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五 章 風雲의 사나이
무서운 음풍(陰風)이 휘날리는 가운데 침사곡의 신비에 찬 황사(黃沙)는 전진파의 유일한 후계자…… 운학(鄆鶴)을 삼켰다.
운학이 골짜기 안으로 뛰어 들어가던 바로 그 무렵에…… .
괴석(怪石)이 우뚝우뚝 깔려있는 돌바닥을 마치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듯이 재빠른 속도로 뛰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몸은 공중에서 세차게 휘날리고 있는 희뿌연 모래바람 속에서 한 줄기의 흑광(黑光)인 양 몸을 옮긴다. 그는 한 발자국을 떼어놓는 거리가 칠,팔 장은 됨직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무서운 신법을 쓰고 있었다.
발 디디기도 어려워 보이는 수많은 괴석 위를 평지를 달리듯이 그 사람은 간간히 가벼운 기합 소리를 내고, 그 기합 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의 몸놀림은 더욱 빨라지는 것 같았다.
이러한 그의 신법은 방금 무림계의 어느 고수가 보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속도였다.
그 사람은 어느 높다란 바위 위에 사뿐히 올라서자 거기서 잠시 발을 멈추고 사방의 사진(沙塵)을 바라보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음, 왜 이렇게 쌀쌀하고 조용하냐? 설마 내가 늦게 온 것은 아니겠지.』
그는 다시 사방을 휘둘러보고 허리에 차고 있는 파죽검(破竹劍)을 어루만진다.
그러자 그는 돌연 무엇을 발견했는지 희뿌연 모래바람 속을 지그시 노려보더니 한 괴석 뒤로 몸을 날려 숨기고 계속 그 모래바람 속을 응시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과연 세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 세 그림자 역시 무서운 속도로 이쪽으로 달려온다. 보니까 두 노승(老僧)과 한 아름다운 여도사(女道士)였다.
앞장을 서고 있는 노승은 긴 도포를 입고 있었다. 청아(淸雅)한 기품과 온화한 기색이 감도는 인물이었다.
노승의 뒤를 달려오고 있는 또 한 노승은 머리는 백설같이 희고 얼굴은 불그레한데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정광(精光)이며 당당한 풍채와 몸을 놀리는 품으로 보아 내공력(內功力)이 충실하고 위엄이 있는 사람 같았다.
앞장을 섰던 노승은 어떤 바위 위에 올라서자 걸음을 멈추고 역시 사방을 둘러보고는 한 사람의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자 역시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백엽사제(白葉師弟)! 어째서 한 사람도 없소! 설마 우리가 늦은 것은 아니겠지?』
그 위풍 있는 노승이 대답했다.
『설마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가 너무 빨리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때 뒤에 서 있던 아름다운 여도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사부님, 사부님! 저쪽에서 사람이 오고 있습니다!』
두 노승은 여도사가 가리키는 쪽을 급히 살폈다. 과연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긴 도포를 입은 노승이 낮은 음성으로
『백엽사제, 오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자 백엽 사제는 다시 눈여겨 바라보더니
『아, 복파보주(伏波堡主) 요백삼(姚百森)입니다.』
긴 도포를 입은 노승이 아! 소리를 치며 바라보는 사이에 그 두 사람은 십 장(丈)쯤의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체격이 거대하고 위풍이 넘쳐흘렀으니 그는 복파보주 요백삼이었다.
그는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오면서 백엽도사에게 공경한 태도로 말했다.
『오 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어도 백엽도장의 풍채는 여전하십니다. 요모(姚某)가 경하(慶賀)의 뜻을 올립니다. 그리고 이 분은 아마 무당파(武當派)의 장교(掌敎) 어른이 아니신지요?』
요백삼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돌아보자 긴 도포를 입은 노승은 여린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그러하오이다. 빈도가 백백(白栢)입니다. 오늘 요보주의 신룡(神龍)과 같은 위풍을 뵈올 수 있었으니 근래에 없는 영광인가 생각하오!』
무당파하면 천하 무림의 대종(大宗)이라 할 거파(巨派)이다. 그리고 나이로 따지더라도 백백 진인은 요백삼보다 이십 세나 위이다. 그 백백진인이 무당파의 장문인이라는 신분이면서도 요백삼에게 이렇게 공경하는 것을 보면 복파보주 요백삼이 당대 무림에서 얼마나 큰 잠력(潛力)과 위망(威望)을 지니고 있느냐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요백삼은 얼른 겸손한 답례를 하고 자기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소개했다.
『이분은 저와 다정한 친구입니다. 신필(神筆) 왕천(王天)이라고 합니다. 아마 두 분께서도 초문(初聞)은 아닌 줄로 아오이다.』
그의 소개를 받은 무당의 두 도장은 크게 놀랐다. 무림에서 오랫동안 이름을 날린 신필 왕천이 보기에는 건장한 농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백백 진인은 성색을 가다듬고 얼른 인사를 했다.
『왕 신필의 높으신 이름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만 뵙지는 못했습니다. 뜻밖에 오늘 이렇게 뵐 수 있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왕천(王天)도 역시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는 두 도장 뒤에 서 있는 여도사에게 쏠리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째서 무당산에 여제자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아심을 품고 있었다.
백백 진인은 그 심중을 눈치 차린 양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眞)아! 빨리 두 어른께 인사를 올려라!』
그 여도사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후배 운소진(鄆小眞)이 두 분을……』
하자 요백삼이 얼른 말했다.
『우리 거북스러운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용건부터 이야기합시다그려.』
그러자 백엽도장이 요백삼에게 물어보았다.
『요 보주. 어떻게 여기를 오셨습니까?』
『어떤 사람을 찾아 왔소이다.』
요백삼이 말을 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신필 왕천이 입을 열었다.
『요형, 마침 잘 되었습니다. 우리 두 노장님에게 물어 봅시다.』
『그렇군요!』
요백삼을 고개를 끄덕이고
『두 노장님은 전진파의 유일한 전인(傳人)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으시오?』
이 말을 들은 백백, 백엽, 운소진 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쳤다.
『운학(鄆鶴)?』
요백삼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원래 소생은 소생의 누이동생의 행방을 찾고 있었소이다. 그러나 그러자면 운학을 먼저 찾아야만 하는 것이기에……』
하고 뒷말을 이으려할 때 신필 왕천이 그의 말을 가로 채면서
『듣자하니 한남(漢南) 금사문(金沙門)이 침사곡에서 곤륜의 남노대의 유물을 발견했다는군요. 미루어 생각건대 이는 십 년 전 새북(塞北)에 있었던 까닭 모를 큰 싸움과 큰 관련이 있는 것 같소이다. 그러므로 운학은 전진파의 전인(傳人)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곳에 오리라 믿었던 것이외다.』
운소진이 다급하게 묻는다.
『그렇다면 왕 선배께서는 그의 행방을 아십니까?』
왕천은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모르오, 다만 그 사람은 반드시 올 것이라는 짐작뿐이요.』
요백삼이 백백진인에게 물었다.
