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성전암 삼사순례 (마곡사, 성곡사, 갑사)2019년10월13일(일)
마곡사麻谷寺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18)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 율사가 통도사·월정사와 함께 창건한 절로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으나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그뒤 1650년(효종 1) 주지인 각순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옛 모습을 찾았으나 1782년(정조 6) 다시 큰 화재로 영산전과 대웅전을 제외한 1051여 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대광보전은 1788년(정조 12)에 재건되었고, 영산전과 대웅보전은 1842년(헌종 8)에 개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절의 가람배치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대광보전(보물 제802호)·5층석탑(보물 제799호)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특이한 형식이며 그 주변으로 영산전(보물 제800호)을 비롯하여 응진전·명부전·국사당·대향각·흥성루·해탈문·천왕문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충청남도 70여 개 사찰을 관리하고 있다.
마곡사
마곡사5층석탑(고려 후기, 보물 제799호, 오른쪽) 및 마곡사대광보전(조선 후기, 보물 제802호, 왼쪽), 석탑 높이는 876cm,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역사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 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 따르면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慈藏)율사가 통도사·월정사와 함께 창건한 절로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으나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는데, 자장이 절을 완공한 후 설법했을 때 사람들이 '삼'(麻)과 같이 빽빽하게 모여들었다고 해서 마곡사라 했다는 설과 신라 무선(無禪)대사가 당나라 마곡보철(麻谷普澈)선사에게 배웠기 때문에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마곡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이 절은 고려 문종 이후 100여 년간 폐사되어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으나 1172년(명종 2)에 왕명을 받아 보조국사가 그의 제자인 수우(守愚)와 함께 왕으로부터 받은 전답 200결(160만 평)에 중창했다. 당시 사찰의 규모는 지금의 2배가 넘는 대가람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뒤 1650년(효종 1) 주지인 각순(覺淳)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옛 모습을 찾았으나 1782년(정조 6) 다시 큰 화재로 영산전과 대웅전을 제외한 1051여 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대광보전은 1788년(정조 12)에 재건되었고, 영산전과 대웅보전은 1842년(헌종 8)에 개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항일독립운동가 김구가 일본 헌병 중위를 죽이고 잠시 피신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주요 문화재
이 절의 가람배치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대광보전(보물 제802호)·5층석탑(보물 제799호)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특이한 형식이며 그 주변으로 영산전(보물 제800호)을 비롯하여 응진전·명부전·국사당·대향각·흥성루·해탈문·천왕문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이밖에 중요문화재로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보물 제269호),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보물 제270호), 석가모니불괘불탱(보물 제1260호), 동제은입사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 동종(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등이 있다.
세계문화유산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께 등재된 다른 여섯 곳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마곡사대광보전
마곡사에 있는 조선 후기 목조건물. 보물 제802호.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51년에 각순대사가 대웅보전과 함께 중건했으나 1782년 다시 소실된 것을 1788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석 기단 위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평면구조를 가진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마곡사대광보전
마곡사대광보전(조선 후기), 보물 제802호,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공포는 기둥 위로 평방을 두고 외3출목·내4출목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살미첨차는 3앙1수식으로 앙서 위에는 연꽃 봉오리가 표현된 데 비해 뒷면에는 중첩된 교두 형태의 살미첨차가 조각되어 있다.
건물의 내부는 무고주·1고주·2고주가 절충된 형식으로 공간구성이 특이하며, 우물마루의 바닥에는 갈참나무 껍질로 만든 자리를 깔아놓았다. 천장은 2단의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대량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불단을 서쪽에 설치하고 그 위에 비로자나불상 1구를 동쪽을 향해 앉힌 배치방법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마곡사대웅보전
마곡사 뒤편의 높은 언덕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801호. 1651년과 1842년 등 몇 차례의 중수 및 개수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1층과 앞면 3칸, 옆면 3칸의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팔작지붕의 중층건물이다.
