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과 81의 차이를 아시나요?
바로보면 18, 돌려보면 81인데 18은 陰數로 여성을 , 81은 陽數로 남성을 상징한다. 결국 18과 81은 남자,여자처럼 음.양의 차이만 있을뿐 같다는 뜻이 된다. 이에 따라서 우주의 완성을 뜻하는 10(註1) 즉 십진법의 0을 제외한 마지막 수인 9(註2)의 成長의 빛이자 꽃은 朗朗 18세(9 × 2)요, 完成數인 0 즉 10으로 가기전인 皓皓白髮이 81세(9 × 9)다.
* 註1, 숫자 10 - ‘십(十)’은 가장 완전한 수, 가장 완벽한 수이다. 十分, 十全, 十方, 十干, 十齋, 十善, 十樂, 十全大補湯 등에서 ‘十’은 가장 완벽하고 완전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十’은 다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十思, 十步芳草, 十年讀書 등의 말에서 그 뜻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 속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열 번 재고 가위질은 한번 하라”, “열 골 물이 한 골로 모인다”, “열 사람이 지켜도 한 도둑을 못 막는다” 등이다.
그리고 열은 하늘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주역에 나오는 10干과 12支는 우주 만상의 이치를 나타내는 부호들인데 여기서 10干은 하늘을 상징해 둥글게 배치하고 12支는 땅을 상징해 네모로 배치하였다. 즉 10간으로 하늘의 이치를 12지로 땅의 이치를 나타낸 것이다.
또 ‘十'은 우주와 상서로움을 나타낸다. 十方世界는 우주를 가리키는 말로서 무한한 공간 속에서 그 어떤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활동함을 나타내며, 十長生은 생명의 근원을 나타내는 10가지 동식물로서 장수를 나타낸다. 또한 ‘十’은 경사번호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예로 대만과 중국의 국경절이 10월 10일과 10월 1일인 것이다.
그리고 ‘十’은 생명의 탄생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예수도 부활을 의미하는 십자가에 못박혀죽었다가 살아났고, 남녀간의 성적 交接을 "씹(十)한다"라고 했으며, 이 씹의 결과로 인간이 열달의 임신기간을 거쳐 세상에 태어나므로 이는 세계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상인 것이다.
* 註2, 9 - 숫자 ‘九’는 帝王을 상징하며 황제를 지칭해 九五之尊이라 한다. 九五之位, 또는 九五之分 이라고도 한다.
九五는 乾卦의 다섯 번째 효(爻)의 이름으로 天子
의 자리를 말하는 데, 곧 황제의 자리를 이르는 말이다.
九 : 아홉 구(乙/1획)
五 : 다섯 오(二/2획)
之 : 갈 지(丿/3획)
分 : 직 분(刀/2획)
옛날 사람들은 숫자 9가 陽數(奇數) 중에서 가장 큰 수로서, 尊貴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숫자 5(註3)는 陽數 중 중간의 위치에 있어 調和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9와 5를 조합해 놓으면 존귀하고 조화로워 더 이상 상서로울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제왕의 상징으로 여겼다.
周易의 卦에서 아래로부터 다섯번째 陽爻를 ‘九五’라고 하는데, 첫 번째 괘인 乾卦의 다섯 번째 효(爻) 역시 陽爻인 ‘九五’로서, 天子의 자리를 의미한다.
주역에서는 이것을 풀이하여 “九五(아래에서 다섯 번째 양효), 나는 龍이 하늘에 있다. 대인을 보기에 이롭다(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라 했다.
또 주역의 繫辭 상편에는 “왕이 된 자는 九五의 부귀한 자리에 거한다(王者, 居九五富貴之位)”고 했다.
여기에서 황제의 자리를 이르는 ‘九五之(註4)分(註5) ’이 나왔다. ‘九五之尊’이라고도 한다.
또한 , 九六은 만물이 생겨나는 道를 뜻한다.
주역에 ‘九六’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의 뜻은 陽과 陰 또는 음양이 어우러져 만물이 생겨나는 道를 가리킨다.
