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소리와 고창판소리의 이해
정 병 헌(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차례>
1. 고창의 판소리 문화
2. 고창의 판소리와 신재효
3. 판소리 문화의 역사적 기반
4. 고창의 판소리사적 기여와 지향
1. 고창의 판소리 문화
고창에 오면 내방객을 먼저 맞이하는 것이 고창읍성이다. 선운사가 있고, 미당 서정주의 기념관도 있지만, 고창읍성은 원형이 그나마 잘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와 정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잘 복원된 동헌이나 객사, 그리고 입구의 공북루도 그 아취를 잘 드러내고 있고, 빙 둘러싸인 성곽을 따라 걸으면 고창의 자연과 역사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중앙 정부와의 수직적 관계로 이해할 수 있는 고창읍성의 입구 오른편에는 또 동리국악당과 판소리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둘 다 이 고장을 판소리의 중심지로 육성했던 신재효의 생가터에 세워져 있다는 점에서, 고창의 문화에 대한 기여와 현재를 잘 드러내고 있는 명소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고택을 재현하여 ‘신재효판소리공원’을 조성하여 역사적 향취를 더하였다. 이렇게 보면 고창은 과거를 과거로 놓아두지 않고, 현재와 긴밀하게 연결지을 줄 아는 지혜를 가진 고을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처럼 서로 마주 서 있는 읍성과 국악당, 그리고 판소리박물관을 포함하여 새로 조성된 신재효판소리공원은 이곳을 찾는 내방객에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기 위하여 내면과의 대화를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동리국악당은 1990년 12월 31일 준공된 지상 2층 지하 1층의 현대식 건물이다. 준공된 다음 해 이 국악당에서 만정 김소희 선생이 수상자로 선정된 제 1회 동리대상 시상식이 있었고, 이것은 지금까지 매년 계속되어 2022년 32회의 시상식을 치른 바 있다. 김소희가 제 1회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여러 면에서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김소희는 이미 판소리의 성가를 높일 수 있는 시상식의 처음을 장식해야, 그 시상의 의미가 있을 만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김소희에게 1회의 영예를 주지 않은 시상 행사는 그 자체로 격이 떨어지는 정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동리대상 시상은 김소희의 출생지에서 이러한 외부의 성가를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후 판소리 연창자, 고수, 판소리 연구자 중 판소리사에 크게 기여한 인물을 선정하고 그에 걸맞는 영예가 주어졌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만큼의 상금이 부상으로 주어지기도 했다. 동리대상 시상을 관리하고, 그 학술적 연구를 도모하기 위하여 동리연구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신재효 고택의 자리에 위치한 판소리박물관은 2001년 건립되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아담한 박물관으로 판소리의 역사와 만나고, 또 체험도 할 수 있게 하는 시설을 갖추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참 미미하였지만, 이제는 판소리와 관련된 박물관으로서의 의미를 톡톡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만한 정도의 박물관에도 목말라 했던 우리였기에, 그 출발에 많은 성원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금년 개관한 신재효판소리공원은 고창의 판소리문화를 집약하여 보여주고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개관에 즈음하여 개설된 ‘명창초청 판소리아카데미’는 고창이 ‘판소리의 성지로 거듭 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뜻깊은 행사가 되고 있다.
전라북도 서남쪽 끝에 위치한, 인구 오만 이천여 명(2023년 기준)의 자그마한 자치단체로서는 썩 감당하기 어려운 국악당과 박물관, 판소리공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우선 고창은 천혜의 자연 역사 문화 환경을 갖추고 있어 세계문화유산 7관왕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을 갖추고도 이를 잘 지켜내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만이라면 이 고창 말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사업은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해답을 우리는 이곳 고창이 이러한 국악당과 박물관, 그리고 판소리공원을 세울 수 있는 역사적 의미와 요건을 지니고 있고, 그 중심에 동리 신재효가 놓여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2. 고창의 판소리와 신재효
판소리의 변화에 관심을 보이고 그 방향을 모색하였던 인물은 신재효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신재효만큼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판소리의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판소리가 변화하는 중간의 지점에서 그 변화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것은 좋든 싫든 현재의 우리에게 하나의 역사적 실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판소리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고민을 당대에 드러낸 인물은 없었다. 그에 의하여 판소리의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은 남김없이 실험되고 정리되었던 것이다.
