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축제 10월 1~4일… ‘국군의 날’ 제정 의미 양양에 살아 있어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왜 하필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일까? 10월 1일이 어떤 날이며, 무슨 의미로 국군의 날로 지정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아는 사람은 ‘그것도 모르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 양국은 좌우진영의 극심한 대립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한반도에 38선을 기준으로 남북 분할 통치하는 데 전격 합의한다. 한민족은 뜻하지 않게 남북분단의 비극을 맞게 된다. 이어 1950년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남한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다. 맥아더 사령관과 국군은 북으로 계속 진격할 것을 주장하지만 유엔군은 38선을 넘지 말 것을 지시한다. 38선을 앞두고 국군과 유엔군은 잠시 머뭇거린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명령이 나오자마자 국군 3사단 23연대가 최초로 38선을 넘어 통일의 꿈을 안고 북으로 진격한다. 그날이 바로 10월 1일이다. 현재 국군의 날은 정부가 이날을 기려 1956년 제정했다.
38선숨길 한천산 자락을 걷고 있다. 뒤로는 설악산 대청봉과 점봉산, 구룡령 등 백두대간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3사단 23연대는 당시 양양에 주둔해 있었고, 양양은 처음으로 38선 이북을 뚫은 지역인 것이다. 매년 양양시내에서 38선 돌파 재현기념행사를 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38선이 그어진 당시 양양에서는 웃지 못할 비극이 숱하게 생겼다. 같이 살던 마을이 한순간에 남북으로 나뉘고, 다니던 학교도 순식간에 남북으로 나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루아침에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 눈치를 보며 목숨 걸고, 학교에 가기 위해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 낮과 밤을 뒤바꿔가며 남과 북을 오갔다. 38선이 지나는 양양의 노인들은 지금도 그 아픈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마을 중간 잔교천이 남북으로 나눠
양양은 그 비극적인 과거를 다시 살려내 평화를 되새기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38선을 따라 걷는 길을 만들었다. 그게 ‘38선숨길’이다. ‘숨’의 의미는 몸을 감추기 위해 숨어다닌 길과 호흡과 소통하는 의미를 담은 남과 북이 소통하기를 바라는 중의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
38선숨길은 7번국도 38선휴게소에서 출발해서 잔교리 평화마을~대치리~명지리~38선전망대를 거쳐 한천산 옆 자락을 지난 뒤 부소치리고개~도리 한국의학박물관 옆 남천학생체험학습장까지 총 16.8km에 이르는 길이다. 양양 토박이이자 양양 문화관광해설사 김기수씨가 이 길을 동행, 안내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는 38선 휴게소는 7번국도 바로 옆 해변에 있다. 38선을 가리키는 커다란 비석과 함께 북진하는 탱크 이미지를 형상화해서 조성한 38선 미니주제체험관에 6·25 당시의 역사와 생활상을 간단히 보여 주고 있다. 북쪽 해변으로는 양양의 명소 하조대가 저만치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의 공신 하륜과 조준이 해안의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그 사이로 자라는 노송의 절경에 반해 은거했다는 바로 그곳이다. 명승 제68호. 멀리서 봐도 운치 있는 분위기다.
38선숨길에 나오는 잔교리마을 논길을 걷고 있다.
지하보도로 7번국도를 가로지르면 바로 잔교리마을로 연결된다. 일명 ‘평화마을’로 불린다. 잔교천을 따라 700m 구간에 마을 공공미술사업으로 6·25전쟁 관련 민족적 애환과 지역 정체성을 담은 벽화 및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지하보도부터 평화를 상징하는 벽화를 시작으로 그물 속에 갇힌 포탄, 남북이 평화를 낚는 조형물, 철로를 잘라 만든 평화의 탑 등이 눈길을 끈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이를 배달하는 우체부의 모습도 한편에 있다.
잔교리마을은 38선 비극을 현장에서 체험한 전형적인 마을이다. 조형물이 설치된 잔교천이 바로 38선을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같이 살던 이웃이 졸지에 남북으로 나뉘어 방문할 수 없는 현실로 바뀐 것이다. 잔교리는 이름 그대로 마을 중간에 하천이 흐르고 있어 하천을 건너기 위한 잔교(棧橋)가 많아 이름 붙여졌다.