마곡사대웅보전
마곡사대웅보전(조선 중기), 보물 제801호,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 Daum 백과사전
아래층은 가운데에 있는 3칸을 일정한 간격으로 구획하여 삼분합 띠살문을 달았고, 양 끝칸에는 쌍여닫이 정자 살문을 달았다. 위층에는 정면에 채광을 위한 빗살창이 있으며 나머지는 판벽으로 막았다. 기둥은 배흘림이며 그 위에 평방을 두고 공포를 짜올린 다포식이다. 공포는 위·아래층 모두 3출목으로 짜올렸으며, 기둥 사이의 포작은 1개씩 배치하였으나 위층 측면의 양쪽 끝칸에는 생략했다.
외부의 살미첨차는 3개의 쇠서가 앙서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위에 연꽃과 봉황머리를 조각하여 장식했으며 내부의 살미첨차는 1개의 장식판처럼 운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높은 기둥이 층마루없이 곧게 늘어서 있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다. 현판의 글씨는 김생(金生)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마곡사영산전
마곡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800호.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며 현판은 세조가 이곳에 들렀을 때 직접 써서 사액한 것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동쪽을 향하여 세워져 있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하며 공포는 외2출목으로 내부에는 출목이 없어 앞면과 뒷면이 전혀 다르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며, 기둥 위에만 장식한 주심포 형식이다. 내부의 살미첨차는 보머리 모양으로 처리했는데 특히 쇠서의 끝부분이 안으로 심하게 말려들어간 점은 조선 후기 목조건축 양식을 반영한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높은 기둥을 배열하고 그 위에 대들보를 얹은 다음 동자기둥을 세워 종량을 받치도록 하고, 측면에는 2개의 높은 기둥이 직접 종량을 받치도록 했다.
천장은 상하 2단으로 구분된 우물천장이며 다포식과 주심포식이 절충된 형식이다. 우물마루에는 뒷면과 측면에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삼존불과 천불을 안치하였다.
전체적으로 짜임새있게 만들어진 이 건물은 배흘림이 완연한 기둥과 공포 형식에서 조선 중기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이는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마곡사오층석탑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 있는 고려 후기의 석탑. 보물 제799호. 높이 840cm.
마곡사5층석탑
마곡사5층석탑(고려 후기), 보물 제799호, 높이 876cm,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1782년 대광보전 화재 때 많이 파괴되었으나 현재 화강암으로 보수되어 있으며 1972년 탑을 해체·보수할 때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특이한 상륜이 놓여 있는 구조로 일반적인 석탑형식을 따르고 있다. 상층기단에는 양쪽 모서리에 우주가 형식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안쪽으로 둥근 형태의 기둥이 1개씩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갑석은 높고 폭이 넓은 편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며 상층기단의 갑석 위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한 높은 2단 굄이 있다. 탑신의 옥개석과 옥신석은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다. 옥신석은 각 층마다 양쪽으로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로 1층 탑신의 남면에는 문비와 자물통이 조각되어 있고, 2층의 각 면에는 불좌상 1구씩을 새겨 사방불 형식을 취했다.
2단받침의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곡선을 이루며 처마 끝부분의 반전이 심해 장식화 경향을 보여준다. 상륜부에는 노반 위에 풍마동이라는 청동제로 된 부재가 놓여 있는데, 그 형태는 3층의 전각형 건축물 위에 원형의 복발과 보주가 놓여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상륜부의 형식은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중국 원대의 라마식 보탑과 유사하여 원나라와 문화적으로 교섭이 빈번했던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적어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점과 옥개석의 심한 반전 등에서 고려 후기 석탑의 양식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동학사 東鶴寺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에 있는 절.
마곡사의 말사로 724년(성덕왕 23) 상원조사(上願祖師)가 암자를 지은 곳에 회의화상(懷義和尙)이 절을 창건해 상원사(上願寺)라 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거달(柳車達)이 이곳에 와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절을 지으니 스님들이 모여들어 사찰이 커지면서 이름을 동학사로 바꾸었다.
