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9:1-8 행위 완전하여 : 칼빈
본 시편은 하나님의 율법을 인하여 찬송합니다.
1) 이 시는 여러 주제를 취급하고 있어서 그 내용의 개략(槪略)을 말하기 곤란합니다.
그렇지만 선지자는 주로 두 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계율을 기술하고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방법을 지적해 주어서 성도들로 하여금 전심으로 율법을 연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선지자는 이와 더불어서 여러 차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 의롭고 더욱 경건하게 살도록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목적으로 약속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선지자는 성도들이 나쁜 본을 보고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멸시하고 있는 악한 자들을 책망하기도 합니다.
선지자는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 일쑤요, 한 가지 특별한 주제를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 않기에 각 주제를 그 말씀이 나오는 곳에서 취급함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2) 어떤 사람들은 이 시를 팔진법 시(octonary psalm) 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계속되는 여덟 구절들의 첫문자가 똑같은 알파벳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기억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할 주제였음에 틀림없는 교리로부터 매부분을 뽑아 만들어진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신자들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덟 구절을 히브리어의 알파벳순서대로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별로 느낌이 없는 자나 감정이 무딘 자들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 읽는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근본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시가 보여주고자 하는 교훈을 주의 깊게 고찰하여 마음속에 간직해 두고 더욱 이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저자일 것인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는 추측은 할 수 있으나 단정지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석가들도 이 문제에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보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적인 면과 경건생활 면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는 경우에 따라 그의 이름을 내세우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119 편
3) 이 시에 자주 나오고 있는 몇몇 용어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תורח (토라)라는 말은 ‘교훈하다’란 의미를 가진 말에서 온 것으로서 한결같이 ‘율법’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חוקים (후킴)이란 말을 어떤 랍비들은 율례(律例), 또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규범을 의미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견해는 매우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또한 פקדים 은 자연적 정의와 관계되어 있는 교훈을 가리킨다고 랍비는 말합니다.
משפטים 이란 단어는 명령들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어원적으로 이것이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עדות (에도트)을 히브리 사람들은 율법의 교훈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더불어 언약 관계에 들어오시는 방법을 포괄적으로 가리킵니다.
판결 또는 의(義)라고 불려지는 율법의 훈계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정당한 것만을 즐겨하시며 인생들은 완전한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어떤 율례를 구하지 말고 율법에 순종하여 자신의 생활을 다스려 나가야 할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 단어들이 ‘주의 도(道)’라고 불려질 때에는 거의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율법의 가르침을 떠나지 않은 자는 배도(背道)에 빠지는 위험에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인생을 끝맺게 됨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왕들의 칙령은 구별이 없이 모두 חוקים (후킴)이라는 말로 사용되었고, פקודים(피쿠딤)이란 성경 다른 곳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것처럼, 앞선 말과 별다른 차이가 없으면서도 약간 다른 종류의 공의를 가리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문맥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이 용어들은 이 시에서 거의 모두가 서로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율법에 대해 크게 존귀히 여기는 마음을 갖도록 여러 가지 명칭들을 구사하여 그 율법을 찬송하고 우리로 하여금 항상 동일한 교훈을 지키도록 하고 있습니다.
1. 본문 1-2절은 “(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입니다.
1) 선지자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시편 초두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역설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구하고 있지만 올바른 길에서 찾지 않고 자기들을 파멸과 멸망으로 몰아넣는 끝이 없는 곁길로 분별없이 방황을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배도와 어리석음은 당연히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 같은 충동과 더불어 우매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반대 방향으로 몰고 가기 때문에 이 말씀의 의미는 매우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시편 119 편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 더 행복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모두 성령께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과 예배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을 마치 우화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말씀은 백 사람 중에 한 사람 받아들일까 말까 한 교훈입니다.
2) ‘길’ 이란 말은 여기서 삶의 방법 또는 과정과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신실하고 확고한 마음으로 의를 행하고, 이것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를 바라는 자들을 가리켜 곧바른 길을 걷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1절 하반절에서 선지자는 더욱 분명하게 구체화하기를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은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기분과 변덕을 좇는다면 이것은 분명코 곁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의 박수갈채를 받는 자라도 다만 허무함으로 자신을 피곤케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서 행복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배제해 버렸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만약 선지자가 이런 의미를 나타내고자 했다면,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는 자는 땅에서 찾아볼 수 없으므로 오직 천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행복할 수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 답변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정직함이 요구된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이 달려 있는 죄에 대한 은혜로운 용서를 상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복된 반면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피난처를 삼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그 종들의 의는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실히 주의 법을 지키는 자들은 진실로 복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32편 2절에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2절에서는 같은 교훈이 보다 자세하게 확증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속임수에서 지혜로운 자나 일종의 공상적인 거룩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주의 언약을 본받는 자와 율법의 교훈에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선지자는 이 말씀으로 하나님은 결코 외면적인 예배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신실하고 정직한 마음의 생각을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 생활의 유일하신 심판주요 주관자이심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이 사실은 우리의 마음속에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손과 발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 편
2. 본문 3-4절은 “(3)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안내자로 삼고 따르는 자는 불의를 행치 않는 자라고 하는 말씀은 단지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처럼 보입니다.
선지자가 이 말을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생활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도하심 아래 있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둘째로는 우리가 보다 더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조심해서 하나님의 교훈에 나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께 복종할 때 곁길로 나아갈 위험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길로 빠져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방탕 또는 억측은 분명하고 결코 잘못됨이 없는 하나님의 법보다도 자기 자신의 생각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더우기 사람들은 넘어질 때마다 마치 알고서 죄를 범하거나 자발적으로 죄를 범한 일이 없는 것처럼 또는 우리의 모든 악한 기질을 항상 감찰하시기 때문에 모든 악을 바로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충분한 지혜를 주지 않아 우리가 방비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그 즉시로 변명하려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선지자는 주의 법으로 교훈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이 죄에 빠져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됐을 경우 알지 못해서 그랬다는 핑계를 할 수 없다는 점을 선언합니다.
주의 음성을 청종한다면, 사단의 모든 올무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해주기 위해서 4절에서는 하나님은 율법의 완벽한 복종을 요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의 법을 멸시하는 자는 결코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선지자는 하나님께 대한 말씀을 2인칭으로 말함으로서 하나님을 심판주로 우리 눈앞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3. 본문 5-6절은 “(5)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입니다.
원어 כון (쿤)은 때때로 ‘세우다’ 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자신을 위한 인내의 미덕(美德)을 간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이 ‘방향을 정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시편 119 편
그 이유는 하나님은 비록 자신의 법으로 우리를 분명하게 교훈하셨음에도 우리의 우둔한 이해력과 우리 마음의 강퍅함은 항상 성령의 지도하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주된 간구는 하나님의 법으로 이해력을 지혜롭게 개발하는 것과 온순하고 복종하는 마음을 갖고자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에 선지자는 사람이 조심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면 자기가 행한 것 또는 행하려는 것이 혹시나 배척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지키게”(준수 -칼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계획대로 행동하거나 육체적인 생각을 따라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결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길에서 죄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오직 바른 길로만 나아가는 자가 되기를 결심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법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하는 자가 인류의 많은 무리들에게는 비난을 면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요, 이러한 하늘 나라의 무죄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그들은 매우 만족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세상 사람들의 보는 눈에 관심을 두고 있었더라면 그들의 용기는 얼마 못가서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의 모든 계명” 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가 부끄러움을 완전히 면하고자 한다면 사단의 올무나 우리의 극심한 흑암과 무감각 상태 가운데서 최고의 경각심과 주의가 필요함을 가르쳐 주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온갖 힘을 다 기울여 우리 앞에 하나님의 법을 가져서 넘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4. 본문 7절은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매우 능숙하게 지킬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에 대한 특별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표적(表迹)과 증거로 선지자는 여기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주여 주께서 내게 주의 법을 가르치시면 이는 나에게 헤아릴 수 없는 복을 베푸시는 것이니이다’ 라고 명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동안 이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진리를 신실하고 충만하게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시편 119 편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구하면서도 땅에 속한 안이함을 도외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가장 중요한 것을 게을리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의로운 판단”은 완전한 의를 포함하고 있는 계명과 같은 말씀이나 선지자는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교훈의 완전함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칭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자신의 생활을 주께 예속시켜 주의 말씀을 능숙하도록 배운 자가 아니고는 거짓 없이, 충심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로는 하나님을 무시하면서도 입과 혀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체 하는 것은 공연한 짓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여기서 매우 적절하게 참된 경건의 열매는 거짓 없이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5. 본문 8절은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자기의 관심사인 것을 밝힙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선지자는 하나님께 자기를 향한 은혜를 거두시지 말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버린다’ 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거두시는 것, 또는 하나님께서 마치 그의 백성들을 버리시기라도 한 것처럼 환난으로 곤경을 당하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 해석이 문맥과 잘 어울리며 이어지는 “아주”라는 말과도 잘 조화를 이룹니다.
