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순덕론
강력한 생각은 현실이 된다
천국의 문은 기도에 대해 닫혀 있더라도 눈물에 대해선 열려있다.
- 탈무드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Ⅰ.
문학가는 인류의 교사여야 한다는 측면에서 수필가는 시대와 역사의 증언자여야 할 것이다. 인간성 상실, 자연 파괴, 사회적 불안과 공포 등 총체적 위기에 처한 현재, 경제적 합리성만이 강조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는 이제 더 이상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인간의 비인간화가 인성 때문이라고 보는 데는 다른 생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도구적’, ‘정합적 이성’만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의 구조가 비인간화를 불러온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회조직과 구조의 개혁은 필수적이다. 한편, 도구적 이성에만 빠져있는 인간 이성의 찰나적 본성을 등한시하는 더욱 단적인 예는 과학기술의 맹목적 발전과 추종을 들 수 있다. 그 대신 이른바 생태적 합리성에 대한 관심과 고려가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생명에 대한 애정이 배제된 수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21세기 수필가는 생태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수필은 생명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소중한 경험의 산물이요, 최순덕은 그 경험의 문학적 전파자다. 인간의식에서부터 생활과 사회구조에 이르기까지 생태친화적인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 생태적 합리성에 근거한 대안적 세계관 모색과 관련해, 특히 우리 문화와 생활양식 속에 오늘날 새롭게 되살려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이 수필가 최순덕의 일반적 관심사이다.
생태적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생태계 내에서 모든 생명체나 무생물이 유기적으로 엮여 있듯이, 합리성이란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무한히 복잡한 전체적인 맥락에 합당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심’하고 ‘회의’할 수 있는 이성적 힘이 상실될 때 인간은 권력과 그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나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만 좇는 ‘정합적 이성’ 중심의 인간과 사회는 양심과 도덕성을 잃어 ‘비인간화’의 극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 즉 ‘비판적 이성’을 도외시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해내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는 이러한 정합적 이성주의자들이다. 그것은 최순덕의 수필 <하얀 눈물> 속, 북극의 눈물에서 현대 사회와 문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가치를 도외시하는 산업구조, 기술생산의 효율성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과학기술 논리 등이 그것이다. 최순덕의 수필은 바로 이 같은 문제점을 눈물의 미학을 통해 찾아내고 있다. 최순덕의 수필은 야위어가는 북극곰의 실태를 통해 도구적 이성에 빠진 현대인의 문명화에 대해 정조준하는 생태수필이다.
II. 생태수필이란?
생태수필의 의미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전체를 지향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생명의 개념, 즉 생태계 중에서 생명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데 있다. 따라서 생태수필이란 생명 자체를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는 수필이며,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가치와 위상, 생명고양의 조건을 살피어 그 중요성을 문학적 상상력 속에 구체화하는 수필을 가리킨다. 때문에 이를 달리 자연 친화적 수필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하겠다.
생태수필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대별된다. 고발, 발견, 전망 또는 신뢰가 그것이다. 첫째 고발의 장은 생태계 오염이나 생태계 파괴의 참상과 그로 인한 생태적 인간 정신의 상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발견의 장은 자연의 근본이자 바탕인 초록의 현장을 찾아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연의 발견은 원시적 삶을 의미하며, 여유와 느림의 미학을 뜻한다. 생명의 발견 안에는 유년의 추억이 있고, 꿈이 나래를 펴고 있다. 초록의 체온을 통해 우리는 삶의 진실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셋째 전망 또는 신뢰의 공간은 수필가 고유의 감수성으로 아름답고 따뜻한 생태 사회를 보여주어 인류에게 그런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상상력의 보고를 의미한다. 