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世 |
36世 |
37世 |
38世 |
39世 |
40世 |
O 榮 |
圭 O |
鍾 O |
O 雨 |
相 O |
O 熙 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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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世 |
42世 |
43世 |
44世 |
45世 |
46世 |
在 O |
O 鎬 鍵 |
濟 濬 O |
O 東 |
丙 心 O |
O 敎 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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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世 |
48世 |
49世 |
50世 |
51世 |
52世 |
鎭 O |
O 求 |
根 O |
O 變 |
埈 O |
O 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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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世 |
54世 |
55世 |
56世 |
57世 |
58世 |
泰 O |
O 模 |
炫 O |
O 均 |
鎔 O |
O 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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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世 |
60世 |
61世 |
62世 |
63世 |
64世 |
秉 O |
O 炅 杰 |
基 O |
O 鈺 |
洛 永 O |
O 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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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世 |
66世 |
67世 |
68世 |
69世 |
70世 |
德 O |
O 周 起 |
鏞 O |
O 浩 洙 |
住 綵 O |
O 熏 燁 |
항렬표를 보시 O 榮 이렇게 표시된 것은 항렬표를 어디에 넣는가 하는 표시네요
다음은 평리성암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계통도 중시조로부터 15세인 열헌공 핵은 세 아들을 두셨습니다.
15세 열헌공 핵
16세 평리성암공 인정 - 동암공 진 - 송암공 세기
17세 사인공 부 - 헌남공 규 이암.익재.호군공파 국당.부정.상서.사인공파
18세 (아들없음) 전서공(원선), 검교공(의반)
24세 모산공파(해)
중시조 거명으로부터 15세인 열헌공 핵은 세 아들을 두셨는데
자료에 보시면 열헌공 핵의 3자 9손에 대한 자료가 있을 것입니다. 참고 하시구요
세아들 아홉손자가 다 과거에 급제 하였고 또 다섯분인가는 장원으로 급제하였다는 내용이랍니다.
사실 우리 경주이씨 종손은 평리성암공 인정이랍니다.
그렇다면 평리공파.성암공파.평리성암공파 다 비슷비슷한데 구분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으실것입니다.
**** 이 자료는 인터넷 자료에 올려진글 복사해 올려봄
중조 16세 평리공 인정(仁挺) 할아버님
* 찾아보고서도 정리가 안되는 경우가 있기에 카페에 올려져 잇는 내용과 족보에 기록된 내용을 참고로 정리하여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혹 잘못된 부분은 지적하여 주시면 수정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경주 이가는 신라시대 경주 알천 양산촌장이신 휘 알평 할아버지를 시조로 하는데 불행하게도 옛날 어느 때부터 즉 시조 할아버지다음부터 중시조이신 소판공 휘 거명 할아버지이전까지의 족보를 분실하여 그 세계가 전해지지 않고 전해지는 것도 정확하지가 않다.
그러다가 신라 말엽 소판 벼슬을 하신 휘 거명 할아버지부터 세계가 바로 세워지고 명확하게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소판공 휘 거명 할아버지를 중시조로 모시고 우리들은 1세로 부른다.
2세 금현 → 3세 금서 → 4세 윤홍 → 5세 승훈 → 6세 주복(弟 제정) → 7세 칭 → 8세 치련 → 9세 총섬 → 10세 춘정(弟 춘림) → 11세 현복(弟 녹천) → 12세 선용 → 13세 승고 → 14세 득견 → 15세 핵 → 16세 인정(弟 진. 세기) 할아버지로 이어진다.(휘 글자 생략)
중조 16세 휘 인정 할아버님이 즉 '성암공파' 또는 '평리공파'의 파조가 되시는 분이시다.
경주 이가의 대종가 집안의 종손이신 셈이다.
호는 성암(誠菴)이시고 벼슬은 문하평리(종2품)이셨다.
아버지 열헌공(悅獻公) 휘 핵 할아버지도 문하 평리 벼슬을 하셨다.
인정 할아버님은 고려 고종 임금(1214-1259)때 태어나셨는데 생몰연대는 찾지 못하였다.