선지자는 자기의 믿음의 연단을 전혀 도외시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연단이 너무 오래 지속됨으로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자신이 허약하기 때문에 온유하게 취급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내 마음의 연약함을 보셨나이다. 나는 단지 인간에 불과한지라 주의 인자하심의 증표를 너무 오래도록 내게서 감추시지 마시고 나에게 적절한 때가 되면 지체치 마시고 나를 도우사 내가 주의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려는 데서 돌아서지 않게 하소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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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9:9-16 청년이 무엇으로
본문은 청년이 그 행위를 정결케 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1. 본문 9절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자신이 앞에서 말했던 사실, 즉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에 열성을 기울인다 해도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완전히 복종시키지 않고서는 자기들의 생활을 깨끗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른 말을 사용해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이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특별한 방법으로 아이들 또는 청년들을 실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선지자는 자기의 생활을 완벽하게 어거하는 자, 그리고 신중한 처신을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성숙한 나이에 이른 자나 나이 든 자들에게 자유로운 자격을 얻게 될 수는 결단코 없다고 말씀합니다.
청년들은 두 갈래 길을 만나게 되면 자기들이 쫓아가기 좋은 생활의 길을 택하도록 강요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는 자신의 생활을 주관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규율과 안내자로 삼지 않고는 어떠한 유익도 얻을 수 없다고 충고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선지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진지하고도 시기에 잘 맞도록 어거해 나아갈 수 있는 자극을 주어서 솔로몬을 통해서 주신 말씀처럼 더 이상 오랜 세월을 허비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희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전12:1).
계속 악을 행하는 데로 굳어버린 사람은 어른이 되어 돌이키려면 이미 너무 늦습니다.
육체적 성향이 젊은 시절에 완강하여 이중 억제가 필요한데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청년들은 과도한 쪽으로 기울수록 자기 방탕한 생활을 더 돌이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정당한 이유에서 청년들이 율법을 지키도록 특별하게 권면합니다.
우리는 보다 큰 것에서 보다 작은 것으로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법이 청년들의 충동을 억제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법으로 자기의 인도자를 삼는 사람은 누구나 순전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도 옳지 못한 생각들을 감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법이 자신의 죄악을 바로 고쳐주기에 가장 좋은 치료약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시편 119 편
그러므로 세상에 이토록 많은 죄악이 들어오게 된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충동에 따라 뒹군 결과요 하늘의 교훈보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피할 유일한 방법은 주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다스려 나아가는 것입니다.
속이는데 아주 능숙한 사람들은 자신을 사단의 올무에 던집니다.
또 맥을 놓고 권태감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을 악하고 사특한 생활을 하게 합니다.
2. 본문 10절은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아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입니다.
1) 자기 마음의 성실성을 알고 있는 선지자는 계속해서 자기가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선지자는 자발적으로 주께 간구를 시작한 것처럼 자신의 준비를 자랑한 게 아닙니다.
자기가 경험한 주의 은혜를 찬송함으로 한결 같이 걸어갈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완전하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행사를 계속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다 주실 때까지 마음속에 하나님을 간직하고 있으라고 하신 일반적인 교훈과도 일치합니다.
2) 또 우리 마음이 안정되어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하는 한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을 때 우리에게 손을 펼쳐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내의 선물을 구하도록 신뢰감을 북돋아 주는 것처럼 우리 마음을 그분을 향한 정당한 열정으로 고무해 주실 때는 하나님께서 확신을 가지고 패주하는 군인들처럼 우리들을 조심성이 없이 음울한 상태에 이르게 하지 않고 항상 지혜의 영으로 안내를 받게 하시며 완전한 원리와 도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기 자신의 예를 들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율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보호를 받았으며 또한 더욱 주의 깊게 진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계속되기를 구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재시켜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순간부터 방황하게 되고 곁길로 나아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이 יגנשת(타쉬게니) 라는 원어로 더욱 명백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수동태로 ‘곁길로 인도되다’ 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은밀히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19 편
우리는 죄를 범하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방치하시는 그 순간 우리는 죄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합니다.
이 구절은 또 단 한 치라도 하나님의 계명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곁길로 나아가는 죄를 범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3. 본문 11절은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입니다.
이 시는 저자가 개인적으로 특별히 자기만 사용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 말할 때마다 그 본보기를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면 우리는 사단의 유혹에 맞서 자신을 잘 지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법이 우리 마음을 확고히 붙들어 주지 않으면 우리는 곧 죄에 떨어질 것입니다.
혹 학자들 중에 항상 자기 앞에 책이 없으면 멍청이가 되고 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지식은 문자에 국한된 지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여 이 교훈과 친숙해지지 않는다면 사단은 쉽사리 그의 그물로 우리를 덮어 사로잡아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는 하나님의 법을 단지 아는 것이나 다만 관심도 없이 읽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새기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의 지식을 신봉하더라도 하나님을 자기 스승으로 모시지 않는 한 모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점입니다.
4. 본문 12절은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입니다.
선지자 다윗의 능력은 그가 하나님의 제자들 중에 하나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공적인 교사이기도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께서는 자신과 모든 의로운 자들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다만 도상의 나그네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해력 주시기를 구하는 것을 빼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판단력으로 조명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항상 우리 앞에 비취고 있는 빛을 바라볼 수 없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이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음에도 자신의 완벽함을 신뢰함으로 눈이 멀어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멸시하는 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시편 119 편
우리는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가르치는 자로서 영광스러운 직분을 부여해 주신 선지자도 자신을 다만 제자 또는 배우는 자라고만 말했다면, 그보다 재간이나 학식이 훨씬 뒤떨어지는 자들이 더욱 나아지려는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선지자는 자기가 구하여 얻은 자기의 장점(長點)을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은혜를 주신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것은 선지자가 간구 한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라는 기도에서 나타납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성공에 대한 확신이 하나님의 끝없는 인자와 공의와 긍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마땅히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는데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5. 본문 13-14절은 “(13)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주의 법이 자기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친구와 제자들에게 주를 따르게 하는 것이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추상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말하는 것은 실로 마음에는 없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위선자들이 거룩에 대한 모든 교훈들을 매우 유창하게 말은 하면서도 전혀 이와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을 봅니다.
선지자는 앞서 말한 주의 법에 대한 마음의 열정을 이제는 입술에다 적용합니다.
또 선지자는 곧 이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주고자 하는 자기의 간곡하고도 거짓 없는 노력에 대해서 말했던 진리를 다시 한번 말씀합니다.
선지자는 세상의 모든 부귀에서 얻는 기쁨은 하나님의 교훈에서 얻는 기쁨에 비길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선지자는 율법에 대한 자신의 거룩한 사랑과 거의 모든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악한 탐심을 간접적으로 대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제물은 그 자체가 사람들의 마음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거룩함의 교훈을 본받는 것으로 더 없는 기쁨을 삼고 부귀의 모든 모양을 버리겠나이다” 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6. 본문 15-16절은 “(15)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16)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입니다.
