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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14일 오후. 박한 고려대 감독, 정봉섭 중앙대 감독 등은 갑자기 훈련을 중단시키고 선수들을 불러 세운다.
“송도 출신들 다 모여!”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이 휘둥그레 졌던 선수들은 감독들로부터 “얼른 학교로 가서 선생님을 지켜드려라”라는 명령을 받는다.
'농구 할아버지'라 불렸던 송도고 전규삼 옹 (방송캡쳐)
감독들이 언급한 ‘선생님’은 바로 ‘송도 할아버지’라 불렸던 고(故) 전규삼 옹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송도고가 전규삼 옹에게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통보했다”는 기사를 냈다. 사실상의 해고 통보. 사연인 즉, ‘나이가 들어 더 이상 함께 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1915년생인 전규삼 옹은 이미 그 시절 칠순도 훌쩍 넘긴 시기였지만 여전히 왕성히 제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해고 통보 10일 전에도 송도고는 쌍용기(당시 24회) 대회에서 준결승한 터였다.
지도자 경력만 30년 가까이 된 그는 송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고, 많은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했다. 상대팀은 물론이고, 당시 실업 및 대학 감독들조차 인정했던 인물. 그렇기에 대학 감독들은 ‘가서 지켜드려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실제로 해고 통보 기사가 나온 이후, 졸업생들은 물론이고, 학부형에 기자들까지 학교를 찾았다. 운동장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학교에 가서 왜 할아버지가 가르치면 안 되냐고 항의를 했다. 데모 아닌 데모였다. 교장선생님과도 면담을 나누었다.” 제자인 신동재(현 WKBL 심판)의 회고다.
결국 제자들과 농구계의 반발로 학교는 해고 의사를 철회했다. 기사가 난 지 4일만이었다. 제자들이 그를 구해낸 것이다.
전규삼 선생은 성적 자체에 대해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 1년에 1번 이상은 꼭 입상권 진입을 목표로 했는데 선수들의 대학 진학도 무시할 수 없는, 아니 어쩌면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사진=송도고 농구부 제공)
2003년부터 송도고를 이끌고 있는 최호 코치를 비롯하여 송도 출신 제자들은 여전히 그를 ‘가장 잊지 못할 스승’으로 여긴다. (호칭은 시대별로 달랐다. 초창기 제자들은 '선생님'이라 부르고, 선수들끼리는 때때로 '노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정태균, 신동재 등을 지나 신기성, 이현준, 김승현 세대에 이르면서, 즉 80~90년대를 맞으면서는 '할아버지'로 굳혀졌다. SK 이현준 코치는 "그냥 처음부터 할아버지였고, 할아버지도 그렇게 불리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라고 돌아봤다.)
“시대를 앞서간 분이셨다. 우리 학교는 1960~1970년대에 일찍부터 비하인드 백 드리블이나 페이더웨이 슛 같은 것을 배웠으니까. 하지만 기술을 떠나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신 부분에 대해 항상 감사해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항상 학교 공부나 수업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셨다. 개인적으로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운동화 밑창이 떨어져도 쉽게 고치지 못했는데, 조용히 오셔서 ‘잘 신으라’며 신발을 주셨던 기억도 난다. 월급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정말 감사했다.” - 유희형
“우리는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농구인생에 있어, 특히 선수들을 가르치는데 있어 큰 보탬이 되신 분이다. 지금 시대에 그런 분이 계시면 어떨까 싶을 정도다. 함께 목욕탕도 가고, 자장면도 같이 먹고 우리를 손자처럼 대해주셨다. 다른 학교에서는 이런 문화를 이해 잘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때는 부모님도 할아버지를 전적으로 믿고 맡기셨을 정도로 존경스러운 지도자셨다.” - 강병수(전 고려대 감독)
