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가 노벨문학상 많이 배출한 이유
국경을 갖지 못한 나라의 국민에게 타국이란 어떤 의미일까. 1953년 이후 우리 중 걸어서 다른 나라에 닿아본 이는 없다. 바다 너머 실체를 목격한 적 없는 낯선 땅은 두려움이나 동경 중 하나일 테다. 구광렬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에게 라틴아메리카는 후자였다. 동경의 뿌리는 좌절이었다.
한국외국어대 서반아어과를 다니던 시절 잇따라 찾아온 병환과 몇 가지 불운은 청년의 발걸음을 먼 곳으로 이끌었다. 파타고니아의 목동이 되어 양떼 옆에서 존 덴버의 음악을 실컷 듣고팠던 청년은 언어를 모는 시인이 됐다.
멕시코와 한국, 양국에서 등단한 유일한 시인이다. 양국을 오가며 시집뿐 아니라 소설, 희곡, 에세이집까지 다양한 책을 냈다. 신작 ‘각하,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를 낸 구 교수를 지난 6월 17일 서울 평창동에서 만났다.
‘각하,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는 남한의 군인이 북한에 침투해 기습을 한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소설이지만 실화를 그린 논픽션에 가깝다. 1967년 당시 육군 대위였던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의 활약이 소재다. 구 교수는 5년 전에 같은 소재로 이미 소설을 낸 적이 있다. 왜 같은 사건을 다시 썼는지 물었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2011년에 처음 그 사건을 신문에서 읽고 이진삼 전 총장에게 연락해 만났어요. 어떻게 전향(轉向) 공비를 데리고 혼자 북한에 들어갔는지 묻자 ‘우국충정으로 갔다’고 답하더군요. 체 게바라 같은 인물이라 생각했어요. 이 총장의 구술을 바탕으로 영웅담에 가까운 ‘가위 소리’를 썼습니다. 출간 직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어요. 실은 박정희 대통령의 승인 아래 군 당국 차원에서 보상을 걸고 진행한 프로젝트였다는 겁니다. 이진삼 전 총장에게 직접 들었어요. 양심상 다시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종교는 체 게바라
구 교수의 종교는 ‘체 게바라’다. 안정된 미래가 보장된 의사 생활을 접고 남은 생애를 타인을 위해 보낸 체 게바라의 정신을 흠모해서다. 술자리에서 ‘그건 체 게바라 정신에 반한다’고 소리쳐 동석한 이를 당황하게 한 적도 여러 번이란다. 소설을 다시 쓴 것도 체 게바라 정신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구 교수는 체 게바라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썼다. 체 게바라가 전장에서 갖고 다닌 노트를 분석해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체 게바라가 필사한 69편의 시와 체 게바라의 일기를 연대기별로 대조하며 연구했다. 중남미를 통틀어 그가 처음 시도한 분석이다.
한국과 중남미를 오가며 낸 책이 30권 이상. 소설과 시집뿐 아니라 동화, 희곡 등 장르를 넘나든다. 중남미 문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멕시코에 있는 저랑 동갑내기 시인 중에는 지금까지 100권의 책을 쓴 친구도 있습니다. 중남미에서는 시인이나 소설가라고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고 그냥 작가(writer)라고 불러요. 한 사람이 시,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글을 씁니다.”
내친김에 왜 하필 멕시코에서 등단하게 됐는지 물었다. “‘김찬삼의 세계일주기행’을 읽고 남미를 꿈꿨어요. 파타고니아로 가려 했습니다. 대학을 다니던 도중에 무작정 멕시코로 갔습니다. 그때는 한국의 국가 위상이 낮았어요. 파타고니아를 가려면 아르헨티나나 칠레를 가야 하는데 비자가 안 나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멕시코에서 스페인어 수업을 들으며 비자를 기다렸어요. 그러다 결국 멕시코주립대학에 편입해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을 다니던 구 교수는 1986년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시인이 됐다. 멕시코의 문예지 ‘엘 푼토(El Punto)’에 시를 발표하면서였다. 이후 30년간 중남미에서 시인으로 활동해왔다. 멕시코뿐 아니라 우루과이,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국경을 마음껏 넘나들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축구, 수퍼모델과 함께 중남미의 주요 특산품 중 하나다.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문학사에서 위상이 높다. 지금까지 배출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만 6명이다. 중남미 문단의 분위기가 궁금했다.
