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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레스크 이층 회의실이 길어서 일부만 사진에 담았고 왼편 가운데 마이크를 잡고 인사말씀 하시는 이문휘(문) KFI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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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최학주 저자 ... 회원들이 열심이 듣고 있는 모습 ..왼쪽 부터 이강홍(상) 한창섭(문) Mrs. 김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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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 가는 얼굴 보이기 싫은데 찍어서 보낸것이라 여기 올립니다 제손에 펜이 보이시죠 저는 언제나
기록하는 버릇이 있어요 회의 때 설교 .. 강의를 받을때는 깨일만큼 기록 하는 버릇입니다
어제저녁 5/26/11 저녁 뉴저지 Fort Lee 에 위치한 강용원 (음) 동문 회사의 이층에서 30 여명의 조촐한
모임(장소 관계로 제한)을 KFI 이문휘(문) 주최로 Forum 을 갖었다.
연제는 "현대사의 최남선 작업 평가", 세시간 넘어 심도있는 토론의 간담회이었다.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 (나남 출판사) 을 최근 펴낸 육당 최남선(1890-1957) 의 장손인 최학주(공)
박사가 책을 써야만 한 이유를 다른 사람들을 처음 생각한것 보다는 자기 주변 가족 친가 일가들의 2세들에게
조부를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하여 영문으로 시작한것을 우선 한국어로 발간되게 되었다고 한다.
최남선은 정말 한국 근대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간 선조들중에서 신화같은 존재이며 마지막
삶은 진정 질고의 삶속에서 한국 백과 대사전만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 조부를 그리워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조부가 이세상을 떠나기 전 까지 17년을 일찍 사변중에 여윈 선친대신 조부이며 친부인 육당을
의지하고 장기를 함께 두는 친구로 자전거를 타기 좋아하시는 조부에게서 자기 재산 목록 1호인 자전
거 감추기 등등 마지막 돌아가시기전에는 항상 온돌방에서 하루종일 앉아서 대백과사전의 집필작업으
로 7-8시간 앉아계시므로 복사뼈에 생긴 굳은살로 아파하시어 면도칼로 조금씨 잘라내는 일등이며...
교동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대표로 읽어야 할 고별사를 대신 조부한테 떼 써서 적어주신것을 읽었
다는 최학주 박사는 10살 국민학교 어린이 특히 우이동 소원집 뒷동산 앞뜰로 뛰어다니던 손자로
그의 조부에게 말년에 꼬리처럼 붙어다닌 친일파에 대해서는 그시대를 우리가 재조명 하여야 한다
는 말을 잊지 않았다
신석우씨가 조선일보사를 구입할당시 8만5천원이라는 액수도 컸다고 하였는데 육당 최남선은
1906년 17세때 당시 현금으로 7만원을 그의 엄친 최헌규로 부터 받아 사업을 시작 하였는데 그때 쌀
한가마가 2원을 하던 당시라면 그 액수를 가히 짐작 할수 있다. 지금의 고등학교 1학년 쯤 된 아들에게 그런
액수를 준 육당의 부친이 있었기에 육당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것만이 아니라 고전 보존 사업과 계몽문화사업에 지금 화폐로 계산 하자면 400억원 가까이 된 그의 부
친 재산을 자금으로 사용하였기에 그분 돌아가시기전 말년에는 가세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까지 되었다.
남편을 사변중에 여윈 모친이 그의 경기여고 동창들과 은사들의 도움으로 교복 사업을 한것이 다행스럽게
잘되어 최학주 남매가 교육을 받을수 있게 되었고 그 험난한 세월 가족들에게 일어난 비참한 일들로 인한
가족들간의 문제조차 그의 모친인 맏며누리가 거의 모든것을 감당하였다.
고려 최영장군의 후예로 이씨조선에서 과거를 치룰수 없는 이씨 왕조의 방침으로 최씨 후예는 사업을
하게 되었고 후기 조선 시기에는 역관을 할수 있게 되어 그의 가족중에는 중기 이후에는 역관과 중인의
벼슬을 하게 되었다. 특히 육당의 부친 최헌규님의 한의원과 중국과의 사업이 극에 이루면서 서울 시내
가대 중의 5%가 그의 재산이 될수 있는 부를 창출하였고 그 부는 고스란이 육당 최남선의 계몽사업으로
사용되었다.
육당의 고민은 항상 조선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백성이 의식화 되려면 최초의 무기가 언어인데
그 당시 이씨조선은 두가지의 언어가 소통되었다고 생각하던 그는 언어를 정리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
였다. 관리급 선비급은 중국어를 사용한 중국식 한국어 그리고 서민은 언문도 모르고 그저 말로 의사
소통을 하므로 깨우칠수 없어서 언문을 보급을 하여 청년들을 깨우치는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17세
소년은 깨달았고 그일을 하다 간 그의 조부를 누구보다 그리워 하며 그의 조부에게 누가 뭐라던 그의
조부는 애국자 였고 학자였고 선각자 였다는 믿음을 보여 주었다.
회원중에서 우리나라 삼대 천재가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 라는 말을 하면서 그당시 우리가 살지 않은
그시절에 누가 친일파고 누가 친일파가 아닌가? 그것은 종북 좌파들이 우리 현대사를 왜곡시키려고
만들어낸 그들의 슬로간이라고 하였다 .