여기에 아홉을 의미하는 ‘구(九)’의 발음(지우)이 영원함을 의미하는 ‘구(久)’의 발음(지우)과 비슷하기 때문에 九는 오래 지속되는 것, 나아가서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숫자 九(아홉 구, 모을 규)는 ❶지사문자로 옥돌 玖와 同字이다. 다섯 손가락을 위로 펴고 나머지 손의 네 손가락을 옆으로 편 모양을 나타내어 아홉을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九자는 숫자 '아홉'을 뜻하는 글자이다. 九자는 乙(새 을)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새'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九자의 갑골문을 보면 사람의 손과 팔뚝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고대에는 또 又 ㅂ字처럼 사람의 손을 3개의 획으로만 표기했었지만 九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구부러진 팔뚝까지 그린 것이다. 九자는 구부린 사람의 팔뚝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도 '팔꿈치'였다. 그러나 후에 숫자 '아홉'으로 假借
되면서 본래의 의미는 더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후에 肘(팔꿈치 주)자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九(구, 규)는 ①아홉 ②아홉 번 ③많은 수 ④南方, 남쪽 ⑤陽爻, 周易의 陽數 ⑥오래된 것 ⑦많다 ⑧늙다 그리고 모을 규의 경우는 ⓐ모으다, 모이다(규) ⓑ합하다, 합치다(규)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아홉 겹으로 구중궁궐의 준말을 九重, 많은 영토를 九有, 아흔의 한자어를 九十, 한 해 가운데 아홉째 달을 九月, 나라의 영토를 九州, 넓은 하늘을 九乾, 아홉 마리의 소를 九牛, 땅의 가장 낮은 곳을 九地, 사방으로 곧게 십자로를 이루고 옆으로 여러 갈래로 된 도시의 큰 길을 구규(九逵), 맑게 갠 가을 하늘을 구민(九旻),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를 九尾狐, 아홉 층으로 된 탑을 九層塔, 아득히 먼 거리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九萬里, 구멍이 아홉 뚫린 탄을 九孔炭,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을 九節草, 아홉 마리의 봉황을 수놓은 베개를 九鳳枕, 여러 가지 꽃무늬를 놓은 아름다운 장막을 九華帳, 아홉 마리 소에 털 한가닥이 빠진 정도라는 뜻으로 아주 큰 물건 속에 있는 아주 작은 물건을 이르는 말을 九牛一毛, 아홉 번 구부러진 간과 창자라는 뜻으로 굽이 굽이 사무친 마음속 또는 깊은 마음속을 이르는 말을 九曲肝腸, 아홉 번 꺾어진 양의 창자라는 뜻으로 세상이 복잡하여 살아가기 어렵다는 말을 九折羊腸, 아홉번 죽을 뻔하다 한 번 살아난다는 뜻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고 간신히 목숨을 건짐을 이르는 말을 九死一生 등에 쓰인다.