『백백진인께서도 역시 이 일 때문에 이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백백진인은 미소만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화제에 오르고 있는 운학 그 사람이 바로 그 무렵에는 낙엽도 의지하지 못하는 그 죽음의 골짜기 속에 빠져들어 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그들 자신에게도 한 무서운 위기가 슬금슬금 닥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 주위에 숱하게 솟아 있는 크고 작은 괴석 뒤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들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먹이를 노려 풀섶과 바위 뒤를 잠행(潛行)하는 잔인한 표범과도 같이 바스락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놀라운 신법으로 재빠르게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복면속의 두 눈을 번뜩이며 슬금슬금 다가오자 소리도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나, 실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 복면인의 바로 등 뒤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띠우며 복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이런 현상을 비유한다면 매미를 잡으려는 버마재비를 한 마리의 참새가 노리고 있는 거나 같다고 할까.
복면인을 노려보는 그 사람은…… 죽검(竹劍)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일 먼저 이곳에 나타났던 사람임이 분명하다.
요백삼들의 바로 등 뒤까지 접근한 그 복면인은 갑자기 냉정한 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놀란 요백삼들이 급히 고개를 돌린다.
복면인은 즉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죽으려고 왔느냐?』
느닷없는 호통을 받은 요백삼은 약간 노기 띤 음성으로
『실례지만 당신의 말뜻을 모르겠구려!』
그러나 복면의 사나이는 음험한 음성으로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너희들은 죽으려고 왔느냐?』
이번에는 백엽도장이 노기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오?』
그러자 그 복면의 사나이는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면서 세 번째로 같은 말을 쏘아 부쳤다.
『너희들은 정말 죽으려고 왔느냐!』
하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치켜들었던 두 손에서 한 줄기의 찬바람이 번개같이 백엽도장을 향해 날아왔다.
순간, 백엽은 일 장을 후려쳐 그 기괴한 손바람을 막았으나 그때는 이미 그 기괴한 손바람이 몸 안에 스며들었는지 온몸에 찬바람이 감돌며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이 아닌가.
백엽이 주춤거리는 것을 본 복면인은 한 차례 크게 웃으며 다시 한발 다가서는데 그의 입에선
『너희들은 죽는다, 너희들은 죽는다……』
하는 음산한 중얼거림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침중한 음성이 복면인의 등 뒤에서 들렸다.
『너야말로 죽는다!』
복면인은 매우 놀라는 눈치였으나 뒤돌아보지도 않고 냉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떤 친구시오?』
『네놈의 친구가 어디 있어?』
『그렇다면 누구시오?』
『누구냐고? 네놈은 그것도 물을 자격이 없다!』
복면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그 불의의 출현자를 바라보니 마른 나무처럼 앙상한 노인이 바로 눈앞에 서 있지 않는가.
그는 심중 매우 놀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높은 공력으로서도 이 노인이 접근하는 기미를 깨닫지 못했으니 이 노인의 공력은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놀라움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노인을 바라보던 복면인은 노인이 차고 있는 죽검을 보자 비로소 기억이 나는 모양인지
『파죽검객(破竹劍客)!』
소리를 낮게 외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하하하……』
파죽검객은 또 크게 웃고 나서 묻는다.
『천전교주(天全敎主)가 바로 네놈의 제자인가?』
상대가 누구임을 짐작한 복면인은 침착을 되찾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쩌시겠소?』
『네놈이 가르친 제자가 나에게 시비를 걸었단 말이다.』
복면인은 이 말을 듣자 마음속으로는 크게 놀랐으나 한편으로는 천전교주가 정말 이 노인에게 시비를 걸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심상치 못한 일이라, 생각하고는 곧 화제를 바꾸려고 하자 파죽검객이 또 입을 열었다.
『너에게 또 한 가지 물어 보겠는데 너는 나의 제자를 본 적이 있느냐?』
복면인은 아주 침착을 되찾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당신의 제자, 사대협(査大俠)을 만나본 적이 없소이다.』
파죽검객은 하하하 크게 웃음을 날리고 나서
『너는 어째서 나의 제자가 바로 사여안(査汝安)이란 것을 아느냐?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천전교주밖에 없다. 그런데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천전교주란 놈이 바로 너의 제자라는 것을 실토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하하, 오래된 생강이 맵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네놈의 용모가 개의 눈이요, 표범의 귀처럼 생긴 것을 보니 네놈은 속이 음흉하고 모략이 심한 놈 같다. 그러나 하하하…… 그런 개수작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파죽검객은 손뼉을 치면서 무척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망신을 당한 꼴이 된 복면인은 얼른 대꾸도 못할 지경으로 화를 냈다.
파죽검객은 계속 말했다.
『네놈의 사람됨이 지극히 고약해 보인다마는 무공은 한 사람 몫은 되겠구나. 너의 스승은 누구냐?』
복면인은 참고 견디던 분통이 터졌는지 흥! 비웃음을 날리자마자 맹렬한 일 장을 후려쳤다.
파죽검객은 비록 웃으면서 욕을 하며 그를 조롱했지만 그가 일 장을 후려치는 것을 보자 그 무서운 실력과 높은 무공은 정말 평생에 보지 못한 것임을 깨달았다.
파죽검객은 다급하게 그 일 장을 막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중간 지점에서 펑 소리가 울려 퍼지고……
두 사람은 동시에 몇 걸음씩 물러났다.
이 한 차례의 공방은 비록 보기에는 대수로운 것이 아닌 것 같았으나, 싸움을 주고받은 두 사람에겐 생명이 좌우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몇 걸음을 물러선 파죽검객의 얼굴색이 핼쑥하게 변해 있었으며, 복면인 역시 비록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파죽검객은 천전교주의 무공으로 보아 그의 스승인 이 복면인의 공력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짐작은 했었지만 이렇게도 심오할 줄을 미처 몰랐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해 봐도 이 복면인이 과연 누구인지 그 정체조차 가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알만한 사실이 있으니, 이 복면인은 당대의 무림을 덮을 만한 고수임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복면인은 더는 공력을 하지 않고 서서히 몸을 돌려 무당도사와 복파보주들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무슨 볼일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은 나 개인의 사사로운 재산이오. 그러니 그대들이 다급한 볼일이 없다면 속히 이곳을 떠나도록 하오!』
자목 명령조였다.
이때 백엽도사는 숨을 내쉬기도 거북한 듯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아까 복면인이 후려 보낸 유한 손바람의 독기로 하여 심상치 않은 내상을 입은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내상을 입었다는 눈치를 보여서는 안된다는 강인한 마음으로 금세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간신히 가누고 있었다.
그는 장문 사형, 백백진인이 자기를 가장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백백진인이 자기가 내상을 입은 사실을 알기만 한다면 반드시 생사를 돌보지 않는 복수전을 벌리고 말 것이다.
그의 어름으로는 저 복면인의 무공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기에 자칫하면 큰일이 벌어진다는 염려가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복면인의 말을 듣고 보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거친 음성으로 물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오! 여기가 도대체 누구의 사유재산(私有財産)이라고?』
『바로 내 것이다!』
복면인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무슨 증거라도 있소?』
『아무렴! 귓구멍을 후벼 파고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침사곡은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다. 죽음의 골짜기는 천하의 고수들이 그 관리권을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주인이 된 것이다. 그대가 만약 믿기 어렵다면 소림사의 천일대사(天一大師)나 전진문(全眞門)의 청쟁우사(靑箏羽士) 두 사람에게 물어 봐라. 그들이 증인이니까. 흐흐흐.』
이 말이 끝나자마자 백백진인과 요백삼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무엇이? 천일대사와 청쟁우사라고? 그분들이 아직도 살아 계시다는 말인가?』
복면인은 징그럽게 웃으며 딱 잘라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겠다!』
이래서 모든 사람들은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듯했다.
