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한국 로봇 ‘롭해즈’,
세계로봇경진대회서 1위 입상
2004년 4월 27일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로봇이 세계 로봇경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강성철 지능로봇연구센터 박사팀이 제작한
위험작업 로봇인 ‘롭해즈(ROBHAZ)’가
이날 미국 뉴올리언스대학에서 열린 세계
로봇경진대회 구조로봇 부문에서 우승한
것이다.
롭해즈는 지형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두
개의 트랙을 로봇 몸체 양쪽에 설치, 계단
이나 울퉁불퉁한 길에서도 최대 시속5km
로 이동할 수 있어 폭발물 탐지와 화재 현장
에서의 인명 구조 등 위험한 작업을 위해
제작됐다.
세계 로봇경진대회는 97년부터 시작한 권위
있는 대회로 강 박사팀 외에도 구조
로봇 부문에만 미국 카네기멜론대,뉴올리
언스대, 독일 브레멘대, 캐나다 마니토바
대 등이 참여해 경쟁을 벌였다.
이번 구조 로봇 부문은 지진 상황을 연출
한 모의현장에서 20분 동안 어느 로봇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얼마나 많은 모
의 희생자를 탐지하는가를 측정했다. 경기
결과 강 박사팀은 대회 사상 가장 높은 점
수(123점)로 우승했다고 KIST는 밝혔다.
▶2015년 평창올림픽 한국 국적 선택한
노르웨이 스키 스타 김마그너스
크로스컨트리 스키 기대주 김마그너스(17·노르웨이명 마그너스 보어·사진)가 태극 문양을 달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나선다.
그의 소속사인 브리온컴퍼니는 27일 “김마그너스가 한국 스키 발전에 대한 강한 포부와 어머니의 나라에 대한 애정으로 한국 대표를 택했다”고 밝혔다. 마그너스는 1998년 부산 선박회사에서 일하던 노르웨이인 아버지 오게 보어(59)씨와 한국인 어머니 김주현(55)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부산서 보내 지금도 부산 사투리를 쓴다. 그는 크로스컨트리 시작 1년 만인 2012년 노르웨이 전국스키선수권에서 남자 15세 클래식 및 스프린트 우승을 차지한 차세대 유망주이다.
노르웨이는 ‘스키의 마라톤’이라 불리는 크로스컨트리에서 올림픽 최다 금메달(31개)을 딴 이 분야 최강 국가다. 반면 한국의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올림픽 30위 안에 든 적이 없다. 마그너스는 최근 3차례의 전국체전에서 무려 11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며 압도적 기량을 과시했다.
마그너스는 최근 올림픽 출전 국적 선택 문제로 고민해왔다. 최종적으로 노르웨이가 아닌 한국 대표를 선택한 그는 “태극 마크를 다는 것은 아주 가슴 뛰는 일이고, 어머니가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평창 시상대에 올라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요한 23세'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시성.
▶2013년 노진혁,KBO리그 NC다이노스
최초로 인사이더 파크홈런을 달성.
▶2012년 파키스탄에 거주 중이던 오사마
빈 라 덴의 유족 전원, 사우디아라비아로 추방.
▶2012년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페트
로우시크 에서 연쇄 폭탄 테 러 발생(최소 29명 부상).
▶2012년80~90년대 가요 황금기 연 이호준 별세
▶2011년4·27 재보궐선거
▶2010년 세계 최장의 방조제인
'새만금 방조제' 준공.
▶2010년 산악인 오은선 대장, 여성으론
세계 최 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른 오은선 대장.
2010년 4월 27일 오후 6시 16분(이하 한국시간) 대한민국의 오은선(44·블랙야크) 대장이 안나푸르나(해발 8091m) 정상에 태극기를 꽂았다. 여성 산악인 세계 최초로 8000m급 고봉(高峰)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지난 1997년 갸셔브롬 2봉(8035m) 등정 이후 13년만에 이룬 쾌거였으며 이중 12개봉은 무산소 등정이다. 1985년 수원대학교 산악부에서 처음으로 산악계와 인연을 맺은 오은선은 1993년 故 지현옥 대장을 중심으로 한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참가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여성 산악인으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오은선은 이날 오전 1시 40분 라이벌이었던 고(故) 고미영 대장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서 캠프 4(해발 7200m)를 출발했다. 고미영은 2009년 7월 낭가파르바트(8126m)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다가 추락해, 결국 사망했다.
캠프4를 출발한지 18시간이 지난 오후 6시 16분, 드디어 정상에 오른 오은선은 태극기를 들고 두 손을 흔들었다.
