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 刀劍의 軍事的인 運用
孤竹, 2003년 11월 1일
1) 대외 환경과 군사전략
고려 말엽 국정의 혼란을 틈타서 북으로는 여진족(女眞族)이 침입하였고 남으로는 왜구(倭寇)들이 내륙 깊숙히까지 침범하였다. 함경도 출신의 무장(武將) 이성계(李成桂)는 외적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군부(軍府)와 신진(新進) 사대부(士大夫)의 지지를 받아 1392년 조선을 개국하기에 이른다.
조선 전기에도 왜구의 침입이 종종 있었으나 왜구의 주요 공략 대상은 중국이었고 우리나라를 침입하는 왜구는 국경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1419년 세종의 대마도(對馬島) 정벌도 사실은 명나라의 왜구 정벌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라는 의미가 더 강했다.
반면에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함경도와 평안북도에 들어와 살았던 여진족(女眞族)은 수시로 조선의 국경을 침입하였으며 도성을 함락하고 백성들을 납치해갔다. 세종 17년에는 오량합(吾良哈)이 2천 7백여기의 기병(騎兵)으로 여연성(閭延城)을 포위하였고 세종 25년에는 거을가개자(巨乙加介子) 등이 4백여 기병(騎兵)으로 종성부(鍾城府) 보청평(甫靑平)을 노략질하였다. 이들 여진족은 주로 천여명 내외의 기병(騎兵)으로 구성되었으며 명(明)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얻은 갑주(甲胄)로 무장하였고 환도(環刀)와 창(槍) 등의 단병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었다.
한편, 15세기 초반에는 멀리 초원지대로 쫓겨났던 몽고족이 오이라트의 부장(部長) 에센을 중심으로 다시 세력을 결집하면서 중국을 위협하였다. 이에 명나라 정통제(正統帝)는 정벌군을 동원하여 친정(親征)을 단행하였으나 오히려 1449년 토목(土木)에서 오이라트군과 싸우다가 대패하여 포로로 잡히는 몸이 되었다. 조선에서는 이 오이라트족이 조선까지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몽고군의 침입에 대한 대비를 하게 된다.
조선은 이들 여진족과 몽고족 기병을 상대하기 위하여,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종래의 보기(步騎) 합동전(合同戰)을 바탕으로 하되 신무기인 총통(銃筒)을 적극적으로 운용하고 방패(防牌)를 제작하여 보병을 보호하게 된다. 특히 몽고족의 대규모 기병에 맞서기 위해서 문종 때에는 화전(火箭)과 총통(銃筒)을 장착한 화차(火車)를 개발하고 이를 대규모로 운용할 것을 검토하게 된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가로 101.0cm, 세로 135.5cm, 육군박물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 1538∼1609) 장군이 선조21년(1588) 여진족의 시전부락을 소탕하고, 그 포로들을 심문하는 광경. 북방 여진족에 대해서는 주로 기병에 의한 포위 및 섬멸전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
<문종(文宗) 화차(火車)>, 병기도설 문종(文宗) 화차(火車)는 수레 위에 총통기(銃筒機) 혹은 신기전기(神機箭機)를 얹어서 사격을 하는 한편 수레 자체로 적 기병의 돌격을 방어하도록 고안되었다. |
2) 부대의 편성과 무장 체계
조선 전기에는 문종(文宗)의 《진법(陣法)》에 따른 오위진법(五衛陣法)이 우리나라 진법(陣法)의 기본었다. 오위진법은 전군을 다섯개의 부대로 나누어 운용하면서 사방의 적을 동시에 막고 각 부대간에 서로 지원하도록 하는 탄력적인 진법이었다. 오위진법에서는 보병과 기병을 균형있게 편성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진법을 신속하게 펼칠 수 있었으며 진에 머물러 아군이 후퇴할 것에 대비하는 주통(駐統)과 나아가 싸우는 전통(戰統)이 나뉘어 있어서 전 부대가 한 두 번의 패배에 쉽게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대장군(大將軍)의 아래에는 오위(五衛)가 있으며 각 위(衛)의 위장(衛將) 밑에 오부(五部)가 있고 다시 각 부장(部將) 아래에는 사통(四統)이 있다. 이 사통은 기병 2통과 보병 2통으로 구성된다. 기병(騎兵) 2통(統)은 활을 쏘는 병사가 5분의 3이고 창(槍)을 쓰는 병사가 5분의 2이며 이들이 전투력의 핵심을 이룬다. 보병(步兵) 2통에는 궁(弓), 총(銃), 창(槍), 검(劍), 팽배(彭排)의 다섯 가지 병종을 균등하게 갖추는데 총통(銃筒)과 팽배(彭排)는 반드시 한 통에 5분의 1씩 포함시키며 나머지 궁(弓), 창(槍), 검(劍)은 가감하거나 도끼[斧], 철퇴[椎]로 대체할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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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위방진(一衛方陣), 진법(陣法)> 오위(五衛)중 한 개의 위(衛)로만 구성하는 방진(方陣)이다. 하나의 위(衛) 안에 전부(前部), 후부(後部), 좌부(左部), 우부(右部)가 각각 사방(四方)의 방어를 맡고 중앙에는 중부(中部)가 있으며 위장(衛長)은 예비대인 유군(遊軍)과 함께 중앙에 있다. 각 부는 보주통 (步駐統), 보전통(步戰統), 기전통(騎戰統), 기주통(騎駐統)으로 구성되어있다. |
<보주통(步駐統) 결진(結陣)> 맨 앞에 팽배(彭排)가 서고 그 뒤에 총통(銃筒)이 서며 장창(長槍)과 장검(長劍)이 그 뒤에 선다. 궁수(弓手)는 곡사 무기를 가졌으므로 제일 후방에 서서 사격을 한다. |
부대가 진을 펼치면 진을 방어하는 보주통(步駐統)이 배열(排列)하여 밖을 향해 서는데, 팽배(彭排)는 가장 전열에 줄지어 서고 그 뒤로 총통(銃筒), 창(槍), 검(劍), 궁수(弓手)의 순서로 선다. 보전통(步戰統)과 기병 2통은 운(運)을 지어서 그 뒤에 서며 예비대 성격의 유군(遊軍)은 장수의 뒤에 있는다.
이들 조선 전기 병사들의 무장을 살펴보면, 우선 갑옷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수은갑(水銀甲), 유엽갑(柳葉甲), 쇄자갑(鎖子甲), 경번갑(鏡幡甲), 지갑(紙甲) 등이 사용되었는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철편(鐵片), 혹은 혁편(革片)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든 찰갑(札甲)이었다. 세종조에 여진 정벌에 참여한 병사들의 무장 상태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의 병사가 갑주(甲胄)를 착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주통(步駐統)의 가장 앞열에 서는 팽배(彭排)는 곧 방패수인데 이들은 나무 방패와 환도로 무장하였다. 그 다음 열의 총통수(銃筒手)는 청동으로 주조한 화포에 주로 화살을 넣어 발사하였다. 그 다음 열의 창수(槍手)는 장창과 환도를 지녔으며 창날 길이는 1척 5촌이고 나무자루의 길이는 10척이다. 그 다음 열의 검수(劍手)는 자루가 긴 장검(長劍)으로 무장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협도(挾刀)와 거의 동일한 병기이다. 마지막 줄의 궁수(弓手)는 활과 화살, 그리고 환도로 무장하였으며 보병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력이라고 할 수 있다.
