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미산 신륵사(鳳尾山神勒寺)/ 전통사찰
-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전하는 바,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원효대사 꿈에 신령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지으라고 하였다. 이곳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일주일간 기도를 올리니 용 아홉 마리가 승천, 그 뒤에 절을 지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이야기 두 가지.
고려 우왕 때 신륵사 주변 마암馬岩에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을 괴롭힘. 나옹대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용마를 다스렸다.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사람을 괴롭힘.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고 말을 순하게 만듦.
신력으로 용마를 제압하였다고 신神과 륵勒를 써서 신륵사神勒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부터 전하는 이야기이고 사료로 전하는 바가 없어 정확하게 창건을 알 수 없다.
고려 때 절 동대東臺에 다층전탑이 있어 벽절(벽사甓寺)라 불렀다.
나옹화상이 입적,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굴름없는 하늘에서 비가 냈으며, 용이 호상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나옹화상 입적 후 3개월 뒤 1376년(우왕 2)에 나옹화상 정골사리를 봉안, 매우 규모가 큰 불사가 이루어졌다.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을 건립하고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보관하였다.
1469년(조선 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세종대왕 능)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
1472년(성종 3) 중창불사 8개월 만에 200여 칸을 보수와 신축하였다. 1473년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 계헌戒軒이 중건.
(신륵사 홈페이지와 다음/한국민족대백과사전 참조하여 글을 작성함)
여주 신륵사관광단지 주차장에서 밤을 보냈다. 아직 관광철이 아니라 그리 북적이지는 않는다.
신륵사는 역사극에 자주 등장한다. 특히 고려 말이나 조선 초 역사극에.
남한강을 접한 곳에 들어선 신륵사, 아름다운 배산은 없으나 강이 있어 운취가 있는 절이다.
일주문, 문화재관람료를 받고 있다.
몇 백 보를 걸어야 절이 나온다. 신륵사 사적비와 공덕비 들이다.
판돈녕 김덕익 공덕비, 이분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다. 돈녕은 왕실 친인척을 뜻한다고 나온다.
너무 이른가 찻집이 문을 열지 않았다.
요사(?)
불이문, 사천왕문은 불이문이 대신하고 있다.
관광객을 위해 지은 누각, 강 경치를 볼 수 있어 좋겠다.
구룡루, 누각 규모가 크다. 원효대사와 구룡 승천 전설로 구룡루라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범종각, 구룡루 옆에 있다.
적묵당
심검당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 보물 제225호
2층 받침돌(기단석) 위에 다층 몸돌(탑신)이 있어 기본은 신라나 고려의 양식이지만, 각 부재의 세부 조형은 전혀 다르다.
받침에서 몸돌에 이르는 각 부재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8층 이상 탑으로 여기지기도 한다.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돌 재질과 조각 기법이 같아 보이며, 1472년(성종 4) 신륵사 중창 때 같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받침돌에 새겨진 물결 무늬가 특이하다.
극락보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1678년9숙종 4) 건립, 1797년(정조21) 수리 시작, 1800년(정조 24) 마무리를 지었다.
신륵사 극락보전 목조 아미타삼존상 / 보물 제1791호
1610년(광해 2) 제작(복장유물에서 확인), 조각승 인일仁日. 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다.
아미타불은 좌상이지만 보살은 입상으로 보기 드문 삼존상. 여래와 보살 얼굴도 이국적이란 설명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 삼장보살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8호
천장, 지지, 지장 보살들. 경기도에 전하는 삼장보살도 가운데 가장 앞선 시대 그려진 그림.
18세기 경기도에서 활동한 화승 각총覺聰이 주도하여 그린 불화.
삼존상에서 나온 복장유물들(?).
기와를 쌓아 연돌을 만들었다.
보호수/향나무, 800년. 높이5m, 둘레 13m
조사당 / 보물 제180호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신륵사 삼화상진영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7호
무학대화상(좌), 지공대화상, 나옹대화상(우)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1773년(영조49)에 만든 종.
명부전
봉송각
승탑(부도)에 당호가 없다. 어느 시기, 어느 승려의 사리탑인지 알 수는 없다.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신륵사 원구형 석조 승탑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승탑이 가진 형식으로 봤을 때 조선 후기에 만든 것 같다.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 승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門扉形과 범자梵字를 도드라지게 새긴 게 특징이다. 형식으로 보아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여겨진다./문짝 비扉
날이 맑았으면 매우 아름다운 절이겠다.
보제존자 석등, 석등비, 석종 /보물
보제존자는 나옹화상이다.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밀양으로 가는 길에 신륵사에서 입적.
입적 3년 뒤 1379년(우왕5)에 제자들이 이곳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탑을 세웠다. 고려 후기 승탑 양식이다.
석종비, 비문은 목은 이색이 짓고, 글씨(유려한 해서체)는 한수가 썼다.
석종. 석종비, 석등은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
화사석火舍石 각 면에 무지개 모양 창窓이 나있다. 창문 사이엔 비천상상과 이무기가 새겨져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 보물 제229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 보물 제228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잎 석등 / 보물 제231호
화사석에 비천상과 이무기가 새겨진 것은 드문 것이 아닐까?
삼성각
신륵사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 보물 제230호
신륵사에 대장각(불경을 보관하는 건물)을 만들고 그 내력을 적은 비. 1383년(고려 우왕 9).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화상 제자들과 '고려대장경'을 인쇄하고 2층 대장각을 지었다.
신륵사 다층전탑 / 보물 제226호
높이 약 9.4m. 현존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塼塔./전(塼:벽돌)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 데 비하여,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넓게 떼어서 면토(面土)를 발랐다.
벽돌에는 둘레에 연주문(連珠文)을 두르고 그 안에 당초문(唐草文)을 돋을새김한 반원문(半圓文)이 있는 것도 있으나 배열방법은 무질서하다.
신륵사 삼층석탑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나옹화상을 화장한 바위 위에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고려 말 탑이다.
여주 영월공원, 삼층석탑 2기
여주 하리 삼층석탑 / 보물
고려시대 석탑, 몸돌과 지붕돌은 서로 다른 돌이 되어 있다. 하리(지금 여주시 하동) 어느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이전.
돌을 다듬은 기술이 전체 균형미는 평범하다.
여주 창리 삼층석탑 / 보물
고려시대 석탑(추정), 창리(현재 여주 창동) 어느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이전.
영월루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7호
영월루는 원래 군청 정문, 1925년 군청을 옮기면서 이곳에 새로 누각을 세움.
누각 아래 괴암이 있으면 그곳에 '마암馬岩'이 새겨져 있다. 강을 보는 경치도 일품이다.
교각을 세우는 뒤로 신륵사가 보인다.
2023년 3월 8일(수)
오전엔 신륵사를 봤다. 삼층석탑 2기를 보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원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