신재효는 1812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884년 또 이곳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의 생애가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조선 후기 그 엄청난 격동기를 보내면서, 자신의 활동의 중요한 부분이 판소리와 관련된 사업임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는 데 있다. 이것이 없었다면, 그는 호남 변방의 한 중인 관료로서의 평범한 일생을 보낸 가족 내적 인물로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가 지방 관청의 서울 사무를 책임지는 경주인의 아들이었고, 오랜 관료 생활을 거친 뒤에 육방의 우두머리인 호장을 지냈다는 사실 등은 그의 후손에게서나 의미를 갖는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에 불과하다. 우리에게서 그의 이러한 생애마저도 그나마 의미를 갖는 것은 그가 판소리사의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와 관련된 신재효의 활동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기존의 판소리 사설을 개작하여 우리에게 전하였다는 점, 그리고 판소리 연창자에 대한 지원이 대단히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신재효는 판소리 열두 작품 중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의 여섯 작품을 정리 개작하였는데, <춘향가>의 경우는 남창과 동창의 두 가지를 남겨 주었다. 그의 개작에서 제외된 작품들이 판소리 전승에서 탈락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판소리에 대한 깊은 안목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승에서 탈락한 작품들은 신재효의 개작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런 현상이 초래된 것이 아니라, 판소리사의 흐름에 역동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여건을 스스로 갖추지 못했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변강쇠가>의 경우는 그의 개작이라는 작업에 의하여 사설이나마 온전하게 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 작품을 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가와 가사류의 작품도 창작하엿다. <도리화가>는 제자인 진채선을 그리워하는 나이 든 스승의 안타까움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인데,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서간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오섬가>는 만남과 이별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적 정서라 할 수 있는 사랑과 슬픔을 곡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까마귀와 두꺼비의 대화 방식을 통하여 진한 육담적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리화가>나 <오섬가>의 이러한 기술 방식은 우리의 문학 전통에서 대단히 희귀한 것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판소리에 관련된 신재효의 활동 중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지속적이고 계획적인 판소리 지원 활동을 벌였다는 점이다. 부유한 생활과 중인이라는 신분은 이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근면과 노력으로 재산을 증식할 줄 알았고, 또 이루어진 재산을 값있게 사용할 줄 알았던 인물이다. 그의 사랑방은 소리를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나, 또는 재수련을 위하여 찾아오는 명창들로 항상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의 풍부한 재산 축적이나 중인이라는 계층적 성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조건에 처한 당대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어떤 다른 사람에게서도 신재효와 같은 정력적이고 집중적인 판소리 활동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판소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판소리 연창의 우열(優劣)에 대한 그의 평가는 독보적일 만큼 확고하였다. 인물과 사설, 득음, 그리고 너름새를 중시하는 당시의 판소리 평가 척도도 그의 <광대가>에 의하여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명창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그의 문하를 찾는 것이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고창의 판소리를 언급하면서 신재효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끌어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신재효와 고창에 관련된 판소리 연창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잘 알려진 사람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박만순(고부, 동편) 김세종(순창, 동편)
백근룡(정읍) 신만엽(여산)
김창록(무장, 동편) 김수영(흥덕, 서편)
김찬업(흥덕, 김수영의 아들, 동편) 김거복(부안, 서편)