“지금 나를 있게 해주신 분이다. 아이들을 대할 때 편견이 없으셨다. 영어 단어를 어떻게든 하루 하나씩 외우게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시험 성적이 떨어지면 혼났다. 공부와 인성을 중요시 여기셨다.” - 신기성(전 신한은행 감독)
당시 시대를 함께 했던 지도자들도 입을 모았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자였다. 선수들 인성을 많이 강조하셨다. 기술 농구도 인상적이었다. 나도 서장훈, 우지원, 김훈을 선생님께 보낸 적이 있다. 기술 훈련 좀 하라고. 가르치시는 것 자체로 즐거워하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 최희암 전(前) 연세대 감독
“지도자들의 지도자였다고 생각한다. 늘 신사적이셨다. 선수들을 굉장히 아끼셨다. 배울 점이 많았던 분이다.” - 박한 전 고려대 감독
“나는 실업팀(현대전자) 감독이었기에 마주할 일이 많지 않았다. 뵐 때마다 농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기술적인 의견 교환을 많이 했다. 존 프레스에 대항해 공격하는 방법과 같은 내용이었다. 물론, 내가 ‘감히’ 평가할 분은 아니었다. 흔히들 그 분이 기초 기술에만 중점을 두었다고 생각하지만, 더 높은 수준의 기술에 대해서도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 방열 현 대한민국농구협회 회장
오랜 지도자 생활을 해오며 유희형과 서상철, 심욱규, 김동광, 이충희, 강동희, 정덕화, 서동철, 김지홍, 홍사붕, 신기성, 김승현 등 수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해온 그는 그렇게 1961년부터 1996년까지 송도고와 송도중을 이끌면서 ‘송도의 전설’로 이름을 남겼다.
인성여고 단체사진. 가장 왼쪽 검정색 셔츠가 고 심욱규 코치
인천 남자농구에 ‘할아버지’가 있었다면, 여자농구에는 그의 1호 제자와도 같은 ‘낭만 농구’가 있었다. 인성여고를 이끌었던 심욱규 코치다. 나는 ‘해설자 심욱규’만을 기억한다. 경인방송(iTV) 시절, 맛깔 나는 해설로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는 제자들에게 사랑받던 ‘섬세한 남자’ 심욱규이기도 했다. (인성여고 5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책자에서 한 필자는 심욱규 선생의 농구를 ‘낭만적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인성여고에 몸담아온 그는 정지혜(숙명여대 교수), 정은순(KBSN 해설위원), 유영주(BNK 캐피털 감독), 이종애(극동대 감독), 허윤정, 김나연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또한 전규삼 옹의 초창기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만큼 지도 방식도 닮은 점이 많았다.
“기초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셨다. 기본기 훈련을 재밌게 했던 기억이 난다. 다른 학교에서는 하지 않았던 기상천외한 드리블이나 패스를 배웠으니까. 또 코트 밖에서는 선수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주셨고, 굉장히 멋쟁이였던 기억도 난다.”- 유영주 BNK 캐피탈 감독
“기초를 반복하다보면 농구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는데, 그 분은 그 시대에 이미 NBA 기술책을 번역해서 가르쳐주시면서 재미를 더해주셨다. 존 우든 감독의 철학, 훈련방법, 스케줄 관리 등을 많이 공부하셨던 기억도 난다. 거기에 맞춰서 팀을 탄탄하게 이끌었다. 또 여성의 심리를 너무 잘 간파하셨다. 너무 잘 아시고, 가끔은 너무 앞서가다 보니 선수들이 힘들 때도 있었다(웃음). 졸업 후에도 어려울 때면 항상 용기를 북돋워주셨다. ‘너는 잘 할 수 있다’면서. 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대단한 달변가였다. 전규삼 선생님과는 차이가 좀 있었는데, 심 선생님은 기초 위에 실업 레벨에 맞는 기술도 가미하셨다. 약간의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 정지혜 숙명여대 교수
정은순과 유영주를 앞세운 인성여고는 전성시대를 달렸다.
인성여고의 전성시대는 1980년대 후반으로, 1987년 동국대 총장기 쟁탈 전국 고교농구대회에서 창단 24년 만에 첫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최연소 국가대표’였던 정은순과 유영주의 ‘1학년 명콤비’가 활약하던 시기였다.