1394년(태조 3) 고려의 유신 길재가 고려 태조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고, 1457년(세조 3)에는 김시습(金時習)이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는데, 다음해 이곳에 들른 세조가 단종을 비롯해 세조찬위 때 억울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인신과 토지 등을 하사했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모두 소실된 것을 1814년(순조 14) 월인선사(月印禪師)가 예조에 상소하여 중건했고, 1864년(고종 1) 보선국사(普善國師)가 옛 건물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2칸을 지었다. 1904년 초혼각을 숙모전이라고 개칭했다.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5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무량수각·삼은각·숙모전·범종각·동학사·동학강원 등이 있는데 동학강원은 운문사의 강원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수련도량으로 유명하다.
동학사
계룡산의 동학사
성곡사
공주시 우성면 방문리의 495,000㎡의 숲 속에 11곳의 불전이 있는 대찰 성곡사. 성곡사는 산중(山中)에 위치하기 때문에 산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서 가야한다. 자동차로 약 3분. 고개를 오르면 고갯마루에 닿게 되는데 마주보이는 방향으로 부처님이 하늘에서 강림하듯 숲 위로 우뚝 서 있는 광경이 다가온다. 먼발치로 친견되는 부처님은 미륵전에 모셔진 수십 미터의 미륵불이다. 성인성(聖)자, 골곡(谷)자를 써서 성곡사(聖谷寺). 도량이 위치한 산세와 그 흐름, 지형적인 여건 모든 것을 봤을 때, 그런 크기의 부처님들이 안주하여도 손색이 없는 형국인 지세임을 의미하는 절 이름이다.대웅전, 천불전, 미륵전, 와불전, 약사전, 관음전, 오백나한전, 명부전, 지장전, 삼성각, 용왕전 등 11개소의 불전을 조성해 놓아 불상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성곡사는 미륵불처럼 큰 불상이 많고 사역 또한 크다. 고불산 중턱 자락 숲에 불사와 불상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전체를 돌려면 한나절 정도는 족히 잡아야 한다. 불전과 불전을 오가는 사이 숲 속의 오솔길도 거닐며 불전 순례를 할 수 있는 곳이어서 한 바퀴 순례를 마치고 나면 삼림욕이 따로 없을 정도로 공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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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곡사 가는 길은 산골의 정취 물씬 묻어나는 문동골인 새터말, 뒷말, 아랫말 등 산골마을을 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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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곡사 가는 길 고갯마루 풍경. 산 위로 미륵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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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크기의 미륵불 앞의 와불.
이용안내
연중무휴로 개방, 주차장 사용은 무료이고 입장료 또한 없다. 문의전화 041-853-3355
· 내비게이션 명칭 및 주소 : 성곡사, 충남 공주시 우성면 성곡길 357(방문리 산2)· 자가용이용 : 천안-논산 고속도로 공주IC 통과 공주IC 삼거리에서 우회전, 직진하면 1.4km 전방 생명과학고 교차로에 닿게 된다. 이곳에서 다시 우회전 후 연미산 터널을 지나고 청양․예산 방면으로 직진하여 1km 쯤 진행하면 우측으로 우성면 상서리 초입 갈림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상서리로 들어서서 직진하다 보면 우측에 성곡사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를 볼 수 있다.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 하면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풍경 속으로 빠져든다. 이곳에서 성곡사까지는 약 1km.· 대중교통이용 : 공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유곡.정산.마곡] 방면 시내버스 이용, [방문리.성곡사] 입구 하차하여 3km 도보로 이동. 배차간격은 20분에서 30분, 소요시간
내륙 사찰에 용왕전이? 그것이 궁금해
용왕은 해안가의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데 바다가 없는 내륙 절집에 용왕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이렇다. 성곡사는 샘이 없어서 물을 얻기 위해 지하수를 개발했는데 260m의 암반을 뚫고 솟아오르는 천연암반수가 식수원이다. 그 물을 뽑아 올리는 시설 위에 물을 다스리는 용왕을 모셔 이곳을 방문하는 중생들에게 안전한 식수를 제공해 주십사 하는 마음에 모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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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곡사의 용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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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각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집이다.