천하의 영웅들이 자기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말과 천일대사와 청쟁우사가 그의 증인이라는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조용한 시간에 갑자기 쿵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백엽도인이 땅에 쓰러지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백백진인과 운소진은 급히 백엽도사를 일으켰다. 이미 백엽도사의 안색은 종잇장처럼 창백해지고 입과 코에서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짙게 깔린 사색(死色)을 본 백백진인은 당황하는 빛을 감추지 못하며 급히 물었다.
『사제, 사제! 갑자기 웬일인가, 방금의 그 일 장 때문인가……』
백엽도인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형…… 작은 일을…… 참지 않으면…… 큰 일이…… 벌…… 벌어집……』
하고는 말을 마치지 못한다.
백백진인은 치받치는 분노를 억제하면서 백엽도사의 오대요혈(五大要穴)을 짚어 그의 상세(傷勢)를 막으려고 했으나 그의 몸은 순두부마냥 맺힌 데라곤 하나도 없이 물렁물렁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백백진인은 내심 큰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지 못했다. 복면인이 후려친 일 장은 분명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극히 미약한 장풍 같았는데 그 장풍에 무슨 수법이 숨어 있었기에 이렇게도 심한 상처를 입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운소진은 목 놓아 울었다. 그러자 파죽검객이 울고 있는 소진(小眞)을 옆으로 밀어 내고 백엽도사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이미 생명 없는 물체로 변한 백엽도사의 온 몸을 샅샅이 만지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얼른 백엽도사의 도포 깃을 양쪽으로 젖혔다.
거기에는…… 백엽도사의 가슴에는 피처럼 진한 장인(掌印) 즉 손바닥 자국이 뚜렷하게 나 있는 게 아닌가.
이것을 본 파죽검객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한남(漢南)의 금사장(金沙掌)이다!』
신필 왕천도 백엽도사의 가슴을 만져 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틀렸다!』
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백백진인은 백엽도인을 바라보던 시선을 천천히 복면인에게 돌리면서 스르륵 그의 장검을 빼어 들며, 분노로 떨리는 왼손으로는 자신의 도포자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거기에는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운소진의 얼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기세는 아랑곳없이 파죽검객은 심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금사장…… 금사장…… 이 금사장의 수법을 쓰자면 한남 살가(漢南薩家)의 직전(直傳)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저 복면인은 한남 살가의 후계자란 말이야……』
신필 왕천은 벌떡 일어나 그 복면인을 쏘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음…… 천전교 그 놈이 어째서 무서운 것 없이 날뛰나 했더니 바로 이런 스승이 있기 때문이었구나. 오늘에야 그 이유를 알겠다!』
마침내 복면인의 형형한 눈빛과 신필 왕천의 눈빛이 마주쳤다.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은 무슨 요란한 소리라도 낼 듯한 형세를 공중에서 얽히는가 싶자 복면인이 먼저 눈길을 돌렸다.
바로 이때……
『아 저기!』
운소진이 갑자기 부르짖으며 어느 한 곳을 급히 가리켰다. 보니까 그곳에는 백설같이 흰 수염을 나부끼며 한 노인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 노인이 발에 힘을 주고 옮길 때마다 그 발바닥이 닿는 바위에 움푹 움푹 발자국이 나는 것이었다.
뭇 사람들이 이 노인을 주시하고 있는데 쏜살같이 달려온 노인을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흐음! 손색없는 금사장(金沙掌)이구나!』
이 노인과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복면인은 불쾌한 듯한 눈빛으로 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노인은 느닷없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 그의 손바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한 줄기의 손바람이 뻗치더니 복면인 바로 옆에 있는 암벽(岩壁)에 부딪치자 그곳에는 아주 뚜렷한 손바닥 자국이 새겨지고 말았다.
복면인은 크게 놀라 한 걸음 주춤 물러섰으나 갑자기 헤헤헤 괴이한 웃음을 흘리고 나서
『난 또 누구라고, 바로 살가(薩家) 사람이 왔구나!』
그 노인은 약간 화를 내면서
『그렇다! 노부가 바로 살천조(薩天鵰)이다!』
하고 말하며 무서운 눈빛으로 복면인을 노려보았다. 복면인 역시 그에 지지 않는 눈빛으로 마주 노린다.
한동안 말없는 눈씨름을 하던 노인은
『그대는 어디서 폐문의 무술을 배웠소?』
복면인은 하하하,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천하의 그 어떤 무술이라도 모두가 사람이 연구해 낸 소산(所産)이다. 당신 살 아무개가 배울 수 있는 무술이라면 어찌 난들 배울 수 없겠느냐? 내 분명히 말해 주거니와 이 무술은 바로 이 노부가 연구한 것이지만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살천조는 안색이 하얗게 변하도록 격분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셔 진기를 모으고는 금사장의 일격을 가하고자 손을 치켜올리는 바로 그때, 백백진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빈도 백모가 시주를 대신해서 먼저 이놈과 겨루어 보겠소이다.』
백백진인은 과연 일문(一門)의 원수(元首)로서 손색이 조금도 없었다. 이 자리의 경우로 말할 것 같으면 가장 분노해야 하고 가장 비통해야 할 사람은 바로 이 백백진인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어느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온유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살천조는 한발 옆으로 비켜섰다.
그 순간 백백진인이 앞으로 성큼 나서자 푸른빛 검광이 복면인의 어깨를 향해 날아갔다.
복면인은 백백진인의 일 검에서 뻗치는 검세에 놀라면서 몸을 피하자마자 번개같이 손을 뻗쳐 칼을 잡으려 덤볐다. 그러자 백백진인은 그 초식을 변경시키지 않고 그대로 칼끝을 휘두르면서 공수(攻守)를 겸한 칼질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복면인은 그 칼끝을 피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백백진인은 소리쳤다.
『너 이놈 빨리 칼을 뽑아라!』
『뽑지 않구!』
복면인은 선뜻 칼을 뽑아든다.
백백진인은 아무 말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보검은 마치 구름을 말아 올리며 하늘을 나는 청룡과 같은 기세로 복면의 온몸 상하 좌우에 세 번씩 찔러 들어가며 순식간에 도합 십이검(十二劍)을 공격했다.
이것이 바로 구궁신행검법(九宮神行劍法)의 정수(精髓) 중의 하나였다.
백백진인은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거의 없었으며, 또 남과 무공으로 겨룬 적은 더욱 없었다. 때문에 무림에 몸을 둔 모든 사람은 이 무당파의 장문인의 무공이 얼마나 높은가를 모르고 있었다.
이렇듯 백백진인이 공격을 개시하자 그의 검에서 뻗치는 내력(內力)은 태산처럼 중후한 것이어서 일 장 밖에 서서 구경을 하는 뭇 사람들까지도 그 무서운 검기(劍氣)에 압도될 지경이었다.
그가 무당 일파의 장문인다운 법도 있는 검세를 놀리자 검술이 높은 파죽검객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십 합(合)쯤 되었을 때 복면인이 갑자기 검식(劍式)을 달리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그의 괴상한 검식이 연속적으로 나오자 백백진인의 그 철통과도 같았던 검권(劍圈), 곧 칼의 테두리도 아무런 작용도 못하는 듯했다.
백백진인은 오 초를 막는데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다.