스타 탄생시켰던 김진수의 홍대부고
스카우트도 쉽지 않고,체육관도 없이 열악했던 상황에도 불구, 홍대부고는 좋은 선수들을 배출해내며 역사를 쌓아갔다. 그 중심에 바로 김진수 선생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 고교대회 정상 다툼에 항상 빠지지 않던 팀이 있었다. 바로 홍대부고였다. 이상민과 조성원 등이 활약한 홍대부고는 1990년 ‘동국대 총장기 쟁탈 전국고교농구대회’에서 이 대회 출전 이래 첫 타이틀을 거머쥔다. 당시 주역은 이상민(현 삼성 감독). 어시스트 기록에 관대하지 않았던 아마추어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결승전 12어시스트 6스틸 기록은 가히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홍대부고는 1990년에 피크를 이루었다. 이상민을 중심으로 노기석, 이무진 등이 선전했는데, 비록 그 해 6월 대통령기에서는 용산고에게 1점차로 아깝게 졌지만 동국대 총장기와 쌍용기 등에서 우승을 거머쥐면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 시기 홍대부고 우승 뒤에는 재미있는 표현 하나가 따라다녔다 ‘구걸 연습’이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홍대부고에 대해 “1956년 성북고로 탄생해 전국을 제패했고, 1971년 개명하였지만 서울 고교농구팀 중 드물게 전용체육관이 없어 구걸 연습으로 고교 농구 정상에 섰다”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구걸 연습이란 표현이 나올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지만, 우수한 제자들을 배출하고 팀의 전설로 남은 지도자가 있다.
바로 김진수 선생이다.
1937년생인 김진수 선생은 1964년 성북고 코치로 부임한 이래 1999년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홍대부고의 상징으로 자리해왔다. 추일승 고양 오리온 감독, 조성원 명지대 감독, 이상민 삼성 감독, 이무진 홍대부고 코치 등 농구 지도자 뿐 아니라 고광헌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김경태 전 기업은행 부행장 등 여러 분야에서도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WKBL(KBSN 스포츠)과 대학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택훈은 “내가 농구를 할 수 있게끔 도와주신 분이다. 농구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라고 돌아봤다.
김진수 선생 밑에서 배출된 지도자들은 대부분 스타일이 비슷하다. 권위적이지 않고 코트 위에서도 크게 흥분하지 않는다.
“그 당시는 지도자들이 욕을 많이 하시던 시절이었지만, 때리지도 않고 욕도 안 하셨다. 한마디로 신사셨다. 처음 농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농구 실력이 많이 부족했다. 그런데 열심히 하다보니 실력이 늘었다. 그때 열심히 하게끔 동기부여를 해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시다. 칭찬도 많이 해주셨다. 선생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 조성원 명지대 감독
“무리수를 안 두는 분이셨다. 우리들에게는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다. 선생님은 굉장히 힘든 상황에서도 팀을 성공적으로 꾸려오셨다. 외부 스카우트가 원활하지 않을 때는 시골을 전전하며 큰 선수를 스카우트 해오셨고, 잘 먹어야 한다며 집에서 먹이고 재우기도 하면서 팀을 만들었다. 스카우트가 안 되다보니 일반 학생들을 뽑아서 훈련을 시킬 때도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팀을 훌륭히 운영하셨다. 나 역시 그렇게 시작했다(웃음). 당시 체육선생님도 하셨는데, 내가 키가 크다보니 눈에 띄었나보다. 날 보더니 ‘야, 너 농구해’라고 말씀하신게 시작이었다.” - 추일승 오리온 감독
그렇다면 ‘구걸 연습’이란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당시만 해도 홍대부고는 체육관이 없었다. 그래서 홍대부고 출신 지도자가 있는 대학 및 실업팀을 찾아가 짬짬이 훈련했다. 추일승 감독은 “동국대 체육관을 쓰곤 했다. 동국대 출신 동문 덕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뛰던 시기에는 (시위로 인해) 휴교령이 내려지던 시절이었기에 훈련 장소를 구하는 것도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틈을 타서 도망 다닌 선수들도 있었으니”라고 돌아봤다. 조성원 감독의 기억도 다르지 않다.