지구상에서 해발 8000m가 넘는 산은 에베레스트(8848m), K2(8611m), 캉첸중가(8603m) 등 모두 14곳으로, 모두 히말라야 산맥에 있다. 지금까지 1986년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66)가 세계 최초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이후 24년 동안 14좌를 완등한 19명은 모두 남성 산악인이었다. 우리나라 산악인으로는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등 3명이 포함돼 있다.
오은선의 강력한 경쟁자인 에두르네 파사반(스페인·Pasaban·37)은 5월 17일 오후 11시30분쯤 마지막 시샤팡마 정상을 오르며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성공했다. 스페인 바스크족 출신인 파사반은 2001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9년만에 14좌를 완등했다.
파사반은 오은선이 2009년에 오른 칸첸중가 등정에 의문을 제기하며 오은선의 하말라야 14좌 완등에 국내외에서 의혹이 제기되었다. 대한산악연맹은 8월 26일 오은선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부정하는 입장을 밝혔으며, 네팔 히말라야 탐험에 대해 기록하는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는 9월3일 현재 이 문제를 '논란중'으로 기록하고 있다.
▶2009년 타쉬켄트에서 견제민 주우즈
베키스탄 대한민국대사와 atipov 우즈베
키스탄 정보통신담당 부총리 간에 서명된
"대한민국 정부와 우즈베 키스탄 공화국
정부 간 과학기술문헌 전자도서관 시스템 및
도서네트워크 구축을 위한사업 시행에 관한 약정"
▶2008년 대한민국 서울 성화봉송 행사 도중 중 국인폭력시위 사건이 발생.
▶2008년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수도 카불에서 열 린공식 행사에서
무장세력 탈레반의 공격을받아 피신.
▶2008년 박미석 청와대 사회정책수석
비서관, 부동산 투기 및 서류조작 의흑 으로
이명박 대통령 에게 사의 표명.
▶2007년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옛
소비에 트 연방군 병사를 새긴 동상을 이전
하는 문제로 경찰과 시위대가 층돌.
▶2006년 밥퍼 300만 그릇,
무료급식 "빛나는 기록"
▶2005년 마널라 한국 아카데미,
예장 통합 선교부 인수 이양 계약서 작성
▶2004년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 15년 만에 유럽 방문
▶2004년민주당 당직자 일괄사표, 사무처 해단식
▶2004년국가보훈처,
이애라 선생 2004년 5월 독립운동가에 선정
▶2004년제5회 광주인권상에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 선정
▶ 2004년 한국 로봇 ‘롭해즈’, 세계로봇경진대회서 1위 입상
2004년 4월 27일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로봇이 세계 로봇경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강성철 지능로봇연구센터 박사팀이 제작한 위험작업 로봇인 ‘롭해즈(ROBHAZ)’가 이날 미국 뉴올리언스대학에서 열린 세계 로봇경진대회 구조로봇 부문에서 우승한 것이다.
롭해즈는 지형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두 개의 트랙을 로봇 몸체 양쪽에 설치, 계단이나 울퉁불퉁한 길에서도 최대 시속 5km로 이동할 수 있어 폭발물 탐지와 화재 현장에서의 인명 구조 등 위험한 작업을 위해 제작됐다.
세계 로봇경진대회는 97년부터 시작한 권위 있는 대회로 강 박사팀 외에도 구조로봇 부문에만 미국 카네기멜론대, 뉴올리언스대, 독일 브레멘대, 캐나다 마니토바대 등이 참여해 경쟁을 벌였다. 이번 구조로봇 부문은 지진 상황을 연출한 모의현장에서 20분 동안 어느 로봇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얼마나 많은 모의 희생자를 탐지하는가를 측정했다. 경기 결과 강 박사팀은 대회 사상 가장 높은 점수(123점)로 우승했다고 KIST는 밝혔다.
▶2003년 아르헨티나에서 '카를로스메냄'
과 '네 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결한 대통
령 선거 2차 투 표 실시(메냄 24.140/0,
키르치네르가 22.040/0).
▶2002년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확정
▶2002년수원 영통동 여성 연쇄살인사건 발생
▶2002년부산 동의대사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
2002년 4월 27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1989년 부산 동의대 도서관에서 농성 진압 도중 화재로 경찰관 7명이 사망한 동의대 사건 관련자 46명에 대해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키로 결정했다. 찬성 5명, 반대 3명, 기권 1명의 다수결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경찰과 유족들은 공권력에 폭력으로 대항해 인명을 살상한 것도 민주화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5·3 동의대 사건`은 1989년 3월 입시부정을 폭로한 한 교수의 양심선언과 44일간의 총장실 점거투쟁 과정에서 일어났다. 학내 분규가 계속되는 와중인 그해 5월 1일 노동절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인근 가야3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공포탄 20여발을 발사하며 일부 학생들을 연행했고, 학생들도 다음날인 2일 가두 항의집회에서 전경 5명을 납치했다.