백경순(부안, 서편) 전도성(김제, 동편)
김원술(정읍, 전도성의 제자) 신영채(부안, 전도성의 제자)
성민주(부안, 동편) 이날치(담양, 서편)
전해종(부안) 정창업(함평, 서편)
진채선(심원) 허금파(김천)
홍두평(경기) 김경홍(상하)
김남수(흥덕) 김토산(흥덕)
김여란(성내) 김소희(흥덕)
김경희(김소희의 동생) 김성수(심원, 호적명은 김이수임)
여기에서 거론되는 인물이 고창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 동편과 서편을 아우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남녀가 더불어 있다는 점 등은 이 지역이 판소리의 조화와 재생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심에 신재효가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진채선이라는 최초의 여성 명창은 고창의 이러한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재효에 의하여 판소리계에 등장한 진채선에 의하여 판소리계는 그 인적 구성이 보다 풍부해졌고, 이것은 후대에 나타난 창극의 발흥과 여성 명창의 증대를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신재효는 남창만이 존재하던 판소리의 풍토에 진채선이라는 여창을 공급함으로써 판소리 판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여성이 판소리에 참여함으로써 남성의 성음에 맞도록 되어 있는 기존 판소리의 음악은 여성도 부를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했다. 여성이 부르기에 어울리지 않은 골계적, 외설적인 사설도 손질을 해야 했고, 여성의 성음에 맞도록 실내악적인 분위기로의 전환도 일어났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여성이 참여하면서 배역에 따라 분창할 수 있는 창극으로의 전환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신재효는 판소리의 문화적 가능태를 남김없이 이 지역에서 실험했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창작 판소리 등 다양한 문화가 현재도 나타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이미 신재효의 실험 속에서 드러난 일이었다. 판소리 연창자의 대부분이 여성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상황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남성 연창자의 이탈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추세이고, 여성이 이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사명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 신재효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
『조선창극사』에서 신재효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기록한 박만순과 김세종, 그리고 이날치 등은 동편과 서편을 아우르는 명창들이다. 이미 명창으로서의 성가를 높인 연창자들이 신재효의 문하를 거쳐갔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신재효와 고창이 판소리의 변화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김남수 이하는 신재효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고창을 그 출신 지역으로 하는 명창이다. 비록 그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고창을 기반으로 하는 연창자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신재효의 업적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3. 판소리 문화의 역사적 기반
신재효가 있음으로써 고창이 판소리사의 전면에 부상한 것은 확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재효 이전에도 고창에는 판소리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고창이 동리국악당이나 판소리 박물관, 신재효판소리공원을 관리할 수 있는 근거로 신재효를 거론하는 것처럼, 신재효가 판소리 연창자를 육성하고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근거를 고창은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주 향리(移住鄕吏)인 신재효는 판소리의 진흥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그 근거가 되는 기반으로 우리는 고창에 존재하는 풍부한 음악 유산과 무속의 집적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 삶을 영위하다 보면 자연히 인간 행위의 소산인 문화가 탄생하는데, 음악 또한 그러한 문화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창 지역의 음악 문화는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 고창지역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노래는 <선운산>이다. 『고려사』 악지에는 백제의 노래로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정읍>, <지리산>을 들고 있는데, 이 중에서 <선운산>에 대하여는 “장사 사람이 부역에 나갔는데,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람의 아내가 그를 생각하여 선운산에 올라가 바라보며 부른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장사는 지금의 공음면 지역이다.