3) 도검의 운용 방법
가) 팽배(彭排)
오위진법(五衛陣法)에서 환도를 주무기로 삼는 병사는 팽배(彭排)이다. 팽배는 다른 말로 방패수(防牌手)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방패와 환도를 들고 보병통(步兵統)의 가장 전열(前列)에 서서 적의 화살을 막고 접근하는 적은 방패와 칼로 상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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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보병 무장 - 오례의(五禮儀)> 오례의(五禮儀)의 그림으로 재구성해 본 조선 초기의 팽배수 모습이다. |
<원방패(圓防牌) - 복원품>, 전쟁기념관 쇠 테두리도 없고 표면이 평평하며 청동 거울도 달려있지 않는 등 복원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
이들이 사용한 방패는 태종(太宗) 7년에 처음 만들어졌는데 소나무 널빤지로 둥글거나[圓防牌] 모나게[長防牌] 만들고 표면에는 가죽을 씌웠으며 후면은 천으로 덮었다. 방패의 테두리에는 철로 띠를 둘러 보강하였으며 방패의 표면에는 각 오위(五衛) 별로 색을 달리하여 나두(螺頭)를 그리고 그 가운데에 동경(銅鏡)을 장치하여 번쩍거리도록 만들었다. 태종때에 방패의 두께를 7푼으로 하였다는 기록과 《국조오례의》에 나오는 방패 규격을 종합해보면 이들이 사용한 방패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 장방패(長防牌) : 가로 44cm 세로 112cm 두께 1.4cm, 무게 3.24kg - 원방패(圓防牌) : 직경 60cm 두께 1.4cm, 무게 2.06kg |
* 주)《국조오례의》의 척도는 1척을 20cm로 환산하였다. 소나무의 비중은 0.47로 계산하였으며 손잡이와 가죽등 기타 재료의 무게는 200g으로 추정하였다.
팽배수는 왼손에 방패를 들고 오른손으로 환도를 잡아 휘둘렀기 때문에 검술은 지극히 단순한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공격에는 자법(刺法)과 격법(擊法)이 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방패 밖으로 자신의 몸이 드러나는 격법(擊法) 보다는 자법(刺法)이 더 선호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찌르는 공격에 유리한 곧고 짧은[直短] 칼을 선호하였다. 문종 때에 항식(恒式)으로 정해진 보병용 환도의 규격은 날 길이가 1척 7촌 3푼(分), 너비가 7푼이며 칼자루는 2장, 즉 두 손바닥 넓이였다. 칼자루의 길이가 20cm 정도로 겨우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길이였다는 것은 이 칼이 주로 한 손으로 사용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두 손으로도 사용될 수 있도록 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단병 접전에서 팽배수는 상당히 강력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정도전은 도순의 장점[刀楯之利]이라고 하여, 높은 언덕과 좁은 길에 장애물이 많이 있으면 이것은 도순(刀楯)을 사용하는 곳으로 궁노(弓弩) 2명이 도순(刀楯) 1명을 당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한 태종 때에 팽배수(彭排手)와 창수(槍手)들에게 서로 목봉(木棒)을 들고 교전하도록 하였는데 그 다음날 창수(槍手) 두 사람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나) 장검(長劍)
장검(長劍)은 조선 후기의 협도(挾刀) 및 일본의 나기나타(薙刀)와 비슷한 외날의 장병(長柄) 도검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고려에는 칼자루가 긴 대도(大刀)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의 장검(長劍)은 고려 후기에 원(元)나라에서 도입된 장도(長刀)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나라의 장도(長刀)는 《원사(元史)》에 [長刀, 長丈有奇, 闊上窄下, 單刃]이라 하여 1 장 길이의 외날 장병기다.
고려 후기부터 사용되어 조선 시대로 이어진 장검(長劍)은 조선 후기의 협도와 그 기능 및 형태는 거의 동일하며 다만 다른 점이라면 코등이가 없고 칼등에 소꼬리 장식[毦]이 없으며 길이가 좀 더 짧다는 정도이다. 장검의 날 길이는 2척 5촌이고 자루의 길이가 5척 9촌이다. 장검의 길이나 대오상의 위치로 볼 때 장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공격 가능 거리가 멀고 관통력도 강력하지만 창날 안 쪽으로 들어오는 적에게는 취약한 장창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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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장검(長劍),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아래> 협도(挾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
<무인석(武人石), 호암미술관> 장검(長劍), 혹은 협도(挾刀)를 들고있는 것으로 표현된 보기 드문 무인석이다. |
조선 전기에 환도의 길이가 짧았던 이유중의 하나도 바로 이 장검(長劍)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의 병력이 밀집 대형을 이루어 전투를 수행하는 경우에는 큰 칼을 휘두를 만한 공간을 확보 할 수 없지만 자루가 긴 장검은 아군(我軍)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도 먼 거리의 적을 타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검이 긴 칼 대신 널리 사용된 것이다.
장검(長劍)의 구체적인 운용 방법에 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칼날이 좁고 가볍기 때문에 월도(月刀)와 같이 칼날의 무게로 내리 찍는 공격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찌르기와 스쳐 베기 공격에 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의 협도보(挾刀譜)를 보면 격법(擊法) 보다는 자법(刺法)이 훨씬 더 많은데 이는 장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 마병용(馬兵用) 환도(環刀)
조선 전기의 마병(馬兵)은 장창(長槍)을 사용하는 기창(騎槍)과 활을 사용하는 기사(騎射)로 구성되는데 이들 마병의 숫자는 전체 부대의 50%에 달하며 조선 전기 전투력의 핵심을 이룬다. 이들이 사용한 환도(環刀)의 규격은 문종(文宗) 때에 “길이를 1척(尺) 6촌(寸), 너비를 7푼(分)으로 하고 자루[柄]의 길이는 한 뼘 세 손가락[一掌三指]”으로 하도록 정해졌다. 이를 영조척(營造尺)으로 환산해보면 날 길이가 약 49cm 이고 칼자루의 길이는 16cm 정도로 총 길이가 65cm에 불과하다. 이 정도라면 말 위에서 한 손으로 휘두르는데 거의 부담이 없는 무게였을 것이다.
마병(馬兵)의 환도(環刀)는 주무기를 잃게 되거나 혹은 적이 급하게 닥쳐왔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보조적인 무기였을 뿐이며 전술적인 의미를 갖는 병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대외 환경과 군사전략
조선은 1592년 왜군의 침략을 맞아 팔도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비극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임진왜란 참패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장기인 궁시(弓矢)가 왜군의 조총(鳥銃)에 의하여 무력화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본에 조총(鳥銃)이 전래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은 성능이 우수한 합성궁(合成弓)과 편전(片箭)이라는 독창적인 궁술을 보유하였기 때문에 때문에 왜구(倭寇)의 침략을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다. 왜국이 자랑하던 일본도(日本刀)는 조선인들에게 그리 낯선 무기가 아니었으며 이미 고려 시대부터 교역과 왜구의 침입을 통하여 일본도의 위력이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왜구를 먼거리에서 활로 능히 제압할 수 있었고, 근접전투에서도 방패와 창을 사용한 집단전술로 산병 전투에 익숙한 왜구의 일본도를 능히 상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 도검술(刀劍術)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조총에 의하여 조선의 활이 무력화되고 군사의 대오가 무너지자 산병(散兵) 전투에서 특히 강한 일본도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왜군은 일단 조총으로 아군의 진형을 무너뜨린 후 칼과 창을 들고 돌진하여 잔적(殘敵)을 소탕하는 전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신립(申砬) 장군은 전통적인 기사(騎射) 전법으로 이들 왜군을 상대하기 위하여 조령(鳥嶺) 방어를 포기하고 탄금대(彈琴臺)에서 적을 맞이하였으나 사거리가 긴 조총에 의하여 기병의 활은 무력화되었고 조선군은 뿔뿔이 흩어진채 왜검 아래서 무참히 도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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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순절도> 대부분이 활로만 무장한 조선군과 조총 및 도검으로 무장한 왜군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
<임진왜란 시기의 일본군 무장> 철포족경(鐵砲足輕, 뎃포아시가루)과 창조족경(槍組足輕, 야리구미아시가루) |
조선 조정이 속수무책으로 왜군에게 패하면서 한성과 평양을 잃고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자 명나라는 왜군을 자국의 국경 밖에서 막을 목적으로 원군을 파병하게 된다. 조선에 파병된 명군들 중에서 특히 왜군을 효과적으로 격퇴시킨 부대는 남중국에서 차출된 부대들이었다. 이들 남중국의 절강병들은 왜구 토벌에서 혁혁한 전과를 얻은 바 있는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해 훈련을 받은 부대였다. 이들은 왜적이 멀리 있으면 호준포(虎蹲砲) 등 소형 화포와 화전(火箭)으로 조총을 무력화시켰고 왜군이 육박해 들어오면 그 유명한 원앙진으로 왜검과 왜창을 무력화시켰다. 원앙진은 한 대(隊)를 대장 1명과 취사병인 화병(火兵) 1명, 장패(長牌) 1명, 등패(藤牌) 1명, 낭선(狼筅)과 당파(鏜鈀) 각각 2명, 그리고 장창(長槍) 4명 등 총 12명으로 구성하고 단병기와 장병기가 서로 협력하여 적의 창검을 막도록 훈련시켰다. 조선 조정은 절강병법이 왜군의 제압에 효과적임을 체감하고 《기효신서》에 따라서 군대를 편성하고 등패(藤牌), 낭선(狼筅), 당파(鏜鈀), 장창(長槍) 등 살수 기예를 명나라 군사로부터 전수 받았다.