잔교천이 절묘하게 마을을 가로지른다. 양쪽으로는 황금들녘으로 변신한 벼들이 고개를 숙이며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마을 어귀엔 장승들이 평화롭게 방문객을 맞는 듯하고 코스모스도 가을을 알리고 있다. 위도 38도를 알리는 이정표도 가끔 나온다.
잔교를 건너 38선 이북으로 넘었다. 지금은 아무런 문제도, 어느 누가 제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당시엔 군통제소가 있어 서로 전혀 방문할 수 없었다. 38선이 확정된 1945년 잔교리에 살았던 홍 모(당시 18세)씨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낮에는 잔교리마을에 지내다가 밤이 되거나 교전이 생기면 잔교리 앞산 범부골로 피란했다. 땅을 파고 나뭇가지를 얹은 움막 형태의 임시가옥을 짓고 생활했다.”
한국의 4대 기도처로 알려져 있는 양양의 낙산사 홍련암에 파도가 몰아치고 있다.
당시엔 좌·우익 모두 자기들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모둠’이란 단합대회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모둠이 끝나면 좌익은 우익을 습격하고 우익은 좌익을 습격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서로의 모둠을 방해하려고 단합대회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잔교리는 마을 단위에서 가장 많은 27명의 경찰을 배출, 그나마 좌익들의 습격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 역사적 현장을 지금 걷고 있다. 시간은 흘러 과거를 볼 순 없지만 그 사건의 현장은 역사적 사실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듯하다.
황금들녘은 가을을 알리고 있다. 길 옆 잡초와 나무들은 녹음의 절정을 지나 농익은 분위기다. 마치 곧 터트릴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여름에 향기를 내뿜던 꽃들이 이젠 잇달아 열매를 맺고 있다. 마을 농가에는 대추, 밤, 감, 배나무에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도로에서 출발한 38선숨길은 마을길을 거쳐 살짝 산길로 접어든다. 널찍한 임도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임도를 지나 다시 마을길로 내려간다. 대치리라고 쓰인 비석이 저 앞에 있다.
대치리(大峙里)는 풀이하면 큰 고개가 있는 마을이다. 동으로 임재, 서로는 희묵재, 남으로 직시재, 북으로 귀골재가 있어, 큰 고개, 즉 한재라고도 불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다.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쪽 명지리 방향으로 튼다. 아늑한 마을의 황금들녘에 고개 숙인 벼들이 넘실거린다. 논두렁에는 커다란 호박이 덩굴째 뒹굴고 있다. 마을 입구에 살짝 들르고 다시 임도로 들어간다. 완만한 경사로 걷기에 딱 좋다. 길 옆 무성한 나무는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이제 초록의 잔치를 끝내고 곧 단풍 소식을 전할 분위기다.
(왼쪽)위도 38선을 가리키는 커다란 비석이 38선휴게소에 세워져 있다. / 38선숨길 임도를 따라 가다 이정표로 길을 확인하고 있다. / 명지리마을 입구엔 송이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디모테오 신부도 피란민 구하다 순교
초록의 향연을 즐긴 발걸음은 어느덧 명지리로 들어선다. 명지리는 옛날 마을 한가운데 작은 못이 있었는데 수심이 깊은데도 물이 맑아 노는 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라도 해서 ‘明池里’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명지리안골은 분단 당시 광복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 38선 이북동포들의 길의 최종점이자 남한의 시작점이다. 명지리 경계에 국군지서가 있다.
명지리안골은 디모테오순례길의 시종점이기도 하다. 디모테오순례길은 분단 이후 북녘에 남은 신자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이광재(디모테오) 신부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당시 그가 다녔던 길을 재현해서 만들었다. 이광재 신부는 38선이 인접한 양양성당의 주임 신부로 북한에서 피란 오는 성직자와 수도자, 신학생, 평신도들을 남한으로의 이주를 도와주다 좌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 얼마나 슬픈 과거인가. 이 길은 눈 덮인 경치가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명지마을은 일명 앵두마을로 불린다. 마을에서 앵두를 특화작물로 가꿔서 축제도 열고 판매도 한다. 양양은 송이로 유명하지만 그중에서 특히 명지리송이는 특상품으로 알아 준다. 마을 어귀엔 솟대와 함께 커다란 송이 조형물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꼭 남근같이 생겨 멀리서 보면 남근마을을 알리는 상징물로 착각하기 쉽겠다.
