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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우리가 풍성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빌 4:11-19
I. 하나님은 나를 최상급 존재로 지으셨다. 오늘은 빌립보서 강해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가 풍성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자로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가난하게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일 까요? 부자로 살든 가난하게 살든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부요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부요와 관계된 많은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풍성, 충만, 풍부 이런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번성하고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 님은 우리가 구원을 얻어 풍성한 삶을 살도록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교회가 시작되던 첫 시간부터 성령으로 충만하여 교인이 되고 교회가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도 우리가 성령충만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명령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서 풍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풍성하게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궁핍한 사람이 있습니다. 배울 만큼 배웠고 가질 만큼 가졌 것만 만족이 없습니다. 불만에 가득 차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분명 가난한데 부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항상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풍성을 누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제3의 인물이 있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부자로 살면서 부요롭게 살면 되잖아 하는 생각이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쉬운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것을 부어주실수록 겸손하고, 절제된 청빈의 생활이 있고, 넘치도록 하나님께 드리고 나누는 사람은 정말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은혜는 이렇게 받을 만한 그릇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채우시고 이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경건한 삶을 살고자 몸부림했던 구약 지혜서 잠언의 아굴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 다. 수학의 분수를 알고, 국어의 주제를 파악하고, 미술의 꼬라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기도 가운데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 니이다”(잠 30:8-9) 미국 시카고에 가난한 농부 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날 기상천외의 복권에 당 첨이 되어졌대요. 미국에는 큰 복권은 수천억이 된다고 그럽니다. 당국이 가난한 사람에게 수천억이 전달되어져 심장마비라도 일으키면 어떡하나 고민을 하고 논의를 하다가 이 사람을 조사해 보았더니 교인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와 자초지종을 얘기했습니다. 존이라는 농부가 하루아침에 수천억을 손에 넣었을 때 심장마비라도 걸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이 사전에 잘 설명해 주시고 존이 마음의 준비가 되 면 말씀해주세요. 저희가 전달하겠습니다. 목사님이 기도하고 존을 만났습니다. 존, 만일인데 말이야 어디까지나 만약인데 말이야? 이만한 복권에 당첨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 봐. 만약 이게 존에게 왔을 때 심장마비라도 일으키 면 안 되잖아 잘 생각해 봐. 존이 대뜸 먼저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려야지요. 그리고 목사님께 100억 드 릴께요. 갑자기 꽈당하는 소리와 함께 목사님 뒤로 넘어지더니 심장마비로 죽 었대요. 여러분 사람의 욕심이라는게 끝이 없고 인간 욕심의 그릇이 얼마나 클까요? 우주보다 조금 더 큽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당시 세계 최대의 갑부 록펠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기자들과 대화하는 사이에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같은 갑부들은 이만한 재물이면 만족합니까? 그랬더니 가만히 있습니 다. 얼마를 더 가지면 만족할까요? 물었더니 조금 더! 조금 더가 채워지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아니 조금 더! 인간의 욕심의 그릇이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항상 조금씩 부족하고 모자라는 삶을 살게됩니다. 왜요? 그래야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필요로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게 복입니다. 세상 환경과 조건 그리고 소유로부터 행복과 기쁨을 얻고자 하면 늘 불평, 원망하며 살게 됩니다. 환경과 소유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넉넉해지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 만족하지 않으면,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삶의 환경에서 자족하지 않으면, 얼마를 더 가져도 어떤 환경을 가져도 자족이나 만족은 없더라는 겁니다. 기억하세요. 감옥에서 자살하는 사람보다 별장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더라 는 겁니다. 가난에 처하는 지혜도 귀중하지만 부에 처하는 지혜는 더 어렵다는 겁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 오늘 본문 빌립보서 4:11-19, 9절 안에 풍부, 풍성이란 단어가 6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이 위기가 상존하는 이 시대에, 위기 아닌 것이 없는 전방위적인 위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풍성한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존재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원의 목적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주시는 삶이 풍성한 삶, 충만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비교급 인생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최상급 존재로 만드 셨습니다. 우리가 만족, 자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나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옛날 우리 집에 매여 놓았던 금송아지 자랑이나 하고 사는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겁니 다. 이게 콤플렉스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형편과 나의 형편을 비교하지 않겠다. 