시편 119 편
선지자는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본으로 내세워 그들이 본을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의 근심에 심히 사로잡혀 있어서 하나님의 교훈을 묵상할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정한 무관심에 대처하기 위해 선지자는 적절히 근면과 관심을 기울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는 세상의 올무에 걸려들지 않았다 해도 우리에게 매일 갑자기 달려드는 유혹으로 하나님의 법의 빛을 잃어버리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하나님의 법도에 대한 묵상을 계속 하도록 하며 이것에도 우리의 모든 힘을 기울이는 것으로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활이 불안한 것은 자기 마음의 정욕으로 항상 혼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도’ 를 주의 깊게 묵상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끝으로 선지자는 이렇게 해서 얻은 큰 기쁨을 되풀이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마음을 다해 주의 법에 우리 마음을 두지 않으면 주의 법을 능숙하게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선한 생활의 시작은 우리를 기쁨으로 하나님께 인도하게 해주는 주의 법에 있습니다. 동일한 방편이 되는 하나님의 법으로 육체의 욕망도 역시 정복되고 약화됩니다.
우리의 본능적인 상태는 죄악된 것 이상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율법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 우리를 돌이키게 하지 않는 한 우리 마음의 변함 없는 기질은 죄를 향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기도에 많은 부분은 주의 음성 듣는 즐거움을 달라는 간구에 두어야 합니다.
신앙 교육에는 그 내용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을 전수 받기 위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가끔 주일 예배에 참석한 분은 매주 출석하셔서 주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주일 오전만 출석하셨던 분들은 오후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수요일 낮이며 밤까지 확대될 수 있으면 더욱 더 좋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는 새벽에도 시간이 있습니다.
다른 교인들이 자리를 잡고 앉기에 민망할 정도가 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힘써 모이면 하나님께서 그 회중에게 말씀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시편 119 편
시119:17-24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본문은 이 시인이 살아있는 목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1. 본문 17-18절은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입니다.
1) 어떤 사람들은 ‘보답하다’로 번역한 גמל (가말)을 히브리인들 간에 보답하다로 보지 않고 117편 7절이나 다른 구절에서처럼 ‘은혜를 보답하다’로 이해했습니다.
여기서 ‘보답하다’ 는 말은 값없이 주신 은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문장을 서로 구분하여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주의 종에게 베푸소서. 그리하면 내가 살 것이요, 나는 복되다고 생각하리이다’ 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연결된 한 문장으로 보아서 ‘하나님이여! 내가 사는 동안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주의 종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번역을 택한다면, 선지자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자기가 죽은 사람과 같으며, 다른 것은 풍성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로우시다는 느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두 번째 해석을 취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사는 동안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구합니다.
이것은 선지자가 자기 존재의 가장 큰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확신하고 끝까지 이렇게 되기를 목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를 생각해 볼 때, 이 두 문장은 ‘나로 살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겠나이다’ 라고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참되고 신실한 종이 되는 삶보다 더 바라는 것이 없나이다’ 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기대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열렬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야 할 목적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비합리적인 경향을 없애기 위해 우리의 존재의 주된 목적을 말합니다.
선지자는 ‘사람이 주의 법을 지키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다’ 라고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준비하는 일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이 기도는 철저한 위선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119 편
2) 매우 비슷한 교훈이 다음 구절에도 들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율법을 지키는 능력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임과 또 하나님이 이해력의 눈을 열어 주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은 다 소경이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빛을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서 우리가 눈에서 베일을 벗겨 내지 않으면 가장 밝은 빛 가운데서도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된다는 사실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보이지 않는 은혜로 자기의 눈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자기는 눈에 베일이 가려져 닫힘으로서 하늘의 교훈의 빛을 분별할 수가 없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서 자신의 소경됨과 온 인류의 소경됨을 개탄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실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지혜를 신뢰하여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조명을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그 해결책은 임박해 있다고 선지자는 말합니다.
또한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은 것은 외면적인 말씀을 경홀히 하도록 하기 위해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비열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대치시키려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영적인 것을 무시해 버리는 수많은 공상가들처럼 오직 은밀한 영감(靈感)만으로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기억합시다.
선지자의 의도는 전혀 다른데 있습니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빛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나타내신 생명의 빛을 우리가 분별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율법의 교훈을 “기이한 것”이라 말하여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율법의 높이를 경외함으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이 말씀은 또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시켜 주며, 우리의 제한된 능력을 초월하는 신비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십계명만 율법이란 말 속에 내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영원한 구원에 대한 언약과 이에 수반되는 모든 것들도 율법에 포함되어진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가 ‘그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고(寶庫)를 감추고 계심’ 과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선지자가 율법 속에는 가장 기이한 것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골2:3, 롬10:4).
2. 본문 19-20절은 “(19)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 서 (20)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입니다.
1) 선지자가 자신을 세상에 거하는 나그네라고 부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편 119 편
경건치 못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거리로 삼는 것은 이 땅에서 자기들의 생활이 편하고 평탄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여행하는 자요, 자기 기업은 하늘에서 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이 썩어질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동요당하지 않고 자기가 가야할 곳을 사모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주여, 나는 땅에서 빨리 지나갈 수밖에 없으니 주의 율법의 교훈을 빼앗겨 버린다면 내가 어떻게 되리이까?’ 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여행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2) 한편 하나님께서 눈을 뜨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의 계명을 숨기셨다’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데서 영적인 눈을 갖지 못하여 자기들의 눈앞에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요구를 무기력하게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에 대한 자기의 감정은 가장 강렬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선지자에게 보기 드문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가 그런 뜻 입니다.
자기의 판단력을 거의 잃어버릴 만큼 한 가지 일에 자기의 모든 생각을 집중시키는 자를 과도한 열심에 희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선지자는 자기가 율법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마음의 능력이 마비되고 다 소모되었다고 말합니다.
“항상” 이라는 말은 선지자의 인내를 의미합니다.
하늘의 교훈을 배우는 데에 큰 열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종종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단지 일시적일 뿐이요, 그 열심히 곧 식어 버리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할지라도 연약해지지 않고 한결 같아야 합니다.
3. 본문 21절은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주께서 교만한 자를 멸하시며 - 칼빈)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입니다.
1)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주께서 교만한 자를 꾸짖으시며’ 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 גער (가아르)는 ב (베트)와 결합될 때 이러한 번역이 가능하다. 그러나 멸하시며’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내용에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선지자의 의도는 하나님의 계명이 자기 마음을 율법을 연구하는 데로 인도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려는데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채찍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때까지 결코 지연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시편 119 편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인들과 자신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심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채찍으로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보호해 두려움에서 멀어지게 하사 아무것도 해로운 것이나 책망 받을 것이 없게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해 주심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자비에 대한 증거입니다.
선지자가 모든 불신자들을 가리켜 ‘교만한 자’ 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참된 믿음만이 우리를 겸손케 해주는 반면 모든 반역은 교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교만을 물리쳐 주는 하나님의 율례를 조심해서 그리고 주의 깊게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악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맹렬하게 반역을 일으키며 건방지게 모든 자제력을 내던져 버리고 마음껏 모든 종교를 우롱하는 것을 볼 때에 과연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심판주로 앉아 계시는지에 대해서 의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얼마동안 못 본체 하고 계시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의 심판을 행사하시어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헛된 말씀이 아님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자는 모두 버림받은 자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2)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이라는 말이 온갖 종류의 범죄를 아무 구분이 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악하게 멸시하는데서 나오는 억제시킬 수 없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27:26)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주어진 말씀임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체의 부정함으로 넘어진 자들을 자신의 아버지 같은 인자로 보살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이 심판은 특별히 악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그들의 마지막을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26:9).
