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게 받으시는 예배
레위기 1:1-9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내적 목표 두 가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첫째는 모든 교우가 서로를 정성스럽게 대하는 태도를 회복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서로를 귀히 여기고,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 품어 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교우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을 정성껏, 성심을 다해 드림으로 예배가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예배(禮拜)를 뜻하는 단어는 ‘샤하’ 혹은 ‘아보다’입니다. 샤하는 ‘엎드려 절하다’ 혹은 ‘굴복하다’는 뜻이고, 아보다는 ‘봉사, 섬김’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그분 앞에 엎드림이 첫 번째이고, 우리의 삶을 그분 앞에 바침으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봉헌하는 것이 예배의 두 가지 요소임을 이 말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배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능동적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작기는 하지만, 이곳에 모였습니다. 기대와 설렘을 안고 온 분들도 있을 것이고, 습관적으로 나온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태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대목은 주님의 영광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찬 광경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난 그곳은 모세조차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출40:35). 그 거룩하고 장엄한 광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유한함과 죄성을 절감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그것을 ‘누미노제’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앞에 섰을 때 느끼는 존재론적 두려움, 경외감 이런 것들이 누미노제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일찍이 호렙산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다가오는 모세에게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출3:5)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몸과 마음에 배어든 삶의 습속이나 내로라하는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자아를 벗어던지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내 삶의 관습적인 태도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 자아를 내려놓고,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는 일 못지않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분이라든지 또는 이러이러한 분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우리 욕망대로 하나님을 조작하거나 조정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 후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사6:5) 하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어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까? 오늘 레위기의 첫대목이 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레1:1)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입니다. 자칫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잊지 마십시오.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임을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배가 우리의 공적일 수 없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도적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고 가르쳤던 요한의 교훈과도 일치됩니다. 요한일서 4:10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레위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과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제사에 대해 가르칩니다. 제사를 예배 의식으로 대체한 우리로서는 레위기에 등장하는 제사법이 아주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재미도 없고 알쏭달쏭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큰맘 먹고 성경을 통독하던 이들도 레위기의 제사 규정에 이르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곤 합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에 대한 규정은 까다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가끔은 그 대목을 건너뛰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불편해도 건너뛰면 안 됩니다. 때로는 건너뛰고 싶은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예물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제사의 성격에 따라 제물이나 제물을 바치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바칠 예물 혹은 제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코르반’(qorban)입니다. 귀에 익은 단어입니다. 코르반은 ‘가까움’ 혹은 ‘사이가 가까움을 나타내는 물건’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물을 바친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친근함을 회복한다는 표지인 셈입니다. 그런데 코르반의 명사형 어근인 케렙(qereb)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인간의 내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중에는 이 말이 지정의(知情意)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행위는 자신의 심장과 창자를, 자신의 지정의를 바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멀뚱멀뚱, 혼곤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여러 가지 제사 가운데 번제(燔祭, holocaust)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번제는 말 그대로 제물 전체를 불에 살라 바치는 제사입니다. 번제에 사용되는 제물은 소나 양 가운데서 흠 없는 수컷이어야 합니다. 번제를 드리려는 사람은 제물을 이끌고 회막 어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번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 손을 얹습니다. 자기 죄를 제물에게 전가한다는 상징행위입니다. 손을 얹으며 봉헌자는 빠르게 자기 삶을 돌아볼 것입니다. 아등바등 살아가느라 잊고 있었던 자기의 허물과 죄가 주마등처럼 스쳐갈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교만했던 태도, 인색했던 마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들, 내 욕심 때문에 누군가에게 가했던 고통들…. ‘아,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부끄럽고 참담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을 얹는 의례가 끝난 후에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짐승을 직접 잡아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잡는 것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대행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물의 숨을 거둔다는 것, 어질고 착한 눈빛을 하고 있는 가축을 잡는다는 것, 그것도 나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짐승을 잡는다는 것은 참 아찔한 일이었을 겁니다. 낚시를 통해 잡은 물고기가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가미 부분을 칼로 찔러 피를 빼야 한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물며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짐승을 잡는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짐승을 내가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누구를 잡는 행위일까요? 