* 註 3, 숫자 5 - 다섯 五는 ❶지사문자로 다섯 乄(오)와 同字이다. 숫자는 하나에서 넷까지 선을 하나씩 늘려 썼으나 다섯으로 한 단위가 되고 너무 선이 많게 되므로 모양을 바꿔 꼴로 썼다. 五는 나중에 모양을 갖춘 字形이다. ❷상형문자로 五字는 ‘다섯’이나 ‘다섯 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五자는 나무막대기를 엇갈려 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나무막대기나 대나무를 일렬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보통 1~3까지는 막대기를 눕히는 방식으로 숫자를 구분했지만 4를 넘어가면 혼동이 생겼다. 이것을 구별하기 위해 막대기를 엇갈리게 놓는 방식으로 표시한 것이 바로 乄 字 이다. 갑골문에서의 五자는 二사이에 X자를 넣은 방식으로 표기했었지만, 해서에서는 모양이 바뀌었다. 그래서 五는 다섯이나 다섯 伍의 뜻으로 ①다섯, 다섯 번 ②다섯 곱절 ③五行(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④帝位(제왕의 자리) ⑤별의 이름 ⑥다섯 번 하다, 여러 번 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떳떳한 도리를 五倫, 한 해 가운데 다섯째 달을 五月, 그 달의 다섯째 날 또는 다섯 날을 五日, 음률의 다섯 가지 음을 五音, 다섯 가지 곡식(쌀 보리 조 콩 기장)을 五穀, 다섯 가지의 감각(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五感, 다섯 가지 빛깔 곧 푸른빛 누른빛 붉은빛 흰빛 검은빛의 다섯 가지 색을 五色, 다섯 가지 계율이나 계명을 五戒, 퍽 많은 수량을 나타내는 말을 五萬, 다섯 가지 욕심이라는 五慾, 사람이 타고 난 다섯 가지 바탕을 五事, 짙은 안개가 5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五里霧中, 오십보 도망한 자가 백보 도망한 자를 비웃는다는 五十步百步, 오십이 되어 천명을 안다라는 五十天命, 다섯 수레에 가득 실을 만큼 많은 장서라는 五車之書, 좀 못하고 좀 나은 점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五十笑百, 닷새에 한 번씩 바람이 불고 열흘만에 한번씩 비가 온다는 五風十雨 등에 쓰인다.
* 註 4, 之 - 갈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音을 빌어 代名詞나 語助辭로 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발 止 字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갈 去 字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之次, 풍수 지리에서 來龍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註 5, 分 - 나눌 分(나눌 분, 푼 푼)은 ❶회의문자로 푼의 뜻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된다. 칼 刀와 나눔 八의 合字로 물건을 나눔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分자는 ‘나누다’나 ‘베풀어 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分자는 八(여덟 팔)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八자는 사물이 반으로 갈린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사물이 나누어진 모습을 그린 八자에 刀자가 결합한 分자가 물건을 반으로 나누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分자는 사물을 반으로 나눈 모습에서 ‘나누어 주다’나 ‘베풀어 주다’라는 뜻을 갖게 됐지만, 물건이 나뉜 후에는 사물의 내부가 보인다는 의미에서 ‘구별하다’나 ‘명백하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分(분, 푼)은 (1)分稅 (2)分數 (3)十進 級數의 단위의 하나. 곧 하나를 열에 나눈 것의 하나. 1의 1/10. 時間의 단위. 한 시간을 60으로 나눈 그 하나 (4)角度. 경위도 등의 1도를 60으로 나눈 단위의 하나 (5)길이의 단위 1치를 10으로 나눈 그 하나 (6)1돈을 10으로 나눈 그 하나 (7)1割을 10으로 나눈 그 하나 (푼)으로 읽힐 때, ㊀옛날 엽전의 단위. 한돈의 1/10 ㊁무게의 단위. 한돈의 1/10 ㊂길이의 단위. 