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시네마 천국(1)
(김대우 모세 신부)
1980년대 초 우리 마을에 전화가 있는 곳은 이장님 집뿐이었다.
마을 사람에게 급한 전화가 오면 이장님이 동네 방송을 했다.
전봇대 위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서 안내 방송이 울리면
밭에서 일하다 전화 받으러 가는 사람도 있었고
부엌에서 밥을 짓다 이장님 집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텔레비젼이 있는 집도 몇 집 없었다.
그래서 당시 (메칸더 브이)나 (태양 소년 에스테반)을 보려면
텔리비전이 있는 집 아이들과 친해야 했다.
더욱이 영화를 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극장이 열린다는 소문이 났다.
알고 보니 마을 공소에서 성프란치스코에 관한 영화를 상영 한다는 것이다.
내가 기대했던 (우뢰매)같은 영화는 분명 아니었고 듣도 못한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사 상영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레었고 흥분되었다.
그날에 이르러 수사님이라는 분이 영화 상영 장비를 가지고 직접 공소를 방문했다.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공소로 몰려왔다.
80년대 초 시골 마을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성 프란치스코를 할리우드 서부 영화 주인공쯤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자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공소에 모여들었다.
손에는 밭에서 따온 과일이나 며칠 전 뻥튀기 사절단에게서 얻은 튀밥도 들려 있었다.
나도 친구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공소는 마룻바닥이었기 때문에 방석을 깔고 앉지만 또 누워도 본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영화관이 어디 있으랴!
수사님은 긴 수도복 차림으로 동네 어른들과 함께 흰색 천을 쳐서
스크린을 만들고 상영기를 설치했다.
친구들과 설치 과정을 지켜보며 기계가 신기해서 만져보려다
어른들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처음 보는 코쟁이 외국 배우는 너무나 멋졌고 특히 글라라 역을 맡은 여배우가 무척 예뻤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남자 주인공은 그녀를 좋아했지만
전쟁터에 나갔다가 패잔병이 되어 돌아와 수도자가 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두 가지 장면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아버지 가게에서
비단이나 오색 빛깔의 천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결국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아들의 행위에 화가 나 그를 법정에 세운다.
그리고 당장 이딴 짓을 그만두지 않으면 부자지간의 연을 끊겠다며 만인들 앞에서 선포한다.
프란치스코가 이를 거절하자. 그의 아버지는 입고 있는 옷마저 벗으라고 명령한다.
그 옷조차 아버지 돈을 샀다는 이유다.
카메라는 잠시 프란치스코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다 조금씩 확장되었다.
이어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옷을 하나씩 벗는다.
마지막막으로 속옷마저 벗고 벌거숭이가 된 채 사람들 사이를 걸어간다.
나는 눈을 감은 척하면서도 여주인공 글라라가
발가벗은 프란치스코를 제발 안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장면은 프란치스코가 맨발로 황량한 들판을 걷고 또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대자연 안으로 자연스레 사라지며 엔딩 자막이 올라갔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일생 가난하게 살겠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일생 가난하게 살겠다는 희망찬 구도자의 발걸음에 초점을 맞춘 장면이라 하겠다.
그런데 나는 그가 왜 예쁜 글라라를 두고 광야를 향해 걸어가는지
끝장면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 영화는 미완성이었고 뭔가 결말이 나지 않은 비극과도 같았다.
찜찜한 기분이 되어 집으로 가는 내내 머릿속에는 온통 글라라의 슬픈 표정뿐이었다.
그럼에도 영화 속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고
영화 속 주인공들은 너무나 멋졌다.
나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고 그곳에 가고 싶다는 열망도 생겼다.
여하튼 공소에서 보았던 (형님인 태야. 누님인 달) 영화는
텔레비전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골에서 분명 이색적인 사건이었다.
팝콘과 탄산음료는 없었지만
튀밥과 밭에서 따온 과일이 있었고. 지정 좌석은 없었지만
누워서도 볼 수 있는 홈시어터와 같았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그 영화의 무대인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은 내가 언어를 공부하던 도시에서 기차로 25분 정도 달리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웠다.
아시시 거리를 거닐며 기억 속 아련한 영화 장면들을 찾았다.
분수나 식수대를 볼 때면 `아. 이곳이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가 만난 곳이구나!
시청 광장에선 `아. 이곳이 성 프란치스코가 나체로 걸어나온 곳이구나! 하며 감동에 젖었다.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본래 이름은 조반니 베르나르도네였다.
어머니는 그에게 조반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니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프란치스코라고 불렀다.
헤르만 헤세는 그를 `양심의 괴로움과 깊은 겸손을 지닌 사람`
아이이자 시인이었고. 사랑의 대가이자 스승이었으며
모든 피조물의 겸손한 친구이자 형제! 라고 한다.
헤세의 표현을 통해서 성 프란치스코의 (피조물의 찬가)와 (평화의 기도)는
80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리는 기도이고 시이자 노래다.
요즘 말로 하면 재벌 2세쯤 되었던 프란치스코는
젊은 시절 여흥과 놀이를 즐겼고 열정과 욕망이 끓어오르는 청년이었다.
중세 시대 부와 명예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그는 페루자와의 전쟁에 나갔으나 포로 신세가 되어 감옥에 갇힌다.
겨우 아버지의 보석금으로 돌아왔지만 또다시 방탕한 삶을 살았다.
다시 명예로운 기사. 나아가 군주가 되는 꿈을 꾸며
전장에 나간 프란치스코는 한 성당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한 후
스폴레토에서 깊은 열병을 앓는다.
그리고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에서 울려온
쓰러져 가는 내 교회를 다시 세우라..라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정신적 감옥에 갇혀 번민과 외로운 사투를 벌인 후
가난의 삶.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해 머리카락을 자르고 수도복을 입는다.
성녀 글라라는 방탕했던 프란치스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철저하게 복음적 가난을 살아가는 프란치스코를 존경하게 되고
그의 삶과 설교에 매료되어 그녀 또한 수도생활을 결심한다.
부모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지만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가난한 자매회..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훗날 글라라회를 이끌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글라라의 수도생활 규칙을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성녀 글라라의 영적 벗이 된다.
중세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아시시 거리에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발자국에 싣기에 충분했다.
글라라의 시신이 모셔진 성 글라라 대성당과 성 프란치스코 시신이 보관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을 방문하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두 성당 모두 지하 한쪽에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유품을 전시해 놓았다.
수차례 조각천을 덧대어 기운 누더기 같은 수도복만이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언의 말을 건네는 듯하다.
두 성인은 귀족집 자녀들로서 풍족한 삶을 포기하고 복음의 완덕을 실현하고자
그리스도의 청빈을 실제로 살았다.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듯
두 성인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교황님을 비롯한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매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모여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의 날을 갖는 이유 또한 두 성인이 남겨놓은 풍요로움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가난은 풍요로움을 낳았고
이별은 새로운 재회를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