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저벅저벅...
[그러나 너희들은 구대장로 모두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당할 구대장로가 아니었음을...]
순간, 그렇게도 느리던 그의 걸음이 돌연 빨라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한줄기 빛처럼 만박대선개 등을 향해 짓쳐들었다. 손, 피에 젖은 그의 손은 허공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그 손은 수백여 환영을 일으켰다.
만박대선개 등의 입장에서 보니 온통 보이는 것은 손의 환영뿐이었다.
[피하게!]
만박대선개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피할 곳은 없었다.
(완벽하게 삼백육십방위를 차단한 공격이다.)
소요선생 등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충격을 느꼈다. 그들은 찰나지간 한가지 단안을 내렸다. 피할 수 없다면 살길은 최선의 공격뿐인 것이다.
콰아아...
그들은 일제히 장력을 뻗어냈다. 다음순간,
콰콰쾅... 좀 전에 터졌던 폭음보다도 더한 폭음이 그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동시에,
[우욱... 음... 헉!]
각기 다른 다섯 마디의 비명이 폭음 속에서 답답하게 터져 나왔다.
그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먼지기둥이 피어올랐고 갈대가 천지사방으로 자욱하게 잘려져 날리웠다.
잠시 후, 황혼 아래 그들 사섯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만박대선개와 소요선생 등의 모습은 비참했다. 그들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으며 머리는 산발이 되어 날리우고 있었고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유향신협은 본래의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아예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창백했고 두 발은 무릎까지 깊숙하게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있었다. 입가의 선혈은 계속 흘러 이제 그의 앞가슴은 완전히 피로 물들어 있었다. 초점은 멎어 있었다.
이때 만박대선개 등은 질려 있었다. 그들은 크게 소리를 쳤다.
[무엇들을 하는 겐가? 이..이대로 우리를 죽게 버려둘 참인가?]
[으으...무섭다. 우리 네 사람으로서도 부상을 당한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다니...]
스쳐가는 전율... 유향신협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나 그들은 마치 유향신협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듯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전신을 떨고 있었다.
한데 그때였다.
휙휙... 무엇인가 그들 앞에 던져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통.
한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수십여 개. 아니 수백여 개의 머리통이 피와 함께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아직 피는 굳지 않았고 더운 김을 모락모락 뿌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이들은 방금 전에 죽은 것 같았다.
[으으...저...저들은...저들은...]
[이럴 수가...누가...저들을 비명도 없이 죽였단 말인가?]
만박대선개 등은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죽은 인물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차를 따르던 흑의인과 그들이 천마십대장로 가운데 이인이라 말한 두 면사인.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만박대선개 등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도대체 누가 이 무서운 일을...)
(이들의 무공은 천마교의 일급고수의 그것인지라 누구도 쉽게 죽일 수 없는데..)
한데 문득, 그들의 시선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느릿하게 그들의 시야에 나타나는 정확이 아홉 사람. 그들의 모든 것은 백색이었다.
일신은 백포로 휘감고 있었고 얼굴은 하얀 복면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두 발을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한데도 그들은 구름처럼 만박대선개 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 한가지만으로도 만박대선개 등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들 가운데 선두의 백의복면인의 몸은 섬세하다. 여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이때 백의복면 여인은 만박대선개 등을 싸늘한 시선으로 쓸러보며 말했다.
[완벽한 함정이었더군. 천마십대장로라는 인물은 만겁뇌의 십팔마인 가운데 두 명에 불과했고...마약안은 화약이라...]
그녀는 바로 북궁추림이었다. 그 뒤를 따르는 인물은 북궁천과 군협칠대무황.
[서궁세가의 쓰레기들... 그 인자한 얼굴 뒤에 감춰진 냄새나는 짐승의 얼굴은 영원히 비밀이 될 수가 없다.]
[그대들은 누구요?]
만박대선개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북궁천은 냉소를 흘렸다.
[흥! 천하의 일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그대 만박대선개도 모르는 것이 있었던가? 백의성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순간, 만박대선개의 얼굴에 가는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백의성?]
[그대들이 백의성의 인물이었던가? 우리와는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을 텐데?]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북궁추림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사로잡으시오. 총사.]
[알겠습니다.]
