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재사랑산악회-甲午年 始山祭] ♣— 제139차(3/16) 원주 미륵산
* [산행 코스] 귀래면 주포교→ 황룡사 입구→ 미륵농원→ 경천묘(敬天廟)→ 삼층석탑(三層石塔)→ 미륵불(彌勒佛)-미륵봉→ 능선길→ 헬기장<점심>→ 암릉(바위)지대→ 미륵산 정상→ 삼거리 무덤→ 서낭당고개 ♣ <새재사랑산악회> 갑오년 시산제(始山祭)
* [프롤로그] — 봄이 오는 길목에서… ‘새재사랑산악회’ 갑오년 시산제(始山祭)
☆… 이젠 봄이다. 완연히 햇볕의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나 느닷없는 꽃샘추위가 봄을 시샘하기도 하지만 ‘하늘’은 어김없이 생명의 때를 어기지 않는다. 그래서 주역에서 그 생명의 순환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사계절의 순환으로 보면 봄은 원(元)에 해당한다. 인생에서의 청춘(靑春)이다. 생명이 싹을 틔어 천지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예부터 입춘(2월 4일)과 경칩(3월 5일)을 지나면, 대지를 서서히 녹이는 따뜻한 기운이 물씬 피어난다. … 이미 남녘에서 화신(花信)이 올라오고 있다. 따스한 봄바람은 나무에 새순을 맺게 하고 꽃잎을 벌리게 한다. 남녘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을 기다리며 앙상한 가지마다 꽃망울을 터트린다. 남녘의 땅, 하동-광양의 매화(梅花)는 아직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 섬진강 황어가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이어 구례 지리산 산동마을의 산수유(山茱萸)가 꽃망울을 터트렸다는 소식이다. 이렇게 매화(梅花)의 은은함과 산수유의 눈부심으로 생명의 봄은 시작되었다.
☆… 오늘 제139차 산행은 원주의 미륵산(彌勒山)이다. 특히 오늘 그곳에서 갑오년 시산제(始山祭)를 올린다. 연중 가장 중요한 행사를 거행하는 날이다. 미륵산은 원주시 남서쪽 귀래면과 충주시 소태면과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해발 689m의 미륵산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산으로, 정상에 동쪽을 향해 높이 48척의 초대형 미륵불상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원래 용화산이었던 산의 이름도 그렇게 바뀌었다. 미륵산은 신라의 56대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관한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망국의 한을 품은 왕은 산자수명한 이곳의 심산을 찾아 마애불을 조성하며 마음을 달랬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 미륵불상에 자신의 모습을 담아서 표현했다고 한다. 미륵불은 내세불(來世佛)이다. 현세의 절망과 아픔을 삭이며 내세의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인간의 염원을 담고 있다.
☆… 미륵산은 바위와 소나무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미륵산은 전국적으로 세 개가 있다. 통영 미륵산(458m), 원주 미륵산(689m), 익산 미륵산(430m), 그중에 원주 미륵산이 가장 높다. 이곳 미륵봉 정상 쪽으로 올라가면 절묘한 바위와 암벽들이 멋진 경관을 이루고, 우뚝한 바위, 미륵봉 위에 올라서면 귀래면 일대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암봉과 소나무로 이루어져 있는 능선 길이 등산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 [원주 미륵산 가는 길] — 따뜻한 마음이 하나가 되어
☆… 오전 7시 53분, 서울의 군자역을 출발했다. 오늘은 ‘초록색’으로 단장한 분당항공관광버스에 36명의 우리 산우들이 좌석을 채웠다. 근래 우리 산악회에 인연을 맺은 전진국 사장의 3인방, 안상규 님과 강재훈 님도 나오고, 오랜만에 낙천가인 이상철 님이 참석하였으며, 박성길, 최화신 님도 지난달에 이어 나왔다. 그리고 연전에 백두대간을 완주하고 최근 낙동정맥 종주를 하고 있는 ‘너와 나’ 님이 출현하여 여러 산우의 인사를 받았다. 한 동안 뜸했던 ‘뻐꾸기’가 봄날을 맞아 날아오고, 웅희 씨와 이순 씨도 오랜만에 나왔다. 정용선 님과 지혜 양이 발랄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김 총무의 아들 영택 군도 동행했다. 2010년 주흘산 산행 후 처음이다. 연전에 결혼하여 아버지께 손주를 안겨 준 효자이다. 카메라맨 건담 씨도 햇순 같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새로운 생기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다.
