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갤러리는 2002년 첫 전시로〈격조와 해학:근대의 한국미술전〉을 개최한다. 호암미술관소장의 근대미술 명품을 선보인〈한국근대미술명품전〉(호암갤러리,1992)
이후 십 년만에 열리는 대규모 근대미술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말기인 19세기 중엽에서부터 현대미술이 태동하는 1960년대 경까지 약 100년 간의 한국 근대미술을 '정신'과 '정서'에 초점을 두고 새롭게 인식하고자 한다.
특히 이번 전시는 근대미술의 다양한 경향 중에서도 소재와 기법, 색채 등에서 중국이나 일본과는 차별화된 정신성을 바탕으로 작가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추사 김정희, 오원 장승업 등 조선 말기 대가들의 작품과 김환기, 박수근, 장욱진, 이중섭, 박생광, 김기창 등 일제 강점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특징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근대미술을 단절이 아닌 연속의 개념으로 인식하고 한국미술에 면면히 흐르는 한국 미술의 정신성과 미학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또한 전시 방향에 있어서도 시대별 혹은 장르별 전시가 아니라 "격조", "창의",
"해학"의 세 가지 주제를 선정, 대표되는 작품들을 전시함으로써 한국 근대미술을 보는 시각을 넓히고자 하였다.
■ 한국 근대미술의 시작
이번 전시의 출발점은 한국 근대미술의 시대 구분 설정이라 할 수 있다. 그간 미술사학계에서는 우리 근대미술의 기점을 서양화풍의 유입으로 인한 제도와 재료의 변화에 초점을 두어 1910년 전후 - 조선시대 후기설 (이경성, 윤범모), 개화기설(이구열, 이경성), 1910년설(이경성), 1911년설(이구열), 근대부재설(오광수, 서성록, 김윤수), 1920년대설(김현숙) 등 - 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자생적이고 문화사적인 관점에서의 주목하고 있다. 이 시기는 봉건사회가근대정신의 발현에 초점을 두어 실학의 대두와 그에 따른 문예사적 변화가 일어난 19세기 중엽에 본격적으로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전문성과 교양을 겸비한 의관이나 역관 같은 중인들이 활발한 문예활동을 펼치는 등 근대로 향하는 변혁기였으며,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 '정신'과 '정서'에 기초한 근대의 한국미술
이번 전시는 이러한 시대적, 철학적 배경을 근거로 하여, 예술에서의 정신이 왕조사나 침략에 의한 강압으로 매몰될 수 없는 특이한 현상임을 인식하고 한국미술의 특징을‘정신’과‘정서’에 기초한‘격조格調’,‘창의創意’그리고‘해학諧謔’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우리 미술의 흐름을 폭넓게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 지는 각 주제 간의 시각적 관계를 통해 우리 민족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정서를 극대화시키고 그 조형적 특징을 찾아내어 고유한 한국적 미의식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현대미술의 근간이 되었음을 살피고자 하였다.
격조
대상의 외형보다는 상징성과 사의성寫意性에 더 큰 의미를 둔 문인화 정신은 19세기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에 이르러 실학의 개방성과 객관적 정신에 힘입어 조선 고유의 전통문화와 청조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화풍을 꽃피웠다.
추사의 전통적 문인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를 거쳐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1820-1898)과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1860-1914)에게 이어져 품격과 개성을 가지고 전개되었으며, 절제있는 정신성을 기본으로 한 문인화가 지닌 격조의 정신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근대 후기까지 이어져 김환기金煥基(1913-1974), 서세옥徐世鈺(1929-), 유영국劉永國(1916-), 김종영金鐘暎(1915-1982) 등의 작품에서 현대적으로 변용되고 있다.