공대 화공과를 졸업후 1967년도에 도미한 그는 공부를 할 당시에만 보스턴에 살았고 40여년간을
뉴저지에서 살고 있다 그의 부인 김여애(문)는 영문으로 번역하여 곧 출판사와 계약 되는대로 출간될
예정이다. 최박사 내외는 남매를 슬하에 두었고 지금 현재 세 손주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얼마전에는 아들의 딸 백일에 얼굴에 온통 웃음이 하나인체로 70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우이동 뒷산을 뛰어다니던 국민학생처럼 어린시절 이야기를 하여서 한바탕 웃은적도 있다.
어제의 모임은 특별히 이문휘회장이 축제 분위기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불란서 치즈며 와인까지 ..
거기다 참석 여자분들을 위한 고급 와인도 잊지 않고 내어 놓았고 과일이며 스낵...
지금까지의 Forum 에서는 없엇던 화기 애애한 분위기 였으면 최박사는 그의 저서 25권을 25불씩
회원에게 내놓았고 그 수금액 전부를 이문휘회장에게 Korea Forum International 기금으로 희사
하였다.
첫댓글 공돌이라고만 생각한 최박사는 오히려 사학이나 철학을 하였다면 좋았을껄 하는 생각을 하게 할정도로 잘했다 ... 요즘 처럼 정신 나간 사학자들이 우리 현대역사를 왜곡 하고 김일성식으로 좌파눈으로만 보고 해석하고 김일성은 수령이고 이승만은 친미매국노이고 한국전에 공산군은 해방군이고 남한군은 침입군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 강만길 등 좌파 역사가들과 한판 붙어도 될만 하다고 생각되었다 아주 상황 설명과 시종일관 한국역사와 더부러 변천되는 그시대의 조부의 고민을 잘 설명하였다 .
KFI 모임이 어제였었군요!!어제 참석 하였으면 조았을것을~~~아쉽군요! 어제저녁 퇴근하는데 시간도 걸린데다가 마누라랑 어디 갈데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사진 두개가 모두 죽어 있네요!!
이그 .... 하여간 좋은 시간 놓친것만은 사실이고... 공돌이가 천재 조부님의 기를 타고 나서인지 전혀 공돌이 같지 않게 어쩜 어느 사학자가 와서 이야기 하듯 이씨조선 마지막 혼란 한당시의 유대치 오경석 박영효 김옥굔 유길준들 개혁을 도모 하려는 젊은이들과 중인들의 정보 수집으로 그들을 일깨운일 등하며 ..제약업을 하여서 따지는 명수라 따지는 것이 역사에서도 논리적인 해법으로 역사는 과학이라며 역사의 중요성을 정리하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시간 이었습니다
요즘 보내주신 <나의 할아버지 육당>을 잘 읽고 있습니다.
지난 3월 LA에서 장칠봉동문 출판회에 부부동반 하고 갔다가
각자 책을 한권씩 받은 바람에 한권의 여분이 잇어 오늘 선배님한데
우송 했습니다. 곧 받게 되실겁니다.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아 그러시군요.. 너무 감사합니다 실은 저도 장칠봉님께 받았는데 ... 감사합니다 그리고 열심이 읽으시고 이것이 영문으로 나오면 이세들에게 읽히는것이 좋을것 같아요 이미 그 부인으로 부터 영문 번역을 받아 읽엇는데 아주 잘되었어요 그리고 과거 육당님의 과거 문체를 현대화 하려는 작업도 곧 시작 될것입니다 욱당님의 작품을 읽으려면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데 현대문으로 나오면 참 감격할 만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
참석 회원 KFI 곽선섭님의 글입니다. 어제 모임에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배는 같은 golf모임회원이기도 한데 그렇게 뛰어난 인물인지는 몰랐읍니다. 특히 그가 최남선이름으로 주장한 내용중에 인상깊었던 것은, -국가관은 경제사적인 관점만이 다 가 아니고 문화사적인 면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그 시대는 정답이 없던 시대였다. -진실만이 역사다. -좌우 분열을 막기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던 분-그 책이 ‘아직도 정치적인 분단 상태라 언급하기 힘든 면이 남아 있다’등은 되새길 내용들이 많았읍니다.
저도 학주님의 여동생 동주님으로부터 책을 받아 잘 읽었습니다. 잘 배우지 못했던 1900년 전반부 한국 역사의 중요한 시기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국가관, 세계관, 역사관이 분명하셨던 육당 최남선님을 분명하게 알게되여 감사 합니다.
아 그러셨군요 맞아요 동생이 휴스턴에 사는것 알아요 어머님도 모시고 살다 모친께서 몇년전에 소천을 하시엇는데...아 같은 휴스턴이시군요 ..요즘 일기가 좀 더울때죠 건강하세요...
꼭 벼르고 있었던 포럼에 피치못할 사정으로 참석치 못했네요. 평소에 존경하는 최학주 선배님이 조부님을 회고하는 내용을 꼭 듣고싶었어요. 하필 그때에 한국에서 친구가 온다기에 사전에 예약통보도 못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으나 역시 피할수가 없었지요. 서울대총동창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친구이어서 이준행골든클럽회장님이 초청하신 디너에 친구와 함께 나갓었습니다. 흔하지 않은 귀한 기회를 미쓰했군요. 유홍준선배님도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고...이문휘회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코리아포럼 만세!!!
대영후배님 그렇지 않아도 참석할것이라고 메일을 받았는데.. 안보여서.. 월요일 패트리옷골프장에서 라운딩 하며 Even 을 치는 선수 같은 사람과 라운딩 하며 대영후배님의 드라이브샷이 저정도 일거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 거기서 만났으면 할말이 너무 많았다고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