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부 다이어리] 강화 토박이 여인은 어쩌다 네팔 히말라야를 걸었나?
월간산 2020.12.15
월간<山> 독자들에게 나의 전부였던 지난 山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파키스탄 카라코룸 스노 레이크Snow Lake에서 안자일렌을 하고 걷는 포터들.
17년간 한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의 70~80%를 저축했다. 떠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일했으면 그만큼은 놀아야 한다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디데이는 마흔이었다. 나는 활동할 수 있는 나이를 80으로 보았고, 그 절반인 마흔을 인생의 후반이라 생각했다. 전반부에서는 남들처럼 학교 다니고 회사 다니면서 비슷하게 살았다면, 후반부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고백하자면 멋대로 살고 싶었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머물기보다 떠나는 삶이었으면 했다.
마흔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인터넷에 떠돌던 사진 한 장을 보고 처음으로 히말라야에 갔다. 티베트 카일라스와 네팔 무스탕. 그 뒤 히말라야로 이어진 발걸음이 어느새 6년. 그 사이 나는 네팔과 파키스탄 히말라야를 횡단하고, 북인도를 포함해 히말라야에서 6,000km를 걸었다.
나의 목표는 히말라야 전부를 횡단하는 것. 그런데 올해는, 누구나 다 아는 이유로 7개월간의 히말라야 트레킹 계획이 전부 취소되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나는 고향인 강화도에 머물며 다리 한번 건너지 않고, 봄과 여름을 보냈다. 완벽한 칩거였다.
북인도 잔스카르 샤데Shade 가는 길의 마부와 당나귀들
지리산이 전부였던 시절
20대 중반, 지리산에 다닐 때는 지리산만 보였다. 그 산이 내게 전부였고, 애인이었고, 종교였다. 세상에 지리산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다 홀로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지리산이 백두대간의 일부라는 사실에 한 대 맞은 듯했다.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세상의 일부였다. 나의 전부는 이제 우리나라의 굵직한 산을 모두 품고 있는 백두대간이 되었다. 그런데 백두대간이 히말라야 고산족이 사는 마을보다 낮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의 전부는 다시 일부가 되었다.
2년에 걸쳐 네팔 히말라야를 횡단하면서 그것이 히말라야의 전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 더 이상 걸어야 할 히말라야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다 파키스탄 북부의 위성지도를 보고 심한 갈증을 느꼈다. 활처럼 휜 히말라야 산맥은 서쪽 파키스탄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8,216m)부터 인도 북부, 네팔, 시킴, 부탄, 중국 티베트의 남차바르와Namcha Barw (7,756m)까지 뻗어 있었다.
북인도 잔스카르 샤데 패스Shade Pass(4,280m) 정상에 오른 필자.
낭가파르바트 북동쪽의 카라코룸산맥은 위성지도로 보기에도 온통 눈과 얼음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카라코룸은 넓은 의미의 히말라야에 포함된다). 내가 가보지 못한 히말라야는 어마어마한 길이였다. 히말라야의 핵심은 네팔이었지만 그 역시 히말라야의 일부였다.
스물한 살, 정맥을 산행하면서 처음으로 야영산행을 해봤다. 그 뒤로 산에서 야영하는 게 자연스러웠고, 늘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산에 다녔다. 당일 산행은 거의 하지 않았다. 지금은 백패킹이라 부르며 1시간 정도만 걷고 야영하는 일이 흔하지만, 그때는 종일 걷고 나서야 야영을 했다.
20여 년 동안 야영산행을 하면서 많은 장비를 샀고, 계절에 따라 좋은 산을 잘도 찾아다녔다. 산에서 밤과 아침을 맞으며 좋은 건 다 보고 다녔다. 하지만 좋았던 산행도 백패킹이 유행할 무렵, 더 이상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1년의 절반을 히말라야에서 야영하며 보내다 보니 궁금함도 미련도 없었다. 재미난 이벤트였던 야영이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생활이었고, 근사한 곳에서의 야영도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산이 좋았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남도의 산처럼 일단 멀어야 눈에 들어왔다. 서울이나 경기도 근교 산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관심에서 제외됐다. 멀리 떨어진 산도 좋았지만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는 것도 좋아했다.
그런 면에서 히말라야는 취향저격이었다. 한번 집을 나가면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20년을 나가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철부지 시절에는 절대 고향에서 살지 않겠노라 했지만, 마흔이 넘자 고향이 편해졌다.
파키스탄 카라코룸 쿨리 브랑사Quli Brangsa에서의 야영.
고향 산도 모르면서 백두대간 했구나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문득 강화도에는 어떤 산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아는 산은 마니산과 고려산, 혈구산이 다였다. 지도를 보니 평화전망대에서 시작하는 강화지맥이 마니산으로 이어졌고, 꽤 많은 산이 있었다. 새로웠다. 왜 한 번도 강화도에 있는 산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의아하기도 했다.
고향 땅도 모르면서 지리산을 찾고, 강화지맥도 모르면서 백두대간을 했구나. 그나마 백두대간을 하고, 우리나라 산을 다니다가 히말라야 횡단을 한 건 다행한 일이었다. 그조차도 없이 다른 나라 산만 찾았다면 더 부끄러울 뻔했다.
나는 쉬엄쉬엄 강화에 있는 산에 다녀보기로 했다. 산에 갈 때마다 챙겼던 장비는 그대로 둔 채 가장 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등산화, 등산복도 아닌 생활한복 바지에, 면티를 입었다. 마트에서 6,000원 주고 산 배낭에 물 한 병과 간단한 요깃거리만 챙겼다.
네팔 무스탕 콘촉링Konchok Ling에서 마주친 압도적인 풍경.
산을 찾지 않았던 기간만큼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산은 중력의 힘이 강하게 작용했고, 나는 헉헉대며 느릿느릿 걸었다. 허술한 장비, 허술한 걷기로 생전 산행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되어 무無로 돌아갔다.
강화의 산은 의외였다. 이런 산도 있었던가, 이렇게 예뻤던가. 산은 아기자기했지만 조망은 시원했다. 여름내 푸르던 들판은 가을이 되면서 눈부신 황금들판으로 바뀌었고, 길가엔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와 하늘하늘한 코스모스가 춤을 췄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나는 등잔 밑이 있는 줄도 모르고 늘 먼 곳으로만 눈을 돌렸다.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갈망도 없는 법이다. 내게는 고향산천이 그랬다. 코로나 시대의 비극은 내게 고향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주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고향인 강화도의 산들을 자세히 둘러보게 되었다. 별립산에서 바라 본 황금들판.
내게 산은 이벤트이자 쾌락
내게 있어 산은 이벤트이자 쾌락이고, 목적이자 목표다. 그런데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산에 대한 쾌락이 희미해졌고 목표는 불분명해졌다. 그러면서 근본적인 의문이 생겼다. 나는 정말 산을 좋아하는 걸까. 정말 걷기를 좋아하는 걸까. 좋아하는 척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남들보다 유달리 잘 걷거나 체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많이 걸은 것도 아니다. 어쩌다 내 인생에 산이 들어왔고, 어쩌다 히말라야에 가게 됐을 뿐이다.
그 인연이 길어지다 보니 뭔가 운명 같기는 한데, 산에 대해선 여전히 서툴고 잘 모르겠다. 그래서 누가 산에 왜 가는지, 산이 왜 좋은지 물으면 대답이 궁하다. ‘좋아서’ 혹은 ‘궁금해서’라고 답해 보지만 성에 차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 대답은 산이 취미를 넘어 몸에 밴 습관이 될 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허술한 장비와 허술한 걷기로도 충분히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