절강병법의 구현에 필요한 무예를 보급하기 위하여 선조(宣祖) 31년(1598년)에 한교(韓嶠)가 《무예제보(武藝諸譜)》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곤방(棍棒), 등패(籐牌), 낭선(狼筅), 당파(鏜鈀), 장창(長槍), 쌍수도(雙手刀)등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육예(六藝)가 담겨져있다. 원래 《기효신서》에는 각 세(勢)의 명칭과 간단한 설명만이 있었을 뿐 연결 동작이 표시되어있지 않았는데 한교는 명나라 장수들에게 직접 묻거나 스스로 고안하여 연결 동작이 포함된 《무예제보》를 완성하였다.
2) 부대의 편성과 무장 체계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의 진법은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 및 이를 발췌하여 선조 당시에 편찬한 《병학지남(兵學指南)》을 따르게 된다. 《기효신서》는 척계광이 중국 남부에서 왜구에 대항해서 농민군을 편성하고 훈련시키기 위하여 고안한 병법서로서 진법(陣法)과 신호(信號), 무기(武器) 체계 및 살수기예(殺手技藝)를 폭 넓게 수록하였다.
《기효신서》는 살수대(殺手隊)와 조총부대(鳥銃部隊)로 구성되는데 매 5초(哨)마다 1초(哨)를 조총수로 편성하여 전체 부대의 20%를 조총수로 구성하였다. 《기효신서》에서 한 대(隊)의 살수(殺手)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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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앙진도(鴛鴦陣圖), 기효신서> |
<방진(方陣), 기효신서> |
원앙진(鴛鴦陣)에서 장병기는 단병기의 짧은 공격 범위를 보완해주고 단병기는 장병기의 사각 안으로 침입하려는 적을 막아주는 등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당파수는 당파에 화전을 걸고 쏘아서 적의 조총 공격을 무력화시킨다. 《병학지남(兵學指南)》의 장단상제편(長短相濟編)을 보면 각 병기간의 상호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두 방패가 나란히 늘어서면 낭선으로 각각 방패 하나씩을 덮고 장창 두 자루는 방패수 한 명과 낭선수 한명을 맡는다. 짧은 병기는 장창의 느림을 막을지니 이는 도적을 죽이고 반드시 이기는 으뜸 싸움 법이라. 낭선으로 방패를 쓰고 창으로 낭선을 구하고 당파로서 창을 구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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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수기도, 병학지남> |
<원앙진 재구성, 무예도보통지> |
<살수 무장 체계 - 《병학지남》>
구분 |
대장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화병 |
장병기 |
활 |
표창 |
표창 |
낭선 |
낭선 |
활 |
활 |
활 |
활 |
화전 |
화전 |
- |
단병기 |
창 |
등패/환도 |
등패/환도 |
환도 |
환도 |
장창 |
장창 |
장창 |
장창 |
당파 |
당파 |
곤방 |
한편, 조총부대는 대부분이 조총과 쌍수도로 무장하며 대장과 화병은 살수와 동일한 무장을 한다.
<포수 무장체계 - 《병학지남》>
구분 |
대장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화병 |
장병기 |
활 |
조총 |
조총 |
조총 |
조총 |
조총 |
조총 |
조총 |
조총 |
조총 |
조총 |
- |
단병기 |
창 |
쌍수도 |
쌍수도 |
쌍수도 |
쌍수도 |
쌍수도 |
쌍수도 |
쌍수도 |
쌍수도 |
쌍수도 |
쌍수도 |
곤방 |
강홍립 부대의 편성 내역을《기효신서》와 비교해보면 당시의 조선군은 조총수의 구성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살수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총의 공급 부족, 느린 연사(連射) 속도, 날씨에 따른 운용상의 제약 때문에 종래의 장기였던 궁시(弓矢)를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고 포수(砲手), 살수(殺手)와 더불어 사수(射手)를 양성하였다. 이로써 조선 후기의 삼수병(三手兵) 체제가 형성되는 것이다.
3) 도검의 운용 방법
가) 등패수(籐牌手) – 環刀
조선 중기의 등패수(籐牌手)는 조선 전기의 팽배수(彭排手)와 그 역할 및 기능이 유사하며, 다만 종전의 나무 방패가 좀 더 가벼운 등(藤)나무 방패로 대치되고, 표창을 사용한다는 점만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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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제보(武藝諸譜), 등패(籐牌)>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등패(籐牌)> |
등패(籐牌)는 손가락 굵기의 등나무 줄기를 엮어서 전체 형태를 갖춘 뒤 대나무 껍질로 등나무 줄기를 촘촘히 감아서 화살과 창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방패이다. 등패의 중앙은 앞으로 튀어나와있고 가운데는 움푹하며 바깥 테두리는 다시 앞쪽으로 솟아 있어서 화살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등나무가 없는 북방에서는 버드나무를 엮어서 바탕을 만들고 그 위를 가죽으로 덮었다. 조선의 등패는 직경이 3척 7촌이고 손잡이는 뽕나무로 만들었다.
등패수(籐牌手)는 등패(籐牌)와 던지는 창인 표창(鏢槍), 그리고 한 손으로 휘두르는 짧은 요도(腰刀)로 무장하였다. 등패는 종전의 나무 방패에 비하여 가볍고 습기에 강해서 보병이 운용하기에 편리하였다. 또한 창을 가진 적과 싸울 때 일단 창날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면 창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入槍身之內 則槍爲棄物]. 반면에 《무예도보통지》에서는 곤(棍)으로 치면 등패가 뒤집어진다고 하여 등패가 타격 병기에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중국에서는 등패수가 길이 3척 2촌의 요도를 사용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일반 환도를 사용하였다. 등패수가 사용하는 검술은 《무예제보》와 《무예도보통지》를 통하여 자세하게 볼 수 있는데 방패와 함께 운용하는 검술이라 동작이 역시 매우 단순하다. 공격 방법으로는 찌르는 공격[刺法]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이 위에서 아래로, 혹은 좌우로 베는 동작이 대부분이다. 등패수는 특히 적의 다리를 공격하도록 훈련 받았다. 이들의 동작을 살펴보면, 적의 창날 안으로 들어가서는 나는 듯이 뛰쳐나가 적을 베고 혹은 몸을 깊이 낮추어 등패로 상단을 방어한 채 적의 다리를 공격한다.
나) 조총수(鳥銃手) – 쌍수도(雙手刀)
등패수와 함께 임진왜란 이후 시기에 도검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병사는 조총수(鳥銃手)였다. 조총수는 조총과 함께 쌍수장도(雙手長刀)로 무장하여 먼 거리에서는 조총을 쏘고 적이 가까이 접근하면 조총을 버리고 쌍수장도(雙手長刀)로 싸웠다.
