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남누비길 2구간(남한산성 남문-갈마치고개) - 1
★일시: 2020년 3월 17일(수) 2~13도 오전: 흐림, 오후: 맑음
★코스: 산성길 산성역-남한산성 남문(4.5km) + 검단산길(7.7km)
★참석회원(5명): 운암 김종철회장, 송명수, 소종섭, 청안 양완식, 채희묵
*********
10:48 산성역 1번출구
10:52 산성폭포
11:14 옥천약수터 (대원사)
11:34~43 쉼터(간식) 위례근린공원
11:56 보부상의 옛길 표지판
12:07 불망비
12:20 옛남문매표소(도로건너)
*********
12:31 남문(지화문) 누비길 2구간 시작(해발 375m)
12:45 제1옹성
12:48 첫 임도 만나는 지점
12:58 임도 진입
12:59 쉼터(병자호란 이야기 1)
13:09 병자호란 이야기 2
13:18 한양삼십리 누리길 갈림길(KT통신탑 입구)
13:22 헬리포트(정상석, 505m)
13:33 불당리 갈림길
13:41 사기막골 갈림길
13:53~14:20 망덕산(498.9m, 왕기봉)(점심)
14:30~33 전망바위
14:38 형제봉(470m, 이배재정상)
14:50 안말/이배재고개 갈림길(종섭 이탈)
15:01 이배재고개(해발 270m)
15:10 무덤 (이배재터널)
15:32 요골산(359m)
15:41 연리지
15:49 묘5기(갈마터널)
15:52 누비길2 날꼬리
15:55 생태통로 터널(갈마치고개, 230m)
16:10 성남시 영생관리사업소 버스정류소
16:30 누비1 버스 출발
16:55 야탑역 도착
17:00 분당선 승차
17:20 개포동역 하차
***********
위례근린공원에서 간식
*********
은혜의강교회 신종코로나 집단 확진
갑자기 하루 전날인 월요일(16일) 성남 소재 ‘은혜의강교회’에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집단(46명)으로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와 꺼림칙하다. 거기다 영상의 날씨지만 해가 나지 않아 춥다는 느낌까지 든다.
약속시간 10시 20분 보다 5분 늦은 25분에 개찰구를 나오니 멀리서 온 운암과 명수친구, 송파에서 온 종섭친구 셋이 기다리고 있다. 늦어서 점심거리를 가져오지 않아 편의점에 들러 쇠고기김밥(2,200원)을 한 줄 샀다. 뒤늦게 도착한 청안 포함 5명은 1번 출구로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산성역에서 시작
사거리를 가로질러 조그만 인공 ‘산성폭포’가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물론 때가 아니니 물줄기는 볼 수 없다. 성남시가 지난해 2월 누비길1구간중 영장산-남한산성 구역을 연결하기 위해 육교를 만들어 놓았으나 거기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다. 이정표상 남한산성 남문까지 4km.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있다.
바로 계단을 밟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개나리도 노랗게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잣나무밭이 두어 곳 나오고 등로는 흙길이라 편안하다. 산성가는 도로와 닿는 곳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플래카드도 보인다.
산성폭포 공원의 코로나 플래카드
산성폭포 아래 조각
산수유
옥천 약수터의 조롱박 모형 화강석 물통
도로가까지 다가갔다가 옥천약수터 표지판이 있는 산허리를 서쪽으로 돌아간다. 옥천 약수터의 화강암 물통이 조롱박 모양이라 귀여워보인다. 2월 13일자 검사에서 대장균으로 인해 ‘음용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그레서 물을 받아 마실수 있게 약수물꼭지 아래 하얀 컵이 놓여있는데 제 역할을 못할 것 같다. 넓은 평상도 두 개, 벤치도 3개나 있어 약수물이 음용이었을 때는 위례사람들이 아침에 많이 이용했을 것 같다.
옥수천 약수터
‘위례’자가 안들어가면~~~
위례신도시 하산길가에는 위례대원사, 위례한빛고등학교, 위례부영아파트 등 아무래도 신도시 개념인 ‘위례’를 붙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위례신도시는 성남시, 서울 송파구, 하남시, 세 지역에 걸쳐있는데 복정, 장지, 학암이라는 기존 이름을 쓰고싶어하지 않아 세 곳 다 ‘위례동’이다. 생강나무가 수줍은 듯 노란 얼굴을 나뭇가지 사이로 살짝 보여주며 봄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원사 지붕도 보인다.
푹신푹신한 산 옆구리를 따라 종섭친구가 열심히 앞장서 간다. 여러번 걸어봤다며 너무 맘에 드는 트레킹로란다.