문과에 수석 장원하시고 광주판관을 지내셨고 충열왕 2년(1276년) 우정언으로 있을 때 환관들이 왕을 수종한 공로로 벼슬길을 열어 주자는데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이 노하여 직책을 잃었다.
충열왕 6년에 내직으로 들어와 전중시사가 되었고, 첨의부 기거사인을 역임하였다.
사간원 사간으로 있을 때 공이 없으면서 벼슬을 내려주려는데 또 서명하지 않고 반대하다 가 다시 파직되었다.
뒤에 이지지의 상소로 복직되었으니 고려사의 실록에 '공의 성품이 굴강하여 무릇 배관하는데 반드시 그 공과를 살피고 구차히 서명하지 않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자는 만리(萬里)이시고 호는 열헌(悅軒)이시며 휘가 핵(핵)이시다.(중조 15세)
벼슬은 문하평리(종2품)이고 증직으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야]로 읽음, 정2품)이나 호를 따서 '열헌공'이라 후예들이 칭한다.
어머니는 김해 김씨이니 성품이 엄하셨다.
세 아들을 두시고 친히 서사(書史-經書와 史記)를 가르치셨다.
이 중 장자가 휘 인정(仁挺) 할아버지이시고, 차자가 휘 진(진) 할아버지이시며, 삼자가 휘 세기(世基) 할아버님이시다.(중조 16세)
○ 큰댁이신 휘 인정 할아버지께서는 아들 둘을 두셨으니 장자 사인공(舍人公) 휘 부(부) 할아버님과 차자 헌납공(獻納公) 휘 규(규) 할아버님을 두셨는데 장자이신 사인공 할아버지께서는 자식을 두지 못하셨다.(중조 17세)
이로 인하여 17세손을 기준으로 대파로 나뉘었는데 17세 휘 부 할아버지는 대파명이 없는 것으로 족보에 나타나 있다.(경주이씨 대종보 총편 204쪽)
족보에서는 16세 인정 할아버지의 세계로 차남인 헌납공 휘 규 할아버지께서 평리공파(評理公派)의 파조로 나타나 있다.(중조17세)
○ 중조 15세 열헌공 휘 핵 할아버지의 차자이시고 16세 평리공 휘 인정 할아버지의 동생인 동암공(東菴公) 휘 진(진) 할아버지께서는(중조 16세) 세 아들을 두시니 장자가 이암공(怡庵公) 휘 관(琯) 할아버지이시고, 차자가 익재공(益齋公) 휘 제현(齊賢) 할아버지이시며, 삼자가 호군공(護軍公) 휘 지정(之正) 할아버지이시다.(중조 17세)
휘 진 할아버지의 세 아들 중 첫째이신 휘 관 할아버지는 이암공파, 둘째이신 휘 제현 할아버지는 익재공파, 셋째이신 휘 지정 할아버지께서는 호군공파 등 대파의 파조를 이루신다.
○ 또 중조 15세 열헌공 휘 핵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이신 송암공(松巖公) 휘 세기(世基 중조 16세) 할아버지께서는 네 아들을 두시니 첫째가 국당공(菊堂公) 휘 천(천) 할아버지이시고, 둘째가 부정공(副正公) 휘 매(邁) 할아버지이시며, 셋째가 상서공(尙書公) 휘 과(과) 할아버지이시고, 넷째가 사인공(舍人公) 휘 조(싹[조]) 할아버지이시다.(중조 17세)
송암공 휘 세기 할아버지의 네 아들 중 첫째이신 휘 천 할아버지는 국당공파, 둘째이신 휘 매 할아버지께서는 부정공파, 셋째이신 휘 과 할아버지께서는 상서공파, 넷째이신 휘 조 할아버지께서는 사인공파 등 대파의 파조를 이루신다.
이로 미루어 보면 중조 17세 할아버지들을 기준으로 여덟 대파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 그런데 판전공파(判典公派)는 중조 15세 열헌공 휘 핵 할아버지의 둘째 동생이신 판전공 휘 강(康+羽)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중조 15세이신 판전공 휘 강 할아버지를 판전공파 파조로 하였기 때문에 대파 중 세계가 가장 빠르신 것으로 나타나 있다.