한 치의 1/10, 등의 뜻으로 ①나누다 ②나누어 주다, 베풀어 주다 ③나누어지다, 몇 개의 部分으로 갈라지다 ④區別하다, 明白하게 하다 ⑤헤어지다, 떨어져 나가다 ⑥區別, 다름 ⑦나누어 맡은 것, 몫 ⑧分數 ⑨運命, 因緣 ⑩身分, 職分 ⑪길이, 무게, 時間, 角度, 貨幣 따위의 단위 ⑫24節氣의 하나,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을 때, 그리고 ⓐ푼(엽전의 단위)(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구분할 區, 나눌 班, 나눌 配, 나눌 반(頒),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합할 合이다. 용례로는 어떤 사물을 이루고 있는 각 성분이나 요소를 갈라냄을 分析, 어떤 갈래에 달린 범위나 부문을 分野, 틀림없이 또는 확실하게를 分明, 나누어서 넘겨 줌을 分讓, 서로 나뉘어서 떨어지거나 떨어지게 함을 分離, 찢어져 갈라짐을 分裂, 생산에 참가한 개개인이 생산물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누는 일을 分配, 일을 나누어서 맡음을 分擔, 종류를 따라서 나눔을 分類, 따로따로 흩어짐을 分散, 서로 구별을 지어 가르는 것을 分別, 분량이 적적하여 모자람이 없음을 充分, 전체를 몇으로 나눈 것의 하나하나를 部分, 처리하여 다룸을 處分, 명목이 구별된 대로 그 사이에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나 분수를 名分, 따로따로 갈라 나눔을 區分, 개인의 사회적인 지위 또는 계급을 身分, 몫몫이 나누어 줌을 配分, 남에게 어질고 고마운 짓을 베푸는 일을 德分, 마음에 생기는 유쾌 불쾌 우울 따위의 주관적이고 단순한 감정 상태를 氣分, 화합물을 조성하는 각 원소를 成分, 자기에게 알맞은 신분 또는 의무로 마땅히 하여야 할 직분을 本分, 영양이 되는 성분을 養分, 서로 소매를 나누고 헤어짐이란 말로 이별을 뜻하는 말을 分手作別, 분가함 또는 별거함을 分門異戶, 얼마 안 되는 돈과 곡식을 分錢升量, 사리를 분별하는 마음가짐을 分別事識, 자기 분수에 만족하여 다른 데 마음을 두지 아니함을 安分知足, 두 과부가 슬픔을 서로 나눈다는 뜻으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한다는 말을 兩寡分悲, 한번 서로 인사를 한 정도로 아는 친분을 一面之分,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중대한 의리와 명분을 大義名分 등에 쓰인다.
後漢 말기 간신 董卓이 조정이 어지러운 틈을 타 수도 낙양을 장악했다.
그러고는 낙양에 있는 것보다는 자신의 기반이 있는 농서(隴西)와 가까운 장안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獻帝를 위협하여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낙양을 완전히 불태워 버렸다.
낙양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화재를 진압하던 孫堅은 少帝 재위 시 十常侍의 亂 때 잃어버린 옥새를 우물에서 찾아냈다.
손견의 참모 程普가 옥새의 내력을 자세히 설명해 주면서 손견에게 말했다. “지금 하늘이 옥새를 주공에게 주었으니 분명 구오지위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今天授主公, 必有登九五之分). 이곳에 머무르지 말고 고향 강동으로 돌아가 큰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손견의 고향 사람이 袁述에게 이 사실을 몰래 일러바치고 말았다.
이 외에도, 황제의 자리를 양위받으러 장안에 온 동탁에게 呂布가 인사를 하자 동탁이 여포에게 “내가 황제 자리에 오르면 너는 천하의 병마권을 가지게 된다(吾登九五, 汝當總督天下兵馬)”고 말한 구절도 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三國演義에 나온다.
傳國玉璽(註6)는 진시황이 화씨지벽(註7)으로 만든 옥새로, 한고조 유방을 거쳐 한나라 황제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다가, 한나라를 찬탈하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을 거쳐 후한의 광무제의 손으로 넘어갔다가 후한 말 십상시의 난 때 잠시 잃어버린 것을 손견이 발견한 것이다. 이 옥새는 원술의 손에 들어갔다가 다시 조조의 손에 떨어졌다.
* 註 6, 傳國玉璽 - 나라에서 나라로 전해지는 옥새라는 뜻으로, 황제를 상징한다. 秦나라의 始皇帝 政이 和氏之璧으로 만든 옥새에서 유래되었다.
傳國璽라고도 한다. 화씨지벽은 천하의 名玉으로, 진나라 시황제가 이것을 손에 넣어 재상 李斯로 하여금 '受命於天 旣壽永昌(하늘에서 받은 명이여, 그 수명이 길이 번창하리라)'이라는 문구를 篆書로 새겨 도장을 만들게 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시황제가 배를 타고 洞庭湖 어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뻔하였다. 시황제가 황급히 옥새를 호수에 던지고는 신령께 빌자 물결이 잠잠해졌다.