눈만 말고 마음으로도 보라.
성곡사는 각 불전마다 모신 불상의 규모가 무척 크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절의 규모보다 불상의 크기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천불전의 주불을 비롯하여, 지장보살상, 청동와불상, 미륵부처상, 약사여래부처상,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한 분도 아니고 몇 분씩이나 이렇게 크게 조성한 뜻은 무엇일까? 큰 규모로 조성된 여섯 분의 불상을 친견하는 사람마다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우선 알아야 할 것은 이곳은 참회 도량이다. 참회 도량은 중생들이 부처님 전에서 참회를 함으로써 마침내 구원을 얻는 도량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불사를 일으킨 현 주지스님(법명: 환공 관욱)이 이곳에 참회 도량을 짓기로 하고 중생들이 와서 참회를 할 때, 부처의 큰 뜻을 친견하고 참회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의미로 불상조성을 크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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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속에 조성된 거대한 크기의 약사여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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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전위에 조성된 십일면관세음보살상
사람 수명을 연장시켜준다는 대웅보전의 기둥
대개의 경우 주불전에 모신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협시 문수보살-우협시 보현보살, 좌협시 관세음보살-우협시 대세지보살과 같이 모시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으나 이곳만큼은 그렇지 않다. 성곡사는 주불전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협시불로 미륵보살을 모시고, 우협시불로 제화갈라보살을 모시고 있다. 제화갈라보살은 사람의 인과․업장 즉, 전생이든 현생이든 중생들이 지은 죄를 소멸시켜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주불전에 중생의 참회를 들어주는 보살을 주불전의 협시불로 모신 뜻은 이곳이 참회도량임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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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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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내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협시불로 미륵보살을 모시고, 우협시불로 제화갈라보살을 모시고 있다.
주불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용마루와 내림마루, 처마마루의 선이 유연하여 우리 전통건축의 멋을 잘 살려내고 있으며, 기둥의 주초석은 원형의 대리석에 연화문을 돋을 새김하여 주불전의 장엄을 한층 살아나게 하고 있다. 주불전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에는 명부전이 있고 오른쪽에는 영산전이 대웅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 방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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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죄우의 명부전과 영산전은 대웅전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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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곡사의 숲을 걸으며 순례를 하다보면 지은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잘 지어진 전통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사진은 범종루다.
1000분의 부처님이 한곳에 천불전
과거천불, 현세천불, 미래천불. 과거와 현재, 미래를 두고 각각의 때에 천분의 부처님이 계심을 의미하는 말인데, 성곡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장대한 스케일의 불전으로 꾸며져 있는 천불전의 일천분의 부처님은 현세 천불을 의미하며 높이 18m에 이르는 주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500분의 부처님, 왼쪽에 500분의 부처님 등 모두 천불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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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불전의 주불 뒤로 대승불교 공(空)사상의 요체인 금강경의 전문이 동판으로 양각되어 있으며, 그 위로는 개인의 서원을 담은 원불로 야광 여래 333,333불을 모셔 참회기도 도량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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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존불 둘레는 부처님의 십대 제자를 반원형으로 둘러 세워놓아 도솔천에서 부처가 십대 제자와 1250인의 아라한이 모인 가운데 금강경으로 설법을 펼치시는 광경을 형상화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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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불전 풍경
신원사 新元寺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계룡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651년(의자왕 11) 열반종의 개조인 보덕화상이 창건했다. 그뒤 폐허가 되었는데 신라말 이곳을 지나던 도선이 중창하고, 1298년(충렬왕 24) 무기화상이 3창하고, 1396년(태조 5) 무학대사(無學大師)가 4창했다.
