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 암살 혐의 사건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1922년 처음 만나게 된다.
박열은 원래 교사의 꿈을 꾸고 있었지만 3•1 운동 이후 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1919년 독립운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묵가게에서 일하던 가네코가 박열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도 박열의 아나키즘에 근거한 시 ‘개새끼’를 보고 빠져 찾아갔기 때문이다.
(*‘개새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로 시작되는 거칠고 자극적인 문장들의 이면에는, 비루한 취급을 받지만 궁지에 몰리면 상대를 물 수도 있는 개처럼 '권력이 아무리 나(조선인)를 짓밟아도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박열의 강렬한 의지를 담고 있다. )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동거를 시작했고 동거계약서에서도 항일운동에 대한 의지,평등사상을 추구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동거계약서의 내용
1. 동지로서 동거할것.
2. 운동 활동에서는 가네코가 여성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3. 한쪽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길 경우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둔다. )
둘은 함께 흑도회를 결성하고 흑도라는 잡지를 발행한다.
1923년 함께 불령사를 조직했다. 9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의 결혼식에서 일본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요인을 일거에 폭살시키려고 가네코와 같이 거사계획을 추진하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고 불령사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붙잡혔다. (관동대지진 이후 경제불황과 흉흉한 민심의 나비효과로 관동대학살이 일어난다.) 이대로는 어차피 자신에게 누명이 씌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박열은, 상황을 역이용해서 일제와의 정면승부를 선택한다. 정작 시도도 하지 못 했던 '황태자 암살'을 자신이 기획했다고 먼저 깜짝 자백을 한다. 박열의 폭탄선언으로 이제 그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일본의 체제를 전복시키려 한 대역죄인으로 '급'이 달라진 상황이 됐다. 박열과 후미코 부부는 황태자 암살 혐의로 나란히 일본의 법정에 서게 된다. 박열은 여기서 재판에 서는 조건으로, '조선의 예복을 입게 해줄 것', '법정에 서는 취지를 본인이 선언하겠다는 것', '조선어로 이야기할 수 있게 통역을 준비해줄 것', '자신은 죄인이 아니니 재판관이 앉는 좌석과 눈높이를 동등하게 해줄 것' 등을 요구한다.저항에 대한 박열의 의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또한 박열은 마지막 재판을 몇 달 앞두고 후미코와 함께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한 기념사진을 찍어줄 것을 요청한다. 사진도 그 당시 일반적이었던 형태로 찍지 않았다. 1925년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결혼 서류를 작성했다. 1926년 재판부는 박열과 후미코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박열은 오히려 재판 결과에 기뻐하면서 "내가 뿌린 씨앗은 후세에 남아 딱딱한 지각을 깨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종국에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는 승리자다. 나는 영원한 승리자다"라고 선언하며 끝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사형선고 후 얼마되지 않아 일본 천황이 두 사람의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국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본 재판부는 천황의 이름을 빌려 두 사람을 감형해주면서 일본 제국과 천황의 위신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일본 언론은 사형판결에도 의연했던 박열 부부가 목숨을 살려준 천황의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거짓 뉴스를 보도하며 두 사람을 비굴한 이미지로 깎아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박열 부부는 감형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고, 심지어 후미코는 천황이 보냈다는 문서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무기징역 선고 이후 형무소를 옮긴 뒤 후미코가 옥중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자살이 확실하지 않고 임신한 후미코를 일본이 죽였다는 등 불미스러운 내용이 많다.
가네코의 재판기록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지금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먼저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뭐든 우리 두 사람을 비웃어달라고. 이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 다음으로 재판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부디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고.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재심준비회 편, 《박열ㆍ가네코 후미코 재판기록》, 748쪽, 이하 《재판기록》)
나는 박열에게 부화뇌동하여 천황이나 황태자를 타도하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천황은 필요 없는 것, 있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나의 생각이 박열과 같았기 때문에 부부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조건 가운데는 그런 생각을 공동으로 실행하려는 동지적 결합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가네코의 진술서 중)
가네코 후미코
: 일본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박열의 부인
아나키즘에 동조할 수 밖에 없게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의지에 동감하게 되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며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아나키즘은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에서 들어온 잘못된 번역의 대표적인 예로, 정확히는 탈권위주의 정도로 번역되는게 맞을 듯 하다. 아나키스트는 어떠한 이유로도 개인의 자유가 사회/국가라고 이름지워진 권위로 부터 억압받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이다.
박열
1945년 광복을 맞아 22년 2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46년 일본거류민단의 전신인 신조선건설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재일거류민단으로 개편되자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 귀국하여 장학사업에 종사하던 중 6·25 때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이 있다.
출처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훈전자사료관-독립유공자 공적정보
벌거벗은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