이때 파죽검객은 복면인의 괴상한 검법을 자세히 살피며 그 검법을 격파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복면인의 검초는 점점 빨라지는데 그 검법의 씀씀이를 보니 북가(北家)의 검법도 조금씩 쓰며 때로는 남파(南派)의 검초도 가끔 쓰는 것이었다.
백백진인은 온 몸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연거푸 밀리다 보니 한 거암(巨巖)에 막혀 더는 물러날 수가 없게 되었다.
운소진은 이 광경을 보자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달려가 복면인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한 거대한 손이 불쑥 나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녀가 주춤 앞으로 나서다 말고 고개를 돌리니까 바로 복파보주 요백삼이 온화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그러나 힘찬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잠깐 기다려, 내가 나가지.』
운소진은 그의 다정스런 눈빛 속에서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는 강렬한 빛이 흘러나옴을 보고 살그머니 옆으로 물러섰다.
이래서 요백삼은 앞으로 한 발 나서면서 신필 왕천에게 말했다.
『왕형!』
왕천은 그의 뜻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였다.
요백삼은 장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때 복면인의 몸이 크게 움직이는가 했더니, 돌연 그의 검식(劍式)이 일변하고 있었다. 허공에서 쏴……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복면인의 검은 번개처럼 앞으로 내뻗친다. 그의 입가에는 괴상한 웃음이 떠돌고 있다.
『도사, 왜 그러는가? 이 일초는 네가 잘 아는 검식일 텐데……』
일초의 검광은 마치 하늘을 하는 용처럼 허공에서 춤추며 번개 같은 속도로 이제 백백도장의 가슴을 육박한다.
신필 왕천이 급히 요백삼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소리친다.
『귀전비린(鬼箭飛磷)이다!』
그러나 그때 요백삼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지금 이 복면인은 무당파의 전승(傳承)으로 이름난 바로 그 귀전비린으로 무당파의 장문인을 공격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만일 백백진인이 격패당할 경우, 이 얼마나 가증하고 창피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때 백백도장은 입속으로부터 폭발하는 듯한 함성을 지르더니 돌연 기사회생하는 듯 그 표정이 붉어지면서 검식을 한발 가량이나 앞으로 내뻗는다. 번뜩이는 검광은 그의 눈언저리에서 빛나고 그의 하얀 수염이 물결치듯 움직인다. 그의 발이 반 발자국 후퇴하며 동시에 검식은 반사적으로 일보를 전진하니, 이는 의외에도 복면인과 똑같은 귀전비린의 검식인 것이다.
두 검이 부딪치는 허공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고 검광은 교차한다. 그리고 그것은 허공에다 큰 칼무지개를 이루는 것이었다.
백백도장은 지금 무당파의 장문인으로서, 천하 무림에 전통적인 장문으로 이른바 이 귀전비린의 검식을 전승하여 수십만 번이나 연마했던 터이다.
복면인은 자기의 공력을 과시한 나머지 이 순간 백백진인을 능가하는 듯한 사세였으나 검이 허공에서 교차하는 찰나에 그의 몸은 의외에도 크게 진동하는 것이었다.
그때 백백진인은 거센 태풍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태산준령과도 같이 우뚝 자리 잡고 서니 그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번개보다도 더 빠른 검식의 일초가 복면인을 향하여 날아갔다. 복면인은 그 위력에 저윽이 꿀리는 듯 몸을 사렸으니, 그 검식은 귀전비린을 흡사히 닮은 것 같았으나 검세는 측량할 수 없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복면인은 몸을 날리면서 저윽이 놀라는 눈치였다.
실제로 복면인으로서는 귀전비린의 단순한 검학이 무당파의 전통적인 가장 무서운 검식으로 알았던 것인데, 뜻밖에도 백백진인에게 이처럼 변화있는 귀전비린의 초식이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의 귀전비린의 일초를 위압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쏟아지는 백백진인의 검식과 신법은 가지가지 초식으로 변화무쌍한 검광을 일으켰다. 복면인은 창졸간에 초식을 변경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지 돌연 일 장이나 물러섰다. 그러나 계속해서 육박하는 백백진인의 변화있는 검식은 눈시울을 어지럽게 한다.
그때,
『차악!』
하는 소리와 함께 복면인의 왼쪽 소맷자락이 잘라졌다.
이때 백백진인이 구사한 검식은 전기(前記)한 귀전비린(鬼箭飛磷)과 냉양조풍(冷陽組風) 백로횡강(白露橫江)의 세 검식이었으나, 이 세 초식은 바로 무당파의 전통적인 연환삼절검(蓮環三絶劍)이며 무당파 역대 조사의 심혈을 기울여 탁마한 검식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복면인이 귀전비린 일초를 터득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구사되는 두 개의 초식을 몰랐기 때문에 지금 그는 소맷자락을 찢기우는 불미한 꼴을 당하고 만 것이다. 요백삼은 마음속에서 갈채를 보내 마지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복면인의 몸이 한 번 갑자기 허공으로 치솟는가 하는 찰나, 돌연 암운이 누리에 깔리는 듯, 여러 고수들의 시선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돌연 어디선가,
『팍!』
하는 일 장의 소리가 들렸다.
여러 영웅들이 정신을 수습해서 바라보았을 때, 이 어인 일인가! 두어 걸음 뒤로 밀려난 백백진인의 손에는 아무 것도 남겨 있지 않았다. 보검은 그의 손에서 벌써 복면인의 손으로 넘어 갔고 그리고 그것은 복면인의 손에서 두 동강이가 나 있었다. 그 와중에서 복면인의 득의에 찬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여러 고수들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나 파죽검객만은 의미심장하고도 야릇한 미소를 미미하게 입가에 흘리고 있었다. 암운의 와중에서 전개된 초식의 전말을 오직 그 한 사람만은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던 탓이리라. 파죽검객은 이러한 복면인의 한 수 높은 무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백진인은 너무나 엄청난 충격의 탓이었던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운소진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었다. 보니, 그때 복면인의 오른손에 들고 있던 동강이 난 보검이 백백도장의 가슴을 향해 날카롭게 던져진 순간이었다. 여러 도인들은 아뿔싸 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절망적인 순간 구원의 손길을 뻗으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어인 일인가? 여러 사람들의 눈앞을 날으던 끊어진 보검은 돌연 공중에서 뚝 멎으며,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빙글 돌더니 땅으로 내려 박히는 것이 아닌가,
흠칫 놀란 복면인은 얼른 좌우 팔방으로 어지러이 눈길을 굴린다.
복면인의 얼굴이 멎은 곳에, 어느 틈에 빼어 들었는지 삼 척 파죽검(破竹劍)이 어두운 광채를 내쏟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는 일 장이 남짓한데 다른 고수들은 고사하고 그러한 거리에서 뻗은 공력으로 난비(亂飛)하는 비수(匕首)를 막은 실력은 실로 만인의 경탄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른 고수들이 복면인을 반 장 이내에서 포위하고 있어도 복면인은 두려운 바가 없었으나 일 장이나 되는 거리에서 뻗은 파죽검객의 공력은 결국 복면인에게 있어 결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위압이 되었다.
복면인은 내심으로 찔리는 바가 있었음인지 일체의 경거망동을 삼가려는 눈치 같았다.
이렇듯 신검합일(身劍合一)한 실력자를 어떤 초식으로 대적할 것인가가 크게 관심거리다.
복면인은 그 개눈 같은 번뜩이는 눈초리로 파죽검객을 노려보고 있다.
