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미식가들은 유독
일본 요리를 찾는다.
싱싱한 제철 음식들을 아름답게 담아내는 일본 요리의 특성상 풍성한 수확의 계절인 가을은 자연의 선물인 셈이다.
일본에서 귀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할 때 술과 함께 내는 가이세키(
會席) 요리는 일본 요리의 호사로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 시간 넘게 코스로 제공되는 이 요리엔 하늘이 내린 식재료의 맛과 인간이 빚는 미감(
美感)이 어우러져 있다.
소금과 식초로 간한
밥알을 잡아 생선을 얹는 스시(
壽司·생선초밥)는 또 어떤가. 미국 저널리스트 사샤 아이센버그 씨는 ‘스시 이코노미’란 책에서 스시를 ‘20세기 문화의 상징물’로 표현했다. 스시는 세계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서양인들은 이 작은 밥알 덩어리를 통해 이국적 정취를 느낀다.
일본 요리와 곁들이는
사케(일본 청주)는 와인과 같은 반열에 오를 정도로 빠르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사케는 술을 만들기 위한 쌀을 따로 재배해 정교하게 깎아내는,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술이다. ‘핸드 메이드’가 추앙받는 현대에 사케가 ‘뜨는’ 이유다.
단풍과 낙엽이 거리를 뒤덮는 가을. 일본 요리의 진면목을 찾아 나섰다.
● 일본 최고의 만찬, 가이세키 요리
가이세키 요리는 일본의 음식문화가 꽃을 피운 16∼19세기 에도(
江戶)시대 술과 함께 즐기는 연회 요리로 발전해 지금에 이르렀다. 가이세키 요리의 한자가 회석(
會席)이니, 태생부터 모임을 위한 요리였다. 한상 차림이 아니라 소량 음식이 7, 9, 11, 13가지 등 홀수(디저트를 제외하고)로 나오는 코스요리다.
가이세키 요리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계절감이다.
제철 식재료를 주로 하면서 나머지 재료들을 조금씩 넣어 지난 계절을 아쉬워하고 오는 계절을 살짝 맛보게 한다. 철 지난 재료는 ‘나고리(
名殘り)’, 제철 재료는 ‘슌(
旬)’, 철이 이른 재료는 ‘하시리(
走り)’로 부른다. 11월을 기준으로 나고리는 죽순, 슌은 복어, 나고리는 갯장어 등이 될 수 있다.
음식을 담는 그릇도 가이세키 요리의 계절감을 드러내는 중요한 오브제다. 봄에는 분홍색 벚꽃, 7월에는 반딧불, 가을엔 단풍, 겨울엔 눈이 그려진 접시를 사용한다.
흰색, 검은색, 녹색, 빨간색, 노란색 등 오색을 고루 사용하고 단맛, 짠맛, 쓴맛, 신맛, 매운맛에 여섯 번째 맛인 감칠맛도 더한다. 더운 요리와 차가운 요리는 번갈아 낸다.
가이세키 요리가 7개 음식으로 나오는 코스라면 전채요리인 사키쓰케(
先付), 국물요리인 스이모노(
吸い
物), 생선회를 내는 쓰쿠리(
造り), 조금 배를 채우는 요리인 시노기(
凌ぎ), 구이요리인 야키모노 핫슨(
燒物八寸), 찜요리인 무시모노(
蒸し
物), 밥이 나오는 쇼쿠지(
食事) 등으로 구성되는 게 일반적 순서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요리아카데미 츠지원의 가와모토 데쓰야(
川本徹也) 교수는 가이세키 요리의 법도(
法道)를 이렇게 소개한다.
“유능한 요리사는 좋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합니다. 또 손님이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먹을 정도의 분량을 조리하는 게 중요한 능력이죠. 손님은 대화 중이라도 요리가 나오면 즉시 먹어야 합니다. 요리사는 음식 맛이 최상일 때 손님에게 내는 것이니까요.”