이에 경찰은 3일 새벽 구출작전을 벌였으나 농성 학생 100여명은 도서관 복도에 시너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화재가 나 경찰관 7명이 숨지고 11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당시 검찰은 학생 70여명을 살인죄 등으로 기소했으나 법원은 살인죄 대신 방화치사상죄 등을 인정해 이들에게 최고 무기징역까지 선고했다.
▶2002년 핸들러 사망(바비 인형 창안).
▶2001 년 파키스탄, 민주화 운동가 등 1 천 500 명연행
▶2001년페루, 미주 대륙 최초의 고대문명 새로 발견
남미의 페루에 잉카 문명을 앞서는 고도의 문명사회가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의 과학 전문지 사이언스 2001년 4월 27일자에 따르면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북쪽으로 약 200㎞ 떨어진 카랄 유적의 연대를 정밀 측정한 결과 약 4000년 전인 B.C 26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판명됐다.
당초 고고학자들은 카랄 유적의 연대를 B.C 1000년으로 추정했었다. 미국·페루 공동연구팀은 카랄 유적에서 발견된 식물 샘플에 대해 탄소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을 해 이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이같은 결과는 아메리카 대륙에 고도로 집단화된 도시문명이 형성된 시점을 800년 이상 앞당긴 것으로, 이에 따르면 페루의 카랄이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도시문명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성립하는 것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하고 메소포타미아, 중국, 인도에서 초기문명이 시작되고 있을 당시, 남미의 페루에서는 대규모 석조물과 피라미드 주거지가 건설되는 등 문명이 융성하고 있었다. 연구팀은 또 당시 카랄에 이미 농어업 및 수공업 문화가 있었으며, 중앙집권적 정부나 조직이 주민들을 동원해 60피트 높이의 피라미드를 6개나 건설했다고 말했다.
▶2000년삼성자동차, 르노자동차에 매각
삼성자동차가 프랑스 르노사에 매각됐다. 삼성자동차 채권단과 르노사는 2000년 4월 27일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에서 삼성자동차 자산 양수도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삼성자동차는 사실상 삼성그룹의 손을 떠났다. 삼성그룹의 집요하고 조직적인 로비와 부산정세에 굴복한 김영삼 정권의 설립허가로 1995년 4월 기공된 삼성자동차는 공장이 가동되면서 적자의 늪에 빠져들었다.
홍종만 삼성차 법정관리인, 한빛은행 김진만
은행장, 조지 듀앙 르노 수석부사장(왼쪽부터)이
서명 후 손을 맞잡고 있다.
삼성자동차 55만평 공장부지를 조성하는 데 뿌려진 돈은 6000억원. 타사의 부지비용에 비하면 4배나 비싼 비용이었다. 르노-채권단-삼성이 합작 설립한 삼성-르노자동차(가칭)는 자본금 3600억원에 자산이 1조원 이상이며 르노 70.1%, 삼성 19.9%, 채권단 10%의 지분을 갖기로 했다. 대안 부재로 매각이 불가피했다는 점에서는 관계자 모두가 인정했지만, 건설비용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팔려 국부 유출과 헐값 시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2000년헌법재판소, 과외교육금지 위헌 결정
2000년 4월 27일 `과외교육 금지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졌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이날 서울지법이 과외를 금지한 학원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3조와 제22조 1항 1호에 대해 위헌제청한 사건 등 2건에 대해 "자녀 교육권 등 국민의 기본권을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침해한 것"이라며 재판관 9명중 6명의 찬성으로 위헌 결정했다.
이에따라 이 법률조항은 이날짜로 효력을 상실했으며 1980년 7월 30일 이후 금지돼 온 과외교육이 사실상 전면 허용됐다. 헌재의 결정에 대해 학부모, 교사, 학교당국, 교육관련단체, 법조계 등은 `학교밖 교육영역`에 관한 한 부모의 교육권을 우선시한 법리성은 이해하지만 빗장풀린 사교육 팽창과 공교육의 붕괴에 대해 우려하는 반응을 보였다.