그것은 나의 죄에 대해 스스로 벌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대학병원의 원장이셨던 장로님께 들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인턴 시절 하루는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물에 빠졌던 사람이 구급차에 실려 왔더랍니다. 보니까 이미 죽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도 심폐소생술을 비롯한 모든 조치를 다 해보았지만, 그는 결국 깨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사실도 당황스러웠지만,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지금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4대째 내려오는 가문에서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셨던 그분은 그 순간 ‘내가 과연 한 존재의 죽음을 선언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것은 정말 깊은 충격이었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흔들림입니다. 예배드리는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이런 엄중한 일이라고 오늘 레위기서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제물을 잡으면, 제사장들은 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회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뿌렸습니다. 또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으면 제사장은 그것을 가져가 제단 위에서 다 태웠습니다.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주면, 제사장은 그것도 제단 위에서 다 불살랐습니다. 기억하고 계시지요? 제물 곧 코르반은 바로 우리들의 심장이나 창자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제물을 바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도 반복되다 보면 ‘틀에 박힌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제사를 바치는 것으로 사죄가 완수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이사야는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제사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사1:11-12)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가지고 가야 할 또 다른 예물은 우리의 거룩한 삶입니다. 레위기의 하반부에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거룩한 삶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세상에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삶입니다. 레위기에서 나타난 거룩한 삶은 어떤 것입니까?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구석까지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것, 이웃을 속이지 않는 것,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 품꾼의 삯을 가로채지 않는 것,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여 저주하지 않는 것, 보지 못하는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지 않는 것, 재판을 공정하게 하는 것, 남을 헐뜯지 않는 것….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농사를 짓지 않으니 이런 이야기는 다 불필요한 이야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일부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 줄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거룩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질과 맺는 우리의 관계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우리 삶이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돈 지갑이 회심하기 전에는 회심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어찌 살아야 마땅한지를 잘 알면서도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늘 자기의 결핍을 채우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쳇바퀴를 돌리는 사람은 숨만 가쁠 뿐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고 말했습니다. 사람 속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채울 수 없는 심연이 있습니다. 그 심연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현기증을 느끼거나 허무함에 사로잡힙니다. 니카라과의 시인이자 혁명가인 에르네스또 까르데날 신부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태어난다. 하나의 목마름을 안고 태어난다”고 노래합니다. 그 목마름은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전심을 다해 구해야 할 것은 세상의 ‘이런저런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배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만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물질주의에 포섭된 복음 전도자들은 ‘번영의 신학’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의 복을 받고, 물질의 복을 받고, 범사에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걸 전적으로 부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복음의 전부인양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신앙에 따라오는 부수적 결실일 뿐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 우리에게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우리 마음에 모시면, 비록 건강하지 못하다 해도, 부유하지 못하다 해도, 실패의 연속이라 해도 낙심하지 않는 법입니다. 존 아반지니(John Avanzini)라는 은사파 목사는 『세상의 부』라는 책에서 사탄에 대항하는 싸움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싸움은 세상에서 자족하려고 몸부림치는 싸움이 아니라, “거짓 종교를 통해 그들의 소유가 충분하다고 믿도록 유혹하는 사탄에 대항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르치는 종교를 일러 ‘거짓 종교’, ‘사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이 풍족하기를 원한다고 가르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릇된 가르침에 ‘아멘’ 합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더욱 속상한 것은 이런 가르침이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변형된 형태로 한국교회에서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그런 ‘번영의 신학’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입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있습니까? 우리의 심장과 지정의를 그분께 봉헌하고 있습니까? 삶으로 그분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시인 최승호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예배를 ‘자동세탁기’에 견줬습니다. 때 묻은 옷을 자동세탁기 안에 집어 던지듯, 일주일 동안 살면서 지은 죄를 교회에 오는 것으로 말끔히 씻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진정한 예배를 드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12:1)
잊지 마십시오.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당한 예배이고 영적인 예배입니다. 영적인 예배는 몸을 통해서만 구현됩니다. 영적인 예배를 드리려는 이들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말하는 시대, 승자 독식의 체제를 맥없이 받아들이는 시대는 악한 시대입니다.
이 땅의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우리는 서로를 정성스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것은 바로 예배를 통하여 변화된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기운을 세상에 퍼뜨릴 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와 모든 교우들이 그런 일에 정말 소명을 받았다고 느끼길 소망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의 믿음이 진정한 예배를 통해 날로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