다음 순간
『에잇!』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왼손에 들렸던 나머지 동강난 보검이 유성처럼 파죽검객을 향하여 날아갔다. 그러나 보검은 파죽검객의 일초로서 간단히 밀려나 건너편 바위에 가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돌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파죽검객은 미동도 하지 않고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자세로 서 있다.
이윽히 그를 노려보던 복면인은 그의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도 잡아내지 못했음인지 몸을 돌린다. 파죽검객은 끝까지 관망하려는 태도임이 분명하다.
『이번에는 네 차례다!』
그는 오만하게 내 뱉는다.
도전을 받은 살천조(薩天雕)는 유명한 무당파의 장문인이 일초 양식에 어이없게 보검을 빼앗긴 것을 보고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사이에 심중에는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히 떠돌았다. 긴장한 살천조의 손바닥에는 어느덧 땀이 배기 시작한다.
복면인은 크게 너털웃음을 한차례 웃고 나서 멸시에 찬 한마디를 토해냈다.
『그만둬라! 보아하니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 같구나!』
그러나 살천조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머리까지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침착한 한 마디를 보낸다.
『이놈! 해볼 테면 해보자! 말인즉시야, 노부는 마침 네놈이 어디서 그 금사문(金砂門)의 무공을 훔쳤는가 수색해 오던 터이다.』
이때 신필 왕천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한다.
『살형(薩兄)! 소인도 한몫 끼겠소이다!』
살천조는 왕천의 호의에 감동했으나 그러나 그는 한 문파의 장문인의 신분이다. 이런 창피한 경우를 당하여 어찌 약세를 보일 것인가, 그는 큰 소리로 장중한 일성을 토해낸다.
『오늘 이 때를 당하여 설사 이 몸이 금사문에서 파문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 어찌 조사님의 지중하신 위엄을 더럽히랴!』
이 한마디는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특히 신필 왕천에게는 너무도 무색한 어조였다. 그러나 왕천은 일개 시정의 무뢰배는 아니다. 일대 무공을 쌓은 고수급 인물인 것이니, 이 어찌 살천조의 한 마디를 문제 삼으랴! 그는 살천조의 심금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부연하여 자신이 살천조의 위치에 처해 있더라도 당연히 그 한 말을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왕천은 묵연히 머리를 숙이고 물러섰다.
이윽고 살천조는 발을 움직여 두 발자국을 떼어 복면인을 향하고 우뚝 섰다.
그러나 이때 문득 파죽검객의 손에서 그의 파죽검이 몇 번 오르내리더니 돌연 복면의 사나이를 향해 태연하게 한 마디 했다.
『옳지, 됐어! 네놈이야말로 진정코 어느 파의 출신인가 종잡을 수 없는 놈이로다. 어디, 자, 나하고 한 번 겨루어 봄이 어떤가.』
말을 마치자 파죽검객은 아무런 언질도 없이 느닷없이 살천조의 앞으로 엇비슷이 막아선다. 살천조는 순간, 무색한 심정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저윽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파죽검객의 형체를 보자 복면인은 저윽이 긴장하는 눈치였다. 복면인은 자기의 처지를 어림하여 본다.
(이 십 년 째, 나의 이 내상(內傷)은 아직도 치유를 보지 못하지 않았나. 비록 평시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지만, 그러나 이 파죽검객이라는 늙은이는 만만치 않는 놈이거든. 이놈과 결투를 벌인다면, 반드시 천 초 이상의 초식을 겪어야만 승부가 판가름 날 것이니, 하…… 만일 이렇게 되면 나의 공력은 전부 쇠진할 것이고, 게다가 설상가상 상처가 약화된다면 항차 내가 살아날 가망조차도 전부 잃게 되는 것이니라…… .)
그러나 이때 홀연히 요백삼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보시오! 그쪽을 보시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거기에는 뜻밖의 검광(劍光)이 수없이 교차되고 있었다.
그때 멀지 않는 바위 언덕에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고 그 중 두 사람이 바위 언덕에서 뛰어 내리는데 그들이 휘둘러대는 장검에서는 쉴 새 없이 검광이 난무한다.
그러자 나머지 한 사람이 그들 뒤를 따라 바위 언덕을 뛰어 내리면서 크게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앞에 달려 내려오는 두 사람은 이쪽에서 보는 가운데 그 검식은 벌써 십여 초를 교환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또한 그 초식으로 말할진대 산을 움직이는 위력과 파도를 가르는 날카로움이 역력히 보인다.
이편에서 관망하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에는 그들 두 사람의 신변을 동시에 걱정하는 마음과 아울러 그들이 구사하고 있는 초식의 씀씀이에 대해 갈채와 경탄의 소리가 연이어 나왔다.
파죽검객은 그들의 검세를 이윽히 바라보다가 스스로 알 수 없는 웃음을 입가에 띠운다. 그러나 여러 고수들은 그 웃음의 의미를 어림하여 짐작할 수가 없었다.
초식을 펴던 두 사람은 바위등성이를 벗어나자 동시에 우뚝 버티고 선다. 그 순간 두 사람의 검은 허공을 가르며 일기의 절초(絶招)를 엇갈린다. 실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그때 뒤따라오던 사람이 바위등성이를 벗어나 달리는데 검고 긴 머리가 나풀거리니, 그 사람은 한 젊은 소녀가 아닌가, 여자는 높은 음성으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오라버님…… 조심, 조심하세요!』
이쪽으로 등을 보이던 무사가 돌연 몸을 돌려 날쌔게 뛴다. 그러자 마주섰던 사람은 이내 뒤를 추격하면서 일갈 대성과 함께 공중으로 뛰어 나른다. 그러자 쏴! 하는 검풍(劍風)이 연거퍼 세 번 들리면서 번개처럼 날카로운 손속의 초식이 앞에 오는 무사의 등어림을 육박한다.
여러 고수들이 위풍이 당당한 추격자의 기세를 향해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내 마지않는다.
그때 파죽검객이 야릇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로 안아(安兒)가 저렇듯 분노하고 있단 말이냐! 저렇듯 결사적인 초식을 쓰다니 알 수 없는 일이로군.』
요백삼은 파죽검객의 소리를 듣자 비로소 정신이 번쩍 뜨였는지 신필 왕천의 소맷자락을 쥐면서 말한다.
『왕형! 보시오! 바로 사여안(查汝安) 대협이외다.』
그러자 이어 그들 앞 십여 장 거리까지 달려 온 사나이가 소리 질렀다.
『야! 이 사(査)가라는 놈아! 이놈 우리 사이에 도시 무슨 원한이 있단 말이냐. 왜 이토록 미쳐 날뛰는가 말이다!』
그때 살천조가 돌연 놀라 소리친다.
『아! 천전교주(天全教主)다!』
요백삼은 그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던지 살천조를 돌아보며
『살형! 그 어느 쪽이 사형령주(蛇形令主)오이까?』
살천조가 곧 말을 받았다.
『바로 이쪽으로 달려오는 놈이올시다.』
이때 추적하던 사여안이 고함을 지른다.
『이놈, 비겁한 놈, 검을 받아라!』
사여안의 몸은 비룡처럼 공중에서 날리며, 손에 쥔 보검은 마주 선 적의 가슴패기로 날아간다. 그러나 앞에 있는 적은 마치 나는 화살처럼 재빨리 몸을 피하니 그 아름다운 신법이야말로 천하 무림에서 드물게 보는 절묘한 것이었다.
