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휴가는 남해로 다녀왔습니다.
지난해 여름 목포기행을 통해 아름다운 서남해안의 비경을 맛본 우리 가족은 동남해안 투어를 시작 하기로 했기때문입니다. 다음 여름에는 거제도-부산-울산-포항 기행을 차례대로 할것입니다.
다솔이 수학학원 일정때문에 출발시간은 4일(목) 오후 2시에서야 비로소 집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피서 인파들로 인해 서울 거리는 평일 오후임에도 정체가 제법 심해서 서울 요금소까지 진입하는데 한시간 가량 소비한것 같았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진주간 고속화 도로를 따라 사천IC에서 나와 삼천포항과 남해를 잇는 창선.삼천포대교를 들어서는 순간 남해바다의 아름다운 낙조가 여행길 피로를 씻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남해군 삼동면 물건항에 위치한 숙소 남송가족 관광호텔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어둠이 해변을 부지런하게 숨겨놓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숙소는 동문선배 가족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성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덕분에 저렴한 비용으로 부담없이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숙소의 모든 객실에서는 이처럼 그림같은 해안을 조망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어 새벽이면 일출조망도 바다쪽 베란다 창문만 내다 보면 실내에서 할 수 있게 되어있었습니다.
해안가에 반원형으로 바다와 농지를 가르며 우거진 수풀은 남해12경중에서 10경으로 불리며 천연기념물150호로 지정된 물건방조어부림은 태풍과 염해로부터 마을을 지켜주고 고기를 모이게 하는 어부림으로 길이 1.5km, 너비 30m의 반달형으로 팽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푸조나무인 낙엽수와 상록수인 후박나무 등 300년 된 40여종류의 수종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건 방조 어부림 앞바다에는 이처럼 빨간 등대와 하얀등대가 서로 엇갈리게 평행선 처럼 길다란 방파제 앞에 마주하며 서있습니다.
이 방파제의 영향으로 이곳 물건항 바다물결은 사시사철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한 모습을 유지한다고 했습니다.
물건항 주민들은 대대로 남해 특산물인 마른 멸치 잡이로 남해 최고의 부촌을 이루고 산다고 했습니다.
남해에서 나는 마른멸치는 거제도 일원에서 쌍끌이 배로 잡아 털어 올리는 멸치와 달리 정치망 어선에 걸려던 멸치를 퍼올려서 잡아내는 방식이어서 멸치가 훼손되자않고 온전한 모습을 유지해 상품가치가 훨씬 우수하다고 합니다
숙소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맞은편 산중턱에 건설중인 독일인 마을이었습니다.
독일인마을을 둘러본 후 물미안해안도로(남해10경)를 따라 금산 보리암(남해1경)으로 이동했습니다.
금산 북쪽 능선에서는 차량을 이용해서 보리암을 좀더 손쉽게 오를 수 있는 코스가 있기는 했지만 금산입구에서 정상까지 2.2KM에 불과해 운동삼아 산그늘을 따라 쉬엄쉬엄 오르기로 했습니다.
신록으로 우거진 산길에는 직사광선을 만날 일이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지나지않아 땀이 비오듯 뿜어져내렸습니다 .
돌아오는 길에 뉴스를 통해 알고보니 그날이 남해안 지역에 열대야가 기승을 부렸기때문이었습니다.
입구에서 정상까지 가는 길목의 정 중간에 위치한 약수터입니다.
이곳에서 잠시 쉬며 세수도 하고 손수건도 행구며 땀을 말렸습니다.
물도 시원하고 수량은 풍부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수질검사결과 음용수 부적합판정이라고 기록되어있었습니다.
아마도 산정에 위치한 보리암 관광인파들로 인해 지하수가 오염되었기때문인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보리암에 거의 다다를 무렵 만나게 되는 쌍홍문이라고 불리는 자연동굴입니다.
저곳을 통과해야지만 산정과 보리암으로 갈 수 있습니다.
쌍홍문은 금산 38경중 제일의 절경으로 옛날 석가 세존이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쌍홍문의 우편으로 나갔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으며 이 쌍굴의 높이는 7-8m쯤되는데 굴속을 지날때 해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계곡을 타고 올라와 굴을 지나면서 풍속이 빨라져 마치 별천지에 들어 앉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쌍홍문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해안을 향해 내려다 보고 서있는 사선대(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모여던 신선들이 아름다운 금산의 절경에 취해 놀고 가는 장소라는 전설)라 불리는 기암괴석입니다.