문학적 상상력과 생태학적 인식으로 또 하나의 희망이 될 지구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장이다. 따라서 최순덕의 수필은 북극곰의 생존을 위협하는 산업사회의 과학화와 인간 중심주의, 그에 대한 대안으로 생태문학을 제시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생태사회를 건설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최순덕은 수필 <하얀 눈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날씨 앞에 붙는 수식어가 점점 더 자극적이고 강력해진다. 염려스러웠던 ‘지구 온난화’라는 말은 오히려 포근한 옛말이 되었다. ‘지구가 펄펄 끓는다’라는 표현도 지나 이제는 ‘미친 날씨’로, 다시 ‘끔찍한 날씨’나 ‘소름 돋는 공포의 날씨’로 점점 더 수위가 세어지고 있다. 빙하가 녹아내리면 인류도 멸망하게 된다느니, 그 시간이 멀지 않다는 과학자들의 경고에 더욱 불안하고 경악스럽다. 코앞에 닥친 이 엄청난 자연 재앙을 인간은 또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지 이대로 사라질지 두렵다. 기후 위기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는 생명체의 생사를 위협하는 두려운 말이 되고 말았다. " 수필가 최순덕이 말하는 생태문학은 녹색, 생명, 환경 등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녀의 수필은 단순히 환경문제, 환경파괴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모든 병폐를 생태학적 인식으로 바라보며 녹색의 가치에 대한 감성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눈을 보았다. 볼우물 움푹 팬 야윈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눈이다. TV 화면 속의 북극곰과 마주친 내 눈길이 얼음처럼 얼어버렸다. 무심한 듯 허공을 바라보는 초췌한 모습과 참담한 눈빛에는 어떤 희망의 빛이라고는 단 한 가닥도 보이지 않는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육지로 내몰린 북극곰이 먹이를 구하지 못해 매일 1Kg씩 살이 내리고 있다는 보도는 실로 충격이다. 나의 뇌리에 각인된 그 북극곰이 지금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있기나 할까. 내 어릴 적만 해도 소는 식구였다’로 시작되는 수필인 <하얀 눈물>에서는 지구온난화의 대비 부족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그녀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동시대 내면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허무와 환멸이다. 인간의 탐욕이 야기하는 비인간화의 현장을 생태적 합리성으로 비판하면서 그녀는 인간의 오만함에 고개를 숙이고 만다. 이 수필에서 무엇보다도 주제의식의 상상화가 빛나는 부분은 이 글의 말미, ‘북극곰의 하얀 눈물은 인간에게 건네는 사라진 내일의 참혹한 표징일 수도 있다.’라는 부분이다. 여기서 ‘하얀 눈물’은 북극곰의 눈물이기도 하지만, 자꾸만 망가져가는 북극의 눈물이기도 하다 수필의 묘미는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낱말의 다의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연상과 상상의 즐거움을 안겨주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Ⅲ. ‘하얀 눈물’의 의미
바슐라르는 <몽상에 대한 몽상>에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보다 더 나쁜 표정이 있는데,, 그것은 글로 씌어진 눈물이다.’ 라고 했다. 볼테르는 <철학사전>에서 눈물은 슬픔의 말없는 언어라고 했다. 최순덕의 수필을 읽는 순간 볼테르의 눈물이 슬픔을 머금은 채 다발로 나왔다. 최순덕의 <하얀 눈물>은 바슐라르의 ‘글로 씌어진 눈물’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최순덕의 수필 ‘하얀 눈물’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아스라이 북극에 있는 곰을 소환했다. 지구는 위기다! 그 단단한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사연이. ‘우리가 기후다’라는 구호를 다시 불러왔다는 데서 이 수필의 존재가치와 의미를 확인할 수 있겠다.
수필가 최순덕은 눈물처럼 떨어지는 봄을 남기고 지구 생태가 망가져가고 있는 데 대해 경각심을 가지자고 호소하면서 정신의 다이어트를 주창하고 있다. 북극곰의 하얀 눈물이 주는 의미가 가슴에 통증을 일으키면서 봄을 더욱 처연하게 만들었다. 북극곰의 하얀 눈물은 그녀를 훌륭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숨 가쁘게 해양수필만 생각하며 살아온 그녀가 드디어 지구 최대의 이슈를 터치하면서 의식있는 작가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병든 지구는 여전히 무거운 짐을 그녀에게 맡기고 있다. 앞으로 최순덕은 지구의 위기의 동승하리라 본다. 최순덕은 <고등어의 눈물>로 해양수필문학상 우수상을 탄 바 있다. 눈물의 작가 최순덕이 발표하는 이 수필은 ‘북극곰의 사투’를 통한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어 시의적절할 뿐만 아니라 발상과 전개, 중층구조의 확장, 이미지의 활용 등 문학적 장치의 적절한 변주가 작품으로서도 높은 품격을 안겨준다.