서울에서 가이세키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은 롯데호텔 일식당 모모야마(02-317-7031), 신라호텔 아리아께(02-2230-3356), 서울 종로구 삼청동 치요노 유메(02-737-9211) 등이 있는데, 모모야마의 가이세키 요리가 그 중 가장 정평이 나 있다.
● 일본 요리를 세계적 요리로 끌어올린 스시
최고급 일본 요리를 선보이는 서울 특급 호텔들에선 요즘 ‘스시 전쟁’이 불붙었다.
웨스틴조선호텔은 10개월간의 재단장을 마치고 최근 스시조(02-317-0373)를 다시 열면서 일본 도쿄(
東京)의 유명 일식당인 스시 규베이(
久兵)와 손잡았다. 전통적으로 스시가 유명한 신라호텔 아리아께는 일본 기요다(きよ
田) 스시와 기술을 공유하기 때문에 일본 스시를 대표하는 ‘규베이 스타일’과 ‘기요다 스타일’을 국내에서 즐기게 됐다. 스시 규베이는 지난해 연매출이 3000만 달러(약 390억 원)인 기업화된 일식당이고, 기요다 스시는 긴자(
銀座)에 단 하나 매장(10석 규모)이 있는 최고급 일식당이다.
몇 년 전엔 긴 생선으로 밥알을 뒤엎은 스시 스타일이 인기였지만 ‘맛의 균형’을 중시하는 스시 규베이와 기요다 스시에선 생선과 밥이 동시에 목에 넘어가도록 생선을 길게 하지 않는다. 생선 맛만 즐기려면 차라리 사시미를 택하란 얘기다. 스시에 쓰이는 생선은 24시간 이상 숙성시킨 것을 고급으로 친다. 스시 고수(
高手)들 사이에선 참치가 단연 인기다.
밥알 8g - 생선 12g… 기요다 스시의 비밀기요다 스시를 만들 때 밥알 무게는 8g, 생선 무게는 12g에 맞춘다. 밥알 개수는 180개 정도다. 스시 규베이는 이보다 많은 220∼250개. 두 곳 모두 밥의 간은 소금과 식초로만 하고 설탕은 쓰지 않는다. 쌀에서 우러나오는 당분으로만 단맛을 낸다.
스시가 세계적 요리로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레스토랑 평가지 ‘미슐랭 가이드’ 추천 식당인 스시 규베이의 오너 셰프인 이마다 요스케(
今田洋輔) 씨는 스시의 생명을 생선, 쌀, 요리사의 기술과 정신으로 집약한다.
그는 “1950년대까지만 해도 스시는 튀김과 스키야키(냄비 요리)에 비해 야만적 음식으로 취급받았지만 최근엔 비만을 걱정하는 참살이 라이프스타일의 유행에 힘입어 고급 요리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스시를 만드는 요리사의 예술적 손놀림을 감상하면서 요리사와 손님의 소통(
疏通)이 카운터에서 이뤄지는 점도 스시의 경쟁력으로 꼽았다.
스시 규베이가 1940년대 창조해낸 군함말이 스시는 스시가 ‘소통의 요리’란 사실을 보여주는 예다. 유통망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한 손님이 홋카이도(
北海道)의 특산물인 성게알을 싸와 스시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것. 밥 위에 올린 성게 알이 쏟아지지 않게 김을 만 게 이 식당의 창업자인 이마다 씨의 아버지다.
스시는 지방이 적은 생선부터 먹는 게 좋다. 도미→아카미(참치 속살)→주도로(참치 옆구리살)→오도로(참치 뱃살)→피조개와 오징어→전어 순으로 먹는 것이 정설이다.
이태영 아리아께 차장은 “고급 일식당에선 저녁시간대보다 값이 싼 낮에 그 식당의 전략 상품인 세트 메뉴를 먹는 게 좋은 스시를 즐기는 경제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 오묘한 맛과 향, 사케의 멋
사케는 본래 술을 총칭하지만 쌀을 발효시켜 맑게 걸러낸 일본 청주로 통용된다.