▶1993년이만섭 국회의장 피선
▶1993년소설가 황석영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1989년 밀입북한 뒤 해외에 체류하다 귀국한 소설가 황석영씨가 1993년 4월 27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1962년 월간 ‘사상계’에 ‘입석부근’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탑’과 희곡 ‘환영의 돛’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민중의 어두운 현실을 그린 사실주의 소설 ‘객지’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북한을 밀입북해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된 작가 황석영씨가 1993년 7월 12일
수의 차림으로 재판을 받으러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198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운영위원·민중문화운동연합 대표를 거쳐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89년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청으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남측 대변인 자격으로 평양에 들어가 여러차례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이어서 독일에서 체류하다가 1993년 귀국하여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작품으로는 ‘한씨연대기(1972)’ ‘삼포가는 길(1973)’ ‘장길산(1984)’ ‘무기의 그늘(1989)’ 등이 있다. 1994년 국제 펜클럽의 ‘박해받는 작가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2년한국-타지키스탄, 국교 수립
▶1989년분당-일산 신도시 건설 발표
▶1983년소련, 우주무기 금지협정 제의
▶1981년한일은행 민영화 발표
▶1978년아프가니스탄에 군부쿠데타,
칸 대통령 피살
▶1977년일본 중의원,
한일대륙붕협정 비준안 통과
▶1972년아프리카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사망
▶1972년미국 우주선 아폴로 16호 지구 귀환
▶1971년제7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당선
1971년 4월 27일 실시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6백34만2천8백28표를 획득,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얻은 5백39만5천9백표보다 94만6천9백28표를 앞질러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초 7명의 후보가 난립했으나 통사당의 김철 후보와 민중당 성보경 후보가 중도 사퇴, 5명이 경쟁했다.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사실상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의 각축전이었다. 선거때 박 후보는 공화당이 주도한 경제성장의 비전을 제시했고, 김 후보는 박대통령의 영구집권 기도를 규탄하고 향토예비군제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해 상당한 반응을 얻었으나 조직의 열세로 득표로 연결되지 못했다. 또 5월 25일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총 2백4석 중 민주공화당이 전국구 의원 27명을 포함해 1백13명, 신민당은 전국구 의원 24명을 포함 89명이 당선돼 양당체제로 돌입했다.
▶1969년김대만 부산시장 수뢰혐의로 구속
▶1968년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동상 제막
충무공탄신 4백23주년을 하루 앞둔 1968년 4월 27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제막됐다. ‘애국선열 조상(彫像)건립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각계인사가 참석, 선열의 열을 되새겼다.
충무공 탄신 4백23주년을 하루 앞둔
1968년 4월 26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동상이 세워지고 있다.
구리로 만든 충무공 동상은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고(故) 김세중씨가 13개월에 걸쳐 만든 작품으로, 좌대(座臺) 높이 12m, 동상 높이가 9m에 달했다. 30평 화강석 좌대에 세워진 동상의 전면양쪽에는 청동주물의 독전고가, 좌대 하충부분에는 청동주물의 길이 3m 되는 거북선이 놓였고 좌대뒷면에는 이은상씨의 명문이 새겨졌다.
당초 세종로에 세워지는 동상이니 만큼 세종대왕을 세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제가 훼손한 조선왕조의 축(=정기)을 되살리는 데는 이순신 장군이 최고라는 의견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져 충무공 동상을 세우게 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36년간 우리들은 각 시대마다 다른 표현과 방법으로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 주변에 모여 이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며 입을 모아 민주주의를 갈구해왔다.
2004년 2월, 서울시의 광화문~세종로 네거리의 광장 조성 계획이 발표되면서 한 때 이순신 장군 동상이 시청 앞 광장으로 옮겨질 뻔 했으나 점증하는 시민과 전문가의 반대 여론과 서울의 대표적인 기념물이라는 점 등이 고려돼 당초 시의 계획이 사실상 백지화됐다. 오늘도 충무공 이순신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
첫 동상 제작 95세 이진수 옹 “전쟁 끝나길 바라며 충무공 동상 만들어”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20&aid=0003212981
▶1966년페루여객기 안데스산맥에 추락. 49명 사망
▶1966년소련 타시겐트 지방 대지진
▶1962년혁명재판소, 통사당-통일민전사건 선고
▶1961년시에라리온,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0년토고,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0년허정 외무장관, 대통령직 대행
▶1959년유소기, 중국 주석에 선출
▶1957년중국, 정풍운동에 관한 지침 공포
마오쩌둥의 정풍운동
중국 현대사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정풍(整風)운동’만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사건도 드물리라.
“무엇이든 말하라. 말하는 자에게는 허물이 없고, 듣는 자는 그것을 교훈으로 삼는다.”
마오 주석이 1957년 4월 27일 발표한 ‘정풍운동에 관한 지시’의 한 대목이다. 국민에게 당 운영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취지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공산당 정부가 어느 정도 비판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꼴이 됐다. 공산당 독재와 마오 신격화에 대한 비난이 가열되면서 지도부는 충격에 휩싸였다.
공산당은 곧바로 정풍운동의 방향을 바꿨다. ‘사상자유화 운동’으로 시작된 이 운동을 2, 3개월 만에 ‘반우파(反右派) 운동’으로 대치해버린 것. 정풍운동 초기 당 지도부의 장려 속에 기탄없이 불만과 비판을 털어놓았던 이들이 갑자기 숙청 대상으로 전락했다. 정풍운동의 여파로 투옥되거나 직위가 박탈된 중국인은 50여만 명에 이르렀다.