이들은 방패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양손으로 휘두를 수 있는 쌍수도를 사용한 것인데, 이들이 사용한 쌍수도는 곧 중국의 장도(長刀)이며 이는 원래 일본의 노다찌(野太刀)에서 유래된 것이다. 쌍수도(雙手刀)는 날의 길이가 5척이고 칼자루의 길이는 1척 5촌으로 전체 길이는 6척 5촌이며 무게는 2근 8량이다. 칼날의 아래 부분에는 날을 구리로 감싼 동호인(銅護刃)이 1척이다. 이 정도 규모의 칼이라면 일반인은 두 손으로도 운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예제보》를 보면 쌍수도보에서 한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칼날, 정확히 말하면 동호인으로 감싼 부분을 잡고 휘두르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칼의 무게 때문에 불가피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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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제보(武藝諸譜), 쌍수도(雙手刀)>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쌍수도(雙手刀)> |
쌍수도가 얼마나 오랫동안 조선군에 의해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어이없을 정도로 길고 무거운 칼은 오래 지나지 않아 일반적인 왜검 혹은 환도로 대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예도보통지》 쌍수도보에는 “오늘날에는 쌍수도의 제도(制度)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요도(腰刀)로써 대신 연습한다. 단지 그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1) 대외 환경과 군사전략
조선에서 《기효신서》의 절강병법이 채 정착되기도 전에 조선의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위협이 증대되기 시작한다. 명나라가 내란과 임진왜란 참전으로 인하여 만주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1616년 건주위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여진족을 규합하여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국호를 후금(後金)이라고 하였다. 명나라는 후금을 멸하기 위해 만주로 출병을 단행하였으나 오히려 10만 대군이 격멸을 당하게 된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주로 기병으로만 구성되었으며 환도군(環刀軍) 철퇴군(鐵鎚軍) 곳치군(串赤軍) 능사군(能射軍)의 4군(軍)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병사 뿐만 아니라 말까지도 갑주로 무장시켰으며 활보다는 환도와 철퇴, 창을 이용한 단병 접전에 능하였다. 게다가 공성전을 담당하는 전문적인 부대를 운용하였고 명나라에서 투항한 병사들을 통하여 홍이포(紅夷砲) 등 대형 화포를 입수하여 공성전에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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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을 입은 청나라 병사> 청군의 칼과 활, 화살의 휴대 방법은 조선군과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갑주의 형태는 조선군과는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
조선은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선조 때부터 이미 《연병실기(練兵實記)》에 의한 부대 편성을 추진하였다. 이 《연병실기》는 《기효신서》와 마찬가지로 척계광에 의해 편찬된 병서로서 그가 북방으로 임지를 옮겨 북방의 기마민족을 상대하게 되었을 때 새로이 고안한 전법이 담겨져있다. 《연병실기》에서는 보병과 함께 기병과 전차를 대규모로 운용하고 화약무기와 궁시 등 장거리 무기를 보강하여 북방의 기병을 제압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지형은 전차(戰車)를 대규모로 운용하는데 적합하지 않았고 기병의 운용에는 양마(良馬)의 대량 조달이 필요하였으나 말의 수효가 턱 없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연병실기》의 차기보전(車騎步戰)은 조선에서 실제로 구현되지 못하였으며, 대신 조총수의 대규모 육성이 이루어졌다.
< 마병배차도(馬兵配車圖), 병학지남> 연병실기(練兵實紀)에 의한 전차(戰車) 운용 방법이 설명되어있다. 불랑기 2문을 장착한 전차 2량에는 대장격인 차정(車正)과 운전수격인 타공(舵工)이 각각 한명씩 있고 나머지 6명이 화포를 운용한다. 2대의 전차마다 기병 1기와 살수대 2대가 호위를 담당한다. |
<화차(火車), 융원필비(戎垣必備)> 이 화차는 숙종(肅宗) 1년에 훈련도감에서 만든 것이다. 조총을 10개씩 5열로 배열하여 총 50개의 조총을 탑재하였으며 화차의 좌우에 나무 방패를 설치하고 그 아래로는 소가죽을 드리워서 병사를 보호하였다. 전차의 지붕에는 소가죽을 씌우고 여기에 기름을 먹여 비가 와도 조총을 발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화차의 좌우에는 호랑이가 그려진 괵기(虢旗)를 세우는데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적 기병이 뛰어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
1614년 조선의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강홍립(姜弘立)을 대장으로 하여 13,000여명의 군사를 만주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이 포수로 구성된 강홍립 부대는 심양(瀋陽)에서 청(淸)나라의 철기(鐵騎)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 아직 연사능력이 현저히 낮았던 당시의 화기로는 철기 부대의 강력한 돌격을 막아내기 힘들었다. 심양 전투에서 조선군은 조총을 한 번 쏘고 다시 화약을 재기도 전에 밀려들어오는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는 조총수를 보호하기 위한 살수(殺手)의 육성과 기병(騎兵) 운용, 그리고 철기(鐵騎)의 돌격을 막기 위한 화차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부각되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침략이 임박한 시기에 새로이 기병과 차병을 육성하기는 힘이 들었기 때문에 조선은 농성전을 준비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농성전에서 큰 도움이 안되는 살수의 육성 노력은 오히려 약화된다.
1632년 후금이 20만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였을 때 이들은 임경업 장군이 지키던 백마성 등 공격로상의 조선군을 그대로 지나쳐 한양으로 직접 쳐들어오게 된다. 다급해진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지만 식량 부족과 홍이포 등을 이용한 후금군의 효과적인 공격, 그리고 근왕군(勤王軍)의 연이은 패배로 인하여 인조는 결국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치욕스러운 항복을 하게 된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조선의 패배로 끝난 뒤 조선은 기병을 양성하고 병사들에게 살수 기예를 익히게 하는 등 청나라 기병과의 전투에 대비하였으나 청(淸)나라의 중국 지배가 공고해지고 평화시대가 계속되자 무비(武備)에 대한 관심은 다시 희박해지게 된다.
한편, 광해군 2년(1610년)에 당시 훈련도감의 도청(都廳)이던 최기남(崔起南)이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을 편찬하였다. 이 책에는 《무예제보》에 실리지 않았던 권(拳),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협도곤(夾刀棍), 구창(鉤槍), 왜검(倭劍) 등이 수록되었는데 이중 협도곤(夾刀棍)과 구창(鉤槍)은 모두 《연병실기》의 전법을 구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기예(技藝)였다.
2) 부대의 편성과 무장 체계
조선은 이미 선조 때부터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한 부대 편성과 진법 운용이 북방의 기병을 상대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기효신서의 진법은 습지대가 많은 중국 남부에서 도보로 전투를 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고안된 보병 중심의 진법이었기 때문에 진형이 매우 단순하고 변화가 적으며 전면에서 공격해오는 적만을 상대할 뿐이었다. 그러나 북방의 기병은 기동력을 이용하여 보병으로 이루어진 방진의 한 측면에 대해서 집중적인 공략을 실시함으로서 어렵지 않게 방진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연병실기》의 차기보전을 도입하는 한편 조선 초기의 오위진법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다. 이미 선조 때 부터 한교(韓嶠)가 《연병실기》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수정한 《연병지남》의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차전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 때문에 광해군 4년(1612년)에야 비로소 간행된다. 또한 《병학지남》의 후기 판본에는 부록으로 《연병실기》의 차기전(車騎戰) 내용이 수록된다.
《연병실기》의 살수대 편성을 보면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장창수 4명을 없애는 대신 조총과 쌍수도를 지닌 오장(伍長) 두 명과 구형 총통이 달린 곤방을 지닌 장병쾌창수(長兵快槍手) 2명을 추가하여 화력을 보강하였다.
