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휴일
호프만
비 내리는 휴일, 휴일의 거리에 사람들이 없다. 집에 틀어박혀서 휴일을 망친 비를 원망하고 있는 사람들의 한숨이 들린다. 비 내리는 소리는 한숨의 소리로 사뿐하지 않게 내린다.
비 내리는 휴일, 나만 집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다. 비둘기도 비를 피하여 겨우 몸만 가릴 콘크리트 처마 밑에 날개를 말리고 있다.
아니다. 잠시 쉬어가는 것이다. 분주했던 거리도 정갈한 쉼터가 되고 탁했던 공기도 맑아지는 과정이다. 비 내리는 휴일이 꼭 안타까운 것은 아니다. 멜랑콜리아 - 우수와 우울은 비가 잠시 주는 멈춤일 뿐이다.
비 내리는 휴일, 창문에서 식물들을 만난다. 나에게 영감을 주는 담쟁이는 이제 3층의 집 높이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이 담쟁이를 5년 전 이 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1층 로비에서 올라가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 나의 시선보다 높아져간다.
나는 이 담쟁이넝쿨의 성장만큼 그간 성장하였을까? 어디까지 성장하였을까? 담쟁이넝쿨의 키만큼 보이는 성장을 하였을까? 베트남에서 살아온 지난 세월도 폭풍우처럼 파란만장했다. 무려 5번째 직장이 바뀌었다. 컨설팅까지 하면 6년 동안 6번째이다. 이번 회사에서는 거의 2년 가까이 근무 중이니 안정감을 가지고 마음의 성장이 커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성장보다 마음의 성장이 더 중요하다. 단단해지고 또 더 멀리 바라보게 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지혜로운 마음이 되면 눈에 보이는 성장을 위해서 흔들리거나 경박해지지 않게 된다.
그렇게 성장하고 싶다. 담쟁이넝쿨아! 나의 집 창가에서 그렇게 늘 나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의 등을 다독이는구나.
비 내리는 휴일, 마음을 열게 되고 글을 쓰기에 좋다. 세상의 공기가 모두 씻겨내리는 청명함에 마음의 찌꺼기도 투명하게 청소되었다. 글을 쓰려면 번잡한 심정이 글을 써 내려가는데 걸림돌이 된다. 비를 내리듯 시원하게 지상으로 글이 춤을 추듯 흘러내려가기를 바란다.
베트남의 우기는 참으로 시원스럽다. 질척대는 것이 아니고 화끈하다. 한 번에 세상이 떠내려갈 것처럼 그리 땅이 흔들거리는 장대비를 내리꽂다가도, 한순간에 사라지면 뜨거운 햇살에 세상이 탈수기를 나온 것 같다. 그렇게 빨랫감이 마르게 되면 생명체들, 아니 나의 마음까지 다시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 사랑은 비를 타고 싱싱하게 부활한다. 비 내리는 시간 동안 옷을 갈아입을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비 내리는 휴일, 39세 죽은 파스칼(1623~1663)에게 묻게 된다. 그는 왜 그렇게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을까? 그는 누이가 아이를 껴안는 것조차 비판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감정을 닫고 살지 않겠다. 비를 내리는 하늘은 메말랐던 감정에 눈물을 쏟아내듯, 고여있던 감정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감정은 쏟아낼 때가 필요하다. 비가 쏟아지듯 하늘과 땅은 그렇게 깨끗한 세상을 만들면서 선순환한다. 파스칼은 감정의 비를 쏟지 않고 그의 철학, 수학 정신의 어디에 감정을 안 보이게 감추었나 보다. 나는 이성의 철학자가 되기보다 차라리 감수성 많은 사랑의 시인으로 살다가고 싶다. 사랑은 비를 타고 내린다고 믿고 싶다.
비 내리는 휴일, 바깥은 콩볶는 소리로 시끌벅적하지만 나의 창가는 고요하다. 비로소 홀로 앉아있다. 창가의 테이블에 나를 위한 컴퓨터 자판기가 무대가 되어 비를 소재로 글을 쓴다. 쇼팽의 마주르카를 감상하면서 자판기의 글자들이 피아노 건반의 음악이 된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쓴 글이 이 무대의 연습을 통해서 세상에 연주하게 될 글로 잉태되는 것이다.
비 내리는 휴일은 들려준다. '세상은 불평등하다.' 1년 내내 혹독한 가뭄에 땅이 쩍쩍 갈라지는 칠레는 비 내리는 하늘을 울면서 기도했다. 홍수 피해에 안타까운 소식이 눈물짓게 하던 고국의 소식도 들려온다. 나의 베트남 호찌민 집의 창가에서 비가 내린다. 비둘기 한 마리는 친구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나의 눈과 자꾸 마주친다. 세상 모두에게 비가 내린다. 각자의 의미로 각자의 비가 다르게 내린다.