님을 기다리는 정서의 표출은 이 지역에서 일회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악학궤범』에 전하고 있는 <정읍>은 <선운산>의 정서를 망부석과 결부시켰을 뿐, 그 정서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선운산에 올라가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세상에 전하기는 고개에 올라가 남편을 바라본 돌이 있다고 한다’는 <정읍>의 모습으로 얼마든지 치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읍>에서의 행동 주체는 ‘달’과 ‘님’으로 구분되며, 동시에 공간적 배경은 광활한 것과 국지적인 것으로 분할된다. 이러한 대립 관계의 설정은 달의 광명과 정대함이, 님이 있는 ‘즌대’의 저무는 시간과 장소에 전이(轉移)되기를 기원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은 결국 달과 님의 일치를 도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실의 암흑과 비극적 상황을 광명과 이상적 상황으로 환치시킴으로써 님에 대한 불안감은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결 방법은 <서경별곡>이나 <가시리>에 나타나는 극단적 상황의 예견(豫見)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한다. 망부석이라는 것도 사실은 님을 향한 지순한 마음의 순간적 정지(停止)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까지도 님을 향한 지고의 감정을 극대화시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망부석과 결부될 수 있는 지고지순(至高至純)의 감정이 <선운산>이나 <정읍>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방등산>도 고창지역과 관련이 있는 노래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사』 악지에는 “방등산은 나주의 속현인 장성의 역내에 있다. 신라 말년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이 산에 근거를 두니, 양가의 자녀들이 많이 잡혀갔다. 장일현의 여인 역시 그 잡혀간 사람 가운데 들어 있었는데, 이 노래를 지어 자기 남편이 곧 와서 구출해 주지 않는 것을 풍자했다.”고 하였다. ‘장일현’은 기록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으나, 장성이 고창 가까이에 있으므로 이 또한 고창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 장성읍지를 인용한 장성군사는 고창과의 경계인 반등산성(半登山城)과 반등산 속초봉의 만동민보성(萬洞民堡城)을 <방등산가>의 현장으로 추정하였다. <방등산>은 화자의 의지가 다른 사람에게 확산되고, 살고 있는 곳이 정도(正道)가 실현되는 곳으로 변모되기를 희구하고 있다. 풍자의 대상인 남편은 구하여야 하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정도의 파괴를 방조한 권력층으로 이행하면서 그 풍자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적 상황을 노래로 치환할 수 있는 지혜는 <춘향가>의 십장가(十杖歌)에서 익히 보아오던 현상이다. 이 지역의 음악 문화가 유구한 연원을 지니고 있음을 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판소리가 음악과의 깊은 관련 속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은 판소리 명창의 요건으로 득음(得音)을 거론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래 조잡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던 판소리가 현재의 예술 형태로 변화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음악과 관련된 시가를 이야기가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이다. 처음과 끝이 존재하는 서사로서의 이야기가 음악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한 부분만의 연창으로도 가능한, 새로운 형태인 판소리로 변화되었다. 여기에서 받아들이는 음악은 연창자가 성장한 지역의 음악일 수밖에 없다. 흥부이야기나 춘향이야기는 지역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지만, 각 지역에 기반한 음악의 변용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편의 소리와 동편의 소리로 그 법제가 구별되는 것도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 지역에 기반한 음악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나 충청 출신의 연창자들이 ‘석화제, 중고제, 중고조, 호걸제’ 등으로 표현될 뿐, 동편과 서편의 법제로 편입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송흥록 이후 판소리의 연창자 그룹에서 그 지역 출신이 배제되기 시작한 것도 각 지역에 기반한 음악의 변화가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전북의 민요 권역은 크게 넷으로 나뉘어지는데, 고창은 전주, 익산, 군산, 완주, 옥구, 김제, 정읍 등과 함께 서부 평야 도작(稻作)노동요권에 속한다. 이 지역 노동요의 가창방식은 거의 모두 일정한 후렴이 있는 선후창이 지배적이다. 선후창은 매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분화를 전제하고 있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매기는 사람의 전문적인 음악성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전문적인 소리꾼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었고, 그 결과 판소리 연창자가 출현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고창은 같은 서부 평야의 도작노동요권이라 하더라도 노동요와 민요의 내용이 상당히 달라 전남 서북부의 민요와 같은 권역으로 묶여진다고 한다. 