8년 뒤 시황제의 사신이 밤에 華陰 지방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돌연히 어떤 사람이 나타나 사신의 길을 가로막고는 용왕이 돌아가셨기에 돌려준다며 옥새를 놓고 바람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 옥새는 시황제의 손자인 자영이 咸陽을 함락시킨 劉邦에게 바쳤으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그 자손들인 漢나라 황제에게 대대로 전해졌다.
前漢을 멸망시키고 新나라를 세운 王莽이 잠시 이 옥새를 빼앗았으나, 後漢을 세운 光武帝가 되찾았다.
옥새는 후한 말년의 혼란기에 유실되었다가 孫堅과 元述을 거쳐 曹操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隋나라와 唐나라, 後梁과 後唐까지 전해지다가 후당의 마지막 황제가 분신할 때 사라진 것으로 전한다.
이후 몇 차례 전국옥새를 찾았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모두 진품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전국옥새는 진시황 이후로 천하를 제패하는 사람이 소유함으로써 황제나 皇權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으며, 이를 차지하는 사람이 곧 천하를 차지하는 것으로 여겼다.
* 註 7, 和氏之璧 - 화씨의 구슬이라는 뜻으로, 천하의 名玉을 이르는 말로써 어떤 난관도 참고 견디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韓非子 和氏篇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 전국시대 때, 楚나라에 和氏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옥을 감정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楚山에서 옥돌을 발견하여 厲王에게 바쳤다. 여왕이 옥을 다듬는 사람에게 감정하게 하였더니, 보통 돌이라고 했다. 여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이려 했다고 생각하여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에 처해 그는 왼쪽 발을 잘랐다.
여왕이 죽고 武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또 그 옥돌을 무왕에게 바쳤다. 무왕이 옥을 감정시켜 보니 역시 보통 돌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무왕 역시 화씨가 자기를 속이려 했다고 생각하고는 오른쪽 발을 자르게 하였다.
무왕이 죽고 文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초산 아래에서 그 옥돌을 끌어안고 사흘 밤낮을 울었다. 나중에는 눈물이 말라 피가 흘렀다.
문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 “천하에 발 잘리는 형벌을 받은 자가 많은데, 어찌 그리 슬피 우는냐.”고 까닭을 물었다.
화씨가 “나는 발을 잘려서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벌을 준 것이 슬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문왕이 그 옥돌을 다듬게 하니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 명옥을 그의 이름을 따서 ‘和氏之璧’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그후 이 화씨지벽은 趙나라 惠文王의 손에 들어갔는데, 秦나라 昭襄王이 이를 탐내 15개의 城과 맞바꾸자고 하는 바람에 양국간에 갈등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連城之璧’이라고도 불렸다. ‘화씨지벽’은 또 ‘변화지벽(卞和之璧)’ ‘和璧’이라고도 한다.
이 고사는 한비자가 전국시대의 어리석은 군주들을 깨우치기에 유능한 법술가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화씨의 구슬을 비유로 들어 설파한 것이다.
사실 구슬은 처음에 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빛을 발하면 이미 차지하기 어렵다. 한비자는 우매한 군주의 인물 알아보기의 어려움과 지조 있는 선비들의 처신하기 어려움을 화씨의 구슬에 빗대어 이야기한 것이다.
하늘에는 절기가 있어 절기기운 따라 春夏秋冬으로 돌면서 순환하고, 온 세상 만물 또한 生長盛衰滅絶로 돌고 돌아 순환하는 것이니, 18도 돌고 돌아 81이 되었다가 다시 18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기실 18이나 81이나 같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같이 모든 萬象은 처음과 끝이 없이 서로 맞물려서 순환하기에 生卽死요. 死卽生인 것이기에 生死一如라 한다.
이 말은 곧 萬象은 모두 空이라는 뜻이다. 고로 一切皆空이다. 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虛象에 끄달려서는 안되고 內面에 잠재되어 있는 참 나(眞我)를 바로 볼수있어야 한다.
