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운뉴스와 20년을 거래했던 업체가 문을 닫았다. 계열사가 하나 둘이 아닌 대기업 2세들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수익성이 낮은 인쇄업을 접고 다른 업종의 사업들에 열중하기 위해 계열사 하나를 문 닫은 것이다. 그동안 타운뉴스와 20여 년을 함께 일했던 담당자는 부장일 때 만나 이사를 거쳐 전무가 되어 36년 간 근무했던 직장의 마지막 정리까지 맡아서 했다고 한다. 타운뉴스는 좋은 파트너를 잃은 셈이다. 그 분은 언제나 타운뉴스의 여러가지 여건을 고려해서 도움을 주었고, 특히 종이의 무게나 질까지 따져가며 도움을 주었다. 인쇄가 아무리 좋아도 종이 질이 낮으면 우선 무겁고, 보기에도 좋지 않기 때문에 타운뉴스의 업소록이 남가주에서 발행되는 다른 업체의 업소록과 차별화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물론 타운뉴스 광고주와 독자들의 끊임없는 성원과 직원들의 노력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새로운 업체를 찾기 위해 갑자기 예정에 없던 한국 출장을 왔다. 구로 디지털역 인근에 숙소를 잡았다. 구로동에 숙소를 정한 이유는 출장 목적에 관계되는 업체들이 이곳에 많이 있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나 정작 와서 보니 20여 년 전과 상황은 많이 달랐다. 관련 업체들이 대부분 파주 쪽으로 이전했다는 사실을 도착해서 알았다. 그만큼 바뀌는 시대적 상황을 읽지 못하고 구태에 젖어 산다는 증거인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어쩌면 내 잠재의식 속에 있는 추억이 나를 구로동으로 인도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 속의 구로동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구로동에 큰댁이 있었다. 어려서 부터 나는 큰댁에 자주 드나들었다. 학기 중에는 주말에 가서 하루 이틀 자고 왔고, 방학 때면 여러 날 묵기도 했다. 큰 댁에 가면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있었다. 세계적인 위인들의 전집을 비롯해서 세계적인 문인들의 작품이 있었다.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잔소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지방에서 사업을 하고 계셨고, 사촌형이나 누나, 동생들, 큰어머니도 무조건 내편이었다. 따뜻한 아랫목에 배깔고 종일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졸리면 그대로 잤고, 때가 되면 식사하라고 불렀다. 밤늦도록 책을 잡고 있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의 구로동은 길이나 주변이 그냥 시골 동네처럼 느껴졌다. 버스에서 내려 오가면서 봤던 게 전부였으니까. 처마가 그리 높지 않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그런 옛날 길을 떠올리면 된다.
공항에 마중나와 준 친구와 숙소로 가면서 어린 시절 내가 놀던 그 구로동을 생각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로동에 처음왔다는 친구도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고 수많은 차량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맨해튼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옛날 구로동을 떠올리며 구로동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구로동의 구로(九老)는 옛날 이곳에서 노인 아홉 사람이 오랫동안 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일설에는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낙양 용문산 동쪽에 석루를 짓고 시인 8명과 함께 시회(詩會)인 향산구노회(香山九老會)를 만들어 즐겼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1949년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이 있을 때, 경기도 시흥군 구로리에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리명은 그대로 ‘里’로 칭해 오다가 1950년 구로동이 되었다. 이어서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됨에 따라 구로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언제나 열렬한 지지자이자 내 편인 사촌누나가 달려와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친구와 누나에게는 내 구로동 추억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얘기하는 순간, 내가 생각했던 아름다운 추억과 다른 얘기가 나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추억에 빠져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출장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부지런히 뛰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전 담당자와 타운뉴스 일을 함께 했던 직원 중의 한 분이 새로 근무하고 있는 회사가 그동안 거래해 왔던 업체에 버금가는 유명업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두 분과 만나 점심식사를 하며 앞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서류상의 절차만 남겨두고 있다.
덕분에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저도 구로동을 잘 기억합니다. 친숙한 곳이지요. 구로동에 제 사춘언니가 살고있어서 2년전 한국 방문시 그곳을 방문한 기억이 납니다. 맞아요. 옛날에는 그곳이 서울시 영등포구 구로동이었지요. 지금은 말씀하신대로 구로구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바뀐지가 1980년이면 꽤 오래 되었네요. 제가 태어난곳도 영등포구 영등포동이였고 어렷을적에 엄마 심부름으로 자주 영등포 시장에 가서 파 마늘 등등을 사왔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10년전 한국 방문했을적에 영등포를 방문했었는데 영등포 시장이 아직 옛날 모습으로 남아있는걸 보고 깜짝 놀랬어요. 지인 말씀이 영등포 구청앞에 큰 육교가 생기는 바람에 그 동네가 발전하지 못했고 그래서 옛날 모습이 그대로 라고 하네요. 덕분에 저는 동네 골목길을 돌아다보며 아주 희미하나마 시절을 되돌아볼수가 있었어요.
영등포에는 아직 옛모습이 남아 있나 봅니다. 구로동은 천지개벽이 일어나 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그때 그 흔적을 찾지못했어요.
6박 7일 머무는 동안 숙소 동서남북으로 매일 아침 걸었거든요.
하긴 1960대 중반의 모습을 2024년에 찾으려고 한 제가 무리한 걸 기대한 거죠.
사진은 구로동 거리에서 찍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