이보다 앞서 1394년 무학대사는 계룡산에 머물러 있을 때 산신을 선몽하고는 태조에게 진언하여 중악단을 세우고, 이때 묘향산에는 상악단을, 지리산에는 하악단을 설치했다고 한다. 1866년(고종 3) 관찰사 심상훈이 중수하면서 신정사로 불리던 절이름을 신원사로 바꾸었다. 1876년 보연대사가 대웅전·향각·영원전·대방·요사채 등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로는 대웅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과 5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 등이 있다. 또한 대웅전으로부터 50m 떨어진 곳에 산신각인 중악단(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이 있어 이 절은 전국에서 으뜸가는 산신기도장이 되고 있다.
신원사
공주군 계룡면 영화리에 위치한 신원사의 전경
마곡사 영산전(보물 800호)
▲ 마곡사 영산전과 영산전 우측 건물(매화당)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를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건물은 천불(千佛)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키면서(1651) 고쳐 지은 것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해탈문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앞쪽에 걸린 현판은 세조의 글씨라고 하며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짜임새를 잘 갖추고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로 건축 양식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영산전 내부 모습(문화재청 사진)
마곡사 해탈문(충남 문화재자료 66호)
마곡사의 정문으로서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세계[법계]에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 한다. 중앙 통로 양편에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과 보현(普賢) 문수 동자상(文殊 童子像)을 모시고 있다.
▲ 해탈문 중앙 통로 좌우로 배치된 금강역사상과 보현 문수 동자상
마곡사 천왕문(충남 문화재자료 62호)
천왕문은 조선 후기에 세웠으며, 건물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아 1910년에 고쳐 지었다고 한다. 절 입구에서 두번째 있는 문인 천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천장은 지붕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안쪽에는 동서남북 4지역을 지키는 사천왕상과 그림이 있다.
사천왕은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인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4지역을 관할하는 신적 존재이다. 이들은 부처님이 계신다는 수미산의 중턱 사방을 지키면서 인간들이 불도를 따라 사는지 살피어 그들을 올바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 천왕문 중앙 통로 좌우로 배치된 사천왕상
마곡사 명부전(충남 문화재자료 64호)
명부전(冥府殿)은 지장보살과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을 모신곳으로 시왕전(十王殿)·지장전(地藏殿)·명왕전(冥王殿)이라고도 한다.지장보살은 불교에서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을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은 보살이다.
시왕은 인간이 죽은 후에 지옥에서 죄가 많고 적음을 가리는 10명의 왕으로 염라대왕은 그 중의 다섯 번째 왕이다.주존(主尊)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시왕상(冥府十王像)을 모시고 있다.
마곡사 국사당(충남 문화재자료 63호)
국사당(國師堂)은 훌륭한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국사(國師)가 되기까지 필요한 많은 수행과 정진을 승려들에게 상징적으로 전하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은 자연석 기단 위에 세워졌고, 마루방 벽면에는 고승들의 영정이 모셔 있다.
◀ 현판은 산신각으로 되어 있음.
마곡사 본전이 있는 경내로 들어서면...
▲ 다리를 건너면 마곡사 본전이 있는 경내로 들어서...
▲ 범종루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799호)
절마당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해 놓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현재는 5층 지붕돌에만 1개의 풍경이 남아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이 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중국 원나라의 라마탑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 마곡사 오층석탑 사방 모습
길쭉한 감이 있어 안정감은 적으나 당당한 풍채로 버티고 서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머리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즈음으로 여겨진다. 즉 고려 후기 당시 원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라마교 계통의 문화도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탑은 그 문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 오층석탑 탑신 부조물과 상륜부 모습(문화재청 사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마곡사 대광보전(보물 802호)
▲ 마곡사 대광보전 좌우에서 바라 본 모습
이 건물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해탈문·천왕문과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건물로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불에 타버렸던 것을 조선 순조 13년(18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앞면 5칸에는 3짝씩 문을 달았는데 문살은 꽃 모양을 섞은 조각으로 장식하였고 가운데 칸 기둥 위로 용 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고, 불단은 서쪽으로 마련하였는데 불단 위에는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닫집을 정교하게 꾸며 달았다. 안팎으로 구성과 장식이 풍부하고 건축 수법이 독특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대광보전 내부 천장 모습(문화재청 사진)
마곡사 대웅보전(보물 801호)
▲ 대광보전 우측의 계단을 올라서 바라 본 대웅보전과 경내 좌측을 내려다 본 모습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킬 때(1651)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
▲ 좌측에서 바라 본 대웅보전 모습과 아래로 내려다 본 모습(응진전, 김구 선생 거처지, 조사전)
규모는 1층이 앞면 5칸·옆면 4칸, 2층이 앞면 3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 위에 연꽃을 조각해 놓아 조선 중기 이후의 장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건물 2층에 걸려 있는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고 한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형태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을 2층 대들보와 연결하여 만들었고 마루도 널찍해 공간구성이 시원해 보인다. 조선 중기 2층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대웅보전 내부 모습(문화재청 사진)
마곡사 응진전(충남 문화재자료 65호)
이 곳은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羅漢)을 모신 곳으로,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한다.원래 응진전은 수도승의 신앙 형태를 나타내는 건물 중의 하나이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모시고, 주위에 16나한상을 끝에 법천(法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모신다.
