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림단소에서 통문을 받고 회답합니다.
위는 통문(通文)에서 행사(行事)를 알린 것에 회답(回答)입니다.
삼가 현인(賢人)을 존숭(尊崇)하는 것은 훌륭한 덕행(德行)으로 세상(世上)에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총애(寵愛)의 표상(表象)으로 사당(祠堂)을 세우는 것에 여러 사람의 의논(議論)이었습니다. 타고난 천성(天性)에서 솟아나오는 느낌입니다. 그것은 파산 류 선생(巴山柳先生)으로 하여금 심학(心學)의 요체(要諦)를 스승에게서 받았는데 연원(淵源)의 요결(要訣)입니다.
향불과 어육(魚肉)을 받들고 천신(薦新)하던 곳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고 분강(汾江)과 타양(陀陽) 서원(書院)은 황폐(荒廢)하였을 따름입니다.
제사(祭祀)에 쓰였던 그릇과 비로 쓸었던 흔적(痕迹)에는 해바라기와 보리로 바뀌어 떠났습니다. 후손(後孫)들의 탄식(歎息)이 한탄(恨歎)으로, 사림(士林)의 흥분(興奮)한 탄식(歎息)이 더한 것이어서 어떻게 회복(回復)할 것입니까?
옮기는 것에서 사당(祠堂)을 세우고 부조(不祧)의 논의(論議)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성대(盛大)한 거행(擧行)에서 맑은 바람이 어제의 절향(絶響)과 같아서 헤어지기 섭섭하다고 한다면 우리 무리들로 하여금 후학(後學)들은 공경(恭敬)하는 본보기로 삼을 것이거늘, 추모(追慕)에 부치는 것이 길이 그 곳에 있을 것입니다. 타고난 천성(天性)은 같다고 할 것이나 감히 솟아나는 느낌에는 못 미칠 것입니다.
삼가 여러분들이 함께 하는 큰 행사(行事)에 돈독(敦篤)하기를 바랍니다. 천만다행(千萬多幸)입니다.
경자(庚子:서기1960년) 구월 일
회원 김규오 이규섭 이정호 이원구 남재후 이상복 남상호 이난복
김도섭 김휘성 장덕규 이정복 권구섭 이두석 남병철 등
魯林壇所答通
右答通諭事伏以尊賢之盛德曠世之寵章立祠之公議秉彝之聳感其使 巴山柳先生師受心學之要淵源之訣可無奉香薦胙之地乎汾江陁陽墟已矣籩豆掃迹葵麥離離雲仍之齎恨士林之興嘆益復何如哉迺者立祠不祧之論不啻今日之盛擧淸風如昨絕響依依則使吾黨後學矜式焉寓慕永有其地矣秉彝所同敢不聳感伏願僉尊共敦大事千萬幸甚
庚子 九月 日
會員金奎五 李奎燮 李正濩 李遠求 南在厚 李常馥 南相滈
李蘭馥 金道燮 金輝聖 張德圭 李正馥 權龜燮 李斗錫
南炳哲 等
분강유소에서 통문을 받고 회답합니다.
위의 글은 행사(行事)를 알린 것에 회답(回答)을 합니다.
삼가 현인(賢人)을 존숭(尊崇)하는 것은 높은 덕행(德行)입니다. 우리 유소(儒所)의 성대(盛大)한 거행(擧行)으로는 지나간 먼 일을 그리워하고 태어나게 된 그 뿌리에 잊지 않고 갚는다는 것이 제사(祭祀)를 지내는 의례(儀禮)의 요체(要諦)입니다. 도학(道學)에서 이것이 확고(確固)하여 옛날 교화(敎化)의 유래(由來)한 바를 행(行)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운(時運)의 세태(世態)에서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 파산 류 선생(巴山柳先生)을 생각하건대 순박(淳朴)하고 정허(靜虛)한 모습과 남보다 뛰어난 재주로써 대현(大賢)의 문(門)에 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추장(推獎)되어 이미 소중(所重)하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조예(造詣)가 깊이 이르렀을 적에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사(祭祀)가 있으면 모여서 거행(擧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햇살이 퍼지는 세대(世代)에서는 존경(尊敬)하여 높이던 도덕성(道德性)이 과연(果然) 이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아, 세태(世態)로 하여 도덕성(道德性)이 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사(祭祀)를 지냈던 것이 훼철(毁撤)된 풍조(風潮)에서 아름답던 것이 멀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추모(追慕)에 부친 것이 허사(虛事)가 되었습니다. 곧 이것으로 유독(惟獨) 못한다고 자손(慈孫)의 곳에서 하였습니다. 매우 슬퍼할 따름입니다.
옮기는 것에서 화천(花川)의 논의(論議)는 변경(變更)한다고 발표(發表)하였습니다. 자주 묘당(廟堂)을 세우고자 하였고 신주독(神主櫝)을 복원하여 제사(祭祀)를 지낸다고 알렸습니다. 영원(永遠)토록 그것에서는 공공(公共)으로 정중(鄭重)한 뜻에서 떳떳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여러분은 꼭 알아야 할 일입니다. 인(仁)에 닥쳐서 양보(讓步)하지 못하면 의(義)를 보아도 반드시 행(行)하는 것이 없습니다. 신(神)이 사람을 부릴 적에는 마음에 언짢게 여기어 원망(怨望)하거나 성내게 하는 마음이 있어서 예(禮)에서 빠뜨릴 것입니다. 자주 공의(公儀)를 펴서 이 행사(行事)에 완결하기 바랍니다. 천만다행(千萬多幸)입니다.