최근 공개된 공산당 내부문건을 보면, 당 지도부가 반동분자를 추려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정풍운동을 시작했다는 설이 제기됨 직하다. 당시 마오 주석은 측근에게 “우리는 뱀들을 소굴에서 나오도록 유인 중이야. 그러고 나서 그놈들을 모두 제거해버리는 거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중국에서는 최고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정도만 다를 뿐 한 차례씩 정풍운동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비판과 이견을 허용할 경우 혁명으로 변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공산당 정부로 하여금 합리적인 논쟁보다는 외형적인 정치운동을 일으켜 이를 폭력적으로 통제하는 통치방식에 끊임없이 매달리게 했다.
“잘못된 이론과 정치적 여론을 처벌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조그만 징후라도 강력하게 제압해 초기에 백지화시켜야 한다. 적은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음험한 전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9월 중국 공산당 제16기 전국대표대회 4차 중앙위원회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했던 비공개 연설문 일부다. 약 반 세기 전 무자비하게 우파 숙청에 나섰던 마오 주석의 연설을 듣는 듯하다.
아무리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다 해도 중국이 세계는 물론 아시아의 리더도 되기 힘들게 만드는 멍에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공산당 정부의 기본자세다.
▶1949년농지개혁법 국회 본회의 통과
▶1945년이탈리아 무솔리니 애인과 함께 처형
서쪽과 동쪽에서 각각 진격해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이 독일 엘베강 중류 토르가우 부근에서 감격적인 악수를 교환함으로써 2차대전도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1945년 4월 25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가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밀라노를 탈출한다.
무솔리니(가운데)와 그의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는 처형 후 밀라노 로레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일반에 공개됐다.
목적지는 스위스. 그러나 둘은 스위스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탈출 이틀 만에 이탈리아 북부 코모 호수 근처에서 파르티잔에 체포돼 좀더 살아보려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살려만 주면 제국을 주겠다”며 목숨을 구걸했으나 용서받기에는 그가 인류에 끼친 악행이 너무 컸다.
27일 약식재판을 거쳐 총살형에 처해졌고 시체는 28일 밀라노의 로레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군중 앞에 공개됐다. 이틀 뒤에는 히틀러도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을 선택한다. 무솔리니·히틀러에 앞서 4월 12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도 세상을 떠 2차대전의 주역 네 사람 중 처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2차대전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모두 세상을 떠났다.
▶1935년손기정, 서울에서 개최된 마라톤에서 2시간25분14초로 세계신기록 수립
▶1908년제4회 런던올림픽 개막
▶1906년영국-청 티베트조약 조인
1882년 미국 시인, 철학자 에머슨 사망
1822년 미국 제18대 대통령(1869-1877 재임) 율리시스 그랜트 출생
1794년 청나일강 원류에 도달한 스코틀랜드 탐험가 짐 브루스 사망
1791년 미국 무선부호(전신기) 발명가 모스 출생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 필리핀 막탄섬에서 전사
포르투갈 출신의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1521년 4월 27일 필리핀 막탄섬에서 원주민과 전투중 전사했다. 대탐험을 시작한 지 5개월 만이었다.
마젤란이 역사상 최초의 세계일주를 위해 스페인의 세빌랴를 출항한 것은 1520년 11월 28일이었다. 탐험 앤티워프 출신 상인의 경제적 지원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의 허락을 받고 시작한 탐험에는 다섯척의 선박과 270명의 승무원이 동원됐다. 이듬해 11월 28일 남미 남단과 푸에고 제도 사이를 통과해 태평양에 이른 마젤란은 수개월동안 서진을 계속해 1921년 3월경에 괌섬과 필리핀을 발견했다. 필리핀 세부에서는 군주와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스페인 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마젤란은 이날 섣불리 막탄섬을 공격하다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했다. 나머지 선원들이 세빌랴에 도착한 것은 1522년 9월 8일이었고 생존자는 18명이었다. 비록 마젤란 자신은 세계일주를 하지 못했지만, 그는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의 지휘자였다.
탐험가 마젤란
1519.9 다섯 척의 함선을 이끌고 신항로 개척 항해를 떠나다
어느 역사학자의 말마따나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유럽의 식탁 위 풍경은 그야말로 단조로운 흑백이었다. 음식의 맛이라곤 싱겁거나 짜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던 유럽의 식탁이 지금처럼 다채로운 색깔과 그윽한 향기를 지닌 음식들로 가득 차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아시아 산 향신료의 도입이란 일대 사건이었다.