“체육관이 없던 시절, 여러 곳 체육관을 빌려서 훈련을 했다. 중학교도 찾아가고, 빠이롯트(실업팀) 체육관에서도 훈련하고. 빌릴 곳이 없으면 뛰어도 다니고(웃음). 감독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최근에도 제자들은 꾸준히 스승을 찾아 과거를 추억하고, 건강을 기원하는 행사를 갖고 있다.
최근까지도 홍대부고 출신 제자들은 홍대부고 동문회인 ‘홍농회’를 통해 선생의 생일, 혹은 스승의 날을 맞아 행사를 갖고 있다. (홍대부고는 2004년에야 비로소 체육관을 갖추게 됐다. 현재 홍대부고를 이끌고 있는 이무진 코치는 "체육관이 없다보니 아이들을 데리고 인천도 가고, 의정부도 갔다. 안정적으로 훈련할 환경이 없다보니 선수들의 집중력을 유지하는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러다 체육관이 생겼을 때는 느낌이 남달랐다. 스카우트해서 선수들을 키우는 부분부터 훈련까지 여러모로 엄청난 도움이 됐다"라고 돌아봤다.)
전주원을 키운 황신철
선일여고에서만 39년을 지낸 황신철 코치(사진=점프볼)
1990년 7월 18일. 이상민이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쌍용기 우승 트로피를 품던 그날. 나란히 우승팀 자격으로 웃고 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여자농구 포인트가드 역사를 썼던 ‘레전드’ 전주원이다. 전주원은 선일여고 소속으로서 그 해 세 번째 대회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후 선일여고는 1990년에 27승 무패. 6개 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새 역사를 쓴다. (춘계연맹전, 대통령기, 쌍용기, 종별대회, 전국체전, 학산배)
선일여고는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온 여자농구 명문교 중 하나다. 그 토대는 ‘든든한 뿌리’에 있다. 학교측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초등부부터 여중부, 여고부까지 줄기가 이어져왔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황신철이다. (선일초는 2015년 대회 후 긴 역사를 뒤로 하고 잠시 해체됐지만, 2018년에 재창단했다.)
황신철 코치는 1978년 선일초 코치로 부임해 선일여중을 거쳐 선일여고에서만 무려 39년을 지냈다. 2017년 6월, 그는 긴 지도자 경력을 마치고 비로소 은퇴했는데, 그 사이 전주원, 허윤자, 김연주, 이경은, 신지현, 최규희 등 우수한 선수들을 배출해왔다. 언젠가 그가 프로팀 연습장에 나타나자 프로팀 감독들도 정중히 인사를 전하고 극진히 모셨던 장면이 기억난다.
선일 출신 선수들은 선일 시스템의 장점으로 여러가지를 꼽는다. 체육관이 크고 코트가 많기 때문에 초, 중학교 후배들도 고등부 훈련을 보고 자랄 수 있다는 점, 그러면서 서로 응원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고 그만큼 학교의 지원도 아낌이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황신철 코치를 꼽는 이들도 있다. “농구를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좌측 상단부터 선일여고 시절의 전주원-이경은-신지현-김연주 (사진=점프볼)
“제자들이 대부분 재밌게 농구했다고 하더라”라고 말하자, 우리은행의 전주원 코치는 “선수들의 자신감을 많이 살려주시는 스승님이셨다”라고 동의했다. “내가 7개밖에 못하면 더 열심히 해서 10개를 하게끔 만드셨다. 선수들이 기 안 죽고 열심히 할 수 있게 만드는 스타일이셨다. 예전에는 ‘잡기’로 통했던 그런 기술들도 훈련이나 경기 중에 쓰게끔 독려하셨는데 그런 것들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실제로 황 코치는 은퇴하기 전에도 프로팀과의 비시즌 합동훈련을 주선해 선수들의 분위기 전환을 유도하고 동기부여를 하는 등 애를 쓰기도 했다.
