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음악의 대부, 영혼의 기타연주. 'Carlos Santana'
1947년 7월 20일 그룹 산타나의 리더 카를로스 산타나가 멕시코의 Autlan De Navarro란 곳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디바딥 카를로스 산타나"Devadip Carlos Santana". 디바딥은 신의 눈과 등불 그리고 빛이란 뜻이다.
뮤지션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때부터 음악에 흥미를 느낀 그는 5살때 클래식 바이얼린을 배우다가 곧 기타로 전향했다. 그리곤 10대 중반부터 티주아나 나이트클럽 등에서 음악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룹 산타나는 196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되었다. 카를로스 산타나는 196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는데 이 무렵 그는 10대의 나이에 벌써 직업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1966년 그는 동갑내기로 키보디스트 겸 보컬리스트인 그렉 롤리"Gregg Rolie", 등과 함께 산타나 블루스 밴드 "Santana Blues Band"를 결성한다. 그룹 이름이 산타나로 정해진 것은 밴드 멤버중 누군가의 이름을 내세우자는 취지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초기부터 이 밴드가 산타나의 것은 아니었다. 이들 외에도 베이스 주자 데이빗 브라운"David Brown"과 카를로스 산타나의 고등학교 친구인 콩가 연주자 마이클 카라벨로"Michael Carabello" 등이 가담했다. 이들은 계속 멤버 교체를 겪었는데 팀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1967년 중반엔 그룹 이름을 지금의 산타나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이들은 프로모터인 빌 그레이엄"Bill Graham"의 눈에 띄어 『필모어 웨스트"Fillmore West"』 극장 무대에서 정식 데뷔를 하게 된다.
19세때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진출해 마이크 브룸필드, 알 쿠퍼 등의 앨범 [The Live Adventures Of Mike Bloomfield And Al Kooper]에 참여해 주목을 받았고, 곧이어 산타나 블루스 밴드(Santana Blues Band)를 결성했다. 이 그룹은 후에 ‘Santana'로 이름을 바꾸고 CBS 레코드와 계약을 맺어 69년 데뷔앨범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Black Magic Woman', 'Gypsy Queen', 'Samba Pati' 등이 수록된 2집 [Abraxas]와 3집 [Santana Ⅲ]등을 제작하며 70년대 록기타의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이들은 『필모어 웨스트』에서 1968년 12월 19일부터 22일까지의 라이브를 레코딩하게 된다. 하지만 이 앨범은 30여년이 지난 1997에야 "Live at the Fillmore 1968"이란 타이틀로 발매된다. 1969년에는 산타나가 6인조 편성으로 바뀌게 되었고 『우드스톡』 무대에 서는 한편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이 발매된다.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5위권에 오르는 한편 2년여 동안 차트에 머무는 인기 상품이 된다. 여기서는 Jingo와 Evil Ways 등의 히트 싱글이 터져나온다. 한편 산타나가 연주한 Soul Sacrifice는 『우드스톡』의 하이라이트로 기록되며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한 우드스톡 사운드트랙 앨범에도 수록된다.
2집 [Abraxas]는 1970년 발매되어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애당초 이들에겐 없었다. 400만장이 팔리며 1년 반 동안 차트에 머문다. Black Magic Woman, Oye Como Va 등의 히트 싱글이 나왔다. 그 해 말 이들은 당시 10대였던 기타리스트 닐 숀"Neal Schon"을 가감시켜 7인조로 밴드를 확대한다. 이 라인업으로 이들은 3집 [Santana III]를 발매한다. 1971년 가을 발매된 이 앨범 역시 차트 1위에 오르며 2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다. Everybodys Everything과 No One to Depend On 등의 히트 싱글이 나왔다. 하지만 이 앨범을 끝으로 이들의 초기 시대는 가고 카를로스 산타나가 그룹의 리더로 확실하게 자리하며 멤버 교체 역시 겪게 된다.
또한 그는 73년에 마하비슈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의 존 맥러플린 등과 조인트 앨범 [Love, Devotion, Surrender]를 발표해 종교적 색채 짙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74년에는 [Greatest Hits], [Lotus], [Illuminations], [Borbollett] 등 무려 4매의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Moonflower](77)에서 93년 [Sacred Fire]에 이르기까지 재즈에서 블루스, 라틴 등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의 첫 라이브 앨범인 [Moonflower]는 1977년 발매되어 톱 텐에 올랐는데 앨범이 플래티넘을 기록한데는 좀비스"Zombies"의 곡을 리메이크한 Shes Not There가 싱글 차트 20위까지 오른 덕도 있었다. 한편 카를로스 산타나는 1979년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인(그 이전까지는 듀오 앨범을 주로 작업했다.) [Oneness/Silver Dreams - Golden Reality]를 발매하기도 한다.
1986년 산타나는 그간 밴드를 거쳐간 수많은 뮤지션들이 모여 결성 20주년 기념 콘서트를 갖는다. 하지만 밴드 자체의 인기도는 계속 내리막을 걸어 발매되는 앨범이 차트 100위권에 턱걸이하는 부진을 겪기도 하는데 그런 반면 카를로스 산타나는 솔로 앨범 [Blues for Salvador]의 동명 타이틀 곡으로 그의 첫번째 그래미상"Best Rock Instrumental Performance 부문"을 거머쥐는 기쁨을 누린다. 1988년 가을엔 레이블 계약 20주년을 기념한 앨범 [Viva Santana!]가 발매되기도 한다. 1990년 [Spirits Dancing in the Flesh] 앨범을 끝으로 이들은 22년간 몸담았던 『콜럼비아』 레이블을 떠나게 된다. 이 앨범 역시 차트 100위권에 진입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남미의 정열과 블루스의 끈적끈적함, 그리고 재즈의 편안함이 함께 공존하는 그의 기타는 한번만 들어도 쉽게 와 닿는 풍부한 악상과 동양적인 애상감을 매력으로 한다. 도리안과 블루노트 스케일이 독특하게 접목된 그 연주 스타일은, 초기엔 피킹의 어설픔이 자주 보여지곤 했으나 워낙 뛰어난 멜로디 전개와 아무도 필적할 수 없는 끈적끈적한 맛으로 인해 기교와는 무관한 명연을 들려주었다. 그의 대표적인 주법이라면 블루스에 기초한 뜨거운 감촉의 벤딩과 솔로 절정부에서의 5∼7잇단 프레이즈의 조합, 그리고 속삭이듯 나긋나긋하게 프레이즈 사이를 접속시켜주는 슬라이드 등이다.
사 용 장 비
◇ Paul Reed Smith(79, 81), Gibson L-65(73), Yamaha Solid, Yamaha Custom SG-2000, Gibson Les Paul ◇ Reed Smith Custom driving Mesa Boogie Amp, Fender Twin Reverb, Marshall Amps 100W,12”Altec Speakers ◇ Maestro Phase Shhifter, Ibnez와 Boss Chorus Pedals,EchoMachine, Wah Wah Pedal(Morley Mut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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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로파(쥬피터가 사랑했던 여인. 목성(주피터)의 달중에 생명체가 잇을 가능성 높은 별)도 죽여주는 기타연주인데
감사합니다.8월도 마지막 주네요.마무리 잘하시고 줄거움이 가득한 저녁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