위례근린공원에서 간식
위례근린공원이 나온다. 신도시도 들어서고 해서 평상도 있고 해가림막이 있는 기다란 반원형 벤치도 있다. 조금 앉았다 가자고 한다. 산성폭포에서부터 30여분. 청안이 따끈한 콩떡을 내놓고 소사장이 구은 절편을 내놓는다. 콩떡은 따뜻하고 차져 맛있는데, 절편을 그 사이 굳어 돌덩어리란다. 콩떡 한쪽씩 먹고 일어섰다.
폐쇄된 미군 성남골프장
아파트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녹슨 철망문이 굳게 닫혀있고 ‘미군부대시설 출입금지’라고 경고문이 붙어 있다. 미8군 소속 18홀 <성남CC>와 옛 미국 그린베레분견대가 주둔해 있던 곳. 실제로는 하남시 학암동 소재다. 27년만인 2018년 11월 30일 문을 닫고 1년 후인 지난 해 11월 이전 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에 다시 개장했다.
골프장 폐쇄 반대 플래카드
미8군은 원래 용산기지내에 골프장이 있었는데 용산기지를 한국에 넘겨 용산가족공원으로 바뀌었고, 그 대신 1991년 한국군 소속인 ‘남성대’ 골프장 옆 이곳 성남골프장으로 대체해 주었던 것. 남성대골프장도 신도시 개발계획과 함께 2012년 5월 사라졌다. 두 곳다 서울에서 가까워 인기 있었던 골프클럽이었다. 이곳 아파트단지에서는 그린이 보기 좋아 아파트나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 성남골프장을 폐쇄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플래카드를 걸어놓았단다.
사실 위례신도시지구에는 원래 육군특수전사령부, 육군종합행정학교, 국군체육부대(상무대), 육군학생군사학교(문무대) 등 군관련 기관이 있어 ‘남성대‘라는 이름으로 통했으나 신도시 개발과 함께 모두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보부상 다니던 옛길
우리는 옛길을 따라 올라갔다. 보부상이 다니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앞 서던 소사장이 산 옆구리를 타고 계속 간다. 나중에 만나겠거니 했다. 올라와 걷다보니 소사장을 기다릴 필요성도 있고 해서 잠시 통나무에 앉았다. 운암회장은 소사장이 내놓았던 돌같은 절편을 꺼내 입에 넣는다. 입속에 넣고 침으로 녹여 먹겠단다. 가져온 것을 안먹어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3인의 불망비(不忘碑)
불망비(不忘碑) 표지판이 나온다. 지나는 등로에 비켜서 있어 지난 답사때 놓치고 간 것이다. 안내판에는 조선 후기 문신인 광주부 군무책임인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應, 1716~87), 두 광주 부윤, 홍익필(洪益弼, 1721~?)과 이명중(李明中, 1712-89) 세 사람이 군(軍)과 부민(府民)을 사랑하고 잘 가르친 공적을 ‘잊지말자[不忘]’는 뜻을 새긴 것이란다. 자연 화강석 앞면을 잘 다듬어 3기의 비(碑) 형태로 암각되어 있으며 천연의 백색 파도무늬가 아름다운데 그로 인해 글자 해독이 더욱 어렵다. 정조 3년인 1779년 산성 개보수가 끝나고 세운 것이다.
수어사서공명응(守禦使徐公命應) 애휼군민영세불망(愛恤軍民永世不忘)(오른쪽)
부윤홍후익필 (府尹洪候益弼) 애휼교민영세불망(愛恤校民永世不忘)(가운데)
부윤이후명중 (府尹李候明中) 애휼교민영세불망(愛恤校民永世不忘)(왼쪽)
숭정 기원후 삼 기해 십월 일 각(崇禎 紀元後三 己亥 十月 日 刻)(상단)
1779년 음력 10월에 새김.
정조대왕 의지 담긴 남한산성 개보수
인조가 정묘호란(1627년)에 이어 병자호란(1636년)으로 청태종으로부터 치욕을 당해 둘째 아들인 효종이 북벌이라는 이름으로 보복의 칼을 갈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49년 승하했다. 1779년(정조 3년) 정조임금이 자신의 스승이자 문신인 서명응을 수어청 수어사(守禦使)에 임명하고(재임, 1779/1/12~11/23) 직접 관할하에 있는 남한산성 증개축 임무를 하명했다. 서 수어사는 이명중 부윤(재임, 1778/8/2~1779/6/28)의 도움을 받아 그 해 3월 대대적으로 수리를 시작해 6월 18일 끝냈다. 정조는 서명응에게 최고 선물인 호랑이 가죽을 하사했고 이명중에게는 충청감사로 특배시켰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홍익필(부윤 재임,1777/9/7~1778/7/30)은 이명중의 전임자.