창의
조선 말기 학식과 교양을 겸비하고 활발한 문예활동을 펼쳤던 역관, 의관 등의 중인들에 의해 추구되었던 문인적 성향은 전통적인 문인화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표현에 있어서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정취로 당시의 사회상을 신선하게 담아 냈다.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1800이후-1862이후), 석창石窓 홍세섭洪世燮(1832-1884),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의 작품은 전통에 근간을 두고 있으나 개성있는 구도와 표현으로 자연과 인물을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독자적인 틀을 형성했다. 이러한 경향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과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1899-1976)의 실경산수화와 서민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박수근朴壽根(1914-1965)의 그림으로 이어져 당시의 화단에서는 내용과 형식에 있어 이색적인 감각을 선보였다.
해학
삶 속에서 우러난 담겨진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미는 고구려 고분 벽화나 고려 불화의 채색화의 전통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궁중 화원들을 중심으로 장식적인 요소가 강한 민화와 자유롭고 창의적인 서민풍의 민화로 발전하였다.
치밀하면서도 시점을 무시한 <책거리>나 <모란도> 같은 민화는 강렬하면서 현대적인 박생광朴生光(1904-1985)의 채색화와 벽화의 기법을 입체파적으로 재구성한 박래현朴崍賢(1920-1976)으로 이어졌으며, 대담하게 생략하고 단순화된 <금강산도> 같은 서민풍의 민화는 장욱진張旭鎭(1917-1990)의 천진한 그림이나 김기창金基昶 (1914-2001)의‘바보산수’그리고 이중섭李仲燮(1916-1956)의 <은지화>로 연결되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정서의 공감대를 느끼게 한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격조와 해학’이라는 고유한 한국적 미의식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현대미술의 근간으로 작용되고 있음을 살피고, 아울러 수직적인 시각에서 논의되어온 한국 근대미술을 열린 시각과 종래와는 다른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기타 전시프로그램
1. 전시설명회(Docent Program) : 한국어 매일오전 11시, 오후 2시, 4시(월요일 휴관)
일 어 매일 토요일 오후 1시
영 어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2. 어린이 감상용 교재(Children's Guidebook) 전시를 관람하는 초등학교 및 중학교 학생들을 위해 전시장 입구에서 무료배부
3. 갤러리 감상용 비디오 상영(Video Presentation)
4. 강연회(Lecture) - 주 제: 간추린 한국 근대미술사 - 일 시: 4월 2일 (화) 오전 10시 - 12시 - 장 소: 호암아트홀 - 강 사: 유홍준(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5. 갤러리 강좌(Gallery Talk)
1차) 주 제: 한국 미술 속에 나타나는 격조의 정신(가제) 일 시: 3월 14일 (목) 4시 30분 장 소: 중앙일보사 1층 세미나실 강 사: 김학량(미술가·전시기획)
2차) 주 제: 한국미술 속에 나타나는 해학의 정신(가제) 일 시: 3월 21일 (목) 4시 30분 장 소: 중앙일보사 1층 세미나실 강 사: 이원복(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6. 초·중·고등학교 미술교사 초청회(Teachers' Workshop)- 일 시: 3월 9일 (토) 오후 2시 30분 - 4시 30분- 장 소: 중앙일보사 1층 세미나실 - 대 상: 초·중·고등학교 미술교사 80명(선착순 접수)
▶ 별첨 1. 출품작 리스트 2. 대표작가별 비교
(이하응 vs 민영익, 이상범 vs 변관식, 이중섭 vs 박수근, 김기창 vs 박래현)
우리나라에서 묵란도는 난초 그리기와 서예의 관련성을 강조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후 본격적으로 성행하였다. 조선말기 난초그림의 쌍벽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각각 물기 많은 춘란(春蘭)과 난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 내는 건란(建蘭)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이들의 대조적인 정치적 성향과 인생 역정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ndif]>
임금의 아버지를 이르는 칭호인 대원군으로 더 잘 알려진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조선 말기 아들인 고종을 섭정하면서 권력의 핵심을 오갔던 대정치가이다. 영조의 5대손으로 1843년 흥선군으로 봉해지고 1846년 대존관이라는 직책을 맡은 후 종친부 유사당상, 도총관 등 한직을 지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불량배들과 어울리면서 왕족에 대한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조대비에게 접근하여 둘째 아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약조받았다. 1863년 철종이 후손없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어린 고종의 섭정을 했다. 쇄국 정책과 친정 문제로 고종과 명성황후에 반목해서 운현궁으로 은퇴하였다가 임오군란과 더불어 복직되었다. 그러나 곧 청나라 군대에 의해 중국으로 연행되어 4년의 억류 생활 끝에 돌아와 고종의 형인 재황을 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이끌지만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1907년 대원왕에 추봉되었다.
