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우주 만물의 이치는 단 한자 '變'이다.
어느새 12월도 반이 지나갔다. 流水같이 소리 소문없이 흘러가는게 어디 歲月뿐이겠는가?
흐르는 세월따라 宇宙도, 山川도, 草木도, 온갖 동物도, 그 중에서 人間도 따라서 變하여 늙어간다.
그래서 저 유명한 神機妙算의 주인공이자 저 유명한 『皇極經世書』, 『觀物內外編』, 『康節觀梅法』의 저자인 상수론자 邵雍(康節, 1011년~1077년. 註1)은 梅花林에서 바람에 梅花가 날려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문득 깨달았다.
'온 우주와 세상 만물의 이치는 단 한 字인 '變'이라는 것'을!
이로서서 수인심법을 완성시켜서 온 세상 만물과 사람의 운세를 확연하게 볼 수가 있게 된다.
* 註1, 소옹(邵雍, 1011~1077)은 중국 북송의 性理學者로, 象數學者이며 詩人이다. 자는 요부(堯夫), 自號는 安樂이며, 康節은 사후에 내려진 시호(諡號)이다.
소강절의 집안은 증조부가 송 宋 太祖 趙光胤의 휘하에서 군관을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관직에 나선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 邵吉(989~1067) 또한 관직에 나가지 않은 까닭에 집안은 항상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立身揚名하고자 과거에 뜻을 두고 추위와 더위를 참고 견디며 독서와 사색으로 밤을 지세우다 문득 탄식하였다. “옛 사람들은 지나간 것을 높이고 친구처럼 지냈는데 나만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나.” 하고는 齊, 魯, 宋, 鄭 등의 옛 나라들을 오랫동안 유람하고 돌아와 말했다.
“도가 여기에 있다.”
古今과 천지만물의 변화가 결국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됨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은 후 그는 입신양명을 향한 꿈을 접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소강절이 蘇門山 百源에 있을 때, 북해 사람 李之才( ?~1045)가 소강절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소옹의 집을 방문하여 시험 삼아 物理(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와 性命(인간 본성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의 학문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이지재의 물음에 소강절이 삼가 가르침을 청하자 이지재는 河圖洛書, 八卦와 64卦의 圖象 등을 전하였다. 그 뒤 소강절은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性을 알았고, 성을 깨친 다음에 命을 알았으며, 명을 안 뒤에 지극한 理致를 깨달았다.
소강절은 道家와 佛家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유교의 易哲學을 새롭게 해석하여 특이한 數理哲學인 象數學을 창안하였다. 그는 易이 陰과 陽의 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陰ㆍ陽ㆍ剛ㆍ柔의 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수리철학을 바탕으로 우주의 生成과 消滅의 원리를 밝히고 있다. 일년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우주의 일년인 一元에도 생성, 소멸의 순환이 반복된다고 보았다. 그는 해(日)의 경로는 하늘의 元, 달(月)의 경로는 하늘의 會, 별(星)의 경로는 하늘의 運, 辰(시간)은 하늘의 世라 하여 원회운세를 일월성신에 배당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일원에 12회가 있어 360운에 응하여 4,320(1세는 30년, 30×4,320=129,600년)세를 거느리며, 1歲(1년)에 12월, 360일에 4,320(12×360)시간이 있음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강절은 젊은 시절 共城(지금의 河北省 範陽縣)에서 살았는데, 그의 나이 54세 때에 부친이 돌아가신 후 낙양의 天津橋 가까운 곳에 정착하였다. 이 집은 고관 출신인 富弼과 司馬光, 呂公著 등의 벗들이 돈을 모아 그에게 집과 농토를 마련하여 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安樂窩라 하고, 스스로를 안락선생이라 하였다.