쌍홍문을 지키고 서있는 장군암을 지나 쌍굴속에서 내려다본 금산 남쪽 계곡입니다.
보기만해도 소름끼칠만큼 시원했던 굴바람의 추억이 되살아 오릅니다.
보리암 삼층석탑자리에서 바라다 본 상주해수욕장(해안선 가운데 원형모양 해변) 과 남해바다 풍경입니다.
날씨가 흐려서 더 산뜻한 풍경을 담지못해 미련이 남기도 했지만 더이상의 욕심은 사치라고 여기기로 했습니다.
상주해수욕장 왼쪽으로 펼쳐진 한려해상 국립공원 다도해의 절경입니다.
망망대해를 향해 서로 경쟁하듯 아름다움을 뽐내며 어우러진 모습에 찌는듯한 8월 불볕 더위아래에서 한참동안 넋을 잃고 서있게 하였습니다.
정상에는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이 있으며, 불타오르는 여명이 바다에서 솟구쳐 오르는 금산의 일출은 3년동안 덕을 쌓아 볼수 있다 하며 그 장엄함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를 준다고 했습니다.
보림암에서 250여M 거리에는 고려 명종때 설치되었다고 하는 금산 봉수대가 있습니다.
금산 봉수대가 있는 금산(해발681m) 정상은 맑은 날 삼천포와 여수는 물론, 석가 세존이 지나갔다는 세존도와 대마도까지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금산 봉수대는 남해군의 최남단에 있는 봉수대로 낮에는 이리의 배설물을 피우고 밤에는 불을 피워 당시의 상황을 즉시 조정에 알리는 통신 역할을 했던 곳인데 1894년 고종31년에 현대적인 전화 통신 체제로 바뀌면서 금산봉수대도 폐지되었다고 했습니다.
금산 봉수대는 전국 5거선 중 제2거선인 동래부터 시작되는 간선봉수대 역할을 맡았으며 금산봉수대에서 연락하면 가까운 창선 대방산 봉수대를 거쳐 삼천포 각산 봉수대나 전라도 돌산 봉수대로 연결되었다고 합니다.
금산 보리암에서 내려온 다솔이 다운이는 숙소에 있는 미니풀장에서 더위를 식히며 한참을 놀다가 해질무렵 물건항 해변으로 해수욕을 다녀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함께 여행을 온 친구 가족과 함께 제일 먼저 상주해수욕장을 찾았습니다 .
어제까지만해도 물결이 고요하기만 하던 해변은 태풍의 영향으로 파도가 제법 높게 일렁이며 하얀 물보라를 이중 삼중으로 해변에 토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상주해수욕장(남해3경)은 최적의 해수욕장으로 꼽히는 모든 입지(시원한 숲,넓은 백사장,고요한 바닷물)를 모두 갖춘 남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이라고 했습니다.
해변 앞에는 돌섬과 나무섬이 가로 놓여있어 대체로 바닷물이 고요하다고 합니다.
다솔이 다운이는 틈만 나면 차 선루프를 통해 차밖으로 몸을 내놓고 가겠다며 떼를 써는 통에 주행중에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거칠게 몰아쳐 오는 파도에 휩쓸려 물속에서 어쩔줄 몰라하던 다솔이 다운이도 시간이 지나자 물길에 적응을 하고 파도 놀이를 즐기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해변에서는 개인용 거늘막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통제를 하는 바람에 준비해간 거늘막 대신 대여료 5천원하는 비치 파라솔을 임대해서 사용하여야만했습니다.
3시간 가량 파도 타기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1인당 1천원하는 샤워를 한 후 해수욕장을 벗어나오기 전에 기념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했습니다.
다솔이 다운이는 함께 여행온뒤로 처음 일정을 같이 한 또래의 친구딸 아린이 해린이와 같이 기념 사진을 남기고 해수욕장을 뒤돌아 섰습니다.
남해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점심을 외식으로 해결하였는데 남해 특산물로 유명한 한우를 먹고 나서 서포 김만중선생이 사씨남정기를 집필한 곳으로 유명한 유배지 노도를 방문했지만 뱃시간이 맞지않아 부두에서 그져 바라다 보기만하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노도는 0.41㎢ 넓이의 작은 섬으로 서포는 1689년부터 3년간 이 섬에서 유배생활을 한 뒤,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서포는 이 곳에서 자기가 파 놓은 옹달샘의 물을 마시고, 솔잎 피죽을 먹으며 근근이 연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노도의 유래는 옛날 이곳에서 배의 노를 많이 생산했다 하여 노도(櫓島)라 불리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16가구에 43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물고기가 훤히 들여다 보이게 물이 맑으며 볼락, 농어, 감성돔이 잘 잡히는 섬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찾아간 남해 명소는 가천 다랭이 마을(남해 6경)입니다.