그는 혼란한 시대의 정치가로서 숨가쁜 행보를 계속하면서도 많은 난 그림을 남겼다. 특히 김정희의 난을 본받아 함초롬이 피어난 춘란春蘭을 그린 그의 난초그림은 ‘석파난石坡蘭’으로 불리며 당대의 으뜸으로 꼽혔다. 부드럽게 뻗은 가늘고 긴 잎새와 넓은 공간 사이의 긴장감이 특징적이다. 인품이 고고하여 특별히 뛰어나지 않으면 쉽게 손댈 수 없기 때문에 난초를 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했던 김정희도 석파의 난은 매우 깊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자신보다는 석파의 그림을 구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극찬하였다. 또한 그의 난은 '귀인의 난'이라 하여 널리 일본에까지 명성이 높았고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이 많아서 김응원 등의 대필 화가들을 통해 대신 제작되기도 했다.
작품으로 <괴석묵란>, <묵란도>, <석란> 등 난 작품이 많이 남아 있고 서예에도 뛰어났다.
명성황후 민씨의 유일한 친정조카였던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1860~1914)은 파란 많은 생애를 보낸 정치가인 동시에 묵란과 묵죽을 잘 그린 문인화의 명수로도 유명하다. 불과 18세의 약관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으나 김옥균이 주도하는 1884년의 갑신정변 때는 생부인 민태호가 피살되고 그 자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는 등 한말의 급박한 정치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서 있던 인물이었다. 20대 전반에 미국과 구라파 여러 나라를 여행하여 서양 문물을 남보다 먼저 접할 수 있었음에도, 명성황후 민비의 척족이라는 명분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는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한 을미사변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그 뒤 일시 귀국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후에 그 아들이 영구를 가지고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상해에 마련한 거처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서울의 죽동 본가를 하루에도 천 번이나 찾아가 보고 싶은 뜻을 담아 '천심죽재千尋竹齋’라 명명하였다. 운미는 이 천심죽재를 중심으로 당대의 명가 오창석(吳昌碩, 1844~1927) 등 중국의 많은 서화가들과 깊은 교우를 하며 한묵으로 여생을 보냈다.
민영익의 난 그림은 약간 갈필의 기운이 있는 짙은 먹을 써서 잎이 길고 빳빳하게 올라가며 끝을 뭉툭하게 뽑아 내는 것이 특징이며 비수肥瘦의 변화가 거의 없어 강직한 느낌을 주는 한편 서로 얽힘이 적어서 정돈되어 있는 인상을 준다. 특히 뿌리가 드러난 '노근난露根蘭’은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 땅은 그리지 않는다는 중국 남송말 유민화가 정사초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당시 나라를 잃은 민영익의 심경이 그대로 토로되어 있다.
행서에도 능했으며 <묵란도>와 <묵죽도>가 여러 점 남아 있다.