고국을 등지고 나선 일생일대의 신항로 개척 원정
향신료는 원산지인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아랍 상인들을 거쳐 유럽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5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지중해 동부를 장악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 간의 육로무역이 단절되자, 그 대안으로 대서양을 이용한 해상무역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동남아시아의 향료 제도까지 가는 뱃길을 개척하기 위해 바다로 나섰다. 실패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지만, 성공하면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해상무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선수를 친 쪽은 포르투갈이었다.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를 적극 지원한 엔리케 왕자(1394-1460)의 선구적인 노력의 결과로 1488년에는 바르톨로메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도착했고, 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에스파냐에서는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도착함으로써 사실상 신대륙의 발견자가 되었다. 그리고 1519-1522년에 에스파냐에서는 사상 최초로 세계일주 원정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니, 그 중심에는 바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있었다.
마젤란 원정대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빅토리아 호
당시의 모험가들이 종종 그러했듯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똑같은 이름이 다르게 불리는 일이 허다했다. 가령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고국인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원정 후원국인 에스파냐에서는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불렸다. 마찬가지로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영어식 철자며, 그의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Fernão de Magalhães), 원정 후원국인 에스파냐에서는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Fernando de Magellanes)로 불렸다. 하지만 보통은 영어식 철자가 유명하므로 이 글에서도 ‘페르디난드 마젤란’으로 통일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1480년에 포르투갈에서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 왕궁에 들어가 시동으로 일했다. 1495년에는 인도 원정에 참가했고 8년 동안 동남아시아 여러 교역소에서 해상무역 경험을 쌓았다. 1513년에는 모로코에서 전투 도중에 무릎을 다쳤고, 그로 인해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후 그는 향료 제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겠다는 열망에 불타서 포르투갈 왕실에 세 번이나 원정 후원을 요청했지만 연이어 거절당했다. 고민 끝에 마젤란은 다른 나라를 찾아가 방법을 찾아보기로 작정했다.
마젤란이 고국인 포르투갈을 버리고 에스파냐와 협력해 원정을 떠난 것은 마치 변절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모험을 꿈꾸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외국 정부의 후원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가령 이탈리아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에스파냐 정부의 후원을 받았고, 이탈리아인 아메리고 베스푸치 역시 서로 앙숙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양쪽 모두에서 후원을 받았다. 마젤란의 원정대만 해도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프랑스인, 영국인 등 여러 국적의 선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517년에 에스파냐의 세비야에 도착한 마젤란은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접근했다. 당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서경 46도 30분을 기준으로 각각 동쪽과 서쪽에 대한 영유권을 소유하기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에스파냐로서는 포르투갈의 영역인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기존 항로 대신, 자신들의 영역인 남아메리카 하단을 우회하는 신항로를 통해 향료 제도로 가자는 마젤란의 제안이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었다. 과연 그런 항로가 있는지 여부는 물론이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목적지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상 반란을 제압하고 마젤란 해협과 태평양을 지나 필리핀에 도착하다
1518년에 카를로스 1세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젤란은 곧바로 원정 준비에 착수했다. 트리니다드, 산안토니오, 콘셉시온, 빅토리아,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함선 다섯 척으로 이루어진 ‘몰루카 함대’(목적지인 몰루카 제도에서 따온 이름)에는 모두 260명의 선원이 승선했다. 마젤란이 에스파냐의 후원을 받아 원정에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포르투갈 측은 뒤늦게야 회유와 협박을 동원해서 마젤란에게 원정 포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이런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격분한 포르투갈 정부는 마젤란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그를 붙잡기 위해 훗날 대서양이며 향료 제도로 추적대를 급파했다.
1년여의 준비 과정을 거친 원정대는 1519년 8월 10일에 세비야를 떠났다. 일주일 뒤에 에스파냐 남단의 항구도시 산 루카르 드 바라메라에 도착한 일행은 대서양에 접어들기 직전 그곳에서 마무리 준비를 했다. 이때 마젤란은 24일자로 미리 유서를 써서 남겼다. 1519년 9월 20일, 마젤란의 원정대는 드디어 역사적인 첫 걸음을 내디뎠다. 대서양을 횡단하던 도중에 함대는 두 달 가까이 폭풍에 시달리며 악전고투했다. 하지만 마젤란에게는 자연의 위력보다도 더 심각하고 더 고질적인 고민거리가 있었다. 바로 부하들의 반항이었다.