☆… 출발 전, 박운식 전 회장과 도우 부회장이 나와, 우리 산우들에게 인사를 했다. 박 고문은 이번 6.4 지방선거에서 광진구청장에 출사표를 던지고 연일 몸으로 뛰고 있는 중이다. … 오늘은 우리 산악회 시산제를 모시는 날이다. 제수(祭需)를 준비하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은 김의락 총무님과 통통공주 박은배 님이 너무 고맙고, 특히 오늘 산행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산죽 이정인 고문, 도우 김영희 부회장이 각각 금일봉을 전해 왔으며, 산제 후 따뜻한 음복을 나누기 위해 홍어무침과 굴·생미역을 준비해 온 꽁지 문승배 사장 부부의 정성은 늘 한결같다. 산악회에서는 야외용 접는 의자를 기념품으로 장만하여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초록버스 박 기사님도 고급 타올을 기념품으로 기증해 주셔서 참으로 고맙다.
☆… 오늘은 옅은 구름이 드리운 약간 흐린 날씨지만, 부드러운 바람결이 한결 계절을 느끼게 했다. 우리를 태운 산뜻한 ‘초록버스’는 중부-영동고속도로를 달려 나갔다. 문막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주행을 계속하여 중앙고속도로 남원주 I.C에서 국도로 내려섰다. 원주에서 충주로 통하는 19번 도로를 타고 운계리를 지나서, 귀래면 소재지에 내려서 산행들머리인 주포교에 도착했다. 일명 미륵마을이다. 시산제는 산행의 하산 지점인 서낭당고개에서 모시기로 하였으므로 그 준비를 위해서 지평 민창우 대장과 통통공주는 다시 차를 타고 가서, ‘시산제 자리’를 본 후, 반대편에서 산을 오르기로 했다. 오늘의 선두는 베토벤 유형상 부대장이 서기로 하고, 김동순 부대장은 중간 허리를 돌보고, 후미는 김의락 총무과 장병국 회장이 수습하여 오기로 했다.
* [주포리-‘미륵마을길’ 2km] — 3월의 산천은 아직도 건조한 겨울풍경…
☆… 오전 10시 정각, 산행이 시작되었다. 도로명 주소로 ‘미륵마을길’을 따라 2km의 포장도로를 따라서 걸었다. 길은 완만하게 올라가는 길이었다. 길의 좌우 주위에는 1960-70년대 스레트지붕이 그대로 있는 몇 집의 마을이 있기도 하고, 산록의 장대한 송림이 아름다운 곳에는 그림 같은 팬션이 들어서 있고, 주말 별장 같은 집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다.
☆… 그러나 3월의 산천(山川)은 건조하고 삭막하다. 소나무나 잣나무 등 상록수 군락이 아니면, 바싹 바른 낙엽과 앙상한 나목들이 아직 겨울풍경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곧 4월이 되어 연두빛 신록의 옷을 입기까지는 이렇게 황량한 모습일 것이다. 연중 산불이 가장 많이 나는 것도 바로 이맘때이다. 그 팍팍하게 말라 있는 낙엽과 초목들이 요원의 불길이 되기 때문이다. 근래 산불의 원인으로 흡연, 취사 등 등산객의 부주의가 80%가 넘는다는 보도를 읽은 적이 있다. 아주 위험한 시기, 산불 방지에 유의하기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마른 풀더미 속에 파릇파릇 쑥의 새싹이 돋아나오고 있었다.
* [길가의 쉼터] — 정감이 넘치는 낡은 게시판의 글을 읽으며
☆… 길을 가며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멀리 미륵산 연봉이 감싸 안고 있는 산곡의 풍경이 아주 평화로왔다. 날씨가 푸근하여 온몸에 금방 열이 나기 시작했다. 길가의 중간 쉼터가 있어 거기에서 두꺼운 겉옷을 벗고 복장을 정리하며 쉬었다. 어디서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거기에 낡은 입간판이 서 있었다. 글의 내용이 따뜻하여 자세히 읽어보았다.
“짐을 푸시고 잠시 쉬어 가세요. 우리 마을과 미륵산을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미륵산은 좋은 산이지요. 그리 어렵지 않은 등산 코스와 아기자기한 산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미륵의 품에 있는 우리 마을은 50여 가구가 예부터 오순도순 화전 일구며 살아온 산골 작은 마을입니다. 그렇기에 이웃애가 좋습니다. 또 긴 세월 동안 큰 어려움 없이 평화스럽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미륵의 사랑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우리 마을은 친환경의 방법으로 농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오고가는 중에 소용이 있으신 농산물을 만나시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청정계곡과 좋은 환경을 지키는 일이 등산객들의 협조가 없이는 어렵습니다. 등산과 행락의 차이를 혼돈하는 분을 간혹 목격합니다. 좋은 등산 되시고 건강하세요. 다음에는 더 성숙한 말씀으로 여러분을 맞이하겠습니다. / 황산마을”
오래되어 서 퇴색한 나무게시판이지만 그 흘림체의 글씨가 아주 세련되고 이곳 미륵산을 찾아오는 외지의 등산객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특히 ‘청정계곡과 좋은 환경을 지키는 일’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잘못된 ‘행락’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오늘 시산제에 임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가다듬게 했다.