○ 중조 10세 휘 춘정(春貞) 할아버지의 동생이신 휘 춘림(春林) 할아버지의 후예에서는 19세에 와서 첫째인 휘 양오(養吾) 할아버지께서 직장공파(直長公派), 둘째인 휘 존오(存吾) 할아버지께서 석탄공파(石灘公派), 셋째인 휘 존중(存中) 할아버지께서 진사공파(進士公派), 넷째인 휘 존사(存斯) 할아버지께서 교감공파(校勘公派)의 파조로 대파를 이루셨다.
○ 대파중 또 1개파는 중조 12세에 휘 선용(宣用) 할아버지의 동생이 되시는 휘 신우(申佑) 할아버지의 후예 중 중조 17세 사정공 휘 극량 할아버지의 현손이신 중조 21세 월성공(月城公) 휘 지수(之秀) 할아버지께서 월성공파를 이루신다.
여기까지 중조 17세에 와서 대파로 분파 됨을 알 수 있다.
문의한 평의공파는 대파에는 없고 '평리공파' 족보를 찾아서 중조 21세에서 중파로 분파되니 그쪽에서 찾아보던가 아니면 그 이후에도 집안마다 지파, 소파로 분파하여 집안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저곳 수소문을 해보아서 아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근래에 들어와 평리공파에서 성암공파라고 휘 인정 할아버지 호를 빌어 파명으로 하는 이유는 경주 이씨 후예 세계 중 가장 큰 종가인 16세 열헌공 휘 인정 할아버지의 장자인 사인공 휘 부 할아버지께서 후사가 없으므로 인하여 생긴 일인 것 같다.
큰댁인 17세 사인공 휘 부 할아버지 집안과 작은 집안인 17세 헌납공 휘 규 할아버지의 평리공파를 한 집안으로 묶어 16세 열헌공 휘 인정 할아버지의 호인 '성암'를 빌어 성암공파라고 부르기로 한 것 같다.
● 평리공파와 성암공파 파명 일원화
지난 10월14일 오전 11시 중앙 화수회관 소 회의실에서 평리 성암 양파의 파명 통일 협의회가 열렸다.
정읍. 괴산. 천안. 송탄. 울주. 전주. 광주. 여수. 영양. 안성. 예천. 상주 등 전국에서 50여명의 종친들이 참석한
이 날 회의에서 양측에서 각 4명씩 8명으로 대표를 선정하여
평리· 성암 명칭 통합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고 협의를 거쳐
통합명을 [평리성암 대종회]로 하기로 합의하였다.
통합 대표로는 충기 평리 대종회 회장을 선임하였다.
통합 협의회 추진위원은
평리공파에서 상수. 상봉. 종민. 충기 종친이고
성암공파에서는 희우. 하은. 형호. 원형 종친으로 하였다.
2003년 이후 계속되어 온 파명 문제로 여러 가지 잡음이 있었으나
이 날 합의로 평리공 대종회와 성암공 대종회의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
200여 년 간 계속되어 온 평리공 대종회가 2003년 이후 성암공 대종회로 파명이 바뀌면서
평리공파 대종회와 성암공파 대종회로 문제가 대두되고
희우 신임회장이 선출되면서 같은 할아버님 핏줄들로 하나의 파명으로
통합문제가 장기간 협의 끝에 마무리된 것이다.
평리성암공 인정
이인정(李仁挺)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충숙왕 때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오른 진(瑱)의 형이며, 이제현(李齊賢)의 큰아버지이다. 아들은 부(榑)와 규(樛)로 각각 사인·헌납에 이르렀다.
1276년(충렬왕 2)에 우정언으로 있으면서 당시 내수(內竪: 內僚)들이 친종행리(親從行李)의 공으로 허통(許通)되어 조정의 반열을 어지럽히는 것을 첨의부(僉議府)의 낭사(郞舍)들과 더불어 간쟁하였는데, 충렬왕이 노하여 듣지 않고 오히려 일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이때 100여인과 공모하여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죽이려 하였다는 익명의 투서 때문에 다루가치에 의하여 구금되었다가, 무고임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1278년 사간으로 있을 때에도 능력이나 공로가 없고 오히려 흠이 있는 사람들이 관직에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낭사로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사 사의대부(司議大夫) 백문절(白文節)·김서(金㥠), 전서(典書) 최수황(崔守璜)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광주판관(廣州判官)을 거쳐 1280년(충렬왕 6)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으며, 기거사인(起居舍人)에까지 올랐다.