북궁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 네 사람에게 다가들었다. 네 사람은 반항하려 했다. 하나, 그들은 미처 반항도 못해보고 어디를 어떻게 찔렸는지 그대로 혼절한 채 바닥에 무너져 내린다.
본래의 무공을 회복한 북궁천의 무공을 상대하기엔 그들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북궁추림의 시선이 유향신협에게로 향했다.
[대단한 정력이로군.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오히려 서궁세가의 네 인물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다니... 과연 풍운회의 구대장로 가운데 일인답다.]
그녀의 시선은 군협칠대무황에게로 향했다.
[기절했으니 조심해서 안으시오.]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군협칠대무황은 공손히 허리를 굽힌 후 유향신협을 땅속에서 빼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북궁추림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풍운회에 적지 않은 타격이 가겠군. 풍운회가 자랑하는 수백여 검수들이 떼죽음을 당했으니...]
그녀는 가만히 탄식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은 시간을 재듯 황혼으로 향했다.
[성주께서 기다리시겠군. 어서 떠납시다.]
안개, 자욱한 저녁 물안개가 호수에 잠긴 정자의 기둥을 감고 은은히 차오른다.
사위는 은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초저녁의 조용한 고요. 호수 주위의 커다란 수목들은 비껴드는 황혼에 그림자를 드리운채 서 있었다.
호수는 아담한 인공호수였다. 그리고 이 정자는 악양성 최고의 주루인 천향루였다.
천향루의 구조는 여타의 객점과는 크게 달랐다. 우선 주루가 수십 개의 정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특이했고 또한 그 주루가 호수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 더욱 특이했다. 운치가 있었고 화려했다.
수많은 정자 가운데 하나의 정자, 그곳에서는 정확히 팔인이 머물고 있었다. 바로 단엽 일행이었다.
단엽과 백의칠성. 그들은 이때 백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희디흰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거 영 귀찮은데...]
마동이 투덜거렸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마동이다. 그런 그가 복면 사이로 나 있는 입구멍을 통해 술을 마시려니 몹시도 답답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인물들 역시 음식을 먹는데 크게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단엽의 명이 없는 이상 복면을 벗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이 올 때가 지났는데?]
단엽은 흐려져 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북궁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옥겁이 말했다.
[성주, 그들은 틀림없이 임무를 무사히 완성했을 것입니다. 그런대로 백의칠군의 무공은 쓸 만합니다.]
한데 그의 말이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퍼펑!
[으악! 크으!]
돌연 호수변의 한 수림으로부터 요란한 굉음과 함께 비명이 연거푸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이어,
[흐흐흐... 어린 계집의 무공이 제법이다만...더 이상 도망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음산한 음성이 수림을 뒤흔들었다. 마동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성주...마동이 나서서 해결할까요?]
모처럼 피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가 먼저 나서자 나머지 인물들은 아깝다는 눈빛을 던졌다. 그 절호의 기회를 마동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한데 이때, 번쩍! 수림으로부터 한 줄기 인영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인영은 우연인지 단엽 일행이 머물고 있는 정자를 향해 날아왔다.
일견하기에도 피투성이임을 알 수 있었다. 일신에 회의가사를 허름하게 걸친 속인이 아닌 비구니 차림의 소녀였다.
나이는 이십여 세 가량 되었고 용모가 범상치 않았지만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으며 옷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피에 얼룩져 있었으나, 얼굴은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웠다.
우아한 속눈썹은 휘장처럼 두 눈을 가리고 있었으며 크고 서늘한 두 눈은 당혹과 경악에 질려 있었으나 역시 아름다웠다.
조각품처럼 섬세한 콧날, 석류를 한 입 깨어문 듯한 입술. 완벽한 조화미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통의 여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성스러움이었다.
그녀의 목에 휘감겨진 백팔염주로 미루어 그 성스러움은 오랜 불심에서 우러난 듯 싶었다. 소녀는 신형을 심하게 비틀거리며 목교를 타고 정자로 순식간에 건너왔다. 그녀의 품에는 나이 든 노여승이 안겨 있었다.
노여승은 심한 부상을 입은 듯 전신은 피투성이였고 피를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저들은?]
단엽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단엽은 과거 대소림사에서 그녀들을 본 적이 있었다. 단지 본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들 가운데 소녀의 알몸을 밤새 감상했던 적이 있었다.
