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과 가기치기/정진규
아내는 이 늘그막에 우리 집 그릇들을 새것으로 모두 싸악 바꾸었다 끼니마
다 밥상에 오르는 간장 종지까지 새것으로 싸악 바꾸었다 이 봄에 신접살림을
다시 시작했다 이 늘그막에 우리들 그간이 금 간 데 없이 싸악 지워졌을까 입맛
도 싸악 바뀌었을까 나는 겨울 가고 봄이 깊어지기 전 우리 집 마당 나무들 가
지치기를 제대로 했다 나무 의원이 다녀가셨다 그가 놓고 간 가윗날 살펴보니
예사 것이 아니었다! 심금당(尋劍堂)이여, 가지와 허공의 방향을 애초대로 짚고
지나갔다 바람 불고 지나간 자리마저 더듬었다 웃자란 자리만 잘라내었다 자른
자리 없이 잘라내었다 분별이여, 그대 아득히 떠나간 자리, 심검당(尋劍堂)이여
원석(原石)/정진규
사람들은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 같은 것들을 자신의 쓰레기라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줍는 거지 사랑하는 거지 몇
해 전 집을 옮길 때만 해도 그들의 짐짝이 제일 많았다 그대로 아주 조심스레 소중
스레 데리고 와선 제자리에 앉혔다 와서 보시면 안다 해묵어 세월 흐르면 반짝이는
별이 되는 보석이 되는 원석(原石)들이 바로 그들임을 어이하여 모르실까 나는 그
것을 믿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나는 슬픔 부자(富者) 외로움 부자(富者) 아픔의 어
두움의 부자(富者) 살림이 넉넉하다
그림자놀이1/정진규
왼쪽 눈이 고장 나기 시작하더니 오른쪽 눈이 턱없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관음(觀音) 안경을 갈아 끼웠다 새로운 보행을 시
작한 징조다 내 두 손은 민첩해졌다 그림자놀이를 시작했다 그림자놀이 천수(千手)를 두 개의 벽에 비추기 시작했다 두 개
의 벽을 설치해 놓았다 동영상이다 장차 천 개의 손들이 기대된다 이승의 벽과 저승의 벽을 내왕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이
이승과 저승을 열었다 비로소 회사후소(繪事後素)다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
참음, 교활한/정진규
왜 참았을까 참고 참다가 사랑을 참아둔 여자에게 심장이 아픈 여자에게 병문안 전화를 걸고 나니 그렇게 시원했다 자유
의 돌기가 온몸에 오소소 솟았다 큰 빚을 갚은 기분이어서 죄를 탕감한 느낌이어서 오늘 하루가 개운하게 저무는 저녁노을
을 아주 좋은 색깔로 내가 칠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참았을까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실천이었을까 나는 결
코 윤리적이지 못하다 그런 참음이 아니었다 참음이란 유보(留保)다 이런 미결이 이런 미수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을까 직전
(直前)의 위기까지 가야만 왜 직성(直星)이 풀릴까 나를 부풀게 할까 단언하자면 내 참음의 질은 범죄의 참음, 교활한 도망
침, 나는 그 맛을 즐겨왔다 꽃 피는 것들의 곁에서 둥근 우주로 부풀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죄를 짓고 섰다
환희라는 꽃/정진규
풀릴 때가 제일 위험하다 해동 때를 대비하라 제일 위험할 때가 환희의 시절이니라 큰 돌이 무작정 구른다 도처에 푸른 멍
투성이다 너를 만날 때가 네가 다녀갈 때가 제일 위험하다 위험의 향기를 아느냐 벌써 초록 먼동이 번져오기 시작한다 풀내
를 맡는 방식을 나는 안다 나는 물들 줄 안다 죽음의 암내가 풍긴다 상여 소리 넘어간다 봄은 날렵하게 죽음을 입력한다 화
훼사전(花卉辭典)에도 없는 풀꽃, 환희라는 이름의 꽃, 너의 이름을 환희라 지었다 나는 너에게 입력되었다
[ 정진규 시인 약력 ]
*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2017년 졸
*1964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팔 서정」가작으로 등단.
*시집『마른 수수깡의 평화』이후『有限의 빗장』『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매달려 있음의 세상』『비어있음의 충만을 위하여』
『연필로 쓰기』『뼈에 대하여』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몸詩』『알詩』『도둑이 다녀가셨다』『本色』
『껍질』『공기는 내 사랑』『律呂集, 사물들의 큰언니』『무작정』『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