이는 「근대가요대방가 신재효」를 쓴 조운이 영광인이라는 점, 그리고 고창의 권역이 전북의 전주보다 광주와 가깝다는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창을 포함하는 전남 서북부 평야지역에서는 논매기에서 긴소리를 주로 부른다. 긴소리는 소리를 길게 끌어내기 때문에 숨이 짧은 사람들은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길면서도 힘찬 사나이다운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길게 빼서 부르는 대목이 넘어가면 빠른 템포로 사설을 이어나가 변화무쌍한 박진감을 주기도 한다. 설소리꾼은 처음에 높은 소리로 끌어가면서 소리를 하다 높은 소리에서 길게 끌면서 청을 떨어주어 특이한 효과를 내기 때문에 긴소리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과거 활발한 해상 교역의 영향으로 다양한 문화가 교류되었기 때문에 그 민요 또한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들노래의 경우에도 모찌기노래와 모심기노래, 논매기노래, 풍장소리, 장원질노래로 분화되어 있고, 각각의 노래들은 또 늦은소리와 잦은소리로 구분되어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고창의 이러한 ‘같고 다름’은 농악에서도 잘 나타난다. 농악은 풍물굿으로도 불리는데, 그 전승되는 지역에 따라 중부 이북의 웃다리 가락과 이남 지역의 아랫다리 가락으로 구별된다. 이는 다시 경기농악, 호남좌도농악, 호남우도농악, 영남농악으로 구분되는데, 고창의 농악은 전라도의 서쪽에 위치한 익산, 옥구, 김제, 부안, 정읍, 고창, 영광, 함평, 나주, 장성, 광주, 무안, 영암, 강진, 장흥 등의 평야지대에 전승되는 호남우도 농악권에 속한다. 우도농악은 평야지대의 낙천적인 습성과 마찬가지로 가락이 느리면서도 음악적으로 다듬어져서 몸동작보다는 가락의 조화로움이 더 발달되어 있다. 또한 그 내용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쇠와 장고의 느린 가락과 빠른 가락의 조화와 개인 놀이가 발달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호남우도 풍물굿의 특성은 의상은 고깔을 주로 쓰고 복색이 화려하며 느린 가락이 많으나 빠른 가락도 곁들여 비교적 가락이 다양하고 개인 연기에 치중한다. 또한 윗놀이에 치중하지 않고 밑놀이가 다채롭고 멋이 있으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채상이 없는 장고가락이 발달함에 따라 큰 북을 치지 않는 경향이 있다.이기화 선생은이 농악권 중에서도 고창의 농악은 ‘간이 가장 맞다’는 영광·무장 농악의 정통적 계보를 이어오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 말은 목포지방의 농악은 좀 느리고, 익산지방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빨라져 상당한 차이가 나는데, 그 중간 지역인 고창의 농악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아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고창이 소속된 민요 권역과 호남 우도 농악권이 판소리의 서편제가 전승되는 지역과 긴밀한 정합 관계를 보인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창의 농악이 신청 농악 무당들의 친목을 위한 조직체에서 다루어진 농악이 중심이 되어 중부잣집들의 영농을 위한 노작농업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기반한 음악적 전통이 판소리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심대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흥덕의 풍류적 기반도 고창의 판소리를 발달하게 한 바탕으로 추가해야 할 것이다. 명창 김소희는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초기에 전계문, 김용근 등 정읍과 고창지역의 대표적인 풍류방 음악인들과 교유를 가졌는데, 이러한 접촉을 통하여 풍류방 음악의 음악관을 접하게 되었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지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20세기 초 결성된 성내 삼구회(三九會), 흥덕 아양율계(峨洋律契), 성내 육이계(六二契) 등이 활발하게 활동한 것도 이러한 풍류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판소리가 주변의 다양한 음악을 포용하는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흥덕을 중심으로 하는 풍류방 음악인들의 활동은 고창의 판소리 발전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판소리 연창자를 배출한 보고(寶庫)가 무속과 긴밀한 연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최초의 여성 명창인 진채선은 ‘세습 무당의 딸’로 알려져 있다. 세습무는 사제권의 세습을 통해 무업을 전승하고 일정한 활동 구역을 토대로 굿을 해 왔다. 사제권의 세습과 당골판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무업을 전승해 온 것이다. 이러한 무당 가계의 특성상 진채선의 부모는 모두 굿을 통해 여러 가지 음악과 무용 등을 연행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진채선 또한 자연스럽게 판소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 신재효의 교육을 받기 전에 이미 진채선은 판소리를 연행했고, 명창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소양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진채선의 출신은 기생이나, 단골무의 후예 등 여러 가지로 논의되어 왔다. 이에 대하여 이기화 선생은 1847년 고창군 심원면 검당포에서 아전 집안의 조부와 세습무인 김단골을 조모로 하여 태어났다고 말한다. 진채선의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무 계승권은 진채선의 아버지에게 이어졌으나, 후일 김성수 일가에게 그 계승권이 옮겨졌다. 따라서 진채선의 어머니는 무업에 종사하였지만, 진채선은 무업과 관계없이 소리 공부에 매달렸던 것이다.