노여승은 남해 보타신니였으며 어린 비구니는 보타신니의 속가제자인 남해성니였던 것이다. 헌데 지금 그 여인들은 무슨 이유인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도망치듯 이곳 정자로 오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녀들을 추적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어림잡아 백 수십 명. 선두의 인물은 청의노인이었다.
두 눈은 푸른빛, 손에는 청색염주를 들고 있다.
그는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고해동의 수뇌이자, 천마삼존 가운데 일인인 청목사승이었다. 그 뒤를 고해동의 일백 십 팔인의 마인중 십팔인이 따르고 있었다. 이때였다.
[크흐흐... 이제 더 이상 도망갈 수가 없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해라.]
청목사승이 음침하게 웃으며 고해동 십팔인의 마인들에게 눈짓했다.
순간, 고해동의 십팔 마인들은 허공으로 신형을 빼어 올렸다. 이어, 무서운 속도로 남해성니에게 덮쳐들었다.
남해성니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아...이대로 죽어야 하는가?)
그녀는 다리의 힘이 풀어짐을 느끼며 앞으로 엎어졌다.
[조심하시오.]
한줄기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맴도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번쩍 들려지는 것이었다. 이어 구름을 타는 듯한 기분을 느꼈고 그녀는 어느새 정자로 내려 서 있었다.
[누...누구시온지?]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물론 그녀를 구한 사람은 단엽이었다.
그러나, 남해성니는 다만 백의복면인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단엽은 대단대신 백의칠성에게 명을 내렸다.
[죽여라.]
단 한 마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아니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백의칠성은 환호하며 앞을 다투어 몸을 날렸다. 빠르다. 그리고 몸을 날리고 살인하기 시작한 그 속도는 무서울 지경이다.
[으악!]
피가 튀고 살이 튀고,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터져 올랐다.
고해동의 십팔마인이 강하다 하나 백의칠성의 앞에선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었다. 그야말로 추풍낙엽. 피에 굶주린 백의칠성은 파죽지세였다. 자신만만하게 목교를 건너던 마인들. 그들은 아닌 밤에 홍두깨 격으로 나타난 백의칠성 등에 의해 떼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남해성니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세..세상에...]
그녀의 입은 딱 벌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백의복면인들의 무공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수백여 풍운회의 고수들이떼죽음을 당할 만큼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들인 청목사승 일행이다. 그래서, 간신히 그들의 손에서 자신과 자신의 사부만이 살아남아 왔다.
한데 그런 그들을 쥐새끼 때려 잡듯 전혀 힘들이지 않고 죽이는 인물들이 존재할 줄이야. 그것도 단지 칠인으로 말이다. 그녀의 시선은 경악과 의혹으로 어우러진 채 단엽에게 던져졌다.
단엽은 이때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정갈한 백포를 나부끼며 비록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일신에서 풍기는 고귀한 기품이 신비롭기만 하다.
(아아... 이런 인물이 무림에 있었던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인물들이 아닌가?)
그녀는 자신의 안목이 좁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이때,
[우우...]
누군가 살기가 물씬 배인 장소를 토하며 정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피를 뒤집어 쓴 듯한 청의노인 청목사승이었다.
[흐흐...어린 계집, 믿는 데가 있었구나.]
그는 단엽과 남해성니를 힐끔 주시하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더 이
상 생각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는 듯 남해성니를 노리고 짓쳐들었다.
파아아...
가공할만한 장력이 그녀에게로 쏟아져 나갔다. 남해성니는 본능적으로 품 안의 보타성니를 끌어안으며 장력을 피하려 했으나 힘이 없었다. 그녀가 절망으로 몸을 떨고 있는 그 위기의 순간,
[어리석은 놈...]
단엽은 냉소를 치며 비껴 든 천마도를 가볍게 허공을 향해 내저었다.
고오오..
벼락이 치는가. 불꽃과 같은 도기가 수백 줄기 허공을 향해 날았다.
[크아아...]
막 남해성니를 가격하려던 청목사승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부릅떠진 그의 눈에 서서히 핏물이 고여 들었고 입과 코에서도 선혈이 흘러나왔다. 그는 허공에서 바닥에 뚝 떨어져 내렸다.
[으으...]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불신과 회의와 경악의 빛을 담고 단엽에게로 향했다. 단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황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너는...누구냐?]
청목사승은 울컥 한 모금의 피를 토해내며 간신히 몇 마디를 던졌다.
