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죽산리 산74
병인년 전주 숲정이 순교자 이명서 베드로 성인이 묻혔던 곳
중말과 어은동 공소 중간쯤 모싯골(당고개 재) 산 능선에는 천호 성지로 유해가 이장된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성인의 묘터가 있다.
병인년 순교자 이명서(베드로) 성인은 충남 임천 지방의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후 전주지방 귀동면 고수대(현 완주군 구이면)에 이사해 살았다.
치명 무렵에는 전주지방 소양면 유상리 성지동에서 살다가 조화서(베드로), 조윤호(요셉), 이명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1866년 12정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46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치명 후 그의 시체는 오윤택(사현)의 주선으로 다론 치명자들과 함께 소양면 유상리 뒷산 계곡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1920년 3월22일 이 베드로의 손자 이 아나톨(준명)이 그의 할아버지의 유해를 유상리 막고개에서
진안군 진안면 어은동 모시골에 자기 소유 산을 장만하여 자기 부모와 함께 이장하였다.
이 아나톨은 관청이나 교회로부터 아무런 허락도 받지 않고 이장하였기 때문에 서울의 드브레드(유) 보좌주교는 이로 인해
말썽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이번에는 서기 김 도마로 하여금 혼자서 이 베드로의 분묘를 방문 조사케 하였다.
서기 김도마가 이 베드로의 산소를 찾아 진안 모시골에 도착한 것은 1923년 8월 20일 오후 6 시경이었다.
이 아나톨, 이기섭. 조 비오, 박 안드에아 4명이 분묘 조사에 입회하였는데 이들은 3년 전 이 베드로의 유해를 전주 유상리 막고개에서
이곳으로 이장할 때 그 일을 말았던 사람들이다.
서기 김 도마는 이 베드로 분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도면을 그려 입회자들의 승인을 얻었다.
그리고 그 무덤이 이 베드로의 무덤인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집안일이니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 베드로의 무덤이 틀림없음을 증언하고 이에 날인하였다.
어은동은 옛 부터 깊은 피난지였다.
이곳에 신자 부탁이 시작된 것은 병인박해가 일이나자 각 지방에 서 많은 신자들이 숨어‘ 들어 온 때부터이다.
그래서 이 마을은 치명자의 후손들이 많다. 주민들은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1900년에 본당이 설립된 것도
신자들이 집결된 곳에 본당을 세우는 관례 때문이다.
지금도 1900년에 건립한 조선식 목조의 49평 건물이 전란 속에서도 용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모시골은 어온동에서 산 언덕을 넘으면 서북간에 자리한 골짜기다. 복자 이 베드로가 묻힌 곳은 정확히 말해서 모시골이 아니라
그 맞은편의 먹방산과 가는골 사이의 등성이다,
이곳에는 이 베드로와 그의 아들. 이 자오로 (성명 미상)와 자부(성본명 미상)가 나란히 묻혀 있었는데 이 베드로의 유해는 시복되던
1968년에 전주 복자 성당으로 옮겨지고 봉분만 남아있다. 이 베드로가 이곳에 이장된 것은 이 아나톨이 이 산을 매입하여 선산으로 하고
어은동에 살다가 그 골짜기에 묻혀 있는 부모를 조부와 함께 이장한 것이다.
아 베드로 성인이 순교한 후 그 의 아들과 며누리는 언제인지 물라도 어은동으로 이사왔다.
그러나 아나톨(준명)이 어려서 모친을 잃더니 독자인 아나톨이 철이 들 무렵 아버지마저 작고하고 말았다.
그뿐만 이랴 그는 이석봉이라는 독자를 두었으나 그도 17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유일한 생존자는 아나톨의 처 김마리아(성순. 83세)가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보다 아나톨이 22세가 위라고 하니 금년 105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아나톨을 만난 것이 22세 되던 해라는 것 외에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자오로 부부의 묘도 허물어 진체 보는 이외 마음융 쓸쓸하게 한다. 묘석도 없다.
다만 이 베드로의 빈 봉분 앞에 1947 년 당시 본당 신부였던 송남호(요셉) 신부가 세운 참나무 십자가가 을씨년스럽게 썩어가고 있다.
현재 이명서(베드로) 성인의 유해는 천호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
진안에서 장수 넘어가는 국도를 가다보면 오천 삼거리 주변에 진안 성당 평촌공소(석고개 성당)가 있다.
평촌리 부근인 모시골에 묘가 안치되었던 이명서 베드로 성인을 기념하는 성당으로 1982년 건립되었다.
주변 마을 신자들의 노동으로 세워진 공소이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 그러나 현재는 붕괴 직전이라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 순교자
◆ 성 이명서 베드로 (1821∼1866)
‘재덕’으로도 불렸던 이명서는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병인 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 성지동에 정착하였다.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하자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관장은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여 가장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강요하였지만,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열심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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