“일단 글 쓰는 사람의 숫자가 적어요. 한국에는 시인만 2만5000명이라는데, 중남미에는 20개국 다 합쳐봐야 활동하는 주요 시인이 200명가량밖에 안 됩니다. 5억 인구라지만 책은 잘 안 팔려요. 그러니 정말 글을 좋아하는 사람만 작가를 직업으로 삼습니다. 독자 수도 적습니다. 그런데 그 독자의 수준이란 게 지독하게 높아요. 어떤 사람이 ‘나는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 시에 대해 밤새 토론을 하며 논문 수준의 평론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웬만큼 써서야 그 독자들의 수준에 맞출 수 있겠습니까. 많지 않은 작가 중에 세계적 작가가 많이 배출된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한국의 등단 문화가 문단 권력 낳아
‘문화권력’이란 게 없는 것도 특징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문인의 수가 적어서인지 어떤 비판이나 담론도 일단 반가워하고 봅니다. 글을 읽고 논평을 해준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거예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이 데킬라를 사이에 두고 아마추어 시인과 밤새 토론을 하는 게 큰일도 아닙니다. 이게 한국에서 가능한 일입니까. 일단 만나주지도 않잖아요.”
구 교수는 2004년 현대문학에 시 ‘들꽃’을 발표하며 한국에서도 등단했다.
그는 한국의 등단 문화가 문단 권력을 낳는 것 아닌가 의문을 제기했다.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한 등단은 한국만의 독특한 제도입니다. 문예지나 출판사 중심으로 문인 그룹이 형성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실력 있는 문인들이 오로지 작품만으로 평가받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중남미에서는 등단 방식이 좀 다릅니다. 기존 문인들의 추천을 받아 등단해요. 제가 어떤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 사람의 글이 별로라면 제가 동료 문인이나 독자들에게 욕을 먹지요. 그러니 책임감을 가지고 추천합니다.”
5년 전까지도 구 교수는 매년 한국과 멕시코를 오가는 ‘이중생활’을 했다. 학기 중엔 강의를 하며 한국에서 활동을 하고, 방학이 되면 멕시코로 건너가 중남미 작가로 활동하는 식이다. 지금도 중남미에서 시인대회가 열리면 주요 작가 중 한 명으로 초청받는다. 2009년에는 브라질에 본부를 둔 21세기 문학예술인 연합회(알파스21·Alpas xxi) 문학상을 받았다. 알파스21상은 라틴 계열 언어로 활동하는 작가에게 주는 상이다.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로망슈어(스위스의 공용어 중 하나)가 그 대상이다. 구 교수는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수상했다. 알파스21의 인터내셔널 부문상은 한국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지난 5월 소설가 한강이 수상한 맨부커상과 비슷한 성격의 상이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이 영국 국적 외의 작가에게 상을 주듯 알파스21 인터내셔널도 브라질 국적 외의 작가 중 수상자를 뽑는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뉴스는 ‘노벨 문학상’에 대한 한국인의 갈증을 약간이나마 풀어준 낭보였다. 번역의 중요성은 한동안 문학계 화두가 됐다. 구 교수는 조금 다른 얘기를 했다. “한국 문단에서는 문체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문체는 번역이 잘 안 됩니다. 그보다 스토리가 탄탄해야 세계인들에게 읽힙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들의 작품은 쉽게 읽힙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 소설이 어렵습니까? 마르케스는 중남미에선 대중작가예요. 멕시코에서 드라마 대본을 쓰기도 했어요. 마르케스의 소설을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하지요. 결국은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것 아닙니까. 대중들에게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제공한 겁니다. ‘각주의 사나이’라 불리는 보르헤스가 노벨 문학상을 못 받은 이유가 그거예요. 너무 어렵거든요.”
번역도 물론 중요하다고 구 교수는 덧붙였다. “세계 5대 언어는 걱정이 없습니다. 한국어 같은 변방의 언어는 달라요. 번역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도 한국 문학을 스페인어로 번역해봤지만, 제대로 번역하는 건 무척 힘든 작업입니다. 양쪽의 언어에 능통해야 하는 건 기본입니다. 문학적 소양도 있어야 하고 문화적 맥락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옮기는 게 직접 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이유입니다. 번역이 제2의 창작이라는 걸 인정해주고 번역가를 원작자 수준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구 교수는 지면 밖에서도 대중을 만나고 있다. ‘EBS 세계테마기행’ 남미편을 통해서다. 그가 현장에서 전하는 중남미의 문화와 역사는 꽤 인기가 많다. 택시를 타면 방송 재밌게 봤다며 반갑게 알아봐 줄 정도란다. 독특한 중남미의 풍광에 구 교수만의 개인적 역사가 어우러져 여느 여행기와 다른 매력이 있다. 시청률이 높게 나와 2010년부터 매년 적어도 한 차례씩은 출연 중이다. 올해도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다. 구 교수는 그러나 자신의 본분은 작가라고 말한다. 이제껏 해오던 일을 앞으로도 계속할 예정이다. 한국과 중남미 독자 사이에 공감대를 넓히는 일이다. 울산의 반구대를 소재로 쓴 소설 ‘반구대’와 동화책 ‘아기고래 뚜치의 눈물방울’을 스페인어로 낼 예정이다.
중남미 기행 수필집도 준비 중이다. 무엇보다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체 게바라 정신을 끝까지 지키며 사는 게 그의 가장 큰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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