성품이 강직하여 첨의부의 낭사로서 고신에 서명할 때에는 반드시 공적과 허물을 따졌으므로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모산공 이해(이 해 (1468 생)-(1525 졸)
◆ 영산포 영강서원에 모심
◆ 자는 제지 호는 모산, 성효가 출전하여 아버지상(이두평/23세)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니
피 눈물로 풀이 마르다 1504년에 진사시에 급제 1519년 중종기묘에 현량으로 천거되니
그 품제에 제주와 행실이 겸비하고 실천에 독실하다 하였다.
큰집 조카(장남) 영우와 같이 서울에 가 동년 소세양과 박훈으로 더불어 도를 강론하며 도의로 벗을 맺었더니
기묘사화가 일어남에 태학선비를 거느리고 항소하여 조광조(정암)을 구하려다 드디어 구속을 당했으나
다시 풀리어 제현으로 더불어 말하기를 "오늘 소를 올리니 임금의 얼굴이 지척에 있고 밝은 아침에 신을 들메니
옛동산이 천리로다" 하였다.
능주 조광조(정암)귀향소에 이르러 난이한 도리를 강론토론을 하니 정암이 말하기를 "귀향살이에 무료하더니
만일 대소 이공(모산공 할아버지)이 아니면 누구와 더불어 회포를 풀고하다 정암이 사약을 받으니 북망통곡하고 나라를 염려하다가 병이되어 1525년 을유에 하세하니 향년이 58세라.
1712년 숙종 임진에 영강서원에 모시고 향사하였다.
이 사실은 기묘록과 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일찍 간성에 유람하실 때 지은시가 있는데
"그 한번 휘파람 불고 어찌하여 푸른 파도 한하리오.
어찌하여 상공을 날아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정이 술개성부 식파정시에 난일 회상되고 물 세월을 탄식하도다에
모래위에 갈매것에 부끄롭도다"
회시에 왈 " 적은 지 고요하고 고요한 에 호미와 막대를 글과 그림이 흩어 더불어 가까이되니 지고 늙어 옴에
편은 머리에 빗을 용납고..."
기묘사화:
1519년(중종 14) 11월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재상에 의해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사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유교적 정치질서의 회복과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과거제의 폐단을 혁신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여 미신타파에 힘쓰며, 향약을 실시하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의 이상주의적인 왕도정치는 그 구현과정에서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훈구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훈적에서 삭제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 홍경주와 손잡고 조광조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며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1519년 11월 조광조일파가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주도록 상계를 올렸다.
그 결과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곧 사사되었고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 등은 귀양가서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그 밖에 이해(李蟹)·김구(金絿)·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 등 수십명이 귀양가게 되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형제 등은 파직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한다.