기효신서(紀效新書) |
연병실기(練兵實記) |
대장(隊長) |
대장(隊長) |
화부 : 곤방(棍棒) |
화부 : 곤방(棍棒) |
등패(藤牌) : 등패(藤牌). 요도(腰刀), 표창 |
등패(藤牌) : 등패(藤牌). 요도(腰刀) |
등패(藤牌) : 등패(藤牌). 요도(腰刀), 표창 |
등패(藤牌) : 등패(藤牌). 요도(腰刀) |
낭선(狼筅) |
낭선(狼筅) |
낭선(狼筅) |
낭선(狼筅) |
당파(鏜鈀) : 당파(鏜鈀), 화전(火箭) |
당파(鏜鈀) : 당파(鏜鈀), 화전(火箭) |
당파(鏜鈀) : 당파(鏜鈀), 화전(火箭) |
당파(鏜鈀) : 당파(鏜鈀), 화전(火箭) |
장창(長槍) |
오장(伍長) : 조총(鳥銃), 쌍수도(雙手刀) |
장창(長槍) |
오장(伍長) : 조총(鳥銃), 쌍수도(雙手刀) |
장창(長槍) |
장병쾌창(長兵快槍) |
장창(長槍) |
장병쾌창(長兵快槍) |
《연병실기》에서 새롭게 그 중요성이 부각된 기병은 창검으로 무장한 마병(馬兵)과 경기살수(輕騎殺手)로 구분되는데 이들의 무장 상태는 다음과 같다.
<마병 무장체계>
구분 |
대장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화병 |
장병기 |
활 ? |
조총 |
조총 |
쾌창 |
쾌창 |
화전 |
화전 |
활 |
활 |
활 |
활 |
- |
단병기 |
기창 |
쌍수도 |
쌍수도 |
- |
- |
당파 |
당파 |
협도곤 |
협도곤 |
대봉 |
대봉 |
곤방 |
<경기병 무장 체계>
구분 |
대장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화병 |
장병기 |
활 ? |
활 |
활 |
활 |
활 |
활 |
활 |
활 |
활 |
화전 |
화전 |
- |
단병기 |
기창 |
쌍수도 |
쌍수도 |
쌍수도 |
쌍수도 |
구창 |
구창 |
구창 |
구창 |
당파 |
당파 |
곤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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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병수기도(馬兵授器圖), 경기살수도(輕騎殺手圖)> , 병학지남, 원래 연병실기(練兵實紀)의 내용이다. |
<마병입대도(馬兵立隊圖), 연병실기> 대장 뒤로 마상총을 지닌 병사가 네명이 있고 그 뒤에는 당파, 협도곤, 대봉을 지닌 병사가 따라가고 있으며 맨 뒤에 화병이 있다. |
3) 도검의 운용 방법
1) 환도 : 왜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왜검술(倭劍術)의 위력을 절감하였기 때문에 항왜(降倭)를 통한 왜검술의 도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살수대의 훈련은 중국의 기효신서에 따라서 실시하였지만 이와는 별도로 왜검을 잘 쓰는 병사들을 육성하고자 노력하였고 조총수와 사수 모두에게 왜검술을 가르쳤다. 그 밖에도 선조는 왜검술 습득을 위하여 어린 소년 50명을 모아 아동대(兒童隊)를 편성하고 항왜(降倭) 산소우(山所佑)로 하여금 왜검술을 지도하게 하였으며 무인(武人) 당하관(堂下官)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검술을 익히게 하는 등 검술의 도입과 보급을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검술을 가르칠 만한 사무라이[武士] 계급의 항왜(降倭)는 그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왜검술의 도입은 그리 폭 넓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쌍수검, 제독검, 등패 등 명나라의 검술은 명나라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지도를 하였기 때문에 체계적인 보급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쌍수도 등은 기예가 매우 단순할 뿐만 아니라 칼이 지나치게 길고 무거워 왜검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항왜를 통한 검술의 전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이후에 조선은 왜검술을 보급하기 위하여 항왜를 통해서 전수된 왜검술을 채록하여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실었다. 이 책에 실린 왜검은 상당히 실전적이며 동작에 대한 설명이 매우 자세하다. 반면에 《무예제보번역속집》 말미에 실린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신서왜검(新書倭劍)은 원본의 조악한 그림을 그대로 모사하여 놓았기 때문에 검술의 세부적인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다. 한편, 《무예도보통지》에 실려있는 왜검교전은 《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교전과는 다른 것으로서 이는 숙종 때에 군교(軍校) 김체건(金體乾)이 동래 왜관(倭館)과 일본에서 직접 익힌 왜검술을 기초로 하여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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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 |
<무예제보번역속집, 신서왜검> |
한참 뒤인 인조 때에 인조 반정에 공이 컸던 이괄(李适)이 1624년 평안도에서 난을 일으켜 한양으로 진격하였을 때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삼았다. 이 때 "항왜(降倭)로서 적을 따른 자가 가장 심하게 사람을 죽였다"고 하였으며 이에 대해서 조정도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의 왜인을 불러들여 반란군의 항왜를 상대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로 보건데 인조 당시 까지도 조선인은 왜검술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청룡언월도
월도(月刀)는 언월도(偃月刀) 혹은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라고도 하는데, 길고 무거운 칼날을 긴 자루에 달아서 칼의 무게로 찍듯이 베는 장병기이다. 《무예제보번역속집》에 나오는 청룡언월도는 자루의 길이가 5척이고 날 길이는 2척이다. 《무예도보통지》의 월도는 자루 길이가 6척 4촌이고 날 길이는 2척 8촌이다.
중국 송(宋)나라 시대에는 월도(月刀)와 같은 대도(大刀)류의 무기들이 성행하였는데 이는 요(遼), 금(金)의 철기(鐵騎)를 상대하는데 대도(大刀)와 같이 중량감이 있는 병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왜한삼재도회(倭漢三才圖會)》를 인용하여 "왜인의 신묘한 칼 솜씨도 언월도의 휘두름 아래서는 피할 곳이 없었기에 언월도를 칼중에 제일이라고 하는 것은 헛말이 아니다."라고 하여 왜검을 상대할 때도 언월도가 효과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월도는 남왜북로 모두에 대해서 효과적인 무기라고 이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원의(茅元義)는 《무비지(武備志)》에서 "언월도는 조련하고 익힐 때 그 웅대함을 보이는 것일뿐, 진중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중량이 지나치게 무거워 "보통사람은 감히 들지도 못하게 만든" 중국의 화려한 언월도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며 중국의 월도에 비해서 "가을 낙엽처럼 엷고, 형식은 조열(粗劣)"한 조선의 월도는 실전적인 무기이다. 《연병지남(練兵指南)》에서도 기병 돌격시 사용하는 무기중의 하나로 월도를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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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제보번역속집, 청룡언월도> |
<무예도보통지, 월도> |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실린 청룡언월도 기예는 명나라 장수로 부터 직접 전수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전수한 명나라 장수로는 선조 28년 조선에 무예 교사(敎師)로 파견되었던 파총(把總) 양귀(楊貴)가 가장 유력하다.
3) 대봉, 협도곤, 구창,
《무예제보》와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소개된 대봉, 협도곤, 구창은 도검류가 아니라 대기병전용 단창(短槍)이지만 도검류와 가끔 혼동되기도 하므로 이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기로 한다.
- 대봉(大捧)
화병(火兵)은 취사병이면서 동시에 나머지 병사들의 짐을 나르는 병사였다. 척계광은 중국인들이 짐을 나를 때 사용하는 긴 나무 자루에 작은 창날을 달아서 화병으로 하여금 급할 때 쓰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대봉(大捧), 혹은 곤방(棍棒)이다. 대봉은 자루의 길이가 7척이며 날 길이는 2촌이다.
- 협도곤(夾刀棍)
《무예제보번역속집》에 나오는 협도곤(夾刀棍)은 자루의 길이가 7척이고 날의 길이가 5촌이다.척계광은 북방의 철기(鐵騎)를 상대하면서 장창(長槍)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화병(火兵)이 소지하였던 대봉(大捧)의 칼날을 더 크게 만들어 협도곤(夾刀棍)을 만들었다.
“오랑캐를 막는데 이르러서는 철갑(鐵甲)을 입고 말을 달려 일제히 닥쳐올 때 장창이 어둑 부러지는 고로 대봉(大捧) 대신 협도곤(夾刀棍)을 쓰니~”
따라서 협도곤은 도검류가 아니라 짧은 날이 달린 곤방(棍棒), 혹은 단창(短槍) 종류로 이해하여야 한다. 협도(挾刀)와 협도곤은 사용되는 한자(漢字) 부터가 다를 뿐만 아니라 협도의 날 길이는 3척으로 협도곤의 6배나 된다.
