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그때 기억나? 우리가 처음 한집에서 살게 된 그때 말이야. 1998년이니까 벌써 25년 전 이야기네. 오늘은 그때의 나와 오빠, 우리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오빠에게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라 무척 낯설지도 몰라. 사실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래도 우리의 시작이었으니까, 기억이 더 흐릿해지기 전에 이렇게라도 추억하고 싶어. 오빠는 항상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니까 그냥 편안하게 얘기해 볼게.
27살 4월 초였을 거야. 그때 난 만수동에 있는 작은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어. 10시쯤 수업이 끝나고 퇴근하려는데 그날은 도저히 집에 갈 수가 없더라. 그대로 집에 가면 내 인생이 무척 재미없게 흘러가 버릴 것 같았거든. 사실 우리가 서로 죽고 못 사는, 그런 사이도 아니었잖아? 남들처럼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지지고 볶으며 그렇게 살기 싫었어. 좀 다른 인생을 살고 싶었달까. 그날이 아니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볼 기회가 영영 없을 것처럼 숨이 가빠지는 거야. 4년째 사귀고 있었지만 산처럼 변함없는 오빠에게 휘청거리는 나를 설명할 자신이 없었어.
그날 나는 무작정 서울역으로 가서 내 집과 가장 멀어 보이는 부산행 기차표를 샀어. 처음 가는 부산인데 자정 가까운 시간, 기차 안은 생각보다 낯설지 않더라. 갑작스러운 27살의 가출이지만 오래전부터 마음먹었던 일처럼 말이야. 기차에서 삐삐를 던지면서도 두렵지 않았어. 오히려 홀가분했지. 서운하겠지만 솔직히 오빠 걱정은 하지 않았어. 내가 없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니까.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냐고? 애정 표현이 인색한 오빠가 야속해서 ‘나 없이 어디 한번 재미없게 살아봐라’ 하는 심정이었던 것 같기도 해.
부산에 도착해 가까운 모텔에 들어갔어. 피곤했는지 그냥 곯아떨어졌는데 아침에 눈이 안 떠지는 거야. 렌즈를 끼고 잠이 들었는데 그게 문제인 것 같더라고. 힘겹게 렌즈를 빼긴 했는데 그때부터 눈이 푹푹 쑤셔대는 거야. 눈을 뜰 수도 감을 수도 없이 정신 못 차리게 아프더라고. 결국 모텔 여사장님의 도움으로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는데 두 눈 각막이 찢어졌대. 치료받고 모텔에서 꼬박 1박 2일을 앞을 못 보는 채로 누워 있었어. 오빠 마음 찢어놔서 나도 벌 받은 건가? 아무튼 생애 처음 깜깜한 세상 속을 경험했어.
눈을 뜰 수 있게 되고 나서 거제도로 갔어. 나이 든 한 여자와 택시 합승을 했는데 내 꼴이 걱정됐는지 자기 집에 가자고 제안하더라.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은 채 각자의 사연이 있겠거니 하며 일주일을 함께 지냈어. 그녀는 아무 대가도 없이 나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그냥 날 혼자 내버려 두더라. 마치 내 맘을 잘 아는 사람처럼. 정말 드라마 같은 일이지? 낯선 공간, 날 묻지 않는 사람,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싫지 않았어. 그대로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인생을 살 수 있길 바랐던 것 같아.
당진에도 갔었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가 모텔에 투숙하면서 새벽 산책을 했지. 그때부터인가? 내가 지금도 아침 산책을 좋아하잖아. 어느 날 새벽엔 20대에서 50대까지 열 명 가까운 남자들이 강가에 둘러앉아 “어이, 아가씨! 학생인가?” 하며 나를 부르는 거야. 처음엔 살짝 겁도 났지만,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더라고. 알고 보니 근처 건물을 짓는 공사장 인부들이었어. 그 새벽에 그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 달궈진 돌에 산 주꾸미를 굽고 있는 거야. 생전 처음 보는 시커먼 사람들과 구운 주꾸미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니까. 그곳에서 며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어. 내가 참 좁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구나 싶더라.