부러워하면 패배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당당하게 내 형편 이대로 나는 만족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족을 배우고 싶으세요?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비교하지 마세요. 이 비교의식 속에는 인간의 악이 숨어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을 비교하면서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멋지고 근사한 품성을 부러워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 사람의 기도생활을 부러워하면서 내가 어떻게 하든지 따라가야지 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 적인 것, 일시적인 것, 현시적인 것, 얼굴 모양을 비교합니 다. 부러워합니다. 돈을 비교합니다. 자동차, 집, 환경, 부모를 비교합니다. 이게 인간의 악이라는 겁니다. 다이아몬드를 가진 적이 없는 저 같은 소시민들은 다이아몬드 때문에 불행하지 않습니다. 그런 데 다이아몬드를 한 번도 갖지 않은 사람들이 다이아몬드를 딱 선물로 받는 순간 불행해진대 요. 왜냐하면 자기가 받은 다이아몬드가 세상에 제일 작다는 걸 알아요. 결혼식 하기 전까지 는 내 남자, 내 여자가 최고인 줄 안대요. 결혼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고 주례 목사님이 이제 뒤로 돌아서서 하객들에게 인사하겠습니다. 딱 돌아서는 순간 멋지고 예쁜 남자, 여자가 있는 거예요. 아차 실수했구나 싶대요. 물론 우스갯소리지만 이게 인간이더라는 겁니다. 비교의식 때문에 인간은 자족을, 행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이 내게 풍성한 삶을 주신다. 우리가 풍성하게 살 수 있는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2절과 13절 말씀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풍성한 삶은 소유에 있지 않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우리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겁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한국교회 성도님들이 이 말씀을 번영신학적으로 해석을 하고 모두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모든”이란 말 대신 자기 소원과 꿈을 넣습니다.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신앙은 처음 예수 믿는 어린 신자들이나 그렇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겁니 다. 신앙이 깊어지다 보면 성경지식이 더해지고 맥락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이 말씀은 그런 얄팍한 성공신학, 번영신앙을 뒷받침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어느 별장이나 호텔에서 쓴 말씀이 아닙니다. 그가 그토록 가고자 했던 로마에 가긴 갔으나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감옥에 갇혀 춥고 배고픈 시간, 매 맞아 터진 몸으로 살면서 쓴 글입니다. 빌립보서를 설립한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교인들이 선교봉헌 을 합니다. 에바브로 디도의 손에 눈물의 봉헌을 들려 사도 바울을 돕고자 산 넘고 물 건너 멀고 먼 길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바울이 헌금을 손에 받아들고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빌립보교회의 봉헌을 손에 들고 눈물을 닦으며 훌쩍훌쩍 잉잉 그래도 역시 빌립보교회밖에 없구나. 고맙다. 그래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엉뚱하게 “너희들 참 잘했다”라고 합니다. 이 봉헌으로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를 섬기게 되었으니 장하다는 겁니다. 이게 당연 하다는 겁니다. 잘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씀 한 마디를 남깁니다. 이 말씀이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나는 모든 게 잘 되고 배부를 때가 있었다. 그 배부름과 성공이 나를 교만하게 하지 않았다. 이건 내 품성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능력이었다. 때로 헐벗고 배고플 때도 있었다. 그때 나는 비굴하게 살거나 불평자로 살지 않았다. 배부름과 배고픔이 나의 행복을, 자족하는 삶을 빼앗지 못했다. 나는 건강할 때도 있었다. 몸이 약한 나는 약하여 몸져 누울 때도 있었다. 기도로 건강을 찾을 때도 있었지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병들고 약한 모습 그대로 살아야 했다. 이것 때문에 나는 불행하거나 하나님이 살았느니 죽었느니 넋두리하지 않았다. 그 어떤 형편에서든지 나는 당당했고 행복했고 만족했고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겁니다. 이 귀한 말씀을 자기중심적 번영신학으로 받아들이다가 질병이 찾아오고, 실패를 겪어야 하고, 긴 시간 동안 가난에 허덕이게 될 때에 너무나 쉽게 낙심하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이런 현세적이고 일시적이고 세상적인 것 때문에 하늘의 신령한 차원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 믿고 기도하고 헌신하는 모든 것들이 내 사업의 어떤 유익이 있단 말인가? 내 건강에 어떤 유익이 있단 말인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시험 들고 넘어지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성경 많이 읽고, 전도 부지런히 하고 헌신하는 것이 현실 적, 현세적 유익으로 반드시 이어지는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기도 많이 한 순서로 장사가 잘 되고, 성경 많이 알고 있는 순서로 기업이 번창하고 헌신 많이 할수록 자식들이 일류대학에 쑥쑥 들어가면 전도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교회들마다 아마 성경학원들이 생길 겁니다. 그리고 등록처에 번호표 뽑아서 기다릴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 “어떠한 형편에든지” 12절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귀한 말씀들 안에 자족의 비결, 풍성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성공신학의 교과서처럼 암송되어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3서 2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예수 믿으면 내 신앙과 상관없이, 내 존재와 상관없이, 내 신앙의 우선순위와 상관없이 무엇 이든지 잘된다는 뜻입니까? 기억하세요. “네 영혼이 잘됨같이”입니다. 이게 선행조건입니다. 이게 전제조건입니다. 내 신앙 이 든든해질수록, 내 믿음이 반석 위에 설수록, 기도 생활이 단단해질수록,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기를 간구합니다. 내가 영혼이 잘 되어서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인 받을 수 있도록 강건하기를 원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역으로 내 영혼이, 내 신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범사가 어렵고 내 몸도 차라리 병약하길 바란다는 겁니다. III. 풍성히 드리도록 풍성히 채우시리라. 