슈터 출신 김연주 역시 동의했다. “엘리트 농구는 항상 성적이 우선이 되고, 힘들게 하지만 황 선생님만큼은 특별했다고 생각한다. 선수들이 잘 못 하는 부분을 자신있게 시도하게 해주셨다. 선일여고는 여중과 체육관을 같이 썼기에 연습경기를 할 때도 많았다. 중학생들이랑 연습경기를 하면 얻는 것이 적을 수도 있는데, 그럴 때면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제대로 쓰지 못했던 기술들을 하게끔 하셨다. 예를 들면 왼손으로만 경기하게끔 지시하셔서 약한 부분을 보완하게끔 하신 거다.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시도 자체가 재미있었고, 생각하면서 하다보니 재밌었다. 그러다보니 중학생 중에서는 고등학교 언니들이 즐거워 보인다며 빨리 진학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어 김연주는 “은퇴 후 초등학생 선수들을 방과후 수업 때 가르치고 있는데, 마음대로 안 될 때마다 한 번씩 선생님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고교시절에 나는 농구가 정말 재밌어서 했다. 아이들도 그런 생각이 들게끔 가르쳐보고 싶다”고 돌아봤다.
전주원 코치 역시 “성적도 그렇지만, 선수들 마음을 잘 헤아려주셨던 지도자셨다. 내 학창 시절 때도 자유롭게 농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마치 저희가 프로팀 같은 느낌이었다”라며 롱런의 비결을 덧붙이기도 했다.
대부들을 돌아보다
사실, 이들 외에도 학교를 대표했던, 혹은 그 지방을 대표했던 ‘농구 대부’들이 많았다. 광신에는 한춘택(작고) 선생이 있었다. 장덕영 선생(현 중고농구연맹 부회장)이 1982년 팀을 맡아 더 발전시키기에 앞서, 한춘택은 광신의 역사를 만든 인물이었다. 1960년대부터 팀을 맡아 은퇴할 때까지 광신정보산업고를 이끌었다.
안준호 전 삼성 감독도 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학생으로서의 기본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분이다. 수업을 다 듣고 운동을 시작했다. 중간고사 기간이 되면 일주일은 선생님과 다같이 공부만 했다. 아침 경기가 있는 날에는 아침에 경기하고 오후에 수업을 들어갔고, 오후 경기가 있을 때는 아침에 수업을 듣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흔치 않았다. 우리는 성적표를 제출하기도 했다.”
많은 제자들이 한춘택 선생을 회고할 때 ‘선수 입장에서 생각했던 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안준호 전 감독도 동의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100% 선수 입장에 섰던 분이었다. 김현준, 문경은 같은 슈퍼스타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도 돈 생각은 하지 않으셨다. 설렁탕 한 그릇 같이 먹고 결정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농구는 기본기를 매우 중요시 여기셨다.”
한춘택 선생의 뒤를 이어 광신을 이끌었던 장덕영 선생도 같은 말을 했다. 그는 광신에 부임한 뒤 한춘택 선생을 보좌하기도 했고, 또 홀로 팀을 이끌기도 했다. 코치 겸 교사로 있다가 교감, 교장을 거쳐 퇴임했다.
“고교시절 나의 은사였다. 아마도 농구장에서 가장 청렴하신 분이었을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수업을 하고 운동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선생께서는 항상 수업을 마친 뒤에야 운동을 시작했다. 김현준, 이원우 같은 대선수들을 다루면서도 돈 문제도 한번 얽히지 않으셨다.” 장덕영 선생의 말이다.
오늘날에도 광신은 성적 부담없이 선수들 발전에 힘을 쏟는 학교로 유명하다. 그 바탕에는 농구인이자 교육자였던 장덕영의 소신있는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장덕영 선생은 “성적은 걱정하지 말아라. 말썽피우지 말고, 돈 문제에 얽히지 말고 소신있게 지도하라는 말을 많이 한다”라고 전했다.
대구에는 임판석 선생이 있었다. 방열 회장은 그를 ‘대구 농구의 갓 파더’라고 말한다. 계성고에서만 무려 36년을 일했다. 그는 계성고의 첫 전성시대를 이끈 인물이다. 1975년 춘계대회와 추계대회, 전국체전 등에서 3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당시 김여진과 김태범의 맹활약이 눈부셨다.