[크흐흐... 그분은 백의성의 성주이시다.]
이미 살인을 끝낸 마동이 대신 답했다.
[백의성주...]
청목사승의 눈빛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팍!
그의 머리가 수백 가닥으로 갈라져 터져나갔고 동시에 그의 몸도 수백 가닥으로 갈라져 버렸다. 이미 단엽이 뻗어낸 도기에 의해 그의 몸은 난도분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엽은 본래 있던 자리에 느릿하게 앉았다. 이어 백의칠성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착석하더니 술과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모두가 죽어 있었다. 호수는 완전히 피에 젖어 있었으며 청목사승을 따르던 마인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를 못하고 싸늘히 식은 시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남해성니는 가늘게 몸만을 떨고 있었다.
(인간의 무공이 아니다. 어찌 천마교의 청목사승을 단 일도에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그녀는 마치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이때다, 단엽이 그녀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제 안심해도 되오. 편히 쉬도록 하시오.]
마치 홀린 듯 남해성니는 단엽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 하해와 같은 은혜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그녀는 단엽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단엽이 빙그레 웃었다.
[보답은 이미 수년전에 했소이다.]
[예에?]
남해성니는 큰 눈에 의아한 빛이 감돌았다. 단엽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아니오. 사연이나 들어봅시다. 어이해서 저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는지.]
남해성니의 얼굴에 비애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한 눈빛으로 죽은 듯이 품에 안겨져 있는 보타신니를 주시했다. 그녀는 탄식했다.
그리고 힘없는 음성으로 전후사정을 자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저와 사부님은 남해 보타산에서 왔으며 잠시 풍운회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사부님의 뜻이었지요. 난세에 휘말려 있는 무림을 위해 희생하시겠다는... 근래들어 천마교와 풍운회의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처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저와 사부님은 열흘 전 회주이신 철군무로부터 명을 받고 화산장문인 옥암신군과 아미장문인 고목신니를 비롯한 풍운회 삼백여 고수들을 이끌고 막부산으로 향했습니다.
임무는 천마교로 향한다는 군자금을 탈취함에 있었습니다. 그 군자금은 남칠성의 천마교 사백여 산하지부에서 끌어 모은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고 그것을 탈취하면 천마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했기에 우리는 은밀히 군자금 호송의 길목인 막부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한데 오히려 우리가 기습을 받은 것입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들은 완벽히 무장한 상태에서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며 군자금을 실은 마차는 폭발물이었고...]
[되었소.]
단엽은 더 이상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는 한 모금의 술을 들이켠 후 말했다.
[철저한 함정에 빠진 것이구료.]
그의 시선은 보타성니에게로 향했다.
[상세가 어느 정도이시오?]
남해성니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거의 절망적인 상태이십니다. 심맥이 절단되고 오장육부가 흔들린 상태이니... 설사 대라신선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치료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마시오. 숨만 붙어 있다면 그분을 살릴 수 있는 인물들이 있으니... 그들은 머지않아 이곳에 나타날 것이오. 당신 사부의 명이 다하기 전에는.]
남해성니는 정중히 물었다.
[은인의 존함을 묻고 싶습니다.]
단엽은 시선을 들어 남해성니를 직시했다.
[은인이라니 당치도 않소.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하...하지만...]
[핫하하... 죽여야 될 인간들을 죽였을 뿐인데... 어찌 은인이란 소리를 들을 수가 있겠소. 이미 들었겠지만 본인은 백의성의 성주이오. 나에 관해서는 알려 하지 않아도 차차 알게 될 것이오.]
단엽은 다시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남해성니는 고개를 숙인다. 그녀는 본래 무림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녀와 그녀의 사부는 도탄에 빠진 무림을 구하는데 한 팔이 되고자 풍운회에 가담한 것이며 이런 지경에 빠진 것이다. 본래가 무림에 관심이 없던 그녀인지라 무림의 대소사에도 어두웠지만 백의성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보았다.
풍운회 내에서도 백의성은 화제의 대상이었으며 또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만약 백의성이 천마교와 같은 길을 걷는다면 난세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풍운회로서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지경에 빠질 것이며 반대로 백의성이 풍운회와 같은 길을 걷는다면 천마교는 또 한번의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분분한 추측들.