- 구창(鉤槍)
《무예제보번역속집》에 나오는 구창(鉤槍) 또한 대기병전을 위해 척계광이 새로 고안한 무기이다. 구창(鉤槍)은 창날 옆에 갈고리가 달려있어서 이것으로 적 기병을 끌어 내린다. 창의 길이는 8척 5촌이다. 이런 형태의 창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유물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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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제보, 무예제보번역속집>, 위에서 부터 대봉, 협도곤, 구창, |
1) 대외 환경과 군사전략
효종(孝宗)은 부왕 인조(仁祖)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북벌(北伐)을 도모하였으나 청나라의 중국 지배가 공고화되자 현종(顯宗) 이후로는 조선이 독자적으로 청나라를 도모하려는 시도가 포기된다. 이후 양이(洋夷)와 근대화 된 일본이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하는 철종(哲宗) 시대까지 조선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게 된다. 숙종(肅宗) 재위시인 1673년 ~ 1681년에 중국의 오삼계(吳三桂)등이 일으킨 삼번(三番)의 난(亂)으로 인하여 해안 방어 문제가 대두되는 등 국경의 위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남왜북로(南倭北虜)는 가상의 적이었을 뿐이며 실제로 조정을 위협한 것은 빈번한 반정(反正)과 반란(反亂)이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반란사건은 1728년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亂)과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이다. 이인좌는 소론 세력을 기반으로 청주에서 거병(擧兵)하여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인좌의 무리들이 충청도와 영남, 호남 각지에서 거병함에 따라서 조선 전역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홍경래는 조선 개국 이래 차별을 받아온 서북인(西北人)들을 규합하여 순식간에 관서(關西)지역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이들 반란 사건은 모두 단기간 내에 진압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반정이나 반란 사건에 대비한 중앙군의 육성이 중시되는 반면 지방군의 육성은 상대적으로 등한시 된다.
한편 군사 기술 측면에서 볼 때, 조선 후기로 오면 화기(火器)의 성능이 대폭 개선된다. 중국과 일본에서 새로운 염초(焰硝) 제조법이 도입되었고 서양의 신형 화포가 도입되었으며 조총의 성능 개량과 더불어 천보총(千步銃)과 같이 강력한 화력을 가진 개인 화기가 야전에서 운용되었다. 숙종(肅宗) 때에 박영준(朴英俊)이 처음 개발하고 영조 때에 그의 아들인 박지번(朴枝蕃)에 의해 다시 세상에 선을 보인 천보총(千步銃)은 사정거리가 약 900보(步)에 이르고 유효 사정거리가 500보에 이르지만 종전의 대조총(大鳥銃)과 달리 야전에서 휴대하여 사격하기에 편리하였다. 영조 5년에는 윤필은(尹弼殷)이 이와는 또 다른 종류의 천보총을 제작하여 바쳤다. 또한 우천시에도 조총을 우이(雨覆)로 덮어 사격이 가능하도록 하는 기술이 사용되었고 조총의 연사능력도 점차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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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신형 대포> 조선 후기에는 소포, 위원포 등 전래된 신형 화기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이들중 상당수는 말에 실어서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야전에서의 운용이 용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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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鳥銃)>, 독립기념관 가운데 있는 것이 일반적인 조총(鳥銃) 혹은 행용총(行用銃)이다. 맨 위의 총이 천보총이다.천보총은 사거리와 관통력이 뛰어나면서도 가벼워서 조선 후기에 야전에서도 사용되었으며, 구한말 의병들도 서양식 소총에 맞서기 위해서 천보총을 널리 사용하였다. 맨 아래 조총은 구경이 약 2cm 정도되는 대구경 조총(鳥銃)이다. |
이렇듯 화기(火器)의 성능이 개선됨에 따라서 살수(殺手)와 기병(騎兵)의 중요성은 점차 낮아지고 조총(鳥銃)과 대형 화포(火砲)를 중심으로 부대가 편성되었으며 활로 무장한 기병이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를 들어 숙종 34년에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병력 5천명 중에서 4천명이 조총수였다. 《만기요람(萬機要覽)》을 보더라도 오군영(五軍營)이 보유한 무기는 환도(環刀)와 궁시(弓矢), 조총(鳥銃), 화포(火砲)가 대부분이며 살수(殺手)가 사용하는 낭선과 장창, 당파, 월도, 협도 등은 아주 극소수만이 비축되어있다. 조선 후기의 군현지(郡縣志)를 살펴보면 지방군의 경우에도 단병기의 비축량은 매우 적으며 조총(鳥銃)이 대량으로 비축되었고 전통적인 궁시와 더불어 훈련이 거의 필요 없는 수노(手弩)가 대량 비축되었다.
한편, 영조35년(1751)에 사도세자는 《무예제보》의 6기에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왜검(倭劒), 교전(交戰), 월도(月刀), 협도(挾刀), 쌍검(雙劒), 제독검(提督劒), 본국검(本國劒), 권법(拳法), 편곤(鞭棍) 등 12기를 추가하여 18기를 담은 《무예신보(武藝新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정조는 《무예신보》에 기창(騎槍),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쌍검(馬上雙劒), 마상편곤(馬上鞭棍),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를 덧붙여 총 24기로 구성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완성하였다. 이로써 조선에서 동양 삼국의 무예의 집대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2) 부대의 편성과 무장 체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병서는 정조 때에 편찬된 《병학통(兵學通)》이다. 《병학통》은 중국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연병실기》, 그리고 조선의 전통적인 병법서인 《진법》을 영조 때에 다시 간행한 《병장도설》 등 고래의 진법을 총 망라하며 집대성한 병서로서 “《병학통(兵學通)》은 영진(營陣)의 강령(綱領)이고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기격(技擊)하는 추뉴(樞紐)”라고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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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학통, 일위행렬진변위방영도> |
<병학통, 현무진도> |
하지만 이 《병학통》은 《무예도보통지》와 마찬가지로 병법을 집대성하여 간행함으로써 장수들로 하여금 병학을 익히게 하려고 편찬한 병학서였을 뿐, 그 내용이 정조 당시의 실제적인 부대 편성과 군사 운용 상황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병학통》에는 병사들이 낭선, 당파, 쾌창, 협도곤, 대봉 등 《기효신서》와 《연병실기》의 병기로 무장하고 있으나 《만기요람》을 보면 이들 단병기류의 비축량은 매우 미미하다. 또한 이미 숙종조에는 살수의 중요성이 현저히 낮아져서 살수(殺手)가 훈련도감(訓鍊都監)에만 겨우 몇 초 남아있었을 뿐이며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될 당시에는 살수의 기예가 거의 끊어질 지경에 이른 상태였지만 병학통에서는 살수가 대규모로 운용된다. 따라서 당시의 실제적인 무기 체계와 부대 편제를 살피려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반차도(班次圖)》등 당시의 기록화와 만기요람등의 자료를 함께 살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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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반차도(班次圖)> 원래는 보병도 갑주를 입어야 하지만 정조가 국왕 호위시에는 기병만 갑주를 착용하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보병들은 전복 차림이다. |
<화성성묘전배 (華成聖廟展拜)> 조선 왕조가 끝날 무렵까지 국왕을 호위하는 군사들중 고위 무관들은 항상 활과 화살을 지녔다. |
《만기요람》을 보면 순조 당시의 훈련도감(訓鍊都監) 군사의 무장 상태는 다음과 같다.