사케는 정미율(쌀의 표피를 깎아내고 남은 비율)에 따라 50% 이하인 다이긴조(
大吟釀), 50∼60%인 긴조(
吟釀), 60∼70%인 혼조조(
本釀造)로 나뉜다. 깨끗한 맛과 향을 내려면 쌀을 많이 깎아야 하기 때문에 정미율이 낮을수록 좋은 등급이다.
한편 준마이(
純米)는 원재료에 따른 분류 중 하나로 알코올을 섞지 않고 쌀로만 빚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케 본연의 맛을 초보자가 느끼려면 준마이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사케 라벨에는 일본주도(
日本酒度)가 표시된 경우가 많다. ‘+’ 수치가 높으면 드라이한 가라구치(
辛口), ‘―’ 수치가 높으면 단맛이 나는 아마구치(
甘口)라 한다. 예를 들어 일본 미야기(
宮城)의 이치노쿠라 히메젠(
一ノ
藏 ひめぜん)은 주도가 ‘―60’으로 단맛이 매우 강해 식전주나 디저트 청주로 인기다.
사케는 여러 온도로 마실 수도 있다.
고급 사케는 5∼7도로 차게 마시는 게 일반적이다. 사케를 데울 때는 전자레인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탕을 해야 제 맛이다. 체온 정도로 데울 수도 있고, 55도까지 데울 수도 있다. 단 너무 뜨거우면 사케 본연의 향과 맛을 즐길 수 없다. 일식집에서 복 지느러미를 띄워 매우 뜨겁게 내는 히레사케가 고급 술이 아닌 이유다. 또 와인이나 위스키는 보통 연도가 오래된 것을 좋은 술로 치지만 사케는 출고한 지 1년 이내의 제품이 좋다.
사케 소믈리에인 김미정 모모야마 지배인은 “사케를 마시기 전 먼저 코로 향을 느낀 뒤 입 속에 술을 머금고 입 전체로 굴리며 뒷맛을 느끼라”고 말했다.
김 지배인은 가이세키 요리에 곁들일 사케도 추천했다.
식전주로는 발포성 사케로 알코올 함량이 5.9%로 약한 일본 야마구치(
山口)의 ‘고쿄 네네(
五橋 ねね)’, 사시미에는 깔끔한 맛의 아키타(
秋田) 명주인 아라마사 후쿠로토리 시즈쿠사케(
新政 袋取り놔
酒), 된장을 바른 굴 구이 요리에는 칼칼하면서도 단맛이 나는 교토(
京都)의 ‘슈텐도지 아마구치 교온나(
酒呑童子 甘口 京女)’ 등이다.
국내에서 인기있는 고급 사케로는 기쿠히메 구로긴(
菊黑吟), 핫카이산 공고신(
八海山 金剛心), 구보타 만주(
久保田萬壽), 고시노 간바이(
越乃寒梅) 등이 있다.
일본 사케 수입회사인 니혼슈코리아의 양병석 사장은 사케 초보자를 위해 한국 청주인 청하, 일본 가모쓰루(
賀茂鶴) 혼조조, 일본 오쿠노마쓰(
奧の
松) 긴조를 비교해 마셔볼 것을 권했다. 그래서 기자는 한 대형마트에서 이들 세 종류의 술을 사 눈을 가린채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해봤다. 개인적으로는 혼조조, 청하, 긴조 순으로 좋았다. 긴조가 혼조조보다 등급이 높은데도 말이다.
여러 사케의 맛을 묻는 기자에게 “술 맛은 지극히 주관적이라 답하기 어렵다”고 한 양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점이 사케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일본요리 곁들여 좋은 사람들과 사케 한 잔 걸치면 그게 또 사는 맛 아닐지. 시간이 날 때 일본 사케를 다룬 만화 ‘명가의 술’을 보면 금상첨화일 듯싶다.
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