마젤란의 선원 가운데에는 에스파냐인이 절대적으로 많았으며, 이들은 마젤란을 비롯한 포르투갈인 동료들에게 은연중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젤란은 신항로를 개척한다는 임무를 줄곧 비밀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의혹을 샀다. 네 척의 함선을 지휘하는 선장들도 마젤란에게 불만을 품었다. 특히 왕의 측근으로 마젤란을 감시하기 위해 원정에 동행한 후안 데 카르타헤나는 노골적으로 총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했다. 분노한 마젤란은 카르타헤나를 체포했다가 다른 선장들의 만류로 풀어주었는데, 이는 머지않아 더 큰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출발 4개월 만인 12월 13일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한 원정대는 본격적으로 남쪽의 우회 항로를 찾아 다닌다. 그러나 아무 성과 없이 시간만 흐르자 선원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다. 1520년 3월 31일, 원정대는 남반구의 겨울을 나기 위해 훗날 푸에르토 산 훌리안이란 이름이 붙여진 자연항에 닻을 내린다. 바로 이곳에서 선원들의 불만은 결국 반란으로 폭발했다. 4월 2일, 다섯 척의 함선 가운데 세 척이 반란자의 손에 들어갔다. 마젤란은 협상을 도모하는 척 하면서 부하를 시켜 반란 주모자를 제거하고 함선 한 척을 탈환한 다음, 세 척의 배로 항구를 봉쇄하고 나머지 두 척의 항복을 받아냈다.
마젤란 해협 지도
재빠르고 단호한 조치로 반란을 신속히 제압한 마젤란은 카르타헤나를 비롯한 주동자를 가혹하게 처벌했고, 사형 선고를 받은 40명의 선원은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면해 주었다. 10월 21일, 원정대는 남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무려 10개월 만에 훗날 마젤란 해협으로 알려지게 된 곳의 입구를 발견한다. 한 달 만인 11월 28일, 함대는 해협을 무사히 통과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낯선 바다에 들어섰다. 마젤란은 이전까지의 바다와는 달리 훨씬 넓고 깊고 잔잔한 이곳에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함선의 숫자는 세 척으로 줄어 있었다. 산티아고 호는 해협에 들어서기 직전에 그만 좌초했으며, 산안토니오 호는 명령에 불복하고 단독으로 귀향길에 올랐던 것이다. 산안토니오 호의 이탈은 원정대에 큰 타격을 가했다. 한편으로는 그 함선에 식량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귀환한 선원들이 원정이 실패했다고 단언하며 모든 책임을 마젤란에게 덮어씌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에스파냐에 남아 있던 마젤란의 가족은 당국의 탄압을 받았으며, 이런 오해는 마젤란의 사후까지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원정대는 해협을 통과한 지 4개월 만인 1521년 3월 16일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훗날의 필리핀 제도에 도착한다. 마젤란은 본격적으로 원주민과 접촉해 식량과 정보를 얻는 한편,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마젤란은 원주민 간의 분쟁에 불필요하게 끼어드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한다. 원정대의 막강한 무력을 과신한 마젤란은 우호 관계를 맺은 부족을 거들어 다른 부족을 정벌하러 나선다. 그러나 막탄 섬으로 쳐들어간 마젤란과 부하들은 원주민의 거센 반격으로 인해 패배했고, 마젤란은 그곳 해안에서 원주민의 칼에 난자 당해 죽고 말았다. 1521년 4월 27일의 일이었다.
위대한 탐험가인가, 아니면 무자비한 침략자인가?
전기작가 로런스 버그런은 마젤란의 허망한 죽음이 지나치게 무력에 의지해 자만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제까지의 항해에서 마젤란은 여러 번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폭풍에서 괴혈병에 이르는 자연 재난은 물론 선상 반란이라는 위기도 극복했다. 결국 그가 극복하지 못한 가장 큰 장애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총지휘관을 잃은 함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향료 제도를 향한 여정은 계속되었지만 연이은 원주민과의 충돌로 상당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콘셉시온 호도 완전 파손되었다. 1521년 11월 8일, 두 척의 함선에 나눠 탄 원정대는 드디어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다. 에스파냐를 떠난 지 무려 27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원정대는 귀한 향신료를 헐값에 잔뜩 사들여 귀향길에 올랐다. 트리니다드 호는 중도에 포르투갈 함대에 나포되었지만, 빅토리아 호는 1522년 9월 6일, 천신만고 끝에 고국에 도착했다. 함선 5척과 선원 260명으로 이루어졌던 원정대의 규모는 3년여 만에 함선 1척과 선원 18명으로 줄어들었다.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했다는 명예로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나 배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배에는 무엇보다도 값진 보물이 들어 있었으니, 바로 유럽에서도 최고로 치는 향신료 정향이었다. 그 한 척에 실려 있는 정향만 팔아도 원정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건지고 심지어 막대한 이익을 남겼을 정도였다.