그래서 풍운회의 고수들은 긴장된 시선으로 백의성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 화제의 대상인 백의성주를 지금 남해성니가 만나고 있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판단했다.
(결코 사악한 인물들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일신에서 풍기는 끔찍한 마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단엽을 보면 선한 인물 같았고 백의칠성을 보면 마기가 물씬물씬 풍기는 것이 결코 선한 인물 같지는 않았다. 그때 정자에 소리 없이 한사람이 나타나 그녀의 두 눈을 돌연 커지게 만들었다.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었음에도 그 출현을 볼 수 없었던 또 한명의 백의 복면인.
왜소한 체구로 짐작컨데 여인임이 분명했다.
남해성니는 다시금 놀라고 있었다.
(도대체 이 백의성의 인물이라는 인물은 고수 아닌 자가 없는 것 같으니... 대단하다.)
그녀는 경이의 눈빛으로 새로운 백의 복면인을 주시했다. 그는 단엽의 앞에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시오, 부성주... 일은 어찌 되었소?]
새로운 백의 복면인, 그녀는 바로 북궁추림이었다.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지금 객실에 있고 심문할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습니다.]
[알겠소, 수고했소.]
단엽은 만족한 듯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남해성니를 눈짓으로 가
리키며 말했다.
[저분은 남해성니이며 한 사람은 그녀의 사부인 보타신니요.]
그러자 북궁추림은 관심 있는 눈길로 두 사람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를 해야겠군요.]
단엽은 넌지시 물었다.
[치료를 할 수가 있겠소?]
[물론이지요.]
북궁추림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엽은 남해성니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들으셨소? 이 분은 대라신선도 못 고치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신의이기도
하오.]
이어 그의 신형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나머지 백의칠성 역시.
남은 사람은 남해성니와 보타신니, 그리고 북궁추림 뿐이었다.
북궁추림은 단엽이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멍하니 주시했다. 이어 그녀는 탄식했다.
[아아. 이 추림의 마음. 언제 그 분의 마음 속을 파고 들 수 있을지...]
그녀의 음성은 서글펐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던 그녀의 몸은 힘없이 남해성니에게 돌려졌다. 그리고,
[본녀를 따르세요.]
객실.
천향루의 후원에 위치한 아담하고 정갈한 객실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객실이나 지금 이곳은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백의칠성과 백의칠군에 의해 이곳이 철저히 수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십사인의 고수들이 철저하게 이 객실을 호위하는 것으로 짐작컨데 지금 객실에서는 상당히 중대한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수가 있었다.
한사람, 그는 객실의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만박대선개, 그였다. 이미 숱한 고문이 그의 몸 위를 스쳐지난 듯 그의 몸은 한마디로 피투성이였다.
그의 앞, 북궁천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비정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한쪽에는 역시 피투성이의 소요선생, 백의신군 공손기, 일학자 등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단엽은 한쪽 벽에 기대어 선채 북궁천이 고문하는 광경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북궁천이 냉혹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박대선개, 어떤가? 이쯤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
만박대선개는 핏물 배인 이빨을 드러내며 벌겋게 웃었다.
[어림없다. 네놈이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노부가 만박대선개라는 것만을 알 뿐 다른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북궁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모두 같은 말들이로군.]
그의 시선은 단엽에게로 향했다. 그들 두 사람은 여전히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북궁천은 단엽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지금까지... 속하가 너무 이들을 관대하게 다루었나 봅니다.]
[그런 것 같소. 그러나 본 성주는 믿소. 당신이 그들의 입을 결국은 열게 할 것임을...]
[감사합니다.]
북궁천은 단엽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소요선생이 이빨을 갈며 말을 씹어뱉듯이 내던졌다.
[흐흐... 고문이라면 갓난 아이 때 그 한계까지 경험한 우리들이다. 이따위 고문으로써 우리들의 입을 열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래?]
북궁천은 빙그레 웃었다.
[너희들이 지독한 놈들이라는 점은 인정하지...그러나...]
북궁천은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순간, 그의 수려한 용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이어 그의 미간에 박혀 있는 또 하나의 눈, 즉 사령마안이 드러났다.
번쩍! 사령마안으로부터는 수백 가지의 각기 다른 색깔의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육체적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야. 문제는 정신적인 고통이며 네놈들이 얼마나 견디어 내는지 두고 보겠다.]
북궁천은 비릿하게 웃었다.