4. 본문 22-23절은 “(22)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입니다.
1) 이 구절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9 편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많은 살육자들을 피할 수 없으므로 그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신중하게 처신하도록 하시며 그들이 사악한 혀와 맞서 행하는 순수한 선함을 보호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청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문맥과 잘 어울리지 않는데, 그렇다면 ‘여호와여 나는 내게 의로우며 주는 나의 무죄함의 증인이시므로 나에 대한 평판이 불의하게 되지 말게 하시며 근거 없는 말로 나를 훼방하지 말게 하소서’ 가 됩니다.
둘째는 이 말씀을 연결된 문장으로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해 지는데, 그러면 ‘하나님이여 주의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나를 악인들이 비방하지 못하게 하소서’ 가 됩니다.
이러한 죄악은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만연되어 왔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신실함이 비방과 훼방을 당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비방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상황을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와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말씀한 것이 이제 성취될 것입니다.
“나와 내 자녀들아 보라 주께서 그를 내게 표적으로 주셨느니라.”
따라서 어쩌면 그리스도를 자신의 머리로 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 가운데서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들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미친자’들이라고 비방하고 있다고 고발하면서 정죄했습니다(벧전4:4).
주의 법에 대한 순수한 생각 때문에 어리석게 되었다고 하는 이 비방은 주의 이름을 모독하려는 것이기에 선지자는 마땅히 이런 훼방을 모두 그치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서 이런 것들을 피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악인들은 땅에서 오만하게 자기들의 비방을 쏟아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심판주로 하늘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2) 23절에서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이러한 비방을 면케 해달라고 간구를 드린 사실이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선지자는 일반 백성이나 대부분의 버림받은 자들에게서만 비방을 받은 것이 아니고 심
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도 비방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앉아” 라는 말은 그들이 선지자에게 해롭고 부당한 말을 하되 자기들의 집이나 식탁에서만 한 것이 아니라 공의를 집행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할 심판 자리에서까지도 공개적으로 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사용한 גם(감)은 ‘또한’ 또는 ‘까지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일반 백성들의 은밀한 수군거림과 자기들의 행위의 비열함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오만한 자들의 오만한 비방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시편 119 편
이 모든 것 가운데서도 선지자는 꿋꿋하게 인내하며 경건한 생활을 추구합니다.
사단은 그를 절망에 넘어뜨리기 위해서 이러한 악한 행위로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주의 법을 묵상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해결책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땅의 판단이 하나님의 종들을 압제하며 그들의 경건을 조롱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다윗이 이런 비방을 피할 수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왜 이것을 피하려 하는가?
또 우리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 좌우되는 것보다 더 부당한 일이 없다는 것을 배웁시다
우리가 그리 할 때는 언제나 동요를 일으키는 상태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우리를 비방하되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뿐 아니라 심판 자리에 앉아 가장 공평하게 일을 처리할 자로 기대되는 자들까지 우리를 비방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정해 주심으로 만족을 누립시다.
5. 본문 24절은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입니다.
분사 גם (감)은 이 구절과 23절을 연결시켜 줍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당한 생각을 가질 때, 우리의 목표를 단호하게 밀고 나아가 끝까지 주의 법을 묵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용기입니다.
선지자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이 시험을 극복했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선지자는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잔악한 불의가 거짓으로 나를 비방하여 나로 슬픔과 괴로움을 당하게 해도 내가 주의 법에서 취한 아름다운 기쁨은 이 모든 것들을 격퇴시키기에 충분하나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증거가 “나의 모사”라고 함으로서 자기는 단순히 자신의 판단만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생활 방향이 얼마나 맹목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 안다면, 이 점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될 것입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무엇보다도 재물이 더 귀하다는 잘못된 원리에서가 아니라면 무슨 근거로 조언을 구하겠는가?
야심적인 사람들은 왜 권력만을 그토록 추구하는 것일까?
이것은 세상에서 영광된 지위 차지하는 것보다 좋은게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런 악한 모사들의 꾀임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이 그렇게 오도되어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를 받는 것과 그 말씀의 교훈에 겸손히 복종하는 곳에는 육체의 속임수나 세상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유혹에 맞서 단호하게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시편 119 편
시119:25-32 내 영혼이
본문은 깊은 환란에서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내용입니다.
1. 본문 25절은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입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무덤 속에 갇힌 것만큼이나 살 소망이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여러 종류의 죽음을 견뎌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해서 조급하게 굴거나 비참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을 예로 들어서 우리가 죽음에 직면하여 모든 피할 수 있는 소망이 다 끊어졌을 때에는 죽음의 문제를 그 손에 쥐고 계시며 특별하신 특권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권세를 가지신(시68:21)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이 싸움은 힘든 것이기에 선지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약속에 의탁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이 약속에로 초대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소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생명을 자신의 손안에 자신의 보호아래 두어 무덤 속에 있는 자처럼 붙들어 주신다고 했으므로 선지자는 삶에 대한 기대로 위로를 얻습니다.
2. 본문 26-27절은 “(26)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 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27)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입니다.
상반절에서 선지자는 자기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자신의 지혜와 힘과 부요함을 믿고 하나님으로 피난처를 삼지 않고 교만한 자들을 본받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께 고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까지 어떠한 일을 시도하거나 수행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하여 자신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듯에 맡기며, 자기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께로 집중시킵니다.
그와 같은 신실한 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하되 진실하게 하고 입술로만 고백하고 마음 속에는 다른 생각을 품는 위선자들처럼 행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자기가 장래에 좋은 소망을 갖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합니다.
시편 119 편
하반절에서 선지자는 엄숙하게 ‘자기는 오직 율법에 대한 참 이해를 구한 것보다 더 사랑스러운 일은 없다’ 고 말합니다.
자기의 소망을 하나님께서 아시도록 하는 자는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탐욕스러운 욕심에 굴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자기의 바램은 오직 ‘주의 율례를 잘 배우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지식을 간구하는 27절에 의해 강조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우리의 내적인 교사로 모시고 있지 않은 채 주의 법을 대하면 그 말씀을 살피는 것만으로는 별 유익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내가 묵상하리이다’ 라고 번역한 말씀을 ‘내가 고하리이다’ 또는 ‘말하리이다’라고 번역하는데 그 이유는 히브리어 שוח (슈아흐) 가 말과 생각을 모두 가리키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의미인 ‘생각’이 본문의 내용과 더 잘 어울립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내가 주의 기이한 행사를 묵상하리니 나로 주의 계명을 깨닫게 하소서’ 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성결케 하사 하늘의 지혜에 대한 맛을 볼 수 있게 해주시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법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맛을 모르므로 무관심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 속에 들어있는 고귀한 지혜를 맛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매우 적절하게 지혜의 은사로 말미암아 이 길이 자기에게 열리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주의 법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와 그것을 묵상함으로 얻는 우리의 기쁨은 우리에게 주어진 지혜의 영과 비례해서 증가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3. 본문 28절은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입니다.
선지자는 조금 전에 ‘자기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고 말한 것처럼 이제는 그와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자기의 영혼이 눌림으로 인하여 녹아졌다고 탄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가 마치 그의 영혼이 눈물로 녹아진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선지자는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정확한 의미는 선지자의 힘이 물처럼 쏟아졌다는 뜻입니다.
동사는 미래 시제로 되어 있으나 계속되는 행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편 119 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의 손을 펼쳐주시면 자신의 극심한 고통이 면해질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앞에서도 거의 살 소망이 없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소생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던 것과 같이 지금도 같은 방법으로 자기가 거의 쇠잔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완벽한 능력으로 다시 회복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주의 말씀대로” 라는 표현을 되풀이하고 있는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거의 효험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과 능력이 한계에 달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언약은 우리를 더욱 강대하게 하는데 커다란 효력을 발휘합니다.
4. 본문 29절은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입니다.