경자(庚子:서기1960년) 월 일
유사 김천종 이범교
회원 이지호 이희원 금학수 임시호 이원성 이희술 김종구 김문희
김세영 이동식 이동춘 이정연 이유린 이희갑 이원조 이가호
김동수 이승교 이희연 이상교 이희덕 이희병 이정락 이정식
이희진 이석연 이용구 등
汾江儒所 答通
右文爲回諭事伏以尊賢尚德吾儒之盛擧追遠報本祭儀之要道斯固昔日敎化之所由行而不以時世而有異也伏惟 巴山柳先生以淳靜之姿超穎之才摳衣於大賢之門推許旣重造詣深至歿而至有祭社之擧晟代尊尚之道果如是也噫世道變而爼豆撤風徽邈而寓慕虚則此不獨爲慈孫之所慨嗟而已也迺者花川論議更發亟欲立廟復宔報祀永遠其公共鄭重之意可尚也伏願僉尊須知當仁不讓見義必行無使神人有憾情禮闕如亟伸公議俾完此事千萬幸甚
庚子 月 日
有司 金千鍾 李範敎
會員 李祉鎬 李羲遠 琴學洙 任時鎬 李源聖 李羲述 金鍾九
金文熙 金世榮 李東軾 李東春 李廷淵 李裕麟 李羲甲
李源祖 李嘉鎬 金東洙 李承敎 李羲演 李祥敎 李羲悳
李羲丙 李鼎洛 李庭植 李羲鎭 李錫淵 李龍九 等
남계서당에서 통문을 받고 회답합니다.
위는 행사(行事)를 알린 것에 회답(回答)입니다.
삼가 우리 도산 부자(陶山夫子)를 생각하건대 도학(道學)으로 동방(東方)에 강의(講義)를 급문제현(及門諸賢)에게 한 것이 수(數)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파산 류 선생(巴山柳先生)은 젊은 나이에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그 문장(文章)에서 수립(樹立)한 것이 덕행(德行)이었습니다. 비지 남 선생(賁趾南先生)과 더불어 나란히 공자(孔子)의 문인(門人) 안연(顔淵)에 견주어 일컫고 있었습니다. 이것으로써 선생(先生)은 세상(世上)을 떠났습니다. 오래지 아니하여 사림(士林)에서는 서원(書院)을 건립(建立)하였습니다. 의제(議題)의 발언(發言)에서 마칠 때까지 타양(陀陽)과 분강(汾江) 두 서원(書院)에 배향(配享)하러 들어가는 것 그리하여 제사(祭祀)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백세(百世)의 고증(考證)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불행(不幸)합니다. 나라에서 금(禁)하는 것에 걸리었습니다. 두 서원(書院)이 함께 훼철(毁撤)에 들어갔습니다. 고요하고 쓸쓸한 것이 백년(百年)의 사이에 선생(先生)의 여운(餘韻)을 잃어버리고 점점 멀어졌습니다. 우리 무리들의 경앙(景仰)에 의지(依支)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애통(哀痛)한 것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까?
근세(近世)에 만류(挽留)하면 급수(級數)는 날로 내려가고 사기(士氣)에서 떨치지 못합니다. 오직 그것에서 서원(書院)을 복원(復元)하고 배향(配享)을 설치(設置)하는 사업(事業)에 이어지는 것이 크게 중요(重要)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보류(保留)하며 뒷날을 기다립니다. 공론(公論)의 의제(議題)에서 조상(祖上)을 위하는 일에 묘당(廟堂)을 세우고 부조(不祧)의 의전(儀典)을 행(行)한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받드는 정성(精誠)에 부치는 것으로써 어찌 오늘날에 합심(合心)하여 철저(徹底)하게 도리(道理)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까?
어떻든 다행(多幸)입니다. 귀원(貴院)으로부터 먼저 발표(發表)한 것에 이 논리(論理)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실로 우리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높이 추모(追慕)하고 있다는 의리(義理)입니다. 어찌 멀고 가까운 것으로써 그리하여 사이가 있다고 할 것입니까? 이에서 감히 같이 성원(聲援)하며 서로 호응(呼應)하는 것입니다. 글에서 삼가 반복(反覆)하게 된다고 하면 생각하건대 여러분들이 넓게 베푸는 공론(公論)의 의제(議題)에 자주 이 행사(行事)에 돈독(敦篤)히 하기를 바랍니다. 천만다행(千萬多幸)입니다.
신축(辛丑:서기1961년) 월 일
당장 이철균
유사 김석조 이중락
회원 류장하 홍태복 김익현 이현규 홍종수 이창식 이인균 홍재형
이서우 김휘계 이경영 등
南溪書堂 答通
右回諭事伏惟我陶山夫子講道東方及門諸賢有不可勝數而我 巴山柳先生早年立雪其文章德行與賁趾南先生幷有孔門顏淵之稱是以先生謝世之未久士林建院之議峻發入享於陁陽汾江兩院而爼豆之此可爲百世之證矣不幸中罹邦禁兩院俱入於毀撤寥寥百年之間先生之遺韻漸遠吾黨之依仰無地可勝痛哉挽近世級日降士氣不振惟其復院設享事係巨重不可不留待後日公議爲先立廟行不祧之典以寓虔奉之誠豈非今日合做底道理乎何幸自貴院先發此論可謂實獲我心其在尊慕之義寧以遠邇而有間乎兹敢同聲相應爲文敬覆惟願僉尊恢張公議亟敦此事千萬幸甚
辛丑 月 日
堂長 李喆均
有司 金錫祚 李重洛
會員 