마군(馬軍) |
갑주(甲胄), 환도(環刀), 통아(筒兒), 편곤(鞭棍), 교자궁(校子弓), 후궁(帿弓), 유삼(油衫), 장전(長箭) 20, 편전(片箭) 15 |
보군(步軍) |
갑주(甲胄), 조총(鳥銃), 환도(環刀), 유삼(油衫), 화약(火藥) 12냥 5돈, 연환(鉛丸) 50개 |
즉, 마군(馬軍)은 대부분 철제(鐵製) 찰갑(札甲)을 착용하고 목궁(木弓)의 일종인 교자궁(交子弓) 및 물소뿔을 부분적으로만 사용해서 만든 후궁(帿弓)을 주무기로 삼았으며 단병 접전 무기로는 편곤(鞭棍)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를 보면 월도(月刀)와 쌍검(雙劍)을 휘두르는 마병이 말 안장에 반드시 편곤을 끼워 넣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장병기를 두 가지씩이나 소지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월도(月刀)나 쌍검(雙劍)은 기예(技藝)를 보이기 위한 병기일 뿐이고 실전에서는 주로 편곤(鞭棍)을 사용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군(馬軍)의 환도(環刀)는 조선 전기의 기병과 마찬가지로 예비적인 호신 무기로 사용되었다. 유삼(油衫)은 오늘날의 비옷에 해당하는 기름 먹인 옷이며 통아(筒兒)는 편전(片箭)을 쏘기 위한 보조 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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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원필비, 갑주, 조총, 환도> 조선 후기 보병의 표준적인 무장이다. 가죽제 찰갑을 입고 조총과 환도를 휴대하였다. 여기에다 화약통과 연환(鉛丸)이 든 자루, 사기로 만든 수통과 비옷인 유삼이 추가된다. |
<무예도보통지 편곤보> 조선 후기 기병의 표준적인 무장이다. 갑주를 입고 편곤, 환고, 궁시로 무장하였다. 안장 아래에 꽂은 것은 통아이다. 다만 무예도보통지의 기병 갑주는 전형적인 조선식이라기 보다는 중국식을 부분적으로 채용한 형식이다. |
보병의 경우 가죽제 찰갑(札甲)이나 면갑(綿甲)을 주로 착용하였고 주된 무기는 조총(鳥銃)이었으며 단병접전을 대비하여 환도(環刀)를 소지하였다.
그 밖에 오군영(五軍營)에 천보총(千步銃), 불랑기(佛狼機), 위원포(威遠砲, 소포(小砲), 동포(銅砲) 등 중소형 화기가 대량으로 비축되어있는 것으로 보아서 조선 후기의 조선군은 포병(砲兵)과 총병(銃兵), 그리고 활로 무장한 경기병(輕騎兵)을 세 축으로 하여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 도검의 운용 방법
조선 후기의 오군영(五軍營) 병사들은 상당수가 조총수였기 때문에 이들 대부분이 방포술(放砲術)과 함께 검술(劍術)을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사용한 환도(環刀)는 쌍수도(雙手刀)에 비해서 상당히 길이가 짧았다.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조선 후기 환도 규격은 날 길이가 3.3척이고 자루 길이가 1척으로서 전체 길이가 약 89.57cm (주척(周尺) : 20.83cm)이다. 칼의 무게는 963g 정도이다. 현존하는 환도 유물을 살펴보면 조선 후기 오군영의 병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특정 양식의 환도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이들은 대부분 칼날의 2/3는 거의 직선에 가깝고 끝 부분만 약간의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칼자루는 가죽 끈으로 감았다. 칼집은 나무 바탕 위에 종이를 바르고 흑칠(黑漆)을 하였거나 혹은 어피(魚皮)로 감쌌다.
조선 후기 병사들이 사용한 검술은 《무예도보통지》에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중국에서 비롯된 쌍수도(雙手刀)와 등패(藤牌), 제독검(提督劍), 일본에서 비롯된 왜검(倭劍) 및 이를 응용한 왜검교전(倭劍交戰), 조선에서 비롯된 예도(銳刀),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마상쌍검(馬上雙劍)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장병기를 사용하는 월도(月刀), 마상월도(馬上月刀), 협도(挾刀)를 포함할 경우 전체 24기 중에서 9기가 도검기(刀劍技)이며 책의 분량을 기준으로 보면 도검기가 전체의 반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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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 왼쪽부터, 제독검(提督劍), 쌍검(雙劍), 본국검(本國劍), 예도(銳刀) |
이들 조선 후기에 새로이 무예서(武藝書)에 편입된 제독검(提督劍), 쌍검(雙劍), 본국검(本國劍), 예도(銳刀)의 가장 큰 특징은 검술의 동작이 전후 좌우 사방을 향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기효신서》와 《무예제보》의 등패(藤牌)와 쌍수도(雙手刀)는 기본적으로 대오(隊伍)를 유지한 상태에서 전투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공격과 방어가 전방(前方)을 향해서만 이루어진다. 하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화기의 발달로 인하여 밀집대형(密集隊形)을 갖춘 살수(殺手)는 화포의 좋은 먹이감이 될 뿐이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살수(殺手) 기예(技藝)는 산개(散開)하여 사방(四方)의 적을 상대로 싸우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하지만 현대전에서 화력의 발달로 인하여 총검술의 중요성이 거의 사라졌듯이, 당시에는 이미 대부분의 전투가 대포와 조총을 사용하는 화력전(火力戰)이 되었기 때문에 군중(軍中)에서 단병(短兵) 기예(技藝)가 실전될 것이 우려될 정도로 도검기(刀劍技)의 중요성이 낮아진 상태였다. 그런 의미에서 《무예도보통지》는 우리나라의 도검(刀劍) 무예(武藝)가 마지막 불꽃을 피우며 사라진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끝 -
참고문헌
五禮儀
武藝圖譜通志
武藝諸譜
武藝諸譜飜譯續集
陣法
兵學指南
兵學通
戎垣必備
紀效新書
朝鮮王朝實錄
萬機要覽
朝鮮後期 兵書와 戰法의 硏究, 盧永九, 2002.2, 서울대학교
朝鮮時代 刀劍의 軍事的 運用, 姜性文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閔賢九
『武藝圖譜通志』「雙手刀」「倭劒」の背景にあるもの, 大石純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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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 실력이 미천하여 그림은 따올 수 없었습니다. 사이트의 주소를 적어 놓을테니 직접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 http://www.swords.pe.kr/docs/millisword/millitaryswords.htm )
조선시대 고려시대의 분들은 바보들이 아니고 군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현재 우리의 얄팍한 지식으로 재단할 분들이 아닙니다. 제발 자신의 지식이나 생각이 1%라도 틀릴 수 있음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여기서 올리는 글은 보다 많은 사람의 생각을 배우고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갈고 닦으기 위한것이지
다른 사람의 지식의 맹점을 파고들어 후벼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불어 후벼팔 정도의 지식을 지니셨는지조차 의심이 드는군요. 자신의 생각에 맹신하실려면 도대체 왜 이런곳에 글을 올리는 것입니까? 부디 다음부터는 이러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자체로 의미가 있었기에 존재합니다.
현대의 위생적인 식생활로 더이상 필요치 않게 보이는 맹장도 과거 시대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장기중 하나였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없어 보인다고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 무엇때문에 존재했는가?
아니 어떠한 필요해 의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궁리하고 알아내는것이 더 나은길이 아닐까요? 그것이 역사를 배우고 그 속에서 배우는 참된 지혜가 아닌가 합니다.
으와....너무 내용이 방대하군요,내용또한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도 되었고,,,,정말 원추!
이 소논문에서 얘기하고 있는 "검"의 운용방법이란 적어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검술'을 떠올릴 때의 그 "검"의 운용방법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셔야 할텐데요? 외려 이 소논문 자체가 대규모 전투라는 특정상황에 임했을 때, 특히 창병의 밀집진을 상대할 때 그것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단히 단순화되고
특화된 검의 운용법을 얘기하고 있음을 분명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적어도, 검을 지닌 무사들이 창병사이로 뛰어들어가면 창병들은 손쉽게 제압되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검"은 아니라는 것이죠.
무슨 말씀이시죠?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제가 미욱하여 KWEASSA님의 리플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만 정리해서 올려주시겠습니까?