이때 추적자는 비록 그의 검초를 적에게 명중시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몸은 신속하게 운행하면서 아직 공중에 뜬 채로 일갈대성과 함께 어깨위로 쳐들려진 왼손으로부터는 두 줄기 괴상한 빛이 번개처럼 날아간다. 그와 동시에 들리는 괴상한 바람소리 또한 가관이었다.
그 소리는 이편의 관망자들에게는 스스로들의 신변을 휩싸는 듯한 전율감을 일으키게 한다.
두 줄기 광선은 어느덧 도망자의 신변에 육박하니 사형령주는 급히 몸을 비틀어 왼쪽으로 피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두 줄기의 광선은 왼쪽으로 피한 그림자를 따라 붙을 듯이 왼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눈에 경악의 빛이 역력하였다.
그러나 그때 사형령주의 오른손이 한 번 번뜩이는가 했더니, 의외에도 두 줄기 섬광은 그 몸을 피하여 억만근의 중압을 내리쏟을 듯이 지상으로 내려 뻗는다. 이편의 여러 고수들은 동시에 몸을 피하니 섬광은 맞은 편 암벽에 가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를 산산조각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는 이어 일진의 광풍이 땅위를 휩쓰는 것이었다.
일검쌍탈진신주 사여안은 십팔 세부터 강호무림을 종횡으로 누비며 위명을 떨친바 있으나 실제로 그의 신풍쌍탈(神風雙奪)의 절기를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던 차에 오늘 이렇듯 심오한 절기를 베푼 것을 보고는 뭇 사람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여러 사람의 고수급 인물들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허리를 펴자 그 앞에는 어느 틈엔가 사형령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여안은 몸을 날려 사형령주와 마주선다. 사여안은 꾸짖듯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놈! 사형령주, 네가 인간을 노소(老小)를 돌보지 않고 살육하고 사람의 법도를 무너뜨리니 천륜을 어긴 것이라, 그 모든 것을 이 눈으로 모조리 보아온 이 사(査) 모는 하늘을 대신하여 네놈에게 천벌을 내리노라. 결단코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하고 결판을 내자.』
그때 뒤미처 오던 한 사람 여협(女俠)은 나는 듯이 사뿐 달려와 사여안의 옆에 나란히 걸음을 멈춘다.
『오라버님, 무얼 하십니까? 저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니오리까? 방금 골짜기로 저 사람은 한 사나이를 밀어 떨어뜨리지 않았습니까? 이 몸은 멀리서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형령주의 눈알이 금시 튀어 나올 듯 붉은 빛을 띤다. 사실 그는 사여안의 신풍쌍탈이 이렇게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궁금하는 모습이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에 역력히 들어나고 본즉 심중에서는 말뚝 같은 분노가 치미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친다.
『이놈, 사(査)가라는 놈아, 허튼 수작 집어쳐라! 도시 네놈은 무얼 믿고 뽐내는 거냐? 두고 봐라! 오늘 네놈이 이 침사곡에서 살아서 도망하는가 두고 보자!』
사여안은 화가 불끈 치미는지 무어라고 얼른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입을 씰룩거리고 있다. 그의 검식이 금시라도 불을 뿜을 듯한 기세이다. 그 옆에 나란히 선 처녀는 그 백옥과도 같은 미간을 찡그리며 섬섬(閃閃)이 사형령주를 노리고 있다.
이때였다. 여러 사람의 등 뒤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들은 잠깐 승부를 멈추라!』
하며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 아닌 파죽검객 서희팽 그 사람이었다.
서희팽은 그 노안에 미미한 웃음을 담으면서,
『안아(安兒)야! 너 눈을 들어 나를 보아라! 누가 왔나……』
그 순간 사여안의 얼굴에서는 살기가 싹 가셔지더니 금시에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오! 사부님, 사부님께서 오셨습니까?』
그의 말을 들으며 서희팽은 제자 사여안의 몰골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본다, 그의 두 귀와 용모는 단정하다. 그제서야 안심을 하였는지
『너 안아야, 마침 잘 만났다. 이 노부는 일전에 그 다섯 명의 죽지 않은 늙은이들에게 크게 조롱을 당했느니라. 흥! 이 복수를 하지 않으면 사내대장부가 아니지……』
그의 모습은 어느덧 노여움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 표정을 보면서 여러 대협들은 뜻을 몰라 멍하니 파죽검객의 얼굴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필 왕천은 다섯 명의 늙은이들이라는 말로서 그가 마교오웅(魔教五雄)을 만났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때 문득
『안아(安兒)야! 그 네 옆에 있는 소저는 누구이냐?』
사여안은 그제서야 생각난 듯이 다시 온 얼굴이 붉게 상기되면서
『사부님, 소제가 이번 하늘의 안배를 받아 어렸을 때 잃었던 누이동생을 찾게 되었습니다. 사부님, 이 아이가 바로……』
그는 목이 메이는지 뒷말을 잇지 못한다.
그때 그 소녀는 사뿐히 걸어 나오더니 파죽검객 앞에 이르러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절을 한다.
『후배 사여명(查汝明)은 노선배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옥을 굴리는 듯 낭랑한 소리였다.
파죽검객은 사여명을 접견하고 내심으로 크게 기뻤다. 그는 하하! 하고 크게 웃고 나서 사여명의 손을 잡으며 동시에 몸을 일으킨다.
사여명은 자신의 몸에 쏠리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자 문득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파죽검객은 그러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귀여운 듯이 바라보면서
『애, 사여명! 이 노부에게 말해 보아라! 어떤 연고로 두 사람이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고?』
이렇게 묻는 그의 태도는 그의 주위에 복면의 사나이가 있다는 것도, 또한 사형령주가 있다는 것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자기 집 집안일을 묻는 것 같은 자상한 어조였다.
사여명은 홀로 외로이 강호를 헤매다가 뜻밖에도 이렇듯 당당한 오라버니를 만났고, 또 그 사부를 뵈옵게 되니 그 마음이 어찌 잔잔할까, 그녀는 온 몸과 얼굴에 기쁨의 환성이라도 일어나듯 크게 상기되어 가지고, 방금 일어났던 그 긴장된 결투는 벌써 머리에서 멀리 사라진 듯, 파죽검객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저는 감숙(甘肅)에서 요원(姚畹)이란 매매(妹妹)와 같이 동반하였사옵니다. 그렇지만 우연히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파죽검객이 묻는다.
『그 요원이란 누군고?』
『네…… , 그렇지만 그보다 먼저 말씀 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이때 요백삼의 눈이 찡긋한다.
『사고랑(査姑娘)이 말하는 요원은 바로 나의 여동생이 아닌지?』
사여명은 놀라면서 요백삼을 돌아본다. 거기에는 위풍도 당당한 중년의 호걸이 팔짱을 끼고 우뚝 서 있다.
『아! 선배(先輩)께옵서 바로 복파보의 보주……』
『그렇소이다.』
『아, 맞았습니다. 그러면 당신께서는 요원의 오라버님……』
『그렇소이다. 헌데 원아는 어디에 있는지요?』
『예, 말씀 올리겠습니다. 한 겨우내 같이 지내는 동안에 어느 날 요원 매매는 글발을 한 통 남기고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소녀가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소녀는 오라버님을 찾았사옵고, 곧 원아가 남기고 간 편지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이르기를 원아는 장모(張某)라는 오라버님을 찾아가니 기다리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으…… 음.』
요백삼은 알 수 없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잠시 멍하니 섰다가 다시 그 모습은 평정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파죽검객은 이렇듯 전말(顚末)이 분명치 않는 이야기를, 더욱 자기 일신상의 문제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말을 여전히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여명의 말이 끝나자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럼 그 뒤에는 어찌 되었는고?』
순간 사여명은 파죽검객의 온화한 노안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자기가 이제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던가 하고 의아했다. 파죽검객의 얼굴에 봄바람 같은 미미한 미소가 감돈다.