평리성암공파 분파도
인정(仁挺)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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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규(규)5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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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선(元善)-의반(依班)53(18)
│ │
│ │
│ 규문(葵文)-진문(진文)-상문(尙文)54(19)
│ │ │ │
│ │ │ │
│ │ │ 용경(用慶)55(20)
│ │ │ │
│ │ │ │
│ │ │ 천수(天壽)56(21)
│ │ │ │
│ │ │ │
│ │ │ 극검(克儉)57(22)
│ │ │ │
│ │ │ │
│ │ │ 성(晟)58(23)
│ │ │ │
│ │ │ │
│ │ │ 교순(敎純)-교진(敎盡)59(24)
│ │ │ │ │
│ │ │ │ │
│ │ │ │ 연희(延希)60(25)
│ │ │ │ │
│ │ │ │ │
│ │ │ │ 영로(英老)61(26)
│ │ │ │
│ │ │ │
│ │ │ 연종(延宗)60(25)
│ │ │ │
│ │ │ │
│ │ │ 언상(彦詳)-언심(彦諶)61(26)
│ │ │
│ │ │
│ │ 효순(孝純)55(20)
│ │ │
│ │ │
│ │ 천석(天錫)56(21)
│ │ │
│ │ │
│ │ 현(玄)57(22)
│ │ │
│ │ │
│ │ 산해(山海)-산포(山浦)-산수(山洙)-산택(山澤)58(23)
│ │ │ │ │ │
│ │ │ │ │ │
│ │ │ │ │ 극강(克綱)-계강(啓綱)-상강(尙綱)
│ │ │ │ │ │ │ │
│ │ │ │ │ │ │ │
│ │ │ │ │ │ │ 혜손(惠孫)
│ │ │ │ │ │ │ │
│ │ │ │ │ │ │ │
│ │ │ │ │ │ │ 훤(萱)
│ │ │ │ │ │ │
│ │ │ │ │ │ │
│ │ │ │ │ │ 의종(義宗)60(25)
│ │ │ │ │ │ │
│ │ │ │ │ │ │
│ │ │ │ │ │ 전(筌)61(26)
│ │ │ │ │ │
│ │ │ │ │ │
│ │ │ │ │ 정손(正孫)60(25)
│ │ │ │ │ │
│ │ │ │ │ │
│ │ │ │ │ 몽조(夢祖)61(26)
│ │ │ │ │
│ │ │ │ │
│ │ │ │ 번(蕃)59(24)
│ │ │ │ │
│ │ │ │ │
│ │ │ │ 인종(仁宗)60(25)
│ │ │ │ │
│ │ │ │ │
│ │ │ │ 형진(亨鎭)61(26)
│ │ │ │
│ │ │ │
│ │ │ 극수(克修)-극제(克濟)-극치(克治)-극평(克平)59(24)
│ │ │ │ │ │
│ │ │ │ │ │
│ │ │ │ │ 형창(亨昌)-정창(貞昌)
│ │ │ │ │ │ │
│ │ │ │ │ │ │
│ │ │ │ │ │ 仁衰-義衰
│ │ │ │ │ │
│ │ │ │ │ 욱(郁)61(26)
│ │ │ │ │
│ │ │ │ │
│ │ │ │ 우점(右點)60(25)
│ │ │ │ │
│ │ │ │ │
│ │ │ │ 눌(訥)61(26)
│ │ │ │
│ │ │ │
│ │ │ 천령(千齡)60(25)
│ │ │
│ │ │
│ │ 정윤(丁潤)59(24)
│ │ │
│ │ │
│ │ 장원(長元)60(25)
│ │ │
│ │ │
│ │ 밀(密)61(26)
│ │
│ │
│ │
│ 석(碩)55(20)경주에서 나주 문평에 1310년경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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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천박(天搏)-천홍(天洪)56(21)
│ │ │
│ │ │
│ │ 승무(升茂)-시무(時茂)-영무(英茂)57(22)
│ │ │ │ │
│ │ │ │ │
│ │ │ │ 종우(宗佑)58(23)
│ │ │ │ │
│ │ │ │ │
│ │ │ │ 백기(百枝)59(24)
│ │ │ │ │
│ │ │ │ │
│ │ │ │ 명담(命聃)-수담(壽聃)-세담(世聃)-영담(鈴聃)60(25)
│ │ │ │ │ │
│ │ │ │ │ │
│ │ │ │ │ 돈(敦)61(26)
│ │ │ │ │
│ │ │ │ │
│ │ │ │ 발(發)-몽(夢)-부귀(富貴)61(26)
