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追伸).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천주의 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모든 것이 천주께로 부터 오는 상이나 벌입니다. 박해(迫害)까지도 그분의 허락(許諾)으로만 오는 것 이니, 참을성 있게, 또한 천주를 위해 견디십시오. 다만 당신 교회에 평화(平和) 를 돌려주시도록 눈물로 간청(懇請)하십시오. 내 죽음은 물론 여러분에게 타격 (打擊)이 될 것이고, 여러분의 영혼(靈魂)은 슬픔 속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 래지 않아, 천주께서는 여러분에게 나보다 나은 목자(牧者)를 주실 것입니다. 그 러니 너무 슬퍼하지들 마시고, 천주를 큰 애덕(愛德)으로 마땅하게 섬기도록 힘 쓰십시오.
애덕(愛德)으로 결합하여 있읍시다. 그러면 죽은 다음에 우리는 영원히 결합 (結合)하여 있을 것이고, 영원히 천주 대전(大殿)에서 복을 누릴 것입니다. 천만 번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⑫ 페레올(Ferreol) 주교께 편지를 올린 지 3일 후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 부는 아래와 같은 추신(追伸)을 덧붙였다.
『저는 오늘 프랑스 배들이 조선에 왔다는 확증(確證)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를 쉽게 구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협(威脅)만 하고 돌아가 버리면, 조선포 교지(朝鮮布敎地)에큰 해를 끼치고, 저도 죽기 전에 무서운 형벌(刑罰)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천주여, 모든 것에 좋은 결말(結末)을 지어주소서!(8월 29일)』
프랑스 사람들이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는 한 때 오래지 않아 석방(釋放)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그와 함께 갇혀있는 신자들에게,
우리는 사형을 당하지 않을 것
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무슨 증거를 갖고 계십니까?하고 신자들이 물으니, 그는 대답하였다.
프랑스 배들이 조선에 와 있는데, 주교님과 안신부님(Daveluy 신부의 조선 성 (姓))이 틀림없이 우리의 처지(處地)를 그들에게 알릴 것입니다. 나는 함장(艦 長)을 알고 있으니, 그가 틀림없이 우리를 석방(釋放)시켜 줄 것입니다.
과연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를 몇 달 동안 통역(通譯)으로 두어서, 그를 잘 기억(記憶)하고 있던 세실(Cecile) 해군소장(海軍少將)이, 김대건(金大建) 안드레 아 신부의 석방(釋放)을 요구하였을 것은 있음직한 일이다. 그러나 페레올 (Ferreol) 주교가 곧 편지(便紙)를 보냈지만, 그 편지는 배가 떠난 다음에야 도 착되었으므로, 함장(艦長)에게 전달될 수가 없었다. 이 파견(派遣)의 목적(目的) 은 다만 다음의 편지를 조선의 대신(大臣)들에게 전하는데 있었다. 편지의 원문 (原文)은 한문(漢文)이다.
『불국해군대신(佛國海軍大臣)의 명을 받아, 주 중국 불국함대사령관((駐中國 佛國 艦隊司令官) 세실(Cecil) 해군소장(海軍少將)은, 기해년(己亥年) 8월 14일(1839년 9월 21일)에 있은 추악(醜惡)한 폭행(暴行)에 대해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 지식(知識)과 덕으로 존경을 받던 앵베르(Imbert), 샤스땅 (Chastan), 모방(Maubant) 등 3명의 프랑스인이 무슨 이유(理由)인지 모르게, 조 선에서 사형(死刑)을 당했습니다. 이 동양지방에서 자기의 동포(同胞)들을 보호 (保護)할 책임(責任)을 가진 해군소장(海軍少將)은, 이들 3명으로 하여금 그렇게도 비참(悲慘)한 운명을 당하지 못하게 만든 죄악(罪惡)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온 것입니다.
귀관(貴官)들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법은 어떤 외국인도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데, 그 3명은 이 법을 어겼으므로, 그 위반이 벌을 받은 것입니다.