비 내리는 휴일, 이 글을 닫으면 활짝 개인 하늘이 열리기를 상상한다. 그리되면 다시 세상에 나서리라. 철학에 대해 아쉬운 점은 감정에 대하여 낮게 내려보는 것이다. 그리니까 문학이 그 자리를 보완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문학이 철학과 서로 균형을 이룬다.
인문학은 철학이 원조이고 문학이 형제이다. 그것이 문화를 이루고 역사의 빗물이 되어 강과 바다로 흐른다. 인문학의 비가 사람들의 지혜가 되어 메마르지 않은 통찰의 시선을 세상에 확산하였으면 한다. 문명은 인문학의 수레바퀴로 끊임없이 역동적이어야 한다. 비처럼 내리고 젖게 하고 다시 맑은 하늘의 공기로 움직이는 대기의 선순환을 볼 줄 아는 슬기를 가지리라. 비 내리는 휴일은 소중한 철학의 고요함이다.
오늘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고 답하게 된다.
비 내리는 휴일, 이 시간 온전히 나를 찾게 되어 좋다. 태양이 너무 강렬한 여름은 무성한 생명력에 지쳐버렸다. 비가 내려서 세상을 식혀준 좋은 휴일이다. 햇살 좋은 곳으로 놀러 가지 못한다고 불평하지 말자. 비 내리는 휴일은 꿀같은 휴식의 침착한 평화를 선물한다.
비 내리는 휴일에는 음악을 듣자. 잊어버리던 빈티지 음악을 감상하면서 예술가의 마음을 갖자. 순진무구한 예술가의 마음이 되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마음이 되면 세상의 모든 창의적인 상상의 예술에 빠져들게 된다. 아이의 호기심은 세상에 대한 사랑이다. 이 세상의 예술은 모두 사랑이 된다.
비 내리는 휴일은 니체로 빗대자면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는 순간이다. 낙타의 삶으로 피로해진 눈을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사자처럼 긴장하여 포효할 수도 없다. 그렇게 쉼 없이 앞뒤 가리지 않고 투쟁만 하면서 살다가 하이에나 무리가 덮쳐올 수 있다.
비 내리는 휴일, 창가에서 글을 쓰다가 못 참고 뛰쳐나갔다.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 Singin' in the rain, 1954년 작품)의 진 켈리, 주인공처럼 비를 맞고서라도 좋았다. 오늘 하루치의 산책, 걷기 운동의 시간을 비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일생은 살던 동네 바깥으로 여행하지 않았지만, 시계처럼 동네 산책은 철저하게 지켰다. 나의 산책 시간을 비가 내린다고 놓치고 싶지 않다. 칸트가 진 켈리를 만나서 비 속에 춤을 추었더라면 그의 철학은 훨씬 더 이해하기 쉽고 유쾌한 사랑이 담겨서, 그는 결혼하였을 것이다.
비 내리는 휴일이라도 나가자! 창문 안에서만 생각만 하고 글을 더 이상 쓰지 않기를 잘했다. 창문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잘했다. 비를 맞으면서 걸으니 보이는 것이 많았다. 7월의 마지막 날,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지만, 8월의 계획을 세우게 된 하루를 비 내린다는 핑계로 집안에서만 보낼 수 없었다.
비를 맞고 빗길을 걸어보자! 이 세상에 대한 긍정의 사랑은 비를 타고 내린다.
Singing in the rain 뮤지컬 배우처럼 기꺼이 비를 맞고 걷게 된다. 방구석에서 궁상떨지 말고 비를 맞으니 빗길이 음악이 되었다. 올해 한여름 마지막 한 달, 8월의 희망을 노래하게 된다.
사실은 고백할 것이 있다. 다음 주에 아마도 아내가 다시 돌아온다. 8월에는 격월 부부에서 주말부부로 돌아가게 된다. 이 비가 그치지 않더라도 내 마음은 사랑은 비를 타고 흐른다. 역시 나는 철학자는 못되고 시인이 되련다.
첫댓글 🙏🙏🙏
-()()()-
...()...
°°°
"비 내리는 휴일 마음을 열게 되고
글을 쓰기에 좋다
세상의 공기가 모두 씻겨내리는
청명함에 마음의 찌꺼기도
투명하게 청소 되었다" 🙏🙏🙏
_(((관세음보살)))_
글을 읽고 오랜만에 Singin' in the rain을 들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RNcJvMD3Ec
PLAY
커피향이
더 진하게 향기로운
비오는날~~^^
사랑은 비를 타고 내린다_
_()()()_
_()()()_
감사합니다.
빗소리는 세상 가장 감미로운 노래,
지금 시방 크지도 작지도 않은 빗소리가 들립니다.
_()()()_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