16나한은 수행을 완성하여 성자의 지위에 올라 중생에게 복을 주고 바른 법으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존재를 말한다.건물은 철종 3년(1852)에 다시 수리한 것이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김구선생 은거 기념 식수는...
▲ 김구 선생께서 잠시 머무셨던 건물
▲ 김구선생 은거 기념 식수
▲ 조사전
마곡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1876~1947) 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로 황해도 안악에서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후 은거 입산 수도 하였던 곳이다. 조국 광복 후에 선생이 이 곳을 찾아 대광보전 주련의 각내관세간유여몽중사(却來觀世間猶如夢中事 - 돌아와 세상을 보니 흡사 꿈 속의 일 같구나)를 보시고 더욱 감개무량하여 그때를회상하며 향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 기념식수 안내판 내용 발췌 -
▲ 경내 좌측에서 바라 본 대광보전(앞)과 대웅보전(뒤)
▲ 다리 앞에서 바라 본 마곡사 경내 전경
마곡사 석가모니불 괘불탱(보물 1260호)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열 때 사용하던 대형 불화를 말하며, 이 괘불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그린 것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6대보살, 10대제자,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천자, 아수라, 용왕 등이 좌우 대칭으로 화면 가득히 그려진 모습이다.
석가모니불은 용화수가지를 양 손에 받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손이 다른 신체 부분에 비해 크게 그려져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둥근 머리광배와 배(舟) 모양의 몸광배로 구분되는데 머리광배에는 작은 부처 여러 구를 그려 넣었다. 석가모니불을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는 제화갈라보살을 비롯한 6대보살은 관음·대세지·문수·보현보살로 구성되었으며 10대 제자상과 보향·명월천자가 상단 좌우 끝에 그리고 아수라 가루라 용왕들이 배치되어 있다.
남아 있는 글로 보아 시주자를 비롯한 여러 승려와 일반인들이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석가탄신일 외에도 수륙재와 49재에 쓰였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대형화면에 나타난 중후한 형태·화려한 색채 등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으로 본존불을 중앙에 크게 묘사하고 다른 무리들을 주위에 작게 배치하여 석가모니가 일반 대중들을 압도하는 듯한 인상을 전달하고 있다. 삼신불 가운데 석가불을 노사나불과 동일하게 보살형으로 형상화한 독특한 형태의 그림이며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이란 석가의 존명과 함께 각 상들의 명칭도 기록되어 있어 불화 연구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다.
◀ 문화재청 사진
마곡사 동제은입사향로(충남 유형문화재 20호)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의미를 가진 향을 피우는데 사용한 도구이다. 높이 20.2㎝, 입 지름 19.5㎝인 이 향로는 나팔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 입부분은 넓은 테가 있고, 테에는 8개의 구름무늬를 새겼다.