내 가출의 마지막 코스는 춘천이었어. 원룸을 잡아서 그곳에서 정착할까 했는데 며칠 만에 계획이 와장창 깨져버렸지. 맞아, 내가 오빠 회사로 전화한 그 날. 쾅쾅! "어이! 문 좀 열어봐요! 아~ 우리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닌데? 외로운 사람끼리 친구 좀 합시다!" 대낮에 원룸 옆방에 사는 남자 몇 명이 내 방문을 계속 두드리는 거야. 피할 데가 없더라. 얼마나 무서운지 식칼을 가슴에 품고 화장실로 들어가 한참이나 숨죽이고 있었어. 문을 따고 들어오는 사람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면서. 절박하니까 사람도 죽일 수 있겠더라고.
조용해진 틈을 타 지갑 겸용 다이어리 하나만 들고 방을 뛰쳐나왔어. 슈퍼 앞 공중 전화기에 섰는데 오빠 생각만 나더라. 휴대폰도 없던 시절, 오빠 회사로 전화를 걸었지.
여보세요? 오빠, 나야.
“그래, 어디야? 지금 오려고?”
응. 여기 춘천이야.
“어디로 갈까? 그래, 알았어. 기차역에서 기다릴게.”
한 달 반 만에 전화했는데 오빠 목소리는 어제 통화한 사람처럼 담담했어. 서울역이었던가? 기차에서 내려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 끝에 오빠가 서 있는 거야. 그래, 결국 난 그렇게 오빠에게로 돌아왔어. 봄볕에 까맣게 타고 하루 한두 끼니밖에 먹지 못해서 말라버린 날 오빠는 똑바로 보지 못하더라. 우두커니 있다가 첫 마디가 “배고프지 않아? 뭐 먹고 싶어?” 설렁탕. 웃기지?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설렁탕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날은 왜 설렁탕이 먹고 싶었을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설렁탕을 허겁지겁 먹는데 오빠는 거의 먹지 못하고 내 그릇에 오빠 설렁탕을 덜어 주었어. 그제야 오빠를 올려다봤더니 오빠가 울고 있는 거야. 처음이었어. 오빠 눈물을 본 게. 그 순간 '내가 이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났어.
오빠는 나를 우리 집이 아닌 오빠 집으로 데려갔어. 밤늦은 시간이었는데 어머님, 아버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버선발로 반기셨지. 아들 맘고생 시킨 내가 뭐 이쁘다고 그러나 싶었는데 오빠가 나한테 크게 잘못해서 내가 화난 걸로 돼 있더라. 그동안 우리 엄마, 아빠 찾아가서 함께 밥 먹으며 걱정하시지 말라고, 주용이 곧 돌아올 거라고 안심시켰던 것도 오빠고. 도대체 오빠는 날 뭘 믿고 그랬어? 아무튼 난 내 방황을 탓하지 않고 순수하게 나만 생각해준 오빠를 기억해. 그날의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시부모님과 6년을 한집에서 살 수 있었고 소중한 두 아들을 낳아 키울 수 있었어. 25년을 살았는데도 내가 팔짱 끼고 행복하다고 말하면 오빠는 '해준 것도 없는데 뭘' 하는 표정으로 황송해하고, 내가 ‘사랑해’라고 속삭이면 10대 소년처럼 부끄러워하지. 그런 오빠가 난 참 좋아.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우리가 가장 순수했던 그때 – 나의 방황과 오빠의 사랑’쯤이 될까? 듣기 힘들었을 텐데 내 긴 얘기 끝까지 들어줘서 고마워. 목이 칼칼하네. 이제 한잔하러 갈까?
첫댓글 늘 용감하고 단단한 유주님, 참 부럽습니다. 단편소설로 바꾸어도 될 에피소드들의 시리즈를 기다릴게요.
이 글 읽으며 화 났어요. 전 앵그리 버드 예요.
글 못쓰겠다고 투정한 유주가 얄미웠어요.
이렇게 멋진 글을 만들었으면서….
그녀는 참 다채로운 분 이예요.
삐삐를 던지는 결단력.
바닷가에서 소주 한잔.
오빠는 듬직해요.감동적인 그 부분에서 전 펑펑 울었답니다.
유쥬가 있어 메타포라가
더욱 빛납니다.
오빠 오빠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