혹시 송이의 은은한 냄새가 나는지 깊은 호흡으로 들이켜 본다. 아직 냄새는 나지 않는다. 하긴 솔숲으로 들어가야 송이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임도로 올라간다. 한천산 자락이다. 조금은 경사가 있다. 이곳이 바로 남한 송이의 대표산지다. 길 이름도 명지리에서 ‘송이로’로 바뀌었다.
한천산 송이산지를 지난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풀벌레도 저마다의 소리로 존재를 알린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게 해준다. 가을 정취에 빠질 만하면 위도 38도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이곳이 70년 전의 그 아픈 비극의 분단현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듯 되새겨 준다. 38선숨길은 위도 38선을 올랐다 내렸다 한다.
파도가 크게 치는 해변 옆 38선휴게소에서 38선숨길을 출발하면서 문화관광해설사 김기수씨가 설명하고 있다.
부소치고개까지 이광재 신부가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남북으로 넘나들었던 디모테오순례길과 같이 간다. 한천산 정상 부근 38선전망대에 다다르자, 설악산 대청봉과 점봉산, 구룡령 고개가 연이어 보인다. 대청봉에만 구름이 걸쳐 있고 쾌청한 하늘이다. 백두대간 능선이 뚜렷한 스카이라인으로 보여 준다. 한천산은 백두대간 지선 정도 된다.
임도 옆 길 한편에 흙을 뒤집어 쓴 독버섯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순식간에 자라서 그런지 아직 흙을 머리 위에 그대로 이고 있다. 희한한 장면이다. 송이 대표산지와 더불어 토양 자체가 버섯들이 서식하기에 최적의 조건인 듯하다는 생각도 든다.
벌써 10km는 훨씬 더 걸은 것 같다. 다리에 힘이 빠질 시간도 됐다. 시원한 나무그늘 밑에 누워 한숨 자고 싶다. 하지만 걸어야 한다.
한천산을 걸어서 돌아가니 마을이 나온다. 1코스 마지막 마을, 도리(陶里)다. 동네에 점토가 많아 토기를 생산하던 장소라 해서 도리라 불렀다. 우리말로 질골이라고도 했다.
하천이 마을을 가로지른다. 지나는 곳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흐르는 물도 많다. 하천은 남대천 지류다. 남대천은 3개의 하천이 합류해서 흐른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물은 어성천으로 흐르고, 구룡령에서 발원한 물은 후천으로, 점봉산에서 발원한 물은 오색천으로 흘러 합수하는 하천이 바로 남대천이다.
도리를 가로지르는 하천은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대천 상류 어성천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고 산에서 발원한 물이 넘쳐흐르며 아름다운 경치를 품고 있다. 어성전(漁城田)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했다. 하천과 밭에서 나오는 각종 먹거리가 풍부해서 배불리 살기 좋은 이상향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외국인들도 송이캐기 체험행사에 나서 솔숲에서 송이를 찾고 있다.
교실은 북, 화장실은 남으로 갈렸던 비극의 장소
어성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도로 옆 사잇길로 들어서자 한국의학문화원이 나온다. 은퇴한 의사가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건립한 건물이란다. 그 옆이 남천학생체험학습장이다. 분단 당시 학교 교실은 북으로, 화장실은 남으로 갈렸던 그 비극의 장소다. 지금은 아는 듯 모르는 듯 학생체험학습장으로 변신해 있다.
동행 안내한 문화관광해설사 김기수씨는 “지금 걸어온 길은 38선숨길 중에 평화의 길이고, 나머지 통일의 길 19km는 아직 완성되지 않아 임도지만 통제하고 있다”며 “역시 통일의 길은 접근하기도 이뤄지기도 힘든 것 같다”고 했다. 평화의 길 19km와 통일의 길 19km를 합해 38선숨길은 총 38km이다. 통일의 길은 아직 미개통 상태.
38선숨길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길이었지만, 길 자체의 역사적 의미와 10월 국군의 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걷는 길로서 더욱 뜻 깊게 느껴진다.