이상범 vs 변관식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이 개척한 진경산수는 김홍도의 실경산수(=진경산수)와 더불어 한국의 산천을 직접 회화화하면서 내용과 기법 면에서 독창적인 한국화의 틀을 만들었다.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은 겸재와 단원의 한국적 산수화를 계승하여 구한말의 고답적인 산수화풍에서 벗어나 한국적 정취가 넘치는 독자적 실경산수로 한국산수화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였는데 청전 이상범이 모범생같은 삶 속에서 안온하고 순응적인 농촌풍경들을 그렸다면 변관식은 금강산도를 비롯, 기개가 넘치는 강렬한 그림들을 그렸고 개인사에서도 저항적인 풍모가 강했다.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은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당시 왕조의 후원으로 세워진 최초의 근대적 성격의 미술기관인 서화미술회를 1918년에 졸업하고 같은 해 창립된 서화협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1921년 서화협회 1회전과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 1회전 출품을 시작으로 이후 이 전시들이 문을 닫을 때까지 출품했다. 특히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1925년 3등상을 수상했고 이후 연 10회 특선을 차지해서 14회부터는 추천작가, 17회부터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1927년부터 동아일보의 미술책임기자로 근무하다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피검되어 퇴직했다. 해방 후인 1950년부터 1961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후진을 양성, 서울대의 노수현과 함께 현대 화단의 양대 인맥을 구축하였고 국전에서는 초대작가 겸 심사위원을 오랫동안 역임했다. 1922년 이용우, 변관식, 노수현과 더불어 동연사同硏社 그룹을 조직한 것 외에는 이후 별다른 그룹 활동없이 국전이나 대한 미협전 및 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스승이었던 심전 안중식의 영향을 받아 남북종 화풍이 절충된 그림을 선보였으나 1923년 무렵부터는 논과 개울을 근경에 두고 나지막한 야산을 원경에 배치하여 옆으로 길게 전개되는 독창적인 구도를 보이기 시작, 이후 1945년부터는 농촌의 전원 풍경을 두 단의 간단한 구도 속에 배치하고 날카롭고 짤막하게 끊어 치는 가시 같거나 갈고리 같은 필선의 구사로 화면에 잔잔한 긴장감을 주었으며 소정의 적묵법積墨法과는 달리 부벽준법斧劈法으로부터 변형된 부정형한 검은 먹점들로 엷은 먹에서 차츰 진한 먹으로 옮아가는 농담의 묘를 살려 풍경에 쉽게 동화되는 부담없는 시점을 일관적으로 유지했다. 그의 그림은 시골 산야의 정취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특유의 기법으로 처리하여 독특한 운치가 있는 한국적인 산수화를 창출해 내고 향토적 민족 정서를 이끌어 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창덕궁 경훈각 벽화>, <원각사 벽화>, <설로도>, <고원귀려도> 등이 있다.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1899~1976)은 황해도 옹진 출생으로 12세 때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외조부 소림 조석진을 따라 서울 외가로 옮겨 와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에서 도화수업을 받았다. 조석진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서화미술원의 이당 김은호, 심산 노수현, 청전 이상범 등과 함께 화가로서의 길에 들어섰고, 서화협회 1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 1회전에 각각 출품하면서 등단했다. 1925년 이당 김은호와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무로小室翠雲에게 사사를 받는 한편 동경미술학교 청강생으로 5년간의 일본 유학기를 보냈다. 귀국한 후에는 금강산 등을 유람하면서 우리 산하의 독특한 골격을 연구했다. 광복 후 초기 국전에 참여하였으나 공정치 못한 심사에 반발해서 당시 '연합신문'에 국전심사의 불공정성을 폭로한 글을 기고한 후 주로 재야에 머물며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인간사의 속됨을 싫어했고 방랑벽이 심하여 평생 야인을 자처한 그의 그림은 아름답고 편안한 청전의 그림에 가리어 생전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세인들의 안목에‘나 죽으면 봐’라며 의연하게 맞서던 그의 작가적 의지와 역량으로 사후에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화법은 얇은 먹에서 진한 먹으로 점차 덮어 가는 '적묵법積墨法과 묵점을 튀기듯 찍어 선을 파괴하고 리듬을 주는 '파선법破線法'으로 짙고 거친 느낌을 주나 한국인의 강인한 끈기와 강직함, 직설적인 소박함을 표현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또한 시점이 각기 다른 경물을 한 화면 안에 담아 전통적인 산수를 다루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그림에는 허리가 구부정하고 두루마기를 걸친 노인네가 지팡이를 짚고 산을 오르고 있는 장면이 빠지지 않는데, 이는 고요한 화면에 해학적이고 서민적인 감성을 더해준다.