│ │ │ │
│ │ │ │
│ │ │ 맹(孟)58(23)
│ │ │ │
│ │ │ │
│ │ │ 종화(宗華)-근화(根華)-문화(文華)59(24)
│ │ │ │ │
│ │ │ ┌───--┘ │
│ │ │ │ ┌─────-┘
│ │ │ │ │
│ │ │ │ 희방(熙芳)-희영(熙英)-희전(熙筌)-희란(熙蘭)60(25)
│ │ │ │ │ │ │
│ │ │ │ │ │ │
│ │ │ │ │ │ 암(巖)61(26)
│ │ │ │ │ │
│ │ │ │ │ │
│ │ │ │ │ 청수(淸秀)61(26)
│ │ │ │ │
│ │ │ │ │
│ │ │ │ 양신(良臣)61(26)
│ │ │ │
│ │ │ │
│ │ │ 희경(熙慶)60(25)
│ │ │ │
│ │ │ │
│ │ │ 황(璜)61(26)
│ │ │
│ │ │
│ │ 류(榴)-척(陟)58(23)
│ │ │ │
│ │ │ │
│ │ │ 희정(喜楨)--평(平)-희대(希大)59(24)
│ │ │ │
│ │ │ │
│ │ │ 지두(枝杜)60(25)
│ │ │ │
│ │ │ │
│ │ │ 석근(錫根)61(26)
│ │ │
│ │ │
│ │ 관(寬)59(24)
│ │ │
│ │ │
│ │ 익(翊)60(25)
│ │ │
│ │ │
│ │ 이남(厘楠)61(26)
│ │
│ │
│ │
│ 극근(克勤)57(22)
│ │
│ │
│ 두평(斗平)-우평(牛平)58(23)
│ │ │
│ │ │
│ │ 만손(晩孫)-만생(晩生)59(24)
│ │ │ │
│ │ │ │
│ │ │ 귀만(貴萬)-호근(好根)60(25)
│ │ │ │ │
│ │ │ │ │
│ │ │ │ 언서(彦瑞)61(26)
│ │ │ │
│ │ │ │
│ │ │ 계세(溪世)61(26)
│ │ │
│ │ │
│ │ 안영(安榮)-세영(世榮)60(25)
│ │ │ │
│ │ │ │
│ │ │ 지우(支宇)-제우(齊宇)61(26)
│ │ │
│ │ │
│ │ 응기(應期)-응회(應會)61(26)
│ │
│ │
│ 구(龜)--해(해)--별(鼈)-오(鰲)-원(원)59(24)
│ │ 모산공파
│ │ (茅山公派)
*이상 자료를 모아 올려 보았습니다.
급하게 올린 자료라 부족한 부분들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을것입니다.
오늘 오후엔 테니스 모임이 있네요
차후 보충되는 자료를 모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편한 주말 되십시요
5.17일 추가자료
예전에 제가 자료난에 올려놓았던 열헌공 핵의 3자 9손에 대한 보충된 자료입니다.
제목: 경주이씨 중흥조 열헌공(15세) 핵의 3자 9손
중시조인 거명의 15세손인 열헌공 핵은 고려시대 문하평리를 지내셨으며
아들셋과 손자 아홉명 모두가 당시대인 고려때에 과거 급제후 큰 인물이
되셨다는 내용 이랍니다.
열헌공 핵은 세아들을 두셨습니다.
장자인 평리성암공 인정은 광주판관등을 역임하셨고
차자인 동암공 진은 진사 문과시에 장원급제하여 검교정승에 이르렀으며 시문으로 일세에
이름을 떨친분 이었습니다.
삼남인 송암공 세기는 형인 동암공 진과함께 왕이 주관하는 과거에 천장급제하여 왕이 친히
황폐를 주시면서 왕의 문생이라 칭하였다 하며 대제학을 거쳐 검교정승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세아들에서 아홉손자가 나왔는데
장자인 성암공 인정에서는 부와 규가
부는 문과장원 내서사인 역임
규는 문과장원 덕원부사 역임
차남인 동암공 진에서는 관, 제현, 지정
관 성균시 장원
제현 성균시 장원
지정 문과급제
삼남인 송암공 세기에서는 천.과.매.수
천 성균시 장원
매 부정(벼슬)
과 상서(벼슬)
조 문과급제
*종합해 보면 열헌공 세명의 아들중 첫째 인정은 고려제1의 사간이며
둘째셋째인 진과 세기는 천장급제, 손자인 부.규.관.제현.천은 성균시 장원
매.과.조.지정은 문과급제
*여흥민씨인 민묵헌(민지)이 동암공 진 에게 바친 시를 보면
한 꽃받침(열헌공을뜻함) 세집(인정.진.세기)에서 다섯손자가 의뜸을 하였다며
해마다 경사스런 잔치를 혼자서만 보게 되신다며
급제후에 열리는 잔치에 오셔서 아주 부러워 하며 시한수 바쳤으며
*문량 조간이라는 분도
형제가(진과.세기)천장급제 하여 집안잔치를 연이어 하는게 드믄일인데
어진 사람들을(열헌공가문) 얻는것은 옛 제도보다 낫다며
단상에 계신 열헌공의 기뻐하신 모습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갑과의 자손(장원급제)
이라며 별명을 붙어 주었네 하며 부러워 하며 축하시를 붙여 주셨습니다.