선지자는 사람의 본성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기 쉬운지를 알고 있기에 먼저 사단의 그물에 걸려 실수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자기 사상의 성화(聖化)를 간구합니다.
다음에 선지자는 자기가 거짓에 빠지지 않게 율법의 교훈으로 무장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반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주의 법이 나에게 기쁨이 되게 하소서’ 라고 번역합니다.
율법은 육체와 맞서 육체를 굴복시키고 다스리느니만큼 율법이 우리를 수납하고 기쁘게 해주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좋은 이유가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주의 법대로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번역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에서 성도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로 약속하셨기에 선지자는 원천(原泉)에서 긍휼을 이끌어 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두 해석이 우리가 보기에게는 다 억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값없이 내게 주의 법을 베푸소서’ 라는 해석을 취합니다.
חנני (한네니)는 라틴어로 ‘당신이 나를 기쁘게 한다’ 라고 밖에 번역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해석이 거칠고 원만치 못한 표현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신자들이 선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고 있기에 우리는 별 의의가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기에 실수로 크게 속아 넘어가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혜의 영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실수를 범하는 데에 분주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19 편
우리의 존재가 보존되는 방법은 주의 율법 안에서 가르치심 받는데 있다는 말입니다.
선지자는 ‘기쁘게 하다’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사람이 주의 법에 가르침을 받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인자하심이니이다.
그러나 나는 내 공로가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에 따라서 주저하지 않고 주께서 나를 주의 이 인자하심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나이다’ 입니다.
만약 얼마동안 하나님을 섬겼던 선지자가 이제 더 많은 것을 얻기 원할 때에 자신의 공로로 더 많은 은혜누리기를 구하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사인 것을 고백했다고 한다면 교황주의자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공로를 행해야 한다고 하는 사악한 생각은 분명히 땅에 떨어져야 할 것입니다.
5. 본문 30-31절은 “(30)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31)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 입니다.
1) 선지자는 자기는 의와 진리를 따르는 것보다 더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택하고” 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매우 적절한 처사입니다.
사람의 생활은 두 갈래 길이 만나는 지점과 같다고 하는 옛 격언은 단순히 인생살이의 일반적인 흐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두 개의 특별한 행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어떤 일을 착수하려 하기만 하면 마치 폭풍에 멀리 날아가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우 당황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로 망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변함없이 옳은 길을 걸어 나아가기 위해서 진리를 떠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또 다짐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자기가 완전히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의식적인 율법의 준수로 시험들을 이겨냈다고 말합니다.
2) 하반절에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라는 말씀도 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한결같이 율법을 묵상하여 자기들의 눈이 이리저리 방황하지 못하도록 해놓지 않고서는 안정된 기회를 포착할 수 없습니다.
31절에서 선지자는 자기가 율법에 대한 이 거룩한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 악한 자들의 비방으로 인하여 수치를 느끼거나 나약해지지 않기를 기도와 더불어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앞에서 자기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고 말했을 때와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로 선지자는 자기가 주의 법을 붙잡기에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비방으로 인해서 수치를 당하거나 압도당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신실하게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면 할수록 악하고 독을 품고 있는 자들의 입에서부터 공격을 더 많이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시편 119 편
6. 본문 32절은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입니다.
선지자는 주께서 자신을 주의 법에 대한 사랑으로 불붙게 해주신다면 용기를 얻고 힘을 내서 끝까지 자기의 길을 감으로 도중에 연약해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선지자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넓혀주시지 않으면 사람들의 나태함과 무기력함은 바른 일을 하게 할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넓히시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는 하나님의 계명의 길을 걸을 뿐 아니라 뛰어가기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선지자는 율법을 올바르게 지키는 것은 단지 외부적인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닌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율법을 올바르게 지키는 데는 즐거운 순종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마음은 어느 정도는 직접 넓혀야 합니다.
마음은 이것을 행하는 자아 결정적(自我決定的)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한번 마음이 굳어지고 완악해지면 자기의 길을 마음대로 떠나서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합니다.
끝으로 이 구절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한번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넓히시면 거기에는 능력의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른 생각에 능력을 더해 주셔서 우리 발이 뛸 수 있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 편
시119:33-40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또 지키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1. 본문 33절은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입니다.
1) 선지자는 여러 차례 드렸던 기도를 다시 드림으로서 우리 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통치자로 삼는 것임을 아는 것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대부분 이것보다는 다른 것을 자기들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가끔 이런 소망을 갖게 해서 경험이 미숙한 자나 배우지 못한 자뿐 아니라 많은 학식을 쌓은 자들까지도 쉬지 말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해야 함을 명심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해의 영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올바른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2) 하반절에서 선지자는 자기가 말했던 특별한 교훈, 즉 사람의 마음을 실제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새롭게 만들어 주는 교훈을 내세웁니다.
주석가들은 עקב (에켑)이란 단어를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삯 또는 보상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는 경우라면 선지자가 의미한 것은 ‘우리가 교훈을 잘 받게 되면 우리는 주의 율법을 지키려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요, 따라서 주께서는 결코 주의 종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므로 그 보상을 생각하여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킬 것이니이다’ 가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끝까지” 라고 번역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가르치기로 정하신 자들을 계속해서 가르치시며 또한 그들에게 피곤이나 권태감이 없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힘을 주어가야 할 길의 종착점에 도달할 때까지 꿋꿋하게 인내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인내의 은혜를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구절을 단순히 원어의 뜻으로만 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선지자는 ‘~ 까지’ 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는 다만 ‘나는 끝을 지키리이다’ 라고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잠시 동안이라도 넘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목표에서 내 눈을 떼지 않으려 하는데 그리하려면 늘 가르치심이 필요합니다.
시편 119 편
그 이유는 주께서 내게 죽음을 각오하고 주의 길을 달려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날마다 나를 가르치지 않으면 이런 인내는 내게서 찾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인도하시면 나는 끝까지 경성하여 나의 목표요, 나의 표적에서 결코 눈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본문을 우리 번역으로 밝혔습니다.
2. 본문 34절은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입니다.
1) 우리는 여기서 참 지식이란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복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사람들은 자신의 본능적인 어리석음의 결과로 이것보다는 다른 것을 좇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모든 성의를 다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에는 낯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들 자신의 이익에만 연연하는 자, 일시적인 일에 치밀하고 수완이 좋은 자, 심지어는 순수한 자를 속이는데 일가견을 가진 자들을 지혜로운 자로 봅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생각과 정반대로 맞서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지배되지 않는 한 참된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선지자는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지도하심에 자기를 내맡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자신을 위해서 구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선지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지 결코 자기의 힘이나 수완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닌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만일 자기 자신이 교사가 되는 것이 옳다면 이러한 간구는 불필요한 것밖에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흔하지 않기에 선지자는 이에 대해 두 가지 말을 사용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성결을 요구하고 있기에 힘들고 어려운 것이오나 주의 영이 비춰 주시는 하늘의 조명을 받는다면 나는 주의 법을 지키려는 노력을 쉬지 아니할 것이오니이다.’
그러므로 하반절은 그 의미를 보다 더 분명하게 해줍니다.
‘내게 주의 법을 전심으로 간수하고 지킬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전심(全心)은 우리에게 문자 그대로만 율법을 지키며 사람들 보기에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만 행동하는 자들은 율법의 의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시편 119 편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굳게 붙드사 마음에서부터 순전한 공의가 일어나게 하여 그 열매가 그들의 생활에서 나타나도록 해주십니다.
이처럼 영적인 율법의 준수는 율법을 지키는데 신적(神的)으로 예비되고 행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가장 명확하게 확신시켜 줍니다.
3. 본문 35절은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입니다.