神族인 桓民族에게 고래로 부터 전해내려오는 온 우주의 원리를 기록한 天符經은 "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이라 하여서 이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민족의 얼과 홍익인간 정신을 담고 있고 우주의 변화 원리를 해석한 81字(공교롭게도 道德經도 총 81장 임) ‘천부경’의 처음과 마지막 네 글자도 바로 "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하나의 시작은 시작이 없는 하나이고 하나의 끝남은 끝이 없는 하나)"이다.
이는 마치 선문답처럼 사유의 세계로 깊이 빠지게 만드는 말이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끝도 시작도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우주 생성변화의 원리를 담고 있다. 이는 ‘하나(1)’에서 시작하여 ‘열(10)’
까지 쌓이다가 다시 ‘無’로 돌아가는 생성과 소멸의 우주 변화 원리를 숫자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세상 만물은 숫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해하고 ‘삼각형에서 두변의 제곱의 곱은 나머지 한 변인 빗변의 제곱과 같다’라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만들어냈다. 피타고라스는 이 정리원칙을 당시 그리스인들이 연주했던 7현으로 된 수금(Lyre)을 연주하다가 생각해냈다고 한다. 7개의 현이 만들어내는 음의 조화를 청각에서 세상 만물의 조화로 사유를 확장시킨 것이다.
단군이후 오천만년 이상의 우리 역사를 대비해
본다면 기원전 5-6세기로 추정되는 피타고라스 생몰 연대보다 반세기를 더 올라가 우리 한민족에게는 이미 천부경이라는 지적 생산물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볼때 한민족 고유의 사상과 철학은 어느 민족 보다 앞서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해서 21세기에는 서양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우리의 생각으로 한 번 더 걸러보는 지적 정화작업이 필요하다.
근래 한류의 흐름이 K-팝과 K-푸드 등으로 외국인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데, 천부경과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을 K-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21세기 인공지능 시대 우리의 삶을 재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철학사상은 한 시대 삶의 방향타이자 시대정신을 지탱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천부경처럼 세상의 사물과 현상을 숫자로 풀어내는 것은 현실에 경계와 질서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인간의 삶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그 경계와 질서가 허물어지게 되면 우리의 삶은 혼돈 그 자체의 아마게돈 세상이 되어버린다. 세월호 사건이나 이태원 사태 등 우리에게 정신적 판단과 결정의 혼란과 혼돈을 초래했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기술과 인문학이 융합된 디지털융합인문학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한 가지 문제의 끝은 곧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라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전국시대 宋나라 蒙 출신으로, 老子와 더불어 제자백가 중 道家의 대표적인 인물인 莊周의 蝴蝶夢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莊子 內篇 중 두 번째 章인 '齊物論'에서 나오는 '蝴蝶之夢'에서 莊周는 말한다.
"예전에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나비가 진실로 기뻐 제 뜻에 맞았더라! (그래서 자기가) 장자임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깨고 보니, 곧 놀랍게도 장자였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알지 못하겠구나. 장자와 나비는 틀림없이 구분이 있는 것인데. 이를 일컬어 '物이 되었다'고 한다(昔者莊周夢為蝴蝶,栩栩然蝴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
俄然覺,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為蝴蝶與,蝴蝶之夢為周與?周與蝴蝶,則必有分矣。此之謂物化)."
장자는 나비의 꿈을 꾸었을 때 '덧없거나 허망하다'
는 감정보다는 '놀랍고도 신기하다'는 감정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꿈을 꾼 것을 넘어서서 마치 스스로가 '나비가 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자연 사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혀라는 이야기로 읽혀지기도 한다. 이런 해석에서는 내가 언제든지 자연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요구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눈에 보이기에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구분이 있다. 그러나 만물 物化의 원리, 즉 자연의 커다란 道 속에서 그것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느 한 관점을 갖고 고착될 나(我)는 존재하지 않으며, 만물에는 구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장주의 나비 꿈'은 역으로 '나비의 장주 꿈'과 차이가 없다. 더 나아가 내가 원래 장주라는 사람인지 나비인지는 중요하지도 않다. 道는 그저 끊임없이 역동하는 탓에, 그런 인위적인 구분은 오로지 인간의 관점일 따름이다. 제물론의 다른 부분들을 봐도 장자는 역동하는 도를 인간의 知로 정의내릴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를 통해 장자는 그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불변하는 가치는 존재하지도 않고, 세상만물은 모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적인 가치임을 말하고자 한다.