사여명은 얼른 정신을 수습한다.
『네, 그 뒤에 소녀는 오라버님을 따라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사여명은 말을 끊고 사형령주의 모습을 찾으려는 듯이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
파죽검객이 말끝을 잡았다.
『예, 그런데 골짜기에 이르러 무서운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한 사람이, 저 사람의 공격을 받고 골짜기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사여명은 사형령주를 가리키면서 말을 잇는다.
『그것도 상대방이 모르게 가만히 음모(陰謀)로서 밀어버린 것입니다. 소녀는 멀리서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떨어진 사람이 누구인가는 모르옵니다. 오라버니는 한 달음에 저 사람에게 접근해서 결투가 벌어지고……』
묵묵히 듣고 있던 파죽검객이 돌연 손을 저어 사여명의 말을 막는다.
그리고는 곧 사여안을 향해,
『안아(安兒)야! 그 떨어진 사람은 누구인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궁금하게 여기던 질문이었다.
사여안은 입을 다무는 것 같았다. 그는 문득 끊어지는 명철한 어조로,
『운…… 학!』
이 말이 떨어지자 별안간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이 숙연해졌다.
복면인은 머리를 기웃거리고 천전교주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이때 사여명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가 했더니 전신이 잔물결이 이는 듯 떨리고 있었다. 사여명은 겨우 더듬는 듯한 말씨로
『오라버님, 그 그것, 정말입니까?』
사여안이 한 마디로 단정을 내렸다.
『그건 틀림없다. 운학(鄆鶴)이다!』
『아……』
그 순간 사여명은 온 몸이 허물어지는 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백백진인이 옆에 쓰러진 사여명을 부축하려고 황망히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옷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풀썩! 하고 땅에 쓰러지는 기척이 또 났다. 운소진(鄆小眞)이 그만 혼수상태로 땅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명매(明妹)! 명매!』
『진아(眞兒)! 진아!』
천전교주는 두 눈에서 놀람과 음흉한 기색이 교차하는 야릇한 광망을 내뿜고 있다.
사여안은 누이동생을 부축하여 안아 일으켰다. 그는 의식을 잃은 누이동생의 얼굴을 살피면서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운학이라는 이 한마디가 두 소녀로 하여금 의식을 잃게끔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는 말인가?
사여안은 눈을 들어 천전교주를 응시한다. 분노에 떨리는 한손으로 천전교주를 가리킨다.
『너 이놈, 천전교주! 네놈들은 백일하에 얼굴을 맞대고 무인다운 대결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으렷다. 네놈이 만일 장부다운 대결로 임했더라면 운학의 적수조차 못 될 것이야. 흥! 비겁한 놈, 네놈이 사나이라면 배후에서 암암리에 살인을 자행한 네 수치를 깨달아라.』
천전교주는 의외에도 사실이 사여안의 눈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이상 이제는 변명할 도리가 없었던지, 얼굴에 철면피(鐵面皮)와도 같은 뱃심을 보이며 차게 웃는다.
『이봐! 사가야! 운학이란 놈을 침사곡으로 밀어 넣었으니 어쩌란 말이냐? 나 사형령주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진다. 운학이란 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 놈이 미숙한 탓으로 죽은 게지. 그 외에 누구를 원망한단 말이냐?』
천전교주의 이 말이 끝날 즈음, 홀연히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마치 귀신처럼 그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림자는 그 자리에 조용히 선 채 아무 소리도 없다. 하늘에게 신이 내려 선 것인가! 주위에 일던 여러 고수는 물론, 복면인과 파죽검객조차도 그림자가 천전교주의 등 뒤에 나타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처음 그림자를 발견한 사람은 파죽검객이었다. 그는
『오!』
하며 놀라는 탄식을 보낸다.
그러자 모든 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림자에게 쏠렸다.
나타난 노인은 붉은 눈빛에 백짓장 같은 창백한 얼굴이었으며 입가에 날리는 미미한 미소는 마치 신선(神仙)을 연상시키는 풍모였다. 여러 고수들은 그의 인상에서 적지 않은 공포를 느꼈다. 그러자 그의 특징인 듯한 머리의 상투가 눈에 드러났다. 누구의 입에선지는 몰라도
『청목도장(青木道長)……』
하는 한 마디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천전교주는 천하에 악명이 높은 교활한 위인이었지만, 이 신주(神州)의 천하제일 고수인 청목도장의 한 줄기 눈빛을 받자 그만 온 몸이 얼어붙은 듯한 공포가 오싹 전신을 휩쓸었다. 그는 황급히 두어 걸음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청목은 천전교주의 등 뒤에서 이미 사여안의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 운학의 운명을 들었을 때 그는 크게 경악하여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다. 허나 오랫동안 수도생활로 누그러진 고매하고 측량할 길 없는 넓은 도량은 능히 자기를 자제할 수 있었고, 또한 한 가닥 희망조차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전교주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제는 그것이 완전히 희망이 꺼지고 이제 무엇을 기대하랴! 그의 몸은 천 길 만 길의 깊은 동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다시 정신을 수습하였을 때 자기의 육신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고 남은 것은 하나의 빈 껍질뿐인데, 이제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은 오직 분노와 복수심뿐이었다.
그는 온몸을 후들후들 떨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학아(鶴兒)…… 학아!』
이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천전교주를 향하여 일진의 장풍을 날리고 있었다. 그가 무림에서 은퇴한 십여 년 이래 최초로 발휘하는 일 장이었다.
천전교주의 절학은 무림에 들어서자 곧 위명을 날리었고 곧 무림의 대세를 손아귀에 넣은 듯 천하를 휩쓸었다. 그러나 청목도장의 적수는 도저히 못 되었다. 그는 전전긍긍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데만 온 공력을 쏟았다.
천전교주는 두 손을 합하여 앞으로 내밀어 장풍을 막으며, 신법으로는 그의 몸을 마치 물속에서 노는 고기와 같은 자세로 움직였다.
청목도장의 머릿속은 텅 빈 망망대해와도 같았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허심탄회한 가운데, 몸과 발만이 거의 기계적으로 교차하여 거의 움직임을 즉각적으로 반영하여 날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십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무공은 침잠해 버린 듯했지만 그러나 그의 무공은 괄목상대(刮目相對)의 진경(進境)을 나타내었다.
이제 그는 어떠한 몸짓을 하고 있더라도 자유자재로 완전한 초식을 즉석에서 구사할 수 있는 것이며, 순간순간에 초식의 공방을 변경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놀라운 위력은 단 삼 초의 초식으로 천전교주를 열 발자국을 물러서게 하였다.
이때 이곳에 모인 고수들은 오늘에야 비로소 천하제일고수의 솜씨를 보게 된 것이다.
그때였다. 별안간 복면인의 두 손길이 번뜩이더니 계속해서 양손을 연달아 앞으로 뻗히었다. 그러는 동안 청목도장의 초식을 전부 막아 들이고, 이어 다음 순간에는 전 공력을 집중하여 계속 삼장을 공격하며 맹연 대갈일성,
『달려라!』
순간 천전교주는 갑자기 깨달은 것같이 몸을 날려 화살처럼 내달았다.