선지자가 이러한 말씀을 자주 반복하는 것은 지나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우는데 있음을 볼 때에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사람들을 세상적인 쾌락으로 넘어지게 하려 했으며, 수천 가지의 향락으로 그들의 생활의 주요한 일을 그들의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리도록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반절에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라는 말씀은 주의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어느 사람이 육체를 기쁘게 하는 모든 유혹을 버리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재조정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큼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취한다는 것은 매우 찾아보기 힘든 탁월함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미 이런 미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아직도 자신이 완전해지지 못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하신 바울의 말씀대로 자기의 소망이 더욱 완성되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새로운 도움을 간구합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자기 본성의 본래적인 행위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가 시작한 일을 완성하도록 은혜를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주여 주는 내게 용기를 주셨고 또한 능력도 주셨나이다’ 가 그것입니다.
따라서 “즐거워함”이라는 말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유혹으로 옭아매는 육체의 욕망과 대립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4. 본문 36절은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입니다.
1)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공의에 복종하는데서 멀어져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길을 좇아가기가 더 쉬운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나 자발적으로 율법의 공의에 기울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내 마음을 ... 향하게 하시고” 라고 한 시인의 기도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아직도 죄악 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돌이켜 주시지 않으신다면 전적으로 반역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편 119 편
인생의 본질적인 부패는 너무도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복종을 하게 하실 때까지는 올바른 것을 추구하여 선한 데로 향하려고 시도할 수가 없다고 한 선지자의 고백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2) 하반절에서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의를 행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여 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방해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논조를 사용해서 한 가지 죄로 전체를 말합니다.
히브리어 בצע (바차)는 ‘폭력을 사용하다’, ‘몹시 탐내다’, ‘편취하다’는 의미를 가지나 본문의 의도로 볼 때 탐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의에 맞서는 것이 가장 큰 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여기서 일반적으로 배울 수 있는 점은 우리는 강퍅하고 사악한 생각에 많은 영향을 받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망을 갖도록 해주시기 전에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법에 전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 본문 37절은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입니다.
1)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감각은 허무한 것들로 가득 차 있기에 연단과 교정을 거치지 않고는 의를 추구하고자 하는데서 멀어져 있는 것이 조금도 놀라운 일이 못 된다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선지자는 앞 절에서 사람의 마음 속에는 부패함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 다음에 이제는 외부적인 감각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탐심의 질병은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을 뿐 아니라 온 몸에 퍼져 있어서 눈, 귀, 발, 손이 그 악한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마디로 부패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분명히 알거니와 원죄의 죄책은 어느 한가 지 인간의 능력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조직에 침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헛된 것에서 돌이키기만 한다면 눈을 뜨자마자 사면에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단의 속임수를 직시(直視)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단 혼자서만 우리에게 올무를 놓아두어서 우리는 그의 계교와 맞서 나아갈 충분한 자신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헛된 것에서부터 돌이키게 하셨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눈은 본능적으로 죄악된 쾌락에 젖어 있기에 우리들은 그 쾌락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뜰때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지 않으면 마귀가 우리 마음에 들어오도록 두 개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선지자가 눈과 관련해서 사용하신 말씀은 어느 한 부분을 들어 전체를 대신하려고 하는 논조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다른 모든 감각에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시편 119 편
2) 하반절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의미와 잘 부합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달리 해석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여호와여, 사람들이 자기의 힘을 죄를 범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한 사람의 모든 생활은 정죄를 받은 것이므로 나로 하여금 내가 가진 능력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의(義) 외에는 아무것도 좇을 수 없게 하소서’ 가 그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다 더 아름답게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는 보고, 듣고, 걷고,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제일원리(第一原理)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판단력과 의지는 더욱 귀한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죄악과 부패가 뒤섞이게 되면 눈은 볼 수 없고 감각은 느낄 수 없으며, 마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었던 선지자는 바른 이유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 육체를 죽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고 있습니다.
6. 본문 38절은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유일한 목적과 기도의 법적인 사용은 하나님의 약속의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매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간구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나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허락해 주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거나 바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부름을 듣지도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의 뻔뻔스런 행위는 가히 가관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노리개와 변덕 속으로 종속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의 간구를 강조형으로 힘주어 말한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주를 경외함이니이다.’ 관계 대명사 אשר (아셰르)는 여기서 원인 접속사 ‘때문에(because)’ 또는 ‘인하여(for)’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선지자는 세상 사람들처럼 일시적인 쾌락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터무니없이 낮추어 보지 않거니와 육체적인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선지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을 자기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우리의 최종 목표를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다스려 주시는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시편 119 편
7. 본문 39절은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 입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훼방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수많은 훼방자들이 자기를 비방할 기회를 찾기 위해서 노리고 있다가 조건만 생기면 자기를 공격해 올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선지자가 자신의 실수로 이러한 수치스러운 데에 빠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일반적으로 악인들이 선한 자들을 수치와 악의로 비방하며 자기들의 비방으로 그들의 선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왜곡시키며 방해하고 있음을 우려한 것 같습니다.
하반절에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 라는 말씀은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무죄한 자들에게 자기들의 독한 독을 뿜어내고 있는 악한 입들을 하나님은 왜 잠잠케 하시는지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혹 “훼방” 이란 말을 하나님 자신을 대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해석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생활을 드러내 놓기를 목표로 삼고 있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버림받은 자들과 같은 심판을 받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큰 열심과 배짱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의 근거 없는 말을 모두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무엇보다 주의 심판대 앞에서 수치스런 비방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8. 본문 40절은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입니다.
선지자는 경건한 생각과 의를 사랑하는 마음에 관한 말했던 것을 반복합니다.
주께서 시작하신 일을 완수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주의 의에 나를 소생케 하소서” 라는 말씀은 그 길을 속히 가게 해 달라는 것과 같은 뜻이 될 것입니다.
“의” 가 이 시에서는 종종 하나님의 법 또는 의로운 생활의 규범을 가리킵니다.
다음의 해석은 이 구절의 상반절과 하반절을 서로 조화시켜 줍니다.
그것은 ‘여호와여, 주께서 내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거룩한 소망을 주심은 주께서 내게 베푸신 인자하심의 두드러진 증거이니이다. 내가 한 가지 더 바랄 것은 이 행위가 내 일생동안 지속되는 것이니이다’ 입니다.
그러나 “의” 라는 말은 애매해서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회복시키시고 지키시고 붙들어 주시사 이것을 주의 모든 백성들에게 보여주소서.
시편 119 편
시119:41-48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원해 주심과 그 말씀을 증거하며 지키기를 원합니다.
1. 본문 41-42절은 “(41)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42)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니이다” 입니다.
1) 시인이 “주의 인자하심”을 먼저 말하고 “주의 구원”을 나중에 말한 것은 자연스러운 법칙에 따라서 결과보다 원인을 먼저 말한 사실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한 순서를 좇아 말함으로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순진한 인자가 아니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또 선지자는 은혜로우신 구원을 원함과 동시에 언약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2) 42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데서부터 일어나는 원수들의 비방을 최상으로 막아낼 수 있는 방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대로 우리는 미래 시제를 기원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입에 모든 담대한 것으로 채우사 나를 대적하여 비방하는 자들을 격퇴하고, 저들이 내게 근거없는 훼방으로 짐을 지울 때 당하고 있게 마옵소서.’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혀 비방받을 만한 일을 한 일이 없다 할지라도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독하기를 그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말한 비방이 특별히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는 약간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끄러움으로 뒤집어 씌울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까지도 비방거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해석을 취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이 해석이 문맥과 잘 부합되며 다윗은 여기서 그들의 조소에 맞서 하나님께 믿음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유 없이 나를 해치려는 원수들의 비열한 비방에 맞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결코 실망을 주는 일이 없음을 말하리이다.’
이 구절이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또한 선지자는 단순히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한다고만 말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의 근거인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신뢰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119 편
우리는 상반절에 나오는 “말”과 하반절에 나오는 “말씀”과의 상호 관계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또 다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원수들의 오만함에 즉시 압도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의 공격에서 패배당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너그러움의 출처와 근거가 여기에서 우리에게 지적되어져야 합니다.