우리가 이 땅에서 풍성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최상급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며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이 풍성한 삶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풍성하게 살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풍성히 드리고, 풍성히 나누기 위해서입 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뒷부분 13절부터 19절 말씀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것부터 먹듯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씀부터 소개합니다. 성경에 황금률이 있듯이 황금 약속이 있습니다. 황금률은 마태복음 7:12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황금 약속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4:19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빌립보서의 결론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의 풍성한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겁니다. 본문 19절 앞에 나오는 13절~18절 말씀은 황금 약속의 목적이요 조건절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풍성한 봉헌의 삶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감사의 삶이 기록되어져 있습 니다. 마중물을 아십니까? 수도가 없던 시절 마을에 혹은 사막에, 오아시스 옆에 혹은 부잣집 마당에 펌프라는 게 있었습니다. 펌프 옆에는 항상 마중물이 있습니다. 그것 없으면 헛바람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사막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물을 쓰고 반드시 마중물을 남겨 두어야 하는 겁니다. 마중물까지 다 쓰고 나면 그 펌프가 소용없는 겁니다. 물이 안 올라옵니다. 그러나 마중물을 붓고 펌프질을 하면 지하수가 콸콸콸 올라오는 겁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 것, 이웃에게 나누어야 되는 것, 내 주변,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마중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고 돕는데 나를 통하여 도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내게 풍성하게 복을 주시는 것 이게 황금 약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카네기는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봉헌드릴 때마다 내 형편에 조금 부담이 될 만큼 드렸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내 평생에 관리가 부담이 될 만큼 부어주셨다.” 록펠러는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릴 때마다 내 형편에서 힘껏 드렸더니 하나님이 언제나 힘껏 나를 도와주시고 나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가 되어서 살았다.” C.S. 루이스는 똑같은 봉헌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풍성히 주시는 봉헌이 따로 있다 고 했습니다. 내가 쓰고 남는 것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내가 쓸 수 있는 건강이고,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고, 내가 쓸 수 있는 물질인데, 취미생활 절제하고, 오락 절제하고, 나를 가꾸는 일 절제하고, 화려한 음식 먹고 마실 것까지 절약하고 아껴서 풍성히 드리고 나누는 봉헌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여러 차례 풍성한 봉헌을 통해 사도 바울의 교회 개척을 도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사역을 도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난 즉 감옥생활에 동참을 했습니다. 그래서 참 고마웠다. 감사하다고 할 것 같은데 14절 “잘하였도다”라고 칭찬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약속의 말씀이 19절 황금 약속입니다. 19절만 기억하면 안 됩니다. 그 앞에 전제 대조건을 기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빌립보교회가 있었다면 류영모 목사에게는 한소망교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있었는지 특별한 계획이 있었는지 젊은 시절부터 한국 교회 중심의 자리, 앞자리에서 평생을 밖에서 섬기는 사역을 교회 섬기는 일과 함께 감당을 해 왔습니다. 몇 년 전에 CBS재단이사장으로, 지난 2-3년은 부총회장, 총회장, 한교총 대표회장으로 또 지금은 교회연합사업 위원장으로 곳곳을 누비며 섬기고 있습니다. 섬기다 보면 시간도 드려야 되고 몸도 드려야 되고 때로는 물질도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엄청난 일을 감당하면서 정당한 섬김 외에 부정적인,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봉투 하나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업무청탁, 인사 배정과정에서 정당하지 않은 1원 한 장 돈 봉투 한번을 받지 않았습 니다. 부정한 식사 접대, 짜장면 한 그릇을 대접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 앞에 당당히 고백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것은 저 혼자 잘나서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여러분 선거를 치루어도 경쟁자들이 많이 있는 상태에서 부정을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를 단독으로, 후보로 내세워 주셔서 이 일들을 홀로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또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모자람 없이, 넉넉하게 예산을 세워 후원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아훌선교회라는 선교회가 있습니다. 또 다른 선교단체들이 언제나 넉넉하게 섬김통장을 채워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또 어떤 분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저를 대신해서 한국교회를 섬겨주세요”하 고 보내주시는 분들이 정말 넘치고 넘치고 많고 많았습니다. 누구보다도 넉넉하게 섬기면서 도 모자람이 없이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역할을 해주신 것입니다. 저도 사도 바울처럼 말씀을 드리면 “감사합니다”라는 말 대신에 “참 잘하셨습니다.” 류영모 혼자 CBS이사장을 하고 한교총 대표회장을 하고 총회장을 한 것이 아니고, 한국교회를 일으 켜 세운 것이 아니고, 여러분 한분 한분 모든 분들이 함께 하나님 나라 선교사역에 동참해주 신 것입니다. 황금 약속 빌립보서의 결론입니다. 빌립보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축복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 라”(빌 4:19) 저도 이 말씀으로 한소망교회의 성도님들을 축복하고 오늘 빌립보서 강해 마지막 시간 말씀 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한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여러분 모든 쓸 것을 채우시기를 축복합니다. 부족한 종을 사용하신 우리 하나 님이 우리가 믿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여러분 한분 한분 가정 가정, 여러분이 써야 할 모든 삶의 영적인 자원과 물질적인 자원과 건강의 자원과 자손 대대에 자원을 넉넉히 채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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