또한 그는 1937년 경부터 수년동안 그가 한국 산하의 이상향으로서 선택한 금강산을 유랑하며 그 곳의 산세와 바위, 나무의 형태 등을 사생,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적 시각으로 조형화하여 겸재 정선 이후 금강산을 가장 잘 소화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금강산의 변화무쌍한 절경을 역동감 넘치는 극적 구도로 담고, 마른 붓끝이 드러나는 갈필과 담묵·농묵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둔중하고 거친 필치로 힘차게 뻗어 나간 화강암의 산세와 기암절벽들을 그린 금강산 작품들은 단순한 소재를 넘어 그의 강인한 정신성의 표상이기도 하다.
작품으로는 일련의 금강산 시리즈인 <외금강 삼선암>, <내금강 진주담>, <옥류청풍>과 <어해도>가 있다.
이중섭 vs 박수근
이중섭과 박수근은 김환기, 장욱진과 함께 격랑의 현대사를 살면서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표출해온 작가이다. 특히 이중섭과 박수근은 국민화가로 불리 울 만큼 한국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작가로, 각각 한국의 고흐, 한국의 밀레라고 비유되기도 한다.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1916~1956)은 평남 평양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오산학교 재학 시 미술교사로 부임한 서양화가 임용련의 영향을 받아 화가의 꿈을 키우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진취적이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문화학원 미술과에 다시 입학하였다. 졸업 후에도 연구생으로 계속 학교를 다니며 자유미술가협회에 참여하다가 1943년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망월〉로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였다. 1943년 귀국한 이중섭을 찾아 원산으로 온 야마모토 마사코와 1945년 결혼하고 마사코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꿨다. 6·25 동란 중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바뀌자 국군의 화물선을 타고 원산을 탈출, 부산에 도착하였다. 1952년에 종군화가단원이 되었으며, 계속되는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무렵 전란으로 인한 극심한 재료 부족에서 담뱃갑 속 은박지를 송곳으로 긁어서 암갈색이나 흑색의 유채를 밀어 넣는 방법을 착안하였다. 1953년 신사실파에 가입해서 제3회 동인전에 출품하였고, 1955년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개인전은 호평을 받았으나 은지화가 외설스럽다고 당국에 의해 철거되고 그림값도 제대로 못 받아 크게 상심하였다. 이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병증세를 나타내기 시작,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죽었다.
1930-40년대에 그가 누린 평안과 행복 그리고 6.25사변 이후의 가난하고 불행한 생활은 안정감 있고 즐거운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1940년대의 엽서그림과 황소그림을 비롯, 격렬한 감정을 보여 주고 있는 1950년대의 작품에 표현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야수파적인 표현주의 화가로, 향토적, 가정적인 주제와 운동감 있는 화면이 특징이다. 특히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선화(線畵)는 재료가 지니는 개성과 매력이 높이 평가되어 뉴욕현대미술관에 세 점이 소장되어 있다.
