동방교의 은어-隱語)하여 부산 지교회에서 믿음이 솟아나서(특출해서) 상부의 부름을 받고 이곳 중앙오토수(주역용어인듯 한데 수원정을 그런 장소라고 선전한 세칭 동방교의 은어-隱語)로 진출한 나는 뒤에 따로 설명하겠지만 선님들의 순회자 겸 이곳 '수원정'(외부적으로는 제일교회라 칭했음)의 제2성전을 맡은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원래 창고로 사용하던 곳을 개조하여 작은 공간을 확보하고 정리하여 조그마한 성전으로 꾸미고 주로 기존 신도의 지인이나 친구를 통하여 포섭된 새 신도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용도로 만들어진 장소였다.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기 마련이고 난리와 난리소문, 처처에 기근과 지진의 소식은 꼬리를 물고 메스콤을 타게 마련이다. 마태복음 24장은 말세를 강조하여 공포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여러 사례들을 끌어모아 말세를 강조하여 공포심을 불어넣고 유일한 살길이 여기 있노라 설파하는 것이다. 이 제2성전을 출입하는 새 신도들은 이곳 이외의 장소로는 절대 기웃거리거나 쳐다보지도 못하도록 엄히 교육하고 단속했다. 발걸음도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두 손을 합장하여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제2성전에만 출입해야만 했다. '수원정'의 대기자들은 그들을 신성민이라 불렀다.
지성(헌금)을 분에 넘치도록 바치고 담임하는 전도사의 사소한 언질에도 절대 복종하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면 개별 면담을 통하여 로마서 8장15절, 할아버지의 비밀을 살짝 전수한다. ‘아바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라는 말이니 즉,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이미 제2성전에서 여러차례의 집회와 교육을 통하여 충분히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곧 닥아오는 세상의 끝과 불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 좁은길(세칭 동방교)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담임전도사의 관찰에 의해 어느 정도 신심(믿음)을 인정받게 되면 그 때부터 본 성전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이 내려지는 것이다. 새 신도들은 본 성전 출입이 허락되도록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는지 모른다. 일차적으로 나의 승낙을 얻어야만 본 성전 출입의 발판이 열리는 것이다. 생사여탈(?)의 일차적 관문을 틀어지고 있는 셈이다. 약관 20대의 일이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얼마후에 제2성전이 번창하여 밀려드는 새 신도들을 도저히 더 수용할 수 없어 용산 대로변의 철도병원 근처 2층건물 하나를 전세내어 확장이전개업(?)을 하였는데 전도사로서의 실력도 인정받고 세칭 동방교의 한 교회를 단독으로 운영할 수 있어서 감개무량했다. 그후 좁은길(세칭 동방교)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느끼고 이곳을 탈출해 나왔지만 만일 여기에서 계속 잔뼈가 굵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이 세계에서 대성(?)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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