양양의 남대천은 서울의 한강 같은 기능을 한다. 봄에는 황어, 여름에는 은어, 가을에는 연어떼가 올라와 마을 전체를 풍성하게 해준다. 양양에서는 매년 4월 초 황어축제를 시작으로 10월 초 송이축제, 10월 말 연어축제를 개최한다.
올해 19회째인 송이축제는 10월 1~4일 남대천둔치와 양양시장, 송이밸리자연휴양림 등지에서 열린다. 10월 1일 풍년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시작으로 나흘간의 화려한 축제가 막을 올린다(양양군 홈페이지 http://festival.yangyang.go.kr/ 참조). 매년 30만 명 내외 참가하는 송이축제는 단연 송이에 관한 한 전국 최고로 꼽히는 행사다.
양양군청 축제 담당 노영식씨는 “양양 송이의 품질은 전국 송이 관련자들이 최고로 평가할 뿐만 아니라 일본 송이 애호가들도 호평한다”며 “백두대간 솔숲에서 자란 송이의 맛과 향은 다른 지역 송이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양양 송이는 정부에서도 그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2006년 광양 고로쇠수액과 더불어 지리적표시 제1호로 등록된 농산물이다.
지역인들은 양양 송이의 특징을 지형에서 찾는다. 백두대간 설악산 지맥인 화강암의 마사토 지역에서 자라는 소나무와 공생하는 양양 송이와 봉화 등지의 석회암지대 육산에서 소나무와 공생하는 송이와는 수분 함량과 영양성분에 있어 차이가 난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양양 송이는 수분 함량이 낮고 영양이 풍부하며 향이 진해 다른 지역 송이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왼쪽)송이캐기 체험에 나선 가족이 찾은 송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 송이축제 때 체험행사에 선보일 송이들이 솔숲에서 자라고 있다. 사진 양양군청 제공
양양 송이는 20~60년 된 백두대간의 소나무 뿌리에서만 영양분을 섭취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또 그 해의 기온과 습도여부에 따라 생산량이 달라질 만큼 환경에 민감하다. 따라서 아직까지 인공재배가 불가능한 100% 자연산이다. 다른 종류의 버섯은 인공재배를 하고 있지만 송이는 여전히 못 하고 있다. 옛날엔 1표고, 2능이, 3송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1송이, 2표고, 3능이로 바뀌었을 정도다.
자연산 송이는 갓이 피지 않아 갓둘레가 자루보다 약간 굵고 은백이 선명한 것일수록 좋은 제품이다. 또 갓이 두껍고 단단하여 향이 진하고 자루의 길이가 길고 밑부분이 굵을수록 좋다. 특히 갓이 퍼지지 않고 길이는 8cm 이상 자라며 아래 위 굵기가 일정하면 최고품질로 평가한다.
품질이 우수한 양양 송이는 때로는 다른 지역제품이 양양산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양양 송이 전문가들은 다른 지역 제품들과 구분하는 노하우를 알려 준다. 먼저 중국산 송이는 송이의 갓 부분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고 향이 거의 없다. 반면 양양 송이는 갓과 자루에 흙이 묻어 있으며, 조직을 갈라보면 뽀얀 유백색을 띠고 있다. 또한 양양 송이는 일본산에 비해서도 살이 두텁고 향기가 진하다. 수분 함량이 87.5%로 일본산의 92.7%에 비해 훨씬 낮아 살이 단단하고 영양이 풍부하며 휘발성 향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일본의 한 연구팀이 밝혔다. 송이버섯을 좋아하는 나라로는 한국, 일본, 중국, 홍콩 등이 꼽힌다. 그중 일본이 송이에 대한 연구를 가장 활발히 하고 있다.
일본인들 전세기로 양양 송이 사러 오기도
송이의 주요 성분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약 90%가 수분, 지방이 6.7%, 단백질이 2%, 섬유가 0.8%로 구성돼 있다. 수분 중 탄수화물이 85% 정도로, 대부분 식물섬유다. 비타민B¹, B²는 물론 비타민D가 많아 영양이 뛰어나다. 또 지방함량이 적은 데다 콜레스테롤을 감소시켜 주는 물질이 다량 들어 있어 성인병 예방이 좋다. 뿐만 아니라 위암·직장암의 발생을 억제하는 크리스틴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어 항암작용을 한다.