즉 우리들은 주의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신뢰로 믿음이 있고, 이로 인해 주의 성령은 우리로 불신자들의 사악한 신성모독을 담대하게 물리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우리가 그러한 비방을 물리칠 수 있도록 소망의 말씀과 고백의 말씀을 연결시킵니다.
2. 본문 43절은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입니다.
1) 선지자가 왜 “진리의 말씀”이 자기 마음을 강하게 붙들어 주기보다도 혀에 채워지기를 구했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음은 순서에 있어서나 그 우위성에 있어서 혀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믿음이 부족해도 말만 유창하고 능한 것으로 우리에게 이롭다는 말인가?
확고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말이 극히 유창하게 흘러나오지 않는가?
우리의 답변이 있습니다.
다윗은 마음의 믿음과 상관이 없는 외면적인 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입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도 포함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믿음으로 내 마음을 붙들어 주실 뿐 아니라 나로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사람들 가운데서 두려움없이 주를 찬송할 수 있는 입의 자유를 베풀어 주소서’
선지자가 입의 담대함을 간구한 것이 마음에서부터 우러난 것입니다.
2) 또 주의할 것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동안은 빼앗겨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너무 오래’(칼빈 ; 조금도 -한글)라는 말을 왜 사용하는가? 입니다.
우리가 무장을 갖추지 못해 힘이 없을 때, 혹 원수들에게 넘어지지 않을까 하여 매순간마다 경성해야 함을 볼 때 이러한 추리는 매우 애매하게 보입니다.
이와 같은 난점은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으로는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때로는 가장 담대한 마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사단의 격렬한 공격을 받으면 겁에 질려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 편
꾸준한 언어 훈련이 되어 악인들의 조소에 신속한 응답을 보냈다 해도 신앙을 상실하게 되지는 않으나 그 신앙은 흔들리고 신자들은 마음의 냉정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얼마동안 비틀거리고 흔들림을 받습니다.
선지자는 이런 연약함이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 있음을 알았기에 기도한 것입니다.
‘내가 한결 같이 담대한 말로 예비치 못한다 해도 오래 침묵을 계속케 하지 마소서’
선지자는 이 말씀 속에서 자신은 마땅히 필요한 만큼 항상 담대하거나 굳세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인해서 사실상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음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말할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니요 마음의 생각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을 열어 주셔야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담대한 영을 거두어 가시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은 연약해지거나 넘어질 뿐 아니라 우리의 입도 해야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란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함으로서 선지자는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규례”란 단순히 율법의 명령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의 확신의 진정한 근본을 이루고 있는 언약까지를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חול (홀)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서 ‘내가 주의 규례를 두려워하였나이다’ 라고 번역합니다.
우리는 이 해석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규례”를 ‘형벌’ 과 같은 의미로 본다는 것은 선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매우 거리가 멀다는 사실입니다.
3. 본문 44-45절은 “(44)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45)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입니다.
1) 선지자는 율법 배우기를 잠시만 아니라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세 가지 비슷한 동의어, תמיד(타미드), עולם(올람), עד(엣)을 계속 나열해 사용한 것은 성도들이 담대함으로 한결 같이 맞서지 않고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점차 여러 유혹들로 식어지게 되어 율법을 지키려는 생각도 사라지게 될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이러한 유혹들과 맞설 수 있는 좀 더 나은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 그것과 보관된 어려움과 위험을 말합니다.
2) 45절은 선지자가 행하기를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번역은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입니다.
시편 119 편
즉 다윗은 자기가 기쁨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구하였기로 자기가 나아가는 길이 평탄하고, 평안하리라는 생각, 곧 ‘편안하게 행보하는 것’을 크게 기뻐한다는 해석입니다.
사람의 길은 빈번히 방해와 시련을 만나며, 또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장애물들 가운데 누워 있거나 헤어날 수 없는 우여곡절 속에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지 못하기에 그들은 자신의 오만함이 받아야 할 합법적인 형벌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 사면에 올무를 놓아 빠지게 함으로서 우리가 넘어지거나 돌이키도록 하시며 마침내 무저갱에 갇히도록 하십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자기의 길에서 더 많은 장애물들을 만납니다.
3)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절대적인 수종을 하면 그 보상으로 그 사람은 평안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걸어가게 되며 환난을 만날 때에는 이것을 극복할 방법을 찾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아무리 용이하게,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도 곤경에 빠집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근심과 수고를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말한 대로 목적을 달성하여 어찌할 수 없는 환난을 계속당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고후4:8).
또한 쓰라린 환난에 빠져 있을 때에도 평안하게 행보하게 되는 것은 의심스러운 문제들을 하나님께 이러한 방법으로 내맡겨 버림으로서 하나님으로 자기의 인도자를 삼아 환난의 밑바닥에서부터 담대하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4. 본문 46절은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 입니다.
선지자는 앞서 자기가 기도했던 것을 받은 것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입에서 말씀을 빼앗지 마소서” 라고 기도한 선지자는 이제 마치 자기가 기도한 것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용기를 얻어서 열왕들 앞에 말을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할지라도 벙어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온 세상에서 기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왕을 들고 있는데 왕이란 다른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또 하나님의 증언자들의 입을 교만하게 막아 버리는 자들입니다.
실제로 어떤 때는 가장 미천한 자들 앞에서도 우리가 담대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그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두려워서 물러섭니다.
또 처음에 담대했던 말도 곧 자취를 감추어 버립니다.
시편 119 편
그러나 우리의 용기 부족은 열왕의 보좌 앞에 둘러싸였을 때 극에 달합니다.
다윗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원수들과 맞서는 용기를 가질뿐 아니라 열왕들 앞에서도 담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정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우리의 마음이 사람에 대한 공포심에서 완전한 방어를 갖추고 있을 때라는 점과 제아무리 모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낙심과 실망에 떨어뜨리려 할지라도 우리는 왕 앞에 서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들의 헛된 영광에 가려진 것은 가장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5. 본문 47-48절은 “(47)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48)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입니다
이 구절도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 계속됩니다.
요컨대 그토록 귀중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한결같이 묵상한 것보다 자기를 더 기쁘게 해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실제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즐거움’ 이라는 말로 선지자는 자기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 손을 들고........ 묵상하리이다” 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손을 뻗쳐 무엇을 잡으려 할 때는 우리가 어떤 것을 간절히 사모한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선지자의 소망의 강도를 보여줍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 풍채나 걸음걸이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사랑을 꾸며낸다고 해도 매사에 이를 무시하는 생활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마땅히 가장 야비한 위선을 행하는 자라고 비방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는 우리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율법 듣기를 즐거워하는 데서부터 나오는 그 감정은 심히 진실하고도 열성적이었다고 확증합니다.
끝으로 선지자는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의견과 같이 우리는 שוח (슈아흐)란 말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고 있는 은밀하고 남이 볼 수 없는 기쁨을 가리키고 있다고 봅니다.
시편 119 편
시119:49-56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본문에서 선지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습니다.
1. 본문 49-50절은 “(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 게 하셨나이다
(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그가 약속하셨던 것을 실제적으로 이루어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본 절 끝부분으로부터 선지자가 약속에 관해 말하고 있음을 추론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는 자신이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지지 않고서는 그런 희망을 가질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구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근심 중에 머물러 있도록 하실지라도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위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선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근심과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하듯 자기의 고통을 덜어보기 위해서 백방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며 헛된 위로를 찾아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매혹적인 것이 자기의 생각을 유혹하면 이것을 사용해서 자기 고통을 경감시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와 정반대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서 만족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다른 모든 피난처를 찾기에 실패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충만하고 완전한 생명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더우기 선지자는 솔직하게 고백하기를 자기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용기를 얻어내지 못했더라면 죽은 사람처럼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악한 자들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도중에 용기를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마음의 내적인 용기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정당한 이유에서 성도들은 환난을 당할 때에 오직 ‘자기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에서만 생기와 용기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묵상해 본다면 우리는 죽음 가운데에서도 살 수 있고 우리에게 어떤 위로도 주어질 수 없을 만큼 극심한 환난은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119 편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환난을 당했다 해서 위로와 도움을 주실 자를 빼앗겨 버렸다면 우리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거나 업신여김으로서 의도적으로 헛된 위로에 속아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2. 본문 51절은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입니다.