생태계 위기를 최고로 끌어올린 <하얀 눈물>은 지구 생태계의 현실에 대한 거친 고발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동시에 수반한다. 북극의 미래에 대한 상상은 대체로 불안한 심리를 많이 의미하지만, 북극곰이 흘리는 하얀 눈물은 아픔보다는 위기 상황을 경고하는 작가의 사회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얀 눈물>은 외관상 ‘겨울’ 이미지에 집중되어 있다. ‘하얀 눈물’은 ‘북극의 위기’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순백의 이미지에 합당한 표현은 ‘순수’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하얀’을 재해석하게 만든다. 차갑게 식어버린 ‘생명의식’에 대한 따스한 감정을 찾아내는 일은 우리 작가들의 소명이다. 최순덕은 하얀 눈물로 북극의 위기 속에서 북극곰의 위태로운 서사를 써내려가며 한국수필사에 소중한 거탑을 쌓았다.
<하얀 눈물>은 ‘눈물’과 관련된 지구사의 비극적 미래-보기가 눈길을 끈다. 바이오필리아 영화를 보는 듯하다. 생태의 중요성과 자연의 가르침을 동시에 주고 있다. “빙하가 녹아내리면 인류도 멸망하게 된다느니, 그 시간이 멀지 않다는 과학자들의 경고에 더욱 불안하고 경악스럽다. 코앞에 닥친 이 엄청난 자연 재앙을 인간은 또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지 이대로 사라질지 두렵다. 기후 위기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는 생명체의 생사를 위협하는 두려운 말이 되고 말았다.”는 대목에서 삶의 위기에 당도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 지구의 미래는 비극적이다. ‘눈을 바라본다.’ ‘무심한 듯 허공을 바라보는 초췌한 모습과 참담한 눈빛에는 어떤 희망의 빛이라고는 단 한 가닥도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작가는 하얀 눈물 속 희망부재를 잘 표현해내었다.
(1) 발단: ‘작가의 눈에 비친 곰’; ‘눈을 보았다. 볼우물 움푹 팬 야윈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눈이다. TV 화면 속의 북극곰과 마주친 내 눈길이 얼음처럼 얼어버렸다. 무심한 듯 허공을 바라보는 초췌한 모습과 참담한 눈빛에는 어떤 희망의 빛이라고는 단 한 가닥도 보이지 않는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육지로 내몰린 북극곰이 먹이를 구하지 못해 매일 1Kg씩 살이 내리고 있다는 보도는 실로 충격이다. 나의 뇌리에 각인된 그 북극곰이 지금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있기나 할까.’ 오래 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슬픈 북극곰의 모습을 작가는 소환해낸다. ‘인공위성에서 찍은 일 년 전의 사진과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얼음은 열에 녹는다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를 모르는 이 없지 않은가.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의 밀림이 무분별하게 파헤쳐지는 현장을 클로즈업한다.’ 경험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북극에 위기가 불어닥치고 있다는 점을 가득 부풀리고 있다.
(2) 전개; ‘빠지는 곰과 찌는 인간’ ; ‘살이 빠진다는 말에 원초적인 반응이 고개를 든다. 북극곰의 생사가 달린 체중감소 현상을 보고 무슨 기이한 망상일까. 하루에도 몇 번씩 체중계를 오르내리며 살이 찔까 봐 노심초사하기 때문이리라. 나이 들면서 발병하는 노인성 대사증후군에 비만은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이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먹지 못해 살이 빠지고 서서히 죽어가는 동물이 있는가 하면, 자연 생태 파괴의 주범인 인간이라는 동물은 과잉영양 섭취로 살을 빼기 위해 애쓰고 있다니 참으로 요지경 세상이다.’ 아이러니에 작가는 기이한 망상이 무너지듯 내리고, 인간 세상 속에서 과잉영양 섭취로 비만이 되어가는 지구와 지구인을 만난다.
‘야위어가는 북극곰의 사연에 다이어트라는 단어가 파고든다. 북극곰뿐만 아니라 굶주리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이나 지진과 전쟁으로 생지옥을 살아가는 뭇 생명을 생각하면 과잉섭취 후의 다이어트라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먹지 못하면 죽는다는 생명체들의 공통된 섭리 앞에서 일부러 굶는 다이어트라는 말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말인가. 무관심 속에 넘쳐나는 음식물과 생활 쓰레기가 내 몸 안의 지방 덩어리처럼 태산이다.’ 다이어트란 단어와 함께 작가는 생지옥을 살아가는 반대편 뭇 생명을 소환한다. 그 안에서 지방 덩어리인 자신의 육체와도 만난다.