[사령마안... 너는 북궁세가의 인물인가?]
[이럴 수가... 북궁세가의 인물이 백의성과 관련이 있다니...]
만박대선개 등은 경악했다. 그들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들었고 전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북궁천은 웃었다.
[후후...사령마안을 알고 북궁세가를 아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서궁세가의 인물들이로군. 그렇다면 사령마안의 무서움을 더욱 더 잘 알 테니... 잘 되었군.]
순간, 그의 사령마안은 소요선생에게 던져졌고
[으아아악...]
소요선생은 머리가 깨어지는 듯한 충격에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북궁천의 사령마안은 이어 백의신군 공손기와 일학자에게로도 던져졌고 두 사람 역시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세 사람은 어떤 무서운 환상에 시달리는지 손발을 허위적 거리기 시작했고 만박대선개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비명은 객실 안에서만 울릴 뿐이었다. 단엽은 이 객실을 자신의 호신강기로써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하고 있었다. 소리뿐만 아니라 공기조차 차단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독한 놈들이군.)
사령마안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단엽은 그들 네 사람이 쉽사리 입을 열지 않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사령마안의 위력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만박대선개 등의 눈빛이 흐릿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단지 눈빛만으로 그 어떤 인물이든 종으로 부릴 수 있는 사령마안 바로 그것의 위력이었다.
북궁천은 그들의 눈빛이 흐릿하게 변하자 여운과 같은 음성을 흘려냈다.
[너희들은 이 순간부터 절대 본인을 거역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자 만박대선개 등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비명은 없었다. 고통은 이미 끝나 있었고, 그들의 영혼은 완전히 북궁천에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누구인가?]
다시 북궁천이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우리의 주인... 우리는 당신의 종...]
발음은 명확하지 않았으나 분명 그들은 자신을 종이라 했다.
북궁천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사령마안에서는 수백 가닥의 색깔이 다른 빛무리가 계속하여 뿜어져 나왔다.
[좋다. 지금부터 그대들은 자라온 환경과 그대들이 알고 있는 서궁세가의 인물들에 대해 빠짐없이 말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자, 시작하라. 풍운회에 잠입한 서궁세가의 인물들을 말하라.]
[그들은...]
만박대선개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이 네 사람 가운데 가장 높은 신분의 인물임을 말하는 것이고, 그가 알고 있는 서궁세가의 인물들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단엽과 북궁천은 풍운회에 잠입한 서궁세가의 인물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엄청났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인물들은 가공할 신분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그들은 구파일방의 장로급 인물로 행세하고 있었다. 아니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구파일방에 입문하여 완전히 구파일방의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단지 구파일방 뿐만이 아니었다. 남궁세가를 비롯한 무림의 이십여 세가에도 그들의 인물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무림의 중요한 오십여 대소문파에도 그들 서궁세가의 인물들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어떤 문파에서든 수뇌는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구파일방의 인물이 가장 좋은 예이다. 그들은 장로급이지 장문인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자질이 뒤떨어짐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수뇌라는 직책이 어떤 행동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수뇌의 자리를 사양하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그들은 그 문파에 몸을 담고 있을 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문파의 움직임을 서궁세가에 전할 뿐이다. 다시말해 그들에 의해 천하의 모든 문파의 움직임이 서궁세가의 인물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니 그것만으로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서궁세가는 천하의 문파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과거에 서궁세가의 그런 인물들이 가장 많이 활동한 곳은 역시 군협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군협천이 아닌 풍운회였다.
군협천의 인물들이 대부분 풍운회에 영입이 된 탓이다. 어쨌든 만박대선개는 쉼 없이 말을 하기 시작했고 그 서궁세가의 인물에 대한 명단은 단엽의 머릿속에 완전히 작성되어 있었으니 단엽은 들으면 들을수록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데 지금까지 들어던 인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만박대선개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인물에 비한다면...
[그리고... 군협칠대무황 가운데 한명... 예황... 부소영...]
그 말에 단엽의 몸에 거센 충격의 물결이 일었다.
(그럴 리가...)
군협칠대무황 가운데서도 서궁세가의 인물이 있었다면 백의성의 정체 역시 서궁세가의 인물에 의해 완전히 파악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도 예황부소영이라니. 처음 단엽과 수음마희 담야교를 대소림사로 인도하고 그리고 다시 적사도에 들기 전 단엽과 야릇한 인연을 맺었던 여인. 그 여인이 바로 서궁세가의 인물이라니...
