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
먼 나라 멕시코에서 태평양을 건너온 꽃이다. 풀벌레들이 노래를 시작하는 해질녘에 피는 꽃이다. 별들이 어둠을 기대어 나타나서 은하수를 만들고 다정하게 소곤거릴 때 꽃잎은 은은하게 미소 짓는다. 달과 별을 보며 밤새 노랗게 웃는다. 따뜻한 느낌이 든다.
처가에서 씨를 얻어와 집 앞 화단에 심었다.
장인어른의 고향은 개성이다. 6.25 사변 때 피난을 나와 김포에 터전을 마련했다. 장인 종친이 이북에 있어 처음에는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처가는 김포시 양촌읍 양곡이다. 처가 장모님은 일 남 사녀를 두었다. 처남은 9대 독자로 TV 드라마 속에 귀남이 같이 장인 장모님 보호를 받으며 자랐 다고 한다.
셋째딸 처제가 나와 아내가 결혼할 때 처제가 축하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제주도 신혼여행을 하고 돌아와 보니 유언장이 되었다. 양곡고등학교가 코앞인데도 언니 따라 김포고등학교에 갔다. 고등학교 일 학년이다. 아침에 버스를 놓쳐 트럭을 타고 이웃에 사는 언니와 가다가 누산리에서 마주 오는 화물차와 충돌하여 이승을 등졌다. 검단동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처가 식구와 장모님은 오열했다. 장모님은 가슴에 멍이 들고 항상 따뜻한 미소를 짓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사랑하는 딸을 갑자기 잃었으니 그 아픔이 사무쳤을 것이다.
처남은 결혼하여 남매를 낳았다. 10대 독자인 근재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었다.
근재는 착실하고 양곡교회에 다니며 봉사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몇 년 후에는 근재 여동생이 태어났다. 근재는 키가 크고 얼굴도 미남형으로 잘 생겼다. 성격이 온순하고 성실했다. 검소하고 엄한 장인 곁에서 자라 군에 있을 때도 솔선수범하여 상사와 동료들에게 잘하여 포상 휴가도 나왔다.
장모님은 근재에게도 무한 사랑을 쏟았다. 손주를 돌보고 업어서 키웠다. 모든 일에 손주를 우선으로 하였다.
군에서 제대하고 중국 여행을 다녀온 후 대학교에 복학하였다. 학교 기숙사에서 자다 갑자기 열이 나고 원인 모를 병으로 병원에 가보지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 가족이 오열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해 3월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사무실로 전화가 와서 받으니 근재가 죽었다고 했다. 건강하던 근재가 갑자기 죽으니 황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달맞이꽃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옥토 박토를 가리지 않고 뿌리 내린 곳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남는 꽃이다. 산자락과 개울가 군데군데에 노란 꽃잎을 열고 활짝 웃고 있었다. 꾸밈없이 밝게 웃는 모습이 마치 장모님 얼굴 같다. 늘 잔잔한 미소를 짓던 장모님은 가슴 아픈 사연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오셨다.
장모님의 삶은 달맞이꽃을 닮았다. 억센 뿌리로 흙을 움켜지고, 보란 듯이 서 있는 달맞이꽃은 집단으로 모여서 위세를 부리거나, 몸에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으로 치장하지 않아서 더욱 좋다. 억세고 튼튼한 다리로 우뚝 서서 꽃을 피우지만, 뭇시선을 끌만큼 미끈한 자태도 지니지 못했다. 투박한 몸매를 타고났지만, 결코 천박하거나 경박해 보이지 않는다. 시골이나 산골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꽃이다.
사랑하는 딸과 손자를 먼저 보낸 그 아픔을 이겨내며 장모님의 힘든 농사 짓느라 멋이나 치장하지 않았지만, 성품은 달맞이꽃을 그대로 닮았다.
장모님은 기다림이라는 꽃말을 지닌 달맞이꽃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달이 뜨기를 기다리는 달맞이꽃이었고, 별을 기다리는 별 맞이 꽃이었다.
집 앞 화단에 심은 달맞이꽃이 달빛에 비쳐 온유하다. 장모님의 따뜻한 미소 는 달맞이꽃처럼 환하고 바람은 노란 꽃 볼을 스치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