*15세인 열헌공으로 부터 아주 많은 파들이 이어져 내려오는데
경주이씨가 큰 파인 8대파가 다 열헌공으로 부터 이어져 내려온답니다.
열헌공 장자 인정은 평리성암공파(옛 평리공파.성암공파) 파조가 되시고
열헌공의 차자인 동암공 진의 아들 삼형제는 이암공파.익재공파.호군공파를
열헌공의 삼남인 송암공 세기의 네 아들은 국당공파.부정공파.상서공파.사인공파를
열헌공 핵의 3자 9손을 알게 되면 그 후로 이어져 내려오는 파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수 있으며
내 윗대로 올라가다 보면 아주 가까운 조상님들 이었다는것을 알수있답니다.
또한 이분들은 고려라는 국가정치를 이끌어 가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익재공(평리성암공의 조카)께서 남기신 역옹패설 작품집에 보면
선군(동암공 진)은 3형제 이셨다
조모 김씨는 매우 성격이 엄하여 친히 서사를 가르치셨으며 백부(평리성암공)와
계부(송암공)는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시어 ---
백부의 아들 내서사인의 이름은 부바하며, 성균시와 예위시에 모두 장원하였다
그의 동생인 덕원목사의 이름은 규라 하고, --
내서사인인 부에게는 아들이 없고
덕원목사의 아들은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
이런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 글이 있답니다.
* 보충자료(11:30분)
평리성암공파 에서 분파된 중파나 소파를 알기쉽게
평리 성암공파 ( 인정 ) * 대파
ㅣ
부(사인공) , 규(헌납공)
(후사없음) ㅣ
전서공파(원선), 검교공파(의반) * 중파
ㅣ ㅣ
소윤공파 호군공파 * 소파
서암공파 애일당공파
만호공파 사직공파
전적공파 호사공파
세촌공파 모산공파
상서공파 진사공파
목사공파 청계공파
야은공파
* 보충자료( 11:50분)
평리성암공파 주요 세거지
전국에 걸쳐 평리성암공 후손들이 아주 많이 세거하고 있는데
주요 세거지를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안성.괴산등 충청지역
예천.문경.상주.울주 경북지역
정읍고부등 전북지역
순천.보성.여수.고흥 전남지역
나주.영산포.함평.무안.영암.해남.장흥 전남지역 등
경북지역엔 예천 .문경. 상주 지역에
그리고 전남지역엔 나주.영산포.함평등 전남지역에
아주 많은 평리성암공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답니다.
소윤공.세촌공.호군공.애일당공.모산공.청계공.야은공 소파 후손들중
조선조에 큰게 이름을 떨치셨던 선조님들도 계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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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료상으로 이해한 것은
■.평리공파 성암공파가 합쳐져서 평리성암공파 라는 대파로 합쳐쳤다.
■.모산공파는 평리 성암공파속의 소파이다.
1. 크게 보면 평리성암공파이고 작게 보면 모산공파(위에서 언급한 13개의 소파.)에 포함되는것 이겠지요.
2. 계통도에 기재되어 있는 분들은 직계만을 표시한 것 인지요.
(사람이 더 있을것 같은데 하는 소박한 의문이 있습니다.)
3. 모산공파에 대한 설명을 더 해주셨으면 무척 감사 하겠습니다.
4. 소파로 나눠지게 되는 원인 같은것이 따로 있는지요.
5. >중조 15세 열헌공 휘 핵 할아버지의
여기서 휘는 諱 이 의미 이지요.
수준이 팍 떨어지는 질문으로 대단히 죄송 합니다. 감사 합니다.
이에대한 자료를 모아 저녁시간에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