천진교는 소강절이 두견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王安石(왕수인, 1021~1086)의 출현을 예견하였다는 유명한 곳이다. 소옹이 천진교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고서, “두견새는 남쪽에 사는 새인데 이곳 북쪽까지 올라온 것은 남쪽의 기운이 강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쪽 사람들이 관직에 많이 진출할 것이다.”라고 예견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왕안석이다. 왕안석은 남쪽 江西省 사람으로 그가 宰相이 되면서 남쪽의 동료들을 많이 기용함으로 소강절의 예견이 적중하였다. 이와 같은 일화로 소강절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앞날에 일어날 일을 아는 사람(前知)”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봄가을이 되면 성안을 유람하였는데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나가지 않았고, 출타할 때면 말을 몰아 어디든 갔다. 士大夫家에서는 그의 말(馬)소리만 들리면 다투어 그를 맞이하려 하였고, 어린아이들이나 하인들까지도 “우리 집에 선생님이 오신다.”고 말하여 그의 성명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호사가들은 소옹이 거처하는 집처럼 따로 지어놓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소강절은 덕과 기품이 순정하여 어질고 현명하였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사람들과 거리를 두지 않았다. 또한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향리 사람들은 소강절의 덕성을 흠모하여 夫子 형제들이 서로 조심하여 “나쁜 짓을 하지 마라. 안락선생이 알까 무섭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송거리가 있으면 반드시 소옹에게 먼저 갔다.
소강절은 司馬光, 富弼 등의 舊法黨과 친교하면서 市井의 학자로서 소박한 삶을 살았다. 北宋 仁宗, 英宗, 神宗 초년에 걸쳐서 생존하였으며, 歲首는 67세였다.
그의 저서로는 『皇極經世書』, 『觀物內外編』, 『康節觀梅法』, 『伊川擊壤集』 등이 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皇極經世書』에서는 천지만물의 모든 현상의 전개를 數理로써 설명하고 있는데 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극경세서』의 내용에 대해 후세 학인들의 평과 주석이 담긴 『纂圖之要』와 『황극경세서』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觀物內篇」, 소강절 선생이 여러 학인들과 나눈 담론을 엮은 「觀物外篇」으로 되어 있다.
소강절이 직접 편집한 『이천격양집』은 자신이 지은 천 오 백여 편의 시들이 시대 순으로 담겨 있다. 여기에 수록된 시들은 그의 철학사상을 운문의 형식을 빌어 자유로이 표출하고 있다.
하늘에 앞서 일을 행하여도 하늘에 어긋나지 않았던 사람 소강절, 그는 학식이 풍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안으로는 성인의 경지에 가까웠다. 훗날 그는 南宋 度宗 3년(1267)에 孔子廟에 從祀되어 新安伯에 추봉되었으며, 명나라 世宗 때는 先儒邵子라고 높여 불리어지게 되었다정호성리학자 程顥(1032~1085)는 소강절의 묘비명에서 “소강절의 道는 편안하였으며, 또한 학문을 이루었다(安且成).”라고 하였다.
소강절은 역의 이치에 通徹 하였으며, 『주역』을 새롭게 해석하여 상수학이라는 새로운 역학의 흐름을 창안하였다. 그가 창안한 상수학은 주자학의 근본이념이 되었으며, 周敦(1017~1073)이의 太極圖說과 더불어 동양우주론의 근원사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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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서로에게 말하고 생각할 때마다
따스함이 느껴지는 단어가 하나 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 단어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면 나는 왠지 그 사람과 한층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에 푸근해진다.
난로 같은 훈훈함이 느껴지는 단어 그 단어는 바로 "우리"라는 단어다.
'나는 나너라고는 너' 라고 시작되는 말에서 보다 우리로 시작되는 말에 더 많은 애정을 느끼게 된다.
이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온전히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람 人字에서 보듯이 사람은 근본적으로
어깨와 어깨끼리, 가슴과 가슴끼리 맞대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굳이 불가의 인과설과 연기설을 들먹이지 않드라도
이 세상에 나와 전혀 상관없는 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맑고 아름다워지리라 믿는다.
그리고 조그만 것에 感謝하게 될 것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너"라는 삭막한 말에 비한다면
"우리"라는 말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 겨운지를!
전유진 - 소녀의 기도
https://youtu.be/F4shOnmWi3U?si=KO9sWP2KLv9jLhi_
첫댓글 글 잘 읽고 갑니다 좋은하루 명절 잘 보내시고 건강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명절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