마젤란의 초상(왼쪽)과 라푸라푸의 동상(오른쪽)은 이 탐험가를 바라보는 양극단의 시선을 상징한다
하지만 원정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마젤란에 관한 평가는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반역자 취급을 받았고, 후원을 받은 에스파냐에서도 자칫 원정을 수포로 만들어버릴 뻔했던 위험인물 취급을 받았다. 원정대의 일원이었으며 마젤란과도 절친했던 베네치아 출신의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비교적 공정한 항해 일지가 간행되었지만 그런 여론을 바꾸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중에 마젤란의 항로를 따라간 후속 원정대가 연이어 큰 손실을 입고 돌아오자, 그제야 사람들은 갖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비교적 적은 손실만으로 목적지에 도달한 마젤란의 비범한 능력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마젤란은 워낙 꼼꼼한 성격이어서 배에 싣는 물품을 일일이 확인하고, 종종 말단 선원들의 일까지 직접 챙겨주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원정 내내 부하들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지 못했고, 항상 반란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마젤란의 성격에 대해서는 성미가 급하고 분별이 없다는 평가와 함께, 지나치게 고지식한 것이 탈이라는 평가도 있다. 나아가 그는 워낙 왜소하고 볼품없는 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종종 남에게 얕잡아 보이곤 했다. 포르투갈에 살다가 중년이 되어서야 에스파냐로 건너왔기 때문에 평생 에스파냐어에 능통치 못했다는 것 역시 원정대 지휘관으로서는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마젤란의 세계일주’라는 표현은 적절치가 않다. 왜냐하면 마젤란은 애초에 세계일주를 의도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도중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원정대의 세계일주는 그 이전까지 서양인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트렸다.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증명되었고, 여러 대륙과 항로에 관한 여러 가지 잘못된 지식들도 수정되었다. 나아가 에스파냐는 마젤란의 위업을 계기로 포르투갈을 앞서는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로런스 버그린은 세계일주보다도 훗날 마젤란 해협으로 알려진 곳의 발견 및 통과가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단언한다. 1914년에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 해협은 무척이나 중요한 통행로로 각광을 받았다.
유럽에서는 여전히 위대한 탐험가로 칭송되는 마젤란이지만, 막상 그가 최후를 맞이한 필리핀에서는 침략자에 살인자로 기억된다. 그를 죽인 원주민 추장 라푸라푸는 시신을 반환해 달라는 원정대의 요청을 거절했고, 그리하여 마젤란은 무덤은커녕 변변한 유품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가 사망한 막탄 섬에는 오늘날 마젤란의 동상 대신 라푸라푸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비 한쪽에는 “포르투갈의 위대한 탐험가 마젤란이 살해된 곳”이란 설명이, 또 한쪽에는 “위대한 족장 라푸라푸가 마젤란을 죽이고 그의 군대를 쫓아냈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마젤란에 대한 극단적인 시각차를 이것보다 더 잘 보여주는 증거가 또 있을까.
BC 399년 소크라테스 독배 마시고 사망
소크라테스는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까지도 토론을 벌였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유화 '소크라테스의 죽음.'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 4월 27일 독배를 마시고 숨을 거뒀다. 70세였다. 죄명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았다는 불경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혐의였다.
소크라테스는 첫 배심에서 500명의 아테네 배심원들 가운데 280명이 그의 유죄를 인정해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아테네 재판 방식에는 유죄가 인정된 사람에게 항변의 기회를 준 후 다시 형벌을 정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제도가 소크라테스에게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 소크라테스는 항변의 기회가 주어지자 "자신은 죄가 없다", "배심원들이 자신의 공을 인정하고 광장에서 향연을 베풀어줘야 한다"며 공격적인 항변을 한 것이다. 결국 유죄라고 인정한 280명에 다시 80명이 보태진 360명이 사형 지지자로 돌아섰다. 한달 뒤인 이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국외로 도망치라는 친구와 제자들의 설득을 거절한 채 독배를 마셨다.
소크라테스의 비극은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요인들의 우연적인 결합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아테네는 30년동안 지속되다가 기원전 404년에야 끝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게 패배해 사회 전체가 어수선했으며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간 두 차례의 전염병과 시칠리아 침공 실패 등으로 사회 분위기는 극도로 암울했다. 더구나 아테네 시민들이 극도로 불만스러워 했던 `30인 참주제`에 참여한 참주 가운데 악덕하기로 소문난 몇몇 사람과 적국인 스파르타에 전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전쟁과 폭정에 대한 쓰라린 기억이 들 때마다 소크라테스를 원망했다. 이때 우연히 찾아온 그에 대한 고발은 희생양를 찾고 있던 사회 분위기와 정확히 맞아 떨어졌고 결국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셔야 했다.
https://youtu.be/bot4J-dAuwM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