반성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음의 다이어트가 더 시급하다. 내장에 덕지덕지 붙은 지방 덩어리 같은 탐욕의 마음을 쑥쑥 훑어내야 하리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편리함에 길들어진 마음의 다이어트를 해야 할 때다. 작은 행위라도 바로 실천하라고 북극곰은 눈물로 호소한다. 머뭇거리고 망설일 시간이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오염된 환경 속에서 버티고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체들의 고통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거창한 구호나 요란한 행위보다 개미 같은 작은 힘의 응집이 필요하지 않을까.’ 잊고 있었던 아나바다 운동을 생각한다. 가까운 거리는 걷고 생활 속 다이어트를 그야말로 나부터, 내 가족부터 실천하도록 해야겠다는 다짐도 나온다. 그녀는 한때 청춘을 뒤흔들던 뜨거운 젊은 날의 젊었던 의식을 꺼내 본다. 넘쳐나는 몸 안의 지방덩어리가 강조될수록 장맛비 같은 북극의 슬픔은 독자들의 가슴에 굵게 길게 자리한다.
(3) 결말: ‘북극곰과 손녀 상관화하기’ ; ‘무섭고 두렵다. 심각한 상황에 놓인 북극곰의 야윈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말을 하지 못하는 짐승이 겪는 고통이라니 애처롭기 짝이 없다. 하얀 털 위로 흐르는 보이지 않는 하얀 눈물이 아프게 전해져 온다. 오늘 본 저 북극곰의 초췌한 모습이 머잖아 내 손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오염된 자연환경의 원상복구가 어렵다면 더 이상의 오염을 막을 수 있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지 않을까. 북극곰의 하얀 눈물은 인간에게 건네는 사라진 내일의 참혹한 표징일 수도 있다.’ 연속되는 북극곰의 야윈 이미지들이 오염된 지구환경과 연결되면서 작가가 바라는 지구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으로 하얀 눈물을 제시된다. 북극곰의 초췌한 모습을 미래 손녀의 모습과 오버랩시킴으로써 최순덕은 인간이 정신을 차려야 함을 힘주어 말한다. ‘보이지 않는 하얀 눈물’ 이미지를 통해 지구인에게 출구를 모색하게 한 것이다.
Ⅳ. 평가
‘눈물’은 과거를 뒤돌아보고 현재의 교훈을 찾는 도구다. 최순덕은 무수히 흘러내리는 북극곰의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 한 장을 구해 보려 한다. 혼자 남겨진 북극곰은 이런 의식있는 인간들만이 살릴 수 있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마음의 다이어트를 해내는 일이다. 대안과 동시에 지구를 구할 마지막 도구로도 인식되는 것은 생태적 상상력이다. <하얀 눈물>에서 초췌해지는 손녀의 모습에 지구의 생명체를 비유한 것. 고조되는 오염환경, 사라진 인간의 내일, 북극곰의 눈물을 사라진 내일의 참혹한 모습으로 의미화한 일은 모두 주제의식을 구체화하는 바람직한 작업이다. 지구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참 작가의 모습을 보인다. 지구는 병들어가고 있다.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다짐이 극적으로 읽힌다. 북극곰의 눈물은 미래 우리 인류의 분신이며, 그 심경을 대리한다.
해양문학상 수상작가 최순덕의 생태수필 <하얀 눈물>은 다스림 출신 본격수필가들의 인정투쟁이 일구어낸 성과물이 아닐 수 없다. 내 작품으로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그 작가정신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모든 것이 어려운 시절에 지구의 구석진 곳, 보이지 않는 곳을 응시하고 자신을 성찰하며 바른 정신자세를 견지하는, 의식있는 수필가는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작가는 진보적이어야 한다. 지금과 다른,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게 진정한 작가다. 최순덕은 어느 날 TV 화면 속에서 본 야윈 북극곰의 기억에서 끄집어낸 하얀 이미지들을 우리 세상의 과잉생산, 과잉발전, 과잉섭취에 비추어 보고, 자신의 갈증을 작가정신으로 승화시켰다. <하얀 눈물>은 의미있는 한 편의 생태수필로서 세월이 흐를수록 수필가들에게 팔마의 향방을 가늠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