몸통 가운데에는 4곳에 원을 만들고, 그 안에 범자를 써 넣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덩굴무늬로 채웠다. 몸통 맨 아래에는 굵은 선으로 연꽃잎을 새겼다. 나팔모양의 받침대에는 윗부분에 구름과 엎어놓은 연꽃잎을 두었고, 아래에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몸통과 받침대는 따로따로 만들어 연결 시킨 것으로, 연결 부위에는 작은 반원 모양의 받침장식이 있다. 몸통 전체에는 무늬를 먼저 새기고, 무늬마다 은을 입혀 넣는 은입사 방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고려시대 향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불교 금속 공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문화재청 사진
마곡사 동종(충남 유형문화재 62호)
조선시대 만들어진 전체 높이 107㎝, 몸체 높이 80㎝의 동종이다. 동종은 2마리의 용에 의해 매달려 있고, 몸통 어깨의 4곳에 정사각형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돌출된 9개의 유두가 있고, 유곽의 사이에는 위·아래 각각 원형 머리광배을 가진 보살상을 새겼다.
몸통의 윗부분에 2줄의 직사각형 띠를 만들어 그 안에 원을 그리고, 범자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아랫부분에는 연꽃과 보상화를 교차시킨 덩굴무늬 띠를 만들어, 종 표면의 문양에 통일감과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 동종은 마곡사 오층석탑 동쪽 심검당의 툇마루에 자리하고 있다. 종 몸체에 쓰인 글을 통해 조선 효종 5년(1654) 충청도 안곡사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지는 않지만 제작 연대와 장소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중요한 종이다.
◀ 문화재청 사진
포저유서 및 송곡문집판각(충남 유형문화재 126호)
조선시대의 문신인 포저 조익(趙翼,1579∼1655)과 그의 셋째 아들 송곡 조복양(趙復陽,1609∼1661)의 시문집을 새긴 목판으로, 모두 633매이다. 조익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음서로 정포만호가 되고 선조 35년(1602) 별시과에 내과로 급제한 이래 여러 벼슬을 거친 후 대사헌, 좌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이, 성혼의 문묘종사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사직했다. 성리학의 대가로 예학에 밝았다. 조복양은 김상헌의 문인으로, 인조 11년(1633) 사마시에 합격하고 여러 직을 거쳐 부교리로 붕당의 폐를 한탄하여 사직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후 시강관으로 궁중음악의 타락을 지적했고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조익의 셋째 아들이다. 조익의 시문집『포저유서』를 찍은 목판은 377매이고, 송곡의 시문집『송곡집』을 찍은 목판은 256매이다.
◀ 문화재청 사진
마곡사 심검당 및 고방(충남 유형문화재 135호)
마곡사 심검당은 대광보전 5층 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이며, 고방은 창고건물이다. 심검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21년(1797)년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기록과 편액에 적힌 글에 의하면 철종 7년(1856)년에 고치고 1909년에 기와를 다시 올렸다고 한다.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1층의 기단을 형성하고 주춧돌을 놓은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다. 고방은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남향집이다.
◀ 문화재청 사진
세조대왕 연(충남 민속자료 14호)
조선 세조(1417∼1468)가 마곡사에 타고 왔다가 두고 간 연(輦)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귓병치료를 위하여 명산대찰을 두루 다니다가 마곡사에 매월당 김시습이 은신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매월당을 회유하고자 마곡사에 연을 타고 갔다.
그러나 세조의 행차를 알게 된 매월당은 세조와의 대좌를 피하여 몰래 절을 떠났는데 모르고 행차한 세조는 매월당이 없는 것을 섭섭히 여겨 영산전(靈山殿)이라는 현판을 사액하고는 매월당이 나를 버렸으니 연을 타고 갈 수 없다하여 타고 왔던 연을 마곡사에 두고 소를 타고 갔다는 얘기가 마곡사 사적기에 나온다. 보관상태가 나빠 손잡이가 파손되고 부분적으로 채색이 탈락했으나 원형을 보는 데는 문제가 없다. 세조는 세종의 왕자로서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후로는 수양을 위하여 사산을 많이 찾았으며, 치적도 볼만한 것이 많고 말년에는 불교에 깊이 심취하였다.
◀ 문화재청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