이 실예는 우리의 정직함이 악인들의 계교를 싫어한다 할지라도 움츠러들 줄 모르는 한결같음으로 그들의 교만을 굴복시켜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싫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기에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시험에 넘어지고 맙니다.
땅에는 항상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한 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인들에게 짓눌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욕설을 무시해 버리면 우리의 신앙은 안정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는 불신자들을 “교만한 자” 라고 매우 적절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들의 지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시여기고 모든 경건을 발로 짓밟아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늘 나라에 대해 멸시를 쏟아 붓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이 교만으로 눈이 가려지지 않았다면 그런 길로 곧장 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나를 비난한다 해도 나는 주의 법에서 돌아서지 않을 것이니이다.’
우리는 “심히” 또는 ‘크게’ 라는 말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선지자가 악한 자들에게서 단지 얼마동안만 경우에 따라서 괴로움을 당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계속해서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악인들은 자기들이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더욱더 오만하게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도록 합시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건한 자의 숫자는 항상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순수함을 지키려고 한다면 악인들의 무리와 폭도들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 편
3. 본문 52절은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를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입니다.
1) 이 시에서 ‘하나님의 규례’ 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신분(身分)과 작정(作定), 즉 ‘하나님의 의’ 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옛” 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을 볼 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세상의 의로우신 심판주로 알려 주셨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음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율법은 영원히 존재해 왔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는 어느 정도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의가 최근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설명이 됩니다.
기록된 율법은 하나님께서 훨씬 전에 우리 마음 속에 새겨 주셨던 자연 법칙을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입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우리는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영원토록 그의 법을 세워 놓으셨음을 입증하고 있다’ 는 해석을 받아들입니다.
이 법의 제정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팔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그의 말씀은 아무런 효력을 미치지 못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보응하실 때는 이것으로 자신이 말씀 하셨던 것을 확증하십니다. 시민법(市民法)에서 형벌이 집행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과 더욱 조화가 잘됩니다.
선지자는 주의 법의 권위를 세워 참된 행위는 그의 법을 수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가 자기 마음에 가장 오래된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했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바라는 것만큼 자주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우리 믿음의 역량이 점차 식어지고 무감각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지난날에는 바로 이 무적을 분명하게 나타내 주시기를 바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토록 한 가지 방법으로 계속된다는 점과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눈을 들어 그것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두렵게 함으로 깨달음이 있게 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는 생각을 반대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답변은 이렇습니다.
성도들이 주의 심판을 두려워 떨게 된 육체의 금욕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주관하시는 섭리로 인류를 섭리하심을 알게 해준다는 사실을 볼 때 성도들에게 큰 위로의 원천을 공급해 줍니다.
시편 119 편
또 한 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악인들이 얼마동안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도 마침내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지만 성도들은 자기들의 복의 보호자 아래서 인내하여 싸움을 마친 후에 보호를 받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4. 본문 53절은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악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의 괴로움을 당했다는 의미와 선지자는 그들의 파멸에 대한 생각으로 두려워 떨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열심’ 이라고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문맥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 으로 보고 이 말은 선지자의 뜨거운 열심을 가리키며 선지자는 열심히 율법을 범하는 자들을 볼 때 심히 슬퍼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하찮게 생각하고 있는 자들의 사악한 교만을 가장 싫어했음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멍에를 던져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깃발을 치켜든다는 것이 성도들에게 새로운 공격을 가하는 근거가 되지 못함을 주의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되풀이하거니와 이 말씀은 필히 주의를 요합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리 가운데 사는 동안에는 울부짖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자신의 행위에 대한 가냘프고 천박한 핑계를 늘어놓기 때문입니다.
다윗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저버렸으나 다윗은 이런 일로 결코 용기를 잃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향한 경외심이 마음의 거룩한 울분을 불태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쁜 본보기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을 때에 서로서로 앞을 다투어 그것을 미워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말씀 속에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우리 모든 사람은 똑같이 떳떳하다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하고 있는 아첨의 말과 선지자가 자신이 사로 잡혔다고 말하고 있는 맹렬한 노가 서로 대조되어 있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한다고 해서 악한 자들이 극악무도하게 하나님께 대항을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왜곡되고 몰지각한 경우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와 반대로 자기가 맹렬한 노에 사로잡혔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계시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만간 적절한 형벌을 내리시기로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 편
5. 본문 54절은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앞서 자기가 말했던 것, 즉 하나님의 법이 자기의 일생동안 유일한 또는 특별한 기쁨이었다는 사실을 다른 말로 되풀이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순례자들이며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또 신자가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에도 하늘의 후사라고 보아야 합니다.
“나의 나그네 된 집” 이란 그들의 일생동안의 여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특별하게 주의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고국에서 쫓겨 도망 다니는 동안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 얻기를 그치지 않았고, 도리어 자기가 쫓겨남으로 얻은 모든 슬픔보다 더 큰 기쁨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성전을 보는 기쁨을 빼앗기고 제사를 드리러 나아갈 수도 없고 종교행사에 참여할 권리도 빼앗겼음에도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이런 사람은 정말로 보기 드문 덕을 지닌 고귀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그네 된 집” 이란 다윗이 자기 나라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 속에 깊이 새겨두고 그의 생각을 뒤흔들려는 나그네 생활의 쓰라린 가운데 하나님의 법을 묵상함으로 기쁨을 누린 자신의 행위를 높이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6. 본문 55절은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의 하반절은 상반절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 전체가 한 가지 동일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하나님을 기억했기에 율법을 지킬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율법을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데서부터 비롯됩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불경건을 정죄할 때, 저희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 라 말합니다(시50:22, 78:11, 106:21).
다윗은 이것을 바로잡아 보기 위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율법을 지키는데 유일한 방도라고 권면해 줍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영위하심이 우리 마음 속에 생각되는 만큼 그 생각은 우리를 겸손하게 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자극시켜 줍니다.
“밤”이란 말은 선지자가 하나님을 기억하되 불과 얼마동안만 기억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억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시편 119 편
그러나 선지자가 특별한 때를 가리켜 말한 이유는 그 시간에는 우리의 모든 지각이 거의 모두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고 내가 잠 잔 동안에 하나님은 내 생각을 일으키셨나이다.’
선지자가 밤을 말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선지자를 보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고 선지자에게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해주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즉 그 선지자가 흑암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마치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나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억하는데 전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7. 본문 56절은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입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ואת(조트) 라는 말을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누렸던 기쁨의 복과 관련해서 말하기에 그 기쁨의 복들에 대해 말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선지자가 누렸던 모든 복에 대한 인식, 또는 모든 사건에 대한 깨달음이 내포되어 있고 선지자는 어떤 두드러진 예를 들어 자기 행위의 무죄함을 하나님께서 입증해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바리새인들이 성경에서 어떤 문제를 대할 때 그 문제를 왜곡시켜 행함의 공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듯이 선지자는 자신의 어떤 공로를 자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되 자기 생업에 모든 형통함을 주시는 분임을 말하거나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섭리를 우연으로 돌리면서 고의적으로 무시하거나 감추어 버리려고 하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과 자기 자신을 정반대가 되게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있습니다.
또 선지자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의 본을 따르도록 하여 하나님은 결코 편협 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보상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선지자는 이 거룩한 자랑으로 악인들의 비열한 비방을 진압시킴으로 자기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