이 가천 마을은 해변부터 산꼭대기까지 산비탈을 한치의 땅도 그냥 내버려두지않고 개척하며 살아온 남해인의 억척스러운 삶을 대표하는 마을인 셈입니다.
남해섬의 모양을 자세히 보면 마치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이
곳 가천은 여자의 회음부에 해당하는 위치임에도 물이 귀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수원을 풍부하게 염원하는 뜻에서 더할가(加)자에 내천(川)자를 써서 가천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천은 새 새명을 탄생시킬 신성한 곳인 셈입니다.
다랭이 논의 의미를 되새기며 바라보는 가천마을의 풍경은 옛 전통을 그대로 간직한 한 폭의 수채화 같아보였습니다.
가천마을에는 다랭이 논과 함께 암수바위가 명소로 알려져있습니다.
마을 중턱에 위치한 이 암수바위는 발기한 남자의 성기와 애기를 밴 어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전국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다고 합니다.
조선 영조27년 이 고을의 현령 꿈에 한 노인이 "가천에 묻혀있는 나를 일으켜 달라"고 부탁해 땅을 파보니 암수바위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바위를 발견한 뒤로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바라는 제사가 매년 열린다고 합니다.
다랭이 마을 뒤쪽에 있는 설흘산(488m)은 망산과 인접해 있으며 설흘산에서 내려다 보면 깊숙하게 들어온 앵강만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가 아늑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남해대교 방면으로 귀가길을 잡고 나오면서 들렸던 관음포 충무공 전몰유허입니다.
일명 이락사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맨처음 육지에 오른 곳이라고합니다.
이락사 앞 뜰에는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유언비가 역사를 증명하듯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 있습니다.
이락사가 순국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장군이 전사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이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8대손으로 통제사가 된 이항권이 이곳에 나라를 지켰던 장군을 기리는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사철 푸른 육송이 404년 전의 그 날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많게는 10개에서 적게는 4개의 가지가 땅에서 바로 가지를 벌린 채 4,50미터의 오솔길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국을 향한 충무공의 애타는 마음이 소나무에도 투영된 것일까?
당시 해전 상황 전개도를 보면서 마지막 격전을 치루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량해협쪽 바다를 관음포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저 바다 부근 어디선가에서 조선수군에 포위된 외선들이 괴멸되어 가면서 민족의 성웅 충무공의 목숨을 앗아갔을것입니다
남해를 찾을 무렵 우리를 감싸고 돌았던 어둠이 다시 역사의 바다에 베일을 치고 있었습니다.
불멸의 이순신, 충무공의 위용에 격파된 외군의 잔당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쳐나간 광양만 사이의 넓은 바닷길 입구입니다.
자랑스러운 승전역사를 간직하면서도 충무공의 목숨을 빼앗겨 한없이 애통한 격전의 노량해협 위로 남해대교의 야경이 찬란합니다.
남해바다위로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는 것을 보며 마지막으로 남해 대교 바로 옆에 있는 문닫힌 충렬사에 들려 거북선을 보았습니다
정유재란 마지막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해간 충무공은 노량해협을 지키는 저 거북선과 함께 오래오래 우리들을 일깨워줄것입니다.
첫댓글 ㅎㅎ 여행기 잘보고 갑니다 아주 알찬 휴가 보내셨구랴 ㅎㅎ
오..고맙당. 용시가...시방 몇명의 친구들을 꼬시고 있단다. 함께 가려고..으으흐.....횟집도 있냐?
잘 보았습니다. 2년전에 가족여행으로 둘러보았던 곳인데 이렇게 사진으로 설명까지 들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다랭이 마을과 암수바위 그리고 보리암... 잘 보았습니다.
형 횟집은 숙소 앞에 있는 방파제에 물건항유통센터타운이 있는데 그기서 막 잡아올린 횟감들을 세꼬시 형태로 판매하는 집들이 많이 있답니다. 남해 특산물인 마른멸치도 도매하고요 가격은 2만원부터 5만원까지 다양하답니다
그려..고마워^^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