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입니다 / 지설완
오랜만에 울산 동생이 왔다. 동생은 올 때마다 자매들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한다. 이번에는 ‘감사의 수첩’이다. 하루에 다섯 가지씩 감사할 일을 기록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던가. 선물을 받으니 준 이의 마음이 예쁘고 고맙기는 하다. 매일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를 말하면 기쁘고 행복한 일이 일어난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여러 강연에서 듣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에 감사할 일이 뭐가 있나 하는 어깃장을 부리고 싶다.
노력하지 않으면 기분이 깊은 우물 속으로 가라앉는 요즘 가능한 만 보씩 걸으려고 한다. 오늘은 사천 보만 더 걸으면 만 보다. 저녁 식사하기 전 집 앞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나갔다. 공원 한 바퀴 돌아야 이백 보 남짓이다. 공원 둘레를 돌고 돈다. 걷기가 지루할 즈음, 공원 입구 쪽에 장바구니를 가슴에 안고 걸어오는 지인을 만났다.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라인댄스 를 함께 하는 이다. 그는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 운동이 끝나면 같이 집으로 가거나, 가끔은 카페에 들어가 좀 더 대화 하다가(수다를) 집으로 간다.
나를 본 지인은 웬일인지 무척 반색한다. 무거워 보이는 장바구니를 서둘러 받아 들었다. 그녀는 내게 대뜸 “00씨 덕분에 내가 문화생활을 하게 되었잖아요.” 그의 갑작스런 말에 뭔 말인가 순간 어리둥절하면서 궁금했다.
두어 달 전 어느 날, 운동이 끝난 후 삼 층에 있는 도서관을 가려는데 그가 나와 같이 가겠다고 한다. 그녀는 책을 가까이하려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편찮은 친정어머니와 같이 살다가, 어머니가 떠나신 후 이런저런 일도 있고, 건강이 나빠져서 오랫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날 내가 도서관을 간다니까 일 초도 망설임 없이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는 대출증을 만들고 책도 몇 권 대출했다.
그녀가 도서관에 가서 대출증을 만들고 책을 몇 권 빌렸다고 하는 말을 들은 그녀의 친구는 “우리 나이에 책을 뭐하러 읽냐, 눈만 피곤하지. 0투브 영상에 재미있는 것이 널려있는데” 하면서 쓸데없는데 기운을 쏟는다고, 도서관에 가고 책을 읽는다는 그를 말렸다고 한다.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그녀는‘독서를’ 혹은 ‘책을 좋아한다’도 아니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내게는 그 말이 왜 특별하게 들리는지, 아무튼 그는 몇 번이고 ‘책 읽는 거’ 좋아한다고 한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그의 보따리를 공원 벤치에 올려놓고 앉았다. 다시 그녀는 ‘00씨 덕분에’ 문화생활을 하게 되고 도서관도 가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문예대상 공모전 알림 현수막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도 예전 같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출 마감 시간이 몇 시간 남지 않았지만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다섯 시까지만 제출하면 된다는 담당자의 확인을 듣고 부지런히 워드를 쳐서 직접 기관을 방문해서 내야 한다는 제출 조건에 맞추느라 몇 년 방치한 프린터기를 켰는데 다행히 문제없이 원고를 출력해서 마감 시간 내에 제출할 수 있었다, 등의 이야기를 숨차게 하면서 민망하게 또 ‘00씨 덕분이다.’고 한다.
그녀는 입상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담당자에게서 시상식에 참석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입상 또한 나의 공으로 돌리는 말을 하고 또 한다. 밥을 내겠다고 약속 날짜를 정하자고 채근한다. 좋은 일이긴 한데 내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공짜로 뭔가를 받은 것 같은 그것도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받은 얼떨떨한 기분, 로또복권 ‘사 등’에 당첨된 느낌, 아무튼 그랬다. 장바구니를 안고 집으로 향하는 그녀와 헤어져 남은 걸음을 걸으면서 난 누군가에게 ‘덕분입니다’를 얼마나 했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꼬인 맘 같으면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덕담을 할 수 있는 에너지와 여유가 부럽다.
덕분입니다 라고 할 만큼 그런 일들이 있었나 하는 어깃장을 놓는 내가 참 못나고 삭막하다. 감사한 일은 물에 흘려보내고, 아프고 괴로운 일들만 되새김질하면서 ‘뭐가 그리 감사하다고’ 한다.
동생에게서 받은 감사 수첩을 다시 꺼내 본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를 끼적여본다. 어머니께 덕분입니다. 아버지께 덕분입니다. 남편 덕분입니다. 시작하다 보니 가족과 형제, 아는 이들 모르는 이들에게, 사물에도 ‘덕분입니다’를 적고 있다. 심술부리던 맘과 달리 감사하는 대상이 연줄 풀 듯이 떠오른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 생물, 무생물, 우주의 삼라만상 덕분으로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알게 모르게 그들 혹은 그것의 혜택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와 인연이 되는 것들 덕분이다. 올해 마지막 달 십이월에 나는 기도하듯 염불하듯 중얼거린다 ‘덕분입니다’, ‘나의 지금은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지인에게 들은 ‘나의 덕분’이라는 말을 듣고 살짝 설레는 마음에 멀리 까지 왔다. 그런 마음을 낼 수 있는 단초를 준 그의 덕분에 올 한 해를 푸근해지는 마음으로 보낼 수 있구나 한다. “당신 덕분에 나의 불퉁거리는 맘이 좀 펴졌답니다.” 동굴 속으로 가라앉는 마음이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