* [미륵산 농원] — 마당을 가득 채운 독항아리들의 행진
☆… 길을 따라 올라오다가 특히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수많은 독들이 열병식을 하듯 큰 마당을 가득 메운 풍경이었다. ‘미륵산농원’이라는 목재 간판을 내 건 그 집의 너른 마당에 고추장, 된장을 담가놓은 독항아리들이 오(伍)와 열(列)을 맞추어 가득하게 가득 채워져 있었다.
* [깔끔하게 조경한 경천묘(敬天廟)] — 아픈 역사를 승화하는 민중의 마음
☆… 오전 10시 36분, 경천묘 입구에 도착했다. 산불감시초소에 우리 산행인원을 알리고 입산 허가를 받았다. 두 그루의 장대한 소나무가 지키고 있는 길을 돌아서니 산뜻하게 단장한 경천묘가 나왔다. 경천묘(敬天廟)는 신라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망국의 회한(悔恨)을 품은 왕이 이곳에 와서 미륵불을 조성하며 마음을 달랬다는 인연으로 그를 기리는 사당을 지은 것이다. 뒤쪽 산록의 울창한 송림(松林)이 세월을 무색하게 했다.
▶ 경순왕(敬順王)은 신라 56대 왕으로,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6세손이며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는 하대(37대 선덕여왕 이후)로 접어들면서 중앙귀족간의 왕위 쟁탈전과 지방 세력과 하층민의 잦은 반란으로 통치력이 점점 약화 되어 갔다. 이런 가운데 신라에 위협하는 세력으로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가 건국되어 후삼국이 성립되었고, 918년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면서 고려와 후백제 간에 주도권 다툼이 전개되었다. 경순왕은 927년 왕위에 올랐으나 신라는 이미 사직을 보존할 힘이 미약한 상황이었으므로, 드디어 경순왕 9년(935년)에 무고한 백성들의 생명과 천년 사직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고려에 손국(遜國, 나라를 양보함)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나라를 망실한 경순왕은 명산(名山)을 두루 다니다가 이곳 용화산(龍華山)의 빼어남을 보고 그 정상에 올라 미륵불(彌勒佛)을 조성하고 그 학수사(學樹寺)와 고자암(高自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경순왕이 돌아가자 그 신하와 불자들이 고자암에 영정(影幀)을 모시고 제사를 받든 것이 영정각의 시발이었다. 고려 중기에 전각은 무너지고 인적도 끊어졌다가 조선 초에 목은(牧隱) 이색(李穡), 양촌(陽村) 권근(權近) 등이 전각을 중수하였다. 그후 조선 숙종 때 원주목사 김필진이 새로 화상(畵像)을 그리고 다시 전각을 지어 모셨으나 화재를 당했고, 영조 때 재건되면서 임금이 영정각의 명칭을 ‘敬天廟’(경천묘)로 하사하였다. 그 후 경천묘는 소실되어 버렸으나, 왕이 이곳에 머물렀던 유래에 따라 ‘귀래면(貴來面)’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원주시는 2006년 9월 이곳 미륵산 아래에 경천묘를 복원하였다.
☆… 경천묘(敬天廟)는 산록의 남향받이 자리 잡고 있다. 따스한 봄햇살이 쏟아지는 경내는 아주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경건하고 고즈넉하고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외정(外庭)의 너른 마당에 서면 경지를 구분 짓는 가지런한 담장의 한 가운데 세 칸의 경천문(敬天門)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안마당에 들어서면 오른 쪽에 재실(齋室)이 있고, 정면의 계단 위에는 본전으로 올라가는 신문(神門)이 있다. 신문은 정전에 들어가는 세 칸의 소슬대문인데, 일반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서 나올 때는 안쪽에서 오른쪽 문으로 나와야 한다. 오늘 닫혀 있는 가운데 문은 왕(王)이나 제주(祭主)나 귀공만이 출입하는 문이다. 신문 안의 내정(內庭)이 있고 정면의 계단 위에 경천각(敬天閣)이 자리 잡고 있다. 경순왕의 영정(影幀)을 모신 본전이다. 사방으로 담장이 깔끔하게 둘러쳐져 있어 경건함을 더했다.
☆… 경내를 같이 돌아본 산우 ‘바람처럼’이 말했다. 자신의 본명이 김정출인데 김알지 왕을 시조(始祖)로 하는 경주 김 씨 후예라고 밝히면서, 경천묘 조상의 사당 앞에서 자못 경건하게 예를 갖추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