서양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계속 되어왔기에 신화적 사유에서 자주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각은 근대에도 보인다.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확신도 이른바 '꿈의 가설'을 통과한 이후에 나오는 진리다.
물론 근대 이후에 이러한 사유는 점점 서양철학사에서 사라지지만, 현대로 들어가면서 다시 프리드리히 니체가 관점주의적 태도를 취하면서 장자와 유사한 생각들을 펼쳐나간다. 그리고 니체의 영향을 받은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이런 사유들이 오히려 철학계 내에서 흔히 보여지는 보편적인 생각들이 되어 버렸다. 질 들뢰즈가 '동물 되기'라는 철학적 사유를 진행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동양에서도 불교가 바로 이 분야 관련연구의 정점을 찍는 사상이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고찰되어 온 주제였기도 하다. 해서 초기 경전과 불교 설화들을 살펴보면 인간이 되었다가 동물이 되었다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장자사상은 현재까지도 불교사상과 매우 많이 얽히여 있다고 볼수있다.
애당초 이 사상은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쉽게 고민에 빠질 만한 주제이기 때문에 반대로 관련 논의가 없었던 곳을 찾기가 더 힘들다.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논하는 주제는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사고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서양과 동양으로 구분해서 한쪽을 우월, 혹은 열등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장자의 생각에도 맞지 않거니와 매우 잘못된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서로가 자각한 현실이 사실은 꿈속에서 자각한 자아였을지 당사자는 구분하거나 알 수 없다는 이러한 철학과 사고실험의 발상은, 코즈믹 호러장르의 가공의 신화에 등장하는 아자토스의 개념이나, 개인의 꿈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생각의 주체가 바뀌긴 했지만 시뮬레이션 우주론과도 어느정도 맥락이 일치한다.
그럼, 다시 18과 81세의 차이로 돌아가 보자.
사랑에 빠지는 18세, 욕탕에서 빠지는 81세.
도로를 폭주하는 18세,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
마음이 연약한 18세,다리뼈가 연약한 81세.
두근 거림이 안 멈추는 18세, 심장질환이 안 멈추는 81세.
사랑에 숨 막히는 18세, 떡먹다 숨 막히는 81세.
학교 점수 걱정하는 18세, 혈당 당뇨 걱정하는 81세.
아무것도 철 모르는 18세,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 찾아나서는 81세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고,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며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과연, 인간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근래 부쩍 "100세 시대"라고 하니 100살 까지는 살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아래 자료를 보면 80세까지 사는 것도 대단한 행운이요, 축복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연령별 생존 확률★
70세까지 생존 확률은 86%
75세까지 생존 확률은 54%
80세까지 생존 확률은 30%
85세까지 생존 확률은 15%
90세까지 생존 확률은 05%
90세가 되면 100명중 95명은 저 세상에 가고
5명만 남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확률적으로 살 수 있는 나이는 75세~78세다.
아파트나 돈은 80세까지 쓸 요량으로 하고
그 다음의 일은 나 몰라라 한 후 당장 오늘부터 친구를 찾아 나서라.
그 나이에 저축해서 무엇하나?
좋은 일도 많이 하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웃고 사시라.
그래서 오늘의 중요함을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내일은 누구도 알수없는 것이니 내일 일은 내일이 오면 그때가서 생각하면 되기에 굳이 미리 생각할 이유가 없지않겠는가.
오늘도 즐겁게 ,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고,
평생토록 건강하길...
전유진 - '멍에'
https://youtu.be/asmKLBG0rRY?si=PFMGX2yaHp_bUkUN
첫댓글 그래서
오늘이 가장 젊은날
바로 지금 이 제일 소중합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나
바로 나
좋은 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