박수근朴壽根(1914~1965)은 강원도 양구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926년경 밀레의<만종>을 처음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계속하였다.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등단하였고 1936-1943년까지 계속 선전에 입선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월남하여 부두노동자,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를 그려 주는 일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國展) 서양화부에〈집〉이 특선으로 뽑히고 〈노상에서〉가 입선하면서 남한에서 주목 받기시작했다. 이 때부터 사실적인 묘사를 제거하고 흰색, 갈색, 회색, 검정색의 절제된 색채를 사용하며, 나아가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두꺼운재질감(마티에르)을 시도하면서 화단의 어느 누구와 견줄 수 없는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56년까지 국전에 연이어 입선했으며, 제7회 대한미협전에서〈두 여인〉이 국회문교위원장상을 받았다.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도 1백호 크기의 대작〈세 여인〉을 제작하여 1957년 제6회 국전에 출품했으나 심사위원들의 어이없는 판정으로 낙선하였다. 전년도의 충격으로 다음해 국전에는 불참했으나 1959년에 추천작가로 선정되어 다시 국전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일보사 주최 제3회 현대작가 초대전에 출품하였다. 국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까지 역임했던 그는 수술비용이 없어 백내장 치료시기를 놓쳐 1963년에는 왼쪽 시력을 잃고 좌절하는 등 시대적 불운과 생활고 등의 중압감을 이기기 위해 과음과 제작생활을 강행하다가 1965년 지병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박수근은 빨래하는 여인, 노상의 노인네와 아이들 등 서민들의 삶을 독특한 마티에르와 단순화되고 평면화된 구상회화로 표현하여 한국적인 현대회화를 보여 준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김기창 vs 박래현
김기창과 박래현은 예술세계를 함께 나눈 부부 작가로 이제는 고인인 된 두 작가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이다.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4~2001)은 서울에서 태어나 8세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신경이 마비되어 이후 평생 듣지 못하게 되었다. 17세에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문하에 입문하여 이듬해인 1931년 제10회 선전에 첫 번째 입선한 것을 포함, 선전 입선 연 6회와 특선 연 4회를 기록하여 선전 추천작가 자격을 획득하였다. 해방 전까지의 운보 작품은 일본화풍의 세밀화 범주에 속한다. 운보의 평생의 반려자이자 예술적 동지가 되는 우향 박래현과 1946년에 결혼하여 부부전을 지속적으로 열었다. 6·25 전란 동안 피난지 군산에서 입체적 구성 작품과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예수의 일대기 연작을 제작하였다. 1954년에는 국전에 추천작가로 출품하였으며, 중견작가들의 모임인 백양회 창립에 가담하여 동양화의 새로운 모색에 앞장섰다.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 사이에 격정적인 운필이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야생마의 격렬한 동세가 격정적 구도로 나타나는 <군마도>나 황소 두 마리가 싸우는 <투우>는 거대한 무게와 힘이 표현을 대신하고 있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여러 국제전과 순회전에 출품했는데 이 시기의 해외여행과 해외전은 완전한 추상이 등장하는 이미지 연작의 계기가 된다. 운보의 정신적 지주였던 우향이 1976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민화에서 영감을 얻은 '바보산수'를 본격적으로 탐구했으며 만년에는 대걸레 작업인 심상 연작을 내놓기도 했다.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1920~1976)은 평남 진남포(鎭南浦) 출생으로 부모를 따라 전북 군산으로 이주, 성장하였다. 경성관립여자사범학교를 나와 잠깐 교사로 재직한 후 동경에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하였다. 1943년에〈장(粧)〉으로 선전에서 특선하였으며, 1946년 모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운보 김기창과 결혼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부부전을 열었으며 1950년대에는 김기창과 함께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하였다. 1956년 대한미협전과 국전에서 동시에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화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1961년 이후 국전 심사위원, 서울시 문화위원을 역임한 뒤, 서울대학교와 성신여자대학교에 출강하였다.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한 후 남미 각국을 순방하고 1968/69년부터 뉴욕에 체류하면서 프랫(Pratt) 그래픽 센터와 밥 블랙번(Bob Blackbunn) 판화연구소에서 판화를 연구하며 동양화의 실험적 의욕을 판화란 매체로 실현시켰다. 1974년 신사임당상을 수상하고 그 해 귀국기념 판화전을 가졌다. 1975년 다시 도미하였으나 간암으로 입원치료 중 귀국, 이듬해 1월 초에 세상을 떠났다.
우향의 초기작은 다분히 일본화풍이었으나, 6·25 전쟁 중 군산 친정에서의 피난생활을 기점으로 입체파의 영향으로 추상적인 화면을 시도한다. 운보 역시 이 시기에 입체적 작품을 선보였는데 운보의 회화가 직선과 면분할에 주목하는데 비해 우향의 그림은 온화한 색채와 볼륨감에 의해서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대상을 극복한 순수추상의 세계로 나아갔으며 판화와 타피스트리를 활용, 동양화가인 우향이 서구적 기법을 적용시켜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을 만들기를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