판소리 명창이 되는 것은 무당 가계의 사람들이 가지는 꿈이었다는 점, 그리고 최초의 여성 명창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진채선이나 그를 가르치는 신재효 모두에게 지극정성으로 판소리를 연마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소리꾼으로서의 능력을 갖춘 여성이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터전이, 이미 진채선의 어머니가 소리를 하고 다녔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채선은 신재효라는 역사적 인물을 만남으로써 최초의 여성 명창이라는 영예를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김소희가 송만갑을 찾아가 판소리를 배우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송만갑에게 배우기 위해 그 앞에 선 김소희도 이미 판소리의 세계에 들어서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진채선이 신재효와 김세종의 앞에 선 것처럼, 서편의 전승지역인 고창의 음악에 물들어 있는 김소희는 송만갑을 만나면서 새로운 판소리의 세계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연장선상에서 이미 명창의 반열에 올라 있던 박만순이나 김세종, 이날치, 정창업 등이 신재효에게서 받은 교육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신재효가 고창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고창의 민속 음악이나 판소리에 깊은 식견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좌상객의 수준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순창 출신의 김세종이 신재효의 문하에서 실제로 실기 선생을 담당하였다는 점은 신재효 교육의 실체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김세종의 소리는 흥덕 출신인 김찬업을 통하여 보성소리로 옮겨져 그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데, 그 견문의 고상함이 다른 연창자에 비할 바 아니었다고 한다. 문식이 넉넉하고 판소리의 이론과 비평은 당세의 독보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송흥록의 의발(衣鉢)을 계승한 박만순도 김세종의 비평에 대하여는 그 적절함을 수긍하였다고 한다. 김세종이 실기 지도를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김세종의 이론과 신재효의 교육이 상당한 부분 일치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김세종은 송흥록에게서 “너의 김씨 문중 소리가 송씨 문중 소리만 못한 점이 무엇이 있느냐. 가서 김씨 소리를 닦아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김세종의 소리가 송흥록에게서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김세종의 송흥록에 대한 열망의 또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송흥록은 전북 운봉 비전에서 출생한 불세출의 명창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조선창극사』는 ‘모든 가사의 집대성한 공로로 보아서 기량의 특출한 점으로 보아서 창극의 중시조’라 하였고, ‘동배의 명창 모흥갑은 선배로 극히 추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왕의 칭호까지 바쳤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여 판소리의 느린 장단인 진양조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진양조의 완성은 중고제의 명창인 김성옥과의 관련 속에서 나타났는데, 이를 통하여 판소리는 정관(靜觀)에 의한 예술적 창조의 형태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역점을 두어 교정하고자 한 것은 무속에서의 독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재효가 개작한 <심청가> 사설과 정재근판 <심청가>, 그리고 이날치판 <심청가>를 비교해볼 때, 박동실을 통하여 한애순과 장월중선으로 이어지는 이날치판 <심청가>는 같은 서편제로 분류되는 정재근판 <심청가>와 많은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정재근판의 사설은 완판계의 소설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아 대원군의 사랑에서 유생들과 일일이 창본과 음악을 검토하여 예술적 발전을 기하고자 한 박유전의 판소리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하여 이날치판 <심청가> 사설은 송흥록의 판소리 통합 이전부터 존재했고, 그 이후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했던 고유한 의미에서의 서편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설 속에 무속적 세계관이 짙게 반영된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날치나 정창업과 같은 서편제의 명창이 신재효와의 교유에서 얻고자 한 것은, 그렇다면 서편제가 지니고 있는 무속적 성격의 배제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이 동편과 서편의 접합점에 놓여 있다는 점 또한 양쪽의 명창들이 자유롭게 교유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앞서 고창과 관련된 명창들이 동편과 서편, 다양한 출신 지역으로 분포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4. 고창의 판소리사적 기여와 지향