2000년 11월부터 모교 계성고를 맡아 정영삼, 박인태 등을 길러낸 김종완 코치는 “운동할 때는 무서운 분이셨다. 그렇게 무서우면서도 반대로 코트 밖에서는 정이 많으셨다. 따로 챙겨주실 때도 있었고, 선수들마다 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의 길이 맞다. 스승이든 코치든 한없이 정을 줘야 한다. 정이 없으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허재 감독의용산고 시절. 가운데서있는 선수가 바로 허재 우측 끝이 바로 양문의 선생이다
용산고에서 24년간 활동한 양문의 선생도 빼놓을 수 없다. ‘농구대통령’ 허재를 비롯하여 유도훈, 이민형, 김병철, 김재훈 등 수많은 스타들을 발굴, 길러냈다. 1975년부터 1999년까지 숱한 우승을 차지했고 때로는 1년 내내 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승현 같은 재능있는 유망주들을 스카우트하는데도 일조하기도 했다.
DB 이효상 코치는 “용산 출신이 아니시지만, 용산에 대한 애착은 누구보다 강한 분이 아닐까 싶다”며 “무엇보다 스타가 될 것 같은 선수들에겐 더 강하고 모질게 하셨다”라고 돌아봤다. 그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차별’이 없다는 것이었다. 수비할 때만 만큼은 편애가 없었다. 모두가 열심히 다 쏟아 부어야 했다. 그게 팀워크의 첫 걸음이었다. 평소에도 편애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셨던 걸 알았다. 내가 선생님 마음을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죄송스럽기도 하다”라고 덧붙였다.
용산의 모토는 ‘수비’였다. 강한 체력이 뒷받침된 수비로 유명했다. 양문의 선생은 몇 년 전 가진 인터뷰에서 “용산 선수들은 ‘남산’하면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였다. 납조끼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한 바퀴 돌고, 계단 오르내리기도 했다. 예전에는 나도 함께 달렸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런 한 발 더 뛰는 농구가 오늘날 용산 농구의 DNA가 됐다.
한편 그 외 동주여고(부산)의 안영식(작고), 휘문고의 김원호(작고), 전주고 이한구(작고) 선생 역시 각 지역을 대표한 지도자였다. 일선에서 물러난 지 몇 해 되지 않았지만 전주 기전여고에는 이기호 선생도 있었다. 삼성전자에서 활약했고, 삼성생명과 기아 등의 감독을 지낸 박인규는 “전주고 이한구 선생님은 김영설 선생님과 함께 전북농구의 산증인이었다. 이한구 선생님 덕분에 잘 배웠고, 나도 연세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선생께서는 정말 책임감이 강하고 열정적이셨다. 불의를 보고는 못 지나치시고, 자신보다는 조직을 더 잘 만들기 위해 희생하셨던 분이다”라고 기억했다.
이 글에서 정리한 지도자들은 대부분 한 학교에서 오래 재직하며 자신의 지도철학과 이상을 펼쳤던, 그리고 제자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던 이들이다. 그렇지만, 김승기(경복고/KBL 감독과 동명이인), 김성린(작고· 경복고, 대경, 숭의여고 등), 이우재(작고) 선생처럼 여러 사정상 한 학교에서 오래 머물진 않았어도 오랫동안 아마농구 무대를 지켜온 지도자들은 분명 더 많을 것이다. (교사로도 동시에 활동한 이들의 경우, 사립학교인지, 공립학교인지에 따라 재직 기간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자료를 찾고, 인터뷰를 통해 파악하다보니 재직 기간을 떠나 지도자로서 롱런한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시대 분위기를 떠나 선수들 편에서 생각하려 했고,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원칙으로 팀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팀을 더 잘 이끌기 위해 공부하고 고민했으며, 선수들이 ‘학생’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않았다. 이처럼 한국농구에도 기술 발전을 위해, 그리고 선수들 발전을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온 지도자들이 분명 많았다.
아쉽게도 그들이 걸어온 길과 기록, 훈련방식 등은 구체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많지가 않다. 세상을 떠난 전설도 많지만 여전히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는 원로들도 있다. 제자들에 의해, 혹은 관계자들에 의해 한 번 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공유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한국농구의 스승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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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잘보고갑니다~
잘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