<동의보감>에서는 송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독하며, 맛이 달고 향이 짙다. 소나무에서만 기생하며, 산 중 오래된 소나무 아래에서 소나무의 기운을 품고 자란다. 나무에서 나는 버섯 중 으뜸이다. 위의 기능을 돕고 식욕을 증진시키고, 설사를 멎게 하고 기운을 더해 준다.’
양양의 유일한 국보인 진전사지 삼층석탑.
송이버섯은 당뇨병뿐만 아니라 소화기 장애에도 좋고 병에 대한 저항력도 길러 주어 누구에게나 좋은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송이버섯을 섞어 밥을 지으면 아무리 먹어도 소화가 잘 된다. 그 이유는 송이에 함유돼 있는 강력한 소화효소 때문이다. 또 고혈압에 효과가 있으며, 꾸준히 먹으면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송이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금 송이의 항암효과에 대해 한창 연구하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종양저지율이 91.8%, 종양퇴치율이 55.6%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었다. 아직 확실한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송이의 높은 약용가치가 밝혀질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양양군청 노영식씨는 “양양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산과 계곡, 바다가 어우러져 자연조건이 가장 좋다”며 “여기서 생산되는 송이를 포함한 특산물은 전국 어디 내놔도 전혀 손색없다”고 자랑했다.
실제로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위도는 35~40도 사이이고, 고도는 700m 내외라고 한다. 위도 35~40도 사이에 전 세계 인구가 가장 많이 밀집돼 있고, 고도 700m 내외는 고기압과 저기압이 만나는 장소로 기압이 가장 안정적이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양양 송이는 최적의 자연조건에 서식하는 최고의 품질로 평가 받을 만하다.
양양 유일의 국보 ‘진전사지 3층석탑’
선종 종조인 도의선사가 8세기쯤 창건한 진전사지에 있어
강원도에 국보가 10개 있다. 그중 한 개가 양양에 있다. 양양의 유일한 국보인 셈이다. 그게 바로 ‘진전사지 삼층석탑’이다.
진전사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석탑 건축양식으로 볼 때 최소한 8세기경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한다. 16세기쯤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진전사 안내판에 따르면 ‘이 절은 우리나라 선종을 크게 일으킨 도의선사가 신라 선덕왕 13년(821)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하던 곳으로,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와 같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배출됐고,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도 이곳에서 체발득도 했다’고 돼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진전’이란 기와가 수습돼 2005년 6월 사찰을 다시 짓고 진전사로 칭했다.
국보 제122호인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따른 석탑으로 2층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고, 3층 옥개석 윗면에 직경 10cm, 깊이 10cm의 차주공이 남아 있다. 조각 기법이 매우 섬세하고 우수해 신라 하대의 뛰어난 작품으로 추정한다. 대략 8세기 말~9세기 초.
삼층석탑 600m쯤 아래에는 진전사지 부도탑이 있다. 이 부도는 8각형의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기단부가 석탑에서와 같이 방형 이중기단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선종의 종조인 도의선사의 부도탑으로 추정한다.
38선숨길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 교통 •
서울에서 자가용으로 동홍천까지 개통된 서울양양고속도로로 가서 인제→44번국도(한계령)을 지나 양양으로 진입하면 된다. 영동고속도로로는 현남IC나 하조대IC로 빠져나와 양양으로 접근하면 된다. 고속버스는 동서울(문의 1688-5979)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문의 1688-4700)에서 양양까지 간다. 소요시간 3시간 30분 내외. 문의 양양콜택시 033-671-2300 또는 양양개인택시조합 033-671-3113.
•숙식(지역번호 033)•
양양의 별미는 단연 송이 관련 음식이다. 송이칼국수, 송이전골 등 다양하다. 38선숨길 송이로(구 명지리)에 향림면옥(672-1362 또는 010-3760-1362)의 송이칼국수 등이 별미다. 어부들이 즐겨먹던 섭국과 얼큰한 뚜거리탕도 지역인들은 별미로 꼽는다.
숙박은 대명솔비치호텔&리조트(1588-4888), 오색그린야드호텔(670-1000) 등이 있고, 송이축제 때 체험행사가 열리는 송이밸리자연휴양림(670-2644) 등도 많이 찾는다. 문의 양양군청 관광과 670-2723~4.
글 박정원 부장대우 사진 정정현 국장
월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