아마 팰릭스님은 이곳 카페사람들의 고질병인 "~은~입니다." 같은 단정투의 문체때문에도 회의를 느끼신것 같습니다.. 아니시라면 할말없고 ^^; 허나 저는, 충분히 토론의 여지가 있고 확정하기 어려운 사항에 대해 너무 쉽게 단정짓는 이들을 보면 혈압이 치솟거든요..
흘러가는 / 동감입니다.
팰릭스 / KWEASSA 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 글은 창병의 밀집진을 상대할떄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의 검. 이라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음으로서, 검이 창에 비해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회의적으로 보는 人에 대한 반박... 을 설명하기에 좀 걸맞지 않다는 애기가 아닐련지요.
아! 그런의미였나요? 저 또한 전쟁에서 창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현대전에서의 소대단위 진형이라고 볼수 있는 원양진처럼 창이 전체 부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큼니다. 우선적으로 보통 맞붙어서 전투를 행할때 방패수등은 1열만이 전투에 임할 수 있지만 창병들은 2열 3열 길게는 4열까지 함께
협동공격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군대에서 창이란 병기는 매우 효율적인 병기라고 할 수 있고 비교적 숙련이 쉽기 때문에 애용되어온 병기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창병들을 상대하기 위한 군에서 생각해낸 방안이 방패수 즉 칼과 방패를 동시에 운용하여 방패로서 창의 찌르기 공격을 막고 근접하여 칼로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단 이것은 방패수의 단독적인 형태가 아닌 전체 부대에서 선두에 서서 뒤에 창병들의 지원을 받으며 숙련된 방패수들이 적의 선두 창병들의 창을 운용할 수 없는 사각으로 파고들어 진을 와해시키는 용도로 사용되어온 것입니다.
임진왜란당시 우리나라 창병들이 일본의 창과 칼을 같이 사용하는 병사들에게 크게 낭패를 당한것은 조선의 창병이 창진을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조총의 출현 때문이죠. 조총으로 인해 창진이 와해되어 일본군의 난입을 너무나 쉽게 허용한 조선군에게 근접전에서 위력적인 일본의 도검은 위력을 발휘한 것
입니다. 특히 조선의 병사들은 각궁을 주무기로 사용하는데 활과 같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긴 검보다는 짧은 검이 소지하기가 좋기 때문에 조선군의 환도는 길이가 일본군의 도검보다는 짧았습니다. 롱소드와 숏소드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칼에 숙련되지 못한 병사에게 길이의 차이는 넘을 수 없을 만큼의 생사를 가르는
차이가 된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군의 환도의 길이가 길어지게 됩니다. 도검을 사용하는 방패수들이 창병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한 것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창병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방안이었고 또한 일정부분 효과를 본것이 사실입니다. 일종의 tanker의 역활을 수행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군의 창병들을 일선에서 보호하고 적의 창진의 사각으로 파고들어 창진을 와해시키는 현대전으로 따지자면 일종의 특공대와 같은 역활을 했다고 볼수 있죠. 그리고 난전이나 소수부대간의 전투시에는 자신의 키의 2배쯤 되는 창보다는 방패수가 보다 효과적인 병과라는 것은 여러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인 거 같습니다. 저는 창의 중요성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검병 특히 방패수의 또는 슬레이브 무기로서의 도검의 효용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난전시에는 주 무기인 창이나 활을 버리고 도검으로 무기를 바꿔 응전하는 전술은 적어도 조선군에서는 보편화된 방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훈련된 단일병종 집단보다는 훈련된 다병종 집단이 전투에서 보다 효율적인 운용과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창의 중요성 만큼 도검의 중요성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도검보다 도끼병이 더좋지않나요? 도끼가 도검보다 배우는 속도도 빠를뿐더러 경보병에게 도끼쥐어주면 위력이 상당하잔습니까
물론 한손도끼말입니다.
도끼의 경우 공격하여 보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수는 있지만 도끼의 구조상 베는 공격이 아닌 찍는 공격을 가해야 합니다. 실제로 도끼와 도검을 휘둘러 보시면 알겠지만 도끼는 도검보다 공격을 가할때 신체가 더 노출되고 공격과 수비의 간이 큽니다. 방패와 함께 운용한다 하더라도 도검에 비해 신체의 노출빈도가 더
크기 때문에 방어에 보다 취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양손도끼나 방패와 함께 운용되던 도끼병은 공격일변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결사대의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고 사실 도끼나 철퇴와 같은 둔기류는 창병을 상대하기 보다는 방패수와 같은 방패와 칼을 사용하는 병종에 보다 효과적인 부대입니다.
둔기류 무기는 방패를 때려부시거나 충격을 가해 적의 방어무구를 무력화 시키는 방법으로 방패수를 보다 용이하게 상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월수는 창병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진을 이루는 집단전투에서는 창병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적의 창진이 와해되어 난전이 되거나 진형을 갖춘 선두
적군의 방패수를 제압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느정도 창수를 방패수가 방패수를 부월수가 부월수를 창수가 이런식의 상성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패수가 없다면 부월수라는 병종의 쓰임이 보다 적겠죠.
방패를 같이 사용한 도끼병보다는 강력한 한번의 공격으로 적의 방어무구를 무력화 시키는 거대한 도끼인 부를 사용하는 부수가 실제 역사속의 전투에서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부월수는 보통 진형의 맨 뒤에 배치되는데 전투시 공황에 빠진 아군 패잔병을 척살하여 군율을 세우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보다 중요한 도월수의 용도는 바로 적이 방패진과 같은 진형을 갖추워 대치상태가 되었을때 아군의 뒤에서 달려와 그 힘의로 적의 방패를 깨부셔 방어진를 파괴하여 공격의 틈을 만드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 고구려군도 부월수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전법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많은 사학자와 전술가들이 추측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론 로마의 다키아 원정에서 이러한 전술을 사용한 다키아군에게 로마군단의 방패잡는 왼손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도끼가 도검보다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경보병에게 도끼쥐어주면 위력이 상당하다는 말은 어디를 근거로 하신말인가요?
정리하자면 방패수와 같은 도검수는 무장이 약한 경무장 보병집단에게 강한 병종이고 도월수와 같은 둔기류 무기는 무장이 잘되어 있는 중무장 보병집단에 강한 병종입니다. 도검수의 검날은 예리하여 보다 쉽게 베기위하여 발전해 왔고 둔기류의 날은 둔중하여 보다 큰 힘을 전달시키기 위해 발전되어 왔습니다.
보통 창병의 경우 경무장 보병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긴 장창을 활용할 시에는 두손을 모두 사용하여야 그 운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방패를 사용하기 힘듭니다. 다키아인이 사용한 무기는 도끼라기 보다는 S자 형태의 조선장검형태인 펄스인데 이 사용법이 부월수 운용법과 비슷합니다.
군시절 워낙 작업병종이라 이것저것많이 해봤었는데, 많은 도끼질을 해본결과 옛 나뭇꾼들을 존경하게 되었음과 아울러, 도저히 전투용 무기로 쓰기엔 무리가 있겠다는걸 느꼈었습니다. 일단 한손으로 드는 손도끼라 해도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려면 너무 작아서도 아니 되겠고,
어느정도 도끼날이 무게를 가졌다면, 한번 찍을때와 찍은후 도끼날을 뺄때의 동작이 너무 커지더군요. 난전에서의 무기로는 적합치 못한것 같습니다.
특히 한손으로 도끼를 휘두를경우, 조금만 힘이 부족해도 도끼날이 아니라 옆면으로 (넓적한...) 때리는 실수가 많이 나오더군요...창검과는 많이 다르니까요.
도끼는 그 특성상 차지하는 공간이 많아 밀집대형에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쇼트소드와 방패로 무장한 중세중장보병군이 이유도 없이 존재했을리가 없잖습니까.
오로쿠트 / 방패와 도끼로 무장한 병사는 생각보다 쓸만하더이다...
난 고구려 의 경장에 한손엔 방패 한손엔 도끼를 든병사를 보고 생각하며 쓴글인데 재견해가 짧었군요. 고구려에도 중보병과 도검병이 있었다는걸 까먹었습니다. 아무튼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