당시 한성부, 강화부, 개성부, 광주부, 수원부 등 다섯곳의 부(특별 또는 광역시)가 있었는데 한성부 판윤(시장)은 정2품, 4개 부의 부윤은 관찰사(도지사)와 마찬가지로 종2품. 부는 부윤 유고시에만 관찰사가 행정 책임.
서명응과 이명중의 남성신수기(南城新修記)
남한산성 수어장대와 서문 사이에 있는 남성신수기(南城新修記)는 1779년(정조 3) 봄 남한산성을 증·개축하기 위한 수어사 서명응의 지휘와 공사에 참여한 광주부윤 이명중 이하 여러 관리들의 명단과 공사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불망비에 나오는 서수어사가 짓고 이부윤이 글씨를 쓴 것으로 되어있다.
3인의 불망비가 한 바위에
소사장 알바하고 다시 돌아와
날이 흐려 시야가 트여도 조망이 좋지 않다. 소사장이 땀을 흘리며 뒤따라온다. 가다가 길이 막혀 다시 돌아왔단다. 그쪽이 미군 군시설이라 철조망이 있고 더 이상 등로를 만들지 못하게 한 모양이다.
도로와 나란히 따라가기도 하고 능선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벚나무도 있어 4월 초쯤 벚꽃이 피면 장관을 이룰 것 같다. 서북쪽 산성능선이 부옇기는 하지만 시야에 들어온다.
이 벚나무들은 곧 하얀 벚꽃을 피울 것이다.
옛 남문매표소는 버스정류소 이름만 남아
이제는 도로를 건너갔다. 옛남문매표소 기와지붕 건물이 가로질러 서 있던 자리다. 2007년 1월1일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그해 3월 광주방향에서 진입하는 광지원매표소 건물과 함께 이곳 매표소 건물도 철거되었다. “옛남문매표소앞”이라고 버스정류소에 이름만 남아있다. 이곳에는 성남에서 최단코스로 올라오는 등로와도 연결되어있다. 그래서 그 등로와 산성에서 올라오는 등산객, 버스에서 승하차하는 사람들이 있어 커피, 라면, 막걸리 등 간단한 스낵을 파는 푸드트럭도 한 대 있다.
옛남문매표소 횡단보도
남한산성터널
우리는 버스 정류소 푸드트럭을 지나 계단을 따라 도로 아래로 내려갔다. 터널이 나오는 곳에서 다시 올라와 남문에 이른다. 1995년 터널이 뚫리면서 이 성문은 사람만 드나드는 곳이 되고 말았다.
터널과 옛 길
인조의 남한산성에서의 항쟁
인조대왕이 1636년 음력 12월 14일 청군이 한양에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도로 몽진을 하려고 오후 1시쯤 서대문으로 나갔다. 청군이 벌써 홍제동으로 들어섰다는 전갈에 숭례문으로 들어와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다시 의장을 추스르고 수구문인 광희문을 빠져나와 서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눈이 쌓인 험한 산길을 올라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이튿날 다시 나가 보았으나 더 이상 막혀 세자등이 피난간 강화도는 갈만한 곳이 되지 못해 다시 들어와 그 이듬해 1월 30일(음력)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할 때까지 47일 동안 엄동설한 속에서 고초를 겪었던 곳이다. 그 해 인조의 연세 42세. 청대종의 공덕비인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가 있는데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 오른쪽에는 만주문,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된 치욕적인 비.
인조의 피신 상황 상상하기 힘들어
등로를 올라가며 인조대왕의 심정을 떠올려보려고 했건만 신종코로나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긴 해도 엄동설한도 아닌 봄에 어찌 그 비참한 날을 상상이나 해볼 수 있겠는가? 지금 남문 밖 수호목처럼 서 있는 4그루의 느티나무는 인조 대왕이 들어가는 초라한 모습을 보았건만 말이 없이 쇠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4대문 중 가장 웅장하고, 현판이 남아 있어
정조가 왕위에 오른지 3년인 1779년 서명응 수어사와 이명중 광주부윤을 시켜 증개축을 하고 4대문에 이름까지 지어 달아놓았다. 지금은 남한산성 4대문중 가장 웅장한 이 남문의 지화문(至和門) 현판만 남아 있다. ‘지극히 화목한 세상’을 염원했음을 알 수 있다.
후묵배상
|
첫댓글 자상한 보행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