고창과 판소리의 관련을 신재효의 거론으로 완결짓는 것은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재효 이전에도 판소리의 토양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지만, 신재효에 의하여 고창은 판소리에 관한 한 전국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없었다면 고창은 판소리가 불리어지고 전승되는 호남의 다른 지방과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하나의 장소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재효의 거론은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재효가 고창에서 벌였던 사업을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재효는 판소리가 드러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이 지방 고창에서 탐색하고, 실현시켰다. 이 끝없는 실험정신과 변화의 추구가 고창을 판소리의 중심지로 부각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고창 또한 신재효가 기울였던 노력과 정신을 계승할 때, 판소리의 중심지로서의 자부심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고창은 이미 신재효가 이 지역을 판소리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어떤 지역도 갖지 못한 소중한 역사적 정통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기반 위에서 더 고려하여야 하는 것은 이러한 정통성과 의지를 지속시킬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일 것이다. 우리의 시대는 신재효 당시처럼 한 개인의 의지나 재력으로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한 의지나 재력도 이 지역 공동체의 동의 위에서 이루어져야 보다 지속적이고, 확고하게 추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가 충족되었을 때,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비전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전통시대의 판소리적 기반으로 작용했던 신분제나 부유한 양반의 지원 등은 이미 상실되었다. 연창자의 양성을 가능하게 했던 문화적 바탕으로서의 민요권이나 무속적 기반도 이미 상실되었다. 전통시대의 산업이나 신분제도와 연관되어 지속되었던 기반을 다시 회복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따라서 판소리박물관이나 동리국악당, 그리고 신재효판소리공원과 같은 문화적 기반은 단순한 건물로서가 아니라, 판소리 문화의 기반을 구축하는 바탕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판소리의 과거와 현실을 점검하고 이에 근거한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도모할 때, 새로운 창조적 문화의 탄생은 가능할 것이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판소리 인력이 모여들고, 점검하고, 가꾸는 일은 꿈처럼 먼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신재효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옛것을 모방하고 답습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판소리를 선보인다면, 그것은 단순한 꿈을 넘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부록1> 신재효와 진채선에 대한 이해
의식의 개안 : 지역 판소리로 존재
남녀의 장벽과 교육의 부재 속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열망
1898년 9월 1일 “여권통문” 발표(전문인을 양성하기 위한 여성 교육의 필요성)
– 여권통문의 날(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으나 인식의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
고창에서 '채선의 날'을 '여권통문의 날'과 같은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고 있음.
- 진채선은 歌妓가 아닌 歌女로서의 삶을 누리고자 했던 진정으로 프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으로 부각
여창 등장의 의의: 인적 자원의 교체, 음악의 범위 확대, 사설의 변화
<부록2> 진채선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진채선이 전문인으로 살고자 했던 모습을 확인함
1812- 1884 신재효의 생애
1847 진채선 출생
1863-1873 대원군 집정기
1867(20) 경복궁 낙성연
1870(23) 신재효의 도리화가
1872(25) 부안에서 연행
1873(26) 영광에서 연행
1874(27) 부안현감, 영광군수와의 불화
1877(30) 장성에서 연행
1879(32) 영광에서 연행
1880(33) 향리 김재옥의 연행 청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