그때 사여안은 재빨리 칼을 들어 천전교주를 일격했다. 천전교주는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사여안의 검신을 가까스로 모면했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몸을 날려 십 장 밖으로 사라졌다.
『하하하……』
복면인은 크게 웃으며 양손을 벌인다. 그의 장풍은 바위돌이라도 산산조각으로 날릴 만큼 무서운 것이었지만, 그러나 청목도장은 그 곧은 자세를 하나도 흩뜨리지 않고 담담하게 선채 관심도 두지 않는 듯했다.
이미 청목도장은 그의 절묘한 일초를 보냈으니, 그 솜씨의 번개 같은 속도는 적의 공격에 앞서 이미 적의 몸에 접촉됐던 것으로, 그때 적이 초식을 쓴다 해도 자신은 태연한 태도로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손속은 천하무림에서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초식이었다. 여러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고 일 장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복면인은 옆으로 일보 움직이며 오른손으로는 태산과도 같은 무거운 장풍을 일으키니, 그의 공력은 몇 배나 늘어난 듯싶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초식이 허공에서 부딪치니 돌연 일진광풍이 휘몰아치고 삽시간에 암운(暗雲)이 내려 덮이는 것 같았다.
여러 고수들은 모두 두 사람의 일초를 보았지만 실제로 그들 초식 중에서 가장 정묘한 초식을 깨달아 안 것은 오직 파죽검객 그 한 사람 뿐이었다.
복면인은 이때 결투할 의욕을 꺾이고 말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온 공력을 모아서 몇 초를 공격하고 갑자기 몸을 날려 재빨리 후퇴하고 말았다. 그 순간의 동작이야말로 복면인으로서는 대단히 신속한 것이었다.
청목도장은 돌연 입속에서 폭발하는 듯한 호통을 지르더니, 손을 들어 선천기공을 일으키고 일 장을 친다.
복면인은 순간 실로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무서운 진기가 몸을 휩쓰는 것 같았다. 그 위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던지 장삼이 전부 날아가는 것 같고 머리는 꼿꼿이 일어나 휘날렸다.
복면인은 순간적으로 방어하며 숨을 멈추고 온 공력을 다하여 번개 같은 십장을 보냈다. 또 다시 공중에서
『펑!』
하는 괴음이 들리고 암운이 깔린다.
여러 고수들이 눈을 떠 보니 청목도장은 그 자리에 잔잔히 선 채 미동도 없건만 그때 복면인의 몸은 마치 줄이 끊어진 연처럼 칠,팔 장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복면인과 거의 같은 속도로 날아서 복면인의 앞에 우뚝 선다. 그러면서 동시에 손을 흔들더니 복면인의 왼쪽 어깨를 향해 내려치는 것이었다. 복면인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황급한 일 검을 받고 순간에 몸을 피했으나, 갑자기 귓볼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자 찬바람이 얼굴을 휩쓴다.
돌연 파죽검객의 큰 웃음소리가 들리었다.
『하하하하. 오늘 이 늙은이가 힘들이지 않고 네 정체를 알았구나, 하하하……』
복면인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때까지 그의 얼굴을 감추고 있던 복면과 인피 가죽이 한꺼번에 날아간 것이다.
다음 순간 복면인은 몸을 돌리더니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재빨리 몸을 날려 도망하기 시작한다.
그때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신필 왕천의 놀라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김인달(金寅達)이다! 저놈이 또 왕천(王天)을 속이려 하느냐?』
『김인달?』
여러 고수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튀어 나왔다.
왕천은 자신있는 어조로 긍정한다.
『조금도 틀리지 않소이다. 저 늙은이는 원래 북요파(北遼派)의 장문인 김인달(金寅達)이 틀림없소이다. 노부는 기왕에 저놈하고 일전을 겨룬 일이 있소이다.』
복면인의 정체는 이제야말로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는 바로 십 년 전, 새북대회전에 참가했던 북요파의 장문인 김인달 그 사람이었으며 그때 대회전에 참가했던 천하 무림의 고수들 중에 오직 살아남은 유일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많은 무림의 영웅들이 어찌하여 전부 죽었던 것인가? 또 어떤 일로 김인달 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것은 여기 모인 여러 사람은 알 수 없는 일이며 또한 십 년 전의 새북대전과 김인달의 개연성에 대해서도 누구 한 사람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청목도장은 안개에 갇힌 듯 망연히 서 있다가 돌연 몸을 날리며 침사곡의 절벽으로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내달았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 역시 당초의 계획은 침사곡을 목적하고 온 것인즉 이제 한 차례 결전이 끝난 지금 여기서 더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곧 청목도장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침사곡에 다다른 일행은 제각기 뿔뿔이 헤어져서 그 어떤 실마리가 될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곳곳을 답사하였다.
그러나 청목도장은 침사곡에 이르러 멍하니 선 채, 누런 황사를 굽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밑바닥이 없다는 황사의 모래…… .
진정 운학은 황사곡의 모래 밑에 숨을 거두었단 말인가.
청목도장의 신공(神功)은 비록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생명이 끊어진 것만 같았다. 그 까닭인즉 운학으로 말하면 청목도장의 생명과도 같은 오직 하나의 제자였기 때문이었다.
청목은 눈앞이 어른거림을 느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히 고이고 있었다. 그 눈물 속에 운학의 가지가지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운학의 그 기상에 넘치는 모습! 그리고 크고 검은 눈, 그리고 그 눈 속에서 빛났던 맑은 정기!
청목의 안공(眼孔)에는 이 어릴 적의 운학의 모습에서 비롯하여 드디어 건강하고 영준하게 성장하는 운학의 모습이 빠짐없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운학은 마차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미칠 듯이 달리는 네 발굽의 말…… 질풍처럼 내닫는 수레바퀴…… .
청목의 귀에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 끝으로 향해 맹렬하게 달리는 마차 바퀴의 환청(幻聽)이 들리는 듯 했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끝났다! 학(鶴)아야. 모든 것은 다 끝났다.』
꽈르릉…… . 하고 뇌성이 울린다.
그와 동시에 댓줄기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침사곡의 풍운은 이렇듯 측량할 수 없게 자주 뒤바뀐다.
살천조와 무당파의 백백진인은 골짜기 주변을 여기저기 답사하며 전후좌우를 샅샅이 헤매였으나 그러나 아무런 흔적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파죽검객과 사여안 남매는 이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백백진인은 아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운소진(鄆小眞)을 안은 채 살천조를 바라본다. 살천조는 그 눈으로, 이제 백백도인이 돌아갈 뜻을 나타내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백백도장은 먼 곳에 누워 있는 백엽진인의 시신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다시 머리를 굽혀 품에 안고 있는 소진을 내려다보았다.
이때 콩알만한 빗방울이 소진의 코끝에 떨어지니 소진은 미미하게 깨어나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오라버님…… 오라버님은 어디 계십니까?』
소진은 눈을 떴지만 그러나 정신은 아직 혼수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백백도장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가! 우리 그만 가자꾸나!』
그들이 최후로 곡변에 시선을 던져 보았을 때 그들의 눈에 띄인 것은 폭우 속에 망연히 정신을 잃고 선 청목도장의 기다란 옷소매가 폭풍 속에 휘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