(무서운 일이다.)
단엽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북궁천 역시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한데 만박대선개의 말은 더욱 그들을 충격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군협천의 구대장로... 그 가운데 한명 서궁세가의 인물... 그
러나 그가 누군지는 아무도 모름...오직 가주만이 알고 있음.]
(군협천의 구대장로까지?)
단엽은 아연실색했다. 더 이상 만박대선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 말한 탓이다.
순간, 파파팍! 북궁천은 그들의 혈도를 쳐서 혼절을 시켰다. 그의 몸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충격적이로군요.]
[그렇소. 충격적이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예황 부소영이 서궁세가의 인물이라는 점과 군협천의 구대장로 가운데에서도 서궁세가의 인물이 있다는 점이오.]
그의 음성은 은은히 떨려 나오고 있었다. 북궁천은 시선을 객실의 창문쪽으로 던졌다.
[지금 예황 부소영은 백의칠성과 백의칠군과 함께 있습니다.]
단엽은 무겁게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만박대선개가 입을 열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북궁천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단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소. 백의칠성과 백의육군이 위험하오.]
[큰일이로군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녀 혼자서 그들을 상대하기는 벅찰 것입니다.]
[아니오.]
단엽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결코 무공으로는 그들을 제압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모르겠소. 허나...그런 생각이 드오.]
[막아야겠군요.]
북궁천은 말과 더불어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쾅!
그는 먼저 몸을 날렸지만 창문은 단엽이 먼저 빠져나가고 있었다.
정적이다. 어둠에 감싸인 객실 밖은 무서운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낙엽만이 산발적으로 휘날리며 달그림자를 가리우고 있었으며 백의칠성과 백의육군은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철저히 객실을 수호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창문이 박살나며 단엽과 북궁천이 그들 앞에 내려서자 놀란 것은 그들이었다.
[아니 성주 웬일?]
[무슨 일이 있습니까?]
지옥겁과 검황 염무정이 급히 물었다. 단엽과 북궁천은 어리둥절해지고 만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예황 부소영에게 향해 있었다.
이때, 그녀는 한그루의 백양목 아래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마치 달을 감상하듯...
표정 또한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릎에는 철비파가 단정히 놓여 있었다.
이때 문득, 그녀는 천천히 복면을 벗는 것이었다. 완숙하며 아름다운 그녀의 용모가 달빛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시선은 단엽에게 향했다. 입가에는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모든 것을 아셨나요?]
그리고, 미친 듯이 하늘을 향해 웃어젖혔다.
[홋호호호....]
이에 영문도 모르는 백의칠성과 백의육군의 시선은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단엽을 향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표정이다.
한편, 다른 객실에서 보타신니와 유향신협을 치료하던 북궁추림이 문을 열고 나왔다.
상세가 호전되었음인지 보타신니와 유향신협 역시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남해성니가 마지막으로 나왔고 그녀들과 유향신협의 얼굴에도 의혹의 빛이 가득했다.
북궁천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예황 부소영은 서궁세가의 인물이오. 만박대선개가 털어 놓았소.]
[그럴 리가...]
[설마?]
그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백의육군이나 그녀를 백의육군 만큼 모르는 모든 인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홋호호호... 늦었어.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면 늦은 것이야. 호호... 이것은 가주께서도 이미 예상한 일이야.]
예황 부소영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북궁천의 말을 그대로 시인하는 것과 같았다. 그녀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대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은 우리 서궁세가의 아래에서 노는 것이다. 결코 우리 서궁세가의 이목을 벗어날 수가 없으며 차라리 이 예황 부소영의 정체를 몰랐다면 백의성은 당분간 또 하나의 음모를 위해 존속이 되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음모를 위해... 이 말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단엽은 무섭게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섭다. 확실히 서궁세가가 무서운 존재임은 인정한다. 그러나 서궁세가가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고 하나.. 결국은 나의 손에 파멸을 맞을 것이다.]
순간, 부소영의 시선은 벼락처럼 단엽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은 싸늘했다. 그리고 그 눈빛에는 한 가닥 연민의 빛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단엽...그대의 무서움도 인정하겠다. 다만 이 예황 부소영만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주께서도 인정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