라고.
그러나 본 해군소장(海軍少將)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중국인(中國人), 만주인(滿洲人), 일본인(日本人)들이 가끔 무턱대고 귀국에 들어 오는 일이 있습니다. 귀관들은 그들에게는 해를 끼치기는 고사하고, 그들이 고향 (故鄕)으로 돌아가도록 편의(便宜)를 제공하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프랑스 사람들을 중국인(中國人), 만주인(滿洲人), 일본인(日本人)들을 대우하시듯 대우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조선이 문명(文明)한 땅인 줄 믿고 있었는데, 귀국(貴國)은 불국대황제 (佛國大皇帝)의 관용(寬容)을 무시하였습니다. 프랑스사람들이 고국에서 수만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간다 하여, 이제는 프랑스 사람이 아니고, 아무도 그를 상관하
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황제(皇帝)의 은혜(恩惠)는 그의 신민 (臣民)이 세상 어느 곳에 가 있든지, 모든 신민에게 미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
다.
만일 그들 중에 다른 나라에서 살인(殺人)이나 방화(放火)나 다른 무슨 벌을 받 아야 할 범죄(犯罪)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어 벌을 받는다면, 우리 황제(皇帝)는 사법(司法)이 하는 대로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죄명(罪名)도 없고, 이유(理由)도 없이, 포악(暴惡)하게 그들을 사형(死刑)에 처한다면, 그때에는 당연히 노하여, 그 불공평한 압박자(壓迫者)들에게 보복(報復)을 하십니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된 동기(動機)에 대해, 즉 우리나라의 세 박사(博士)에게 조 선 사람들이 가한 사형(死刑)에 대해 지급 당장은 대신(大臣)님들이 즉답(卽 答)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떠나갑니다. 내년에 불함(佛艦)들이 다시
와서 회답(回答)을 받아갈 것입니다.
다만 대신(大臣)님들에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대신(大臣)님들 은 우리 황제(皇帝)께서 그 신민(臣民)에게 베풀어주시는 친절한 보호(保護)를 분 명히 들어서 아셨으니, 만일 이 다음에도 조선 사람들이 프랑스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폭행(暴行)을 가한다면, 조선은 분명히 크나큰 불행(不幸)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런 불행이 임금님과 대신(大臣)님들과 고관(高官)들에게 닥쳐온다 면, 그 불행은 자신들이 아닌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벌 을 받을 것인데, 그것은 포악(暴惡)하고 불의(不義)하고 몰인정(沒人情)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세(救世) 1846년 5월 8일(6월 1일)』
이 기회(機會)에 페레올(Ferreol) 주교는 아래와 같은 편지(便紙)를 썼다(전게서 한(前揭書翰)을 말한다).
『내년에 와서 우리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배상(賠償)을 요구한다면, 장래에는 종교 를 위해 덜 포악(暴惡)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희망(希望)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위협(威脅)만 하고 만다면, 조선 백성이 프랑스사람들을 업신여 길 것이고, 임금은 신자(信者)들에 대해 더욱 격노(激怒)할 것입니다.
벌써 이편지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을 가져오는 기회(機會)가 되거나, 적어도 그것을 재촉하였습니다. 그 사정은 이렇습니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는 관장(官長)들과 정승(政丞)들의 호의(好意)를 샀기 때문에, 이들은 임금님께 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나라 밖으로 나감으로써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나라 에 돌아옴으로써, 죄를 기워 갚았습니다.
그런 다음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옥중에서 번역(飜譯)한 세계지도(世 界地圖)의 사본 한 벌을 인금님께 바쳤습니다. 임금님은 매우 만족(滿足)하여, 그 들의 청을 들어줄 찰나(刹那)에, 불함대장(佛艦隊長)의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며칠 후 조정(朝廷)에서는, 죄수들을 매질하여 배교(背敎)한 사람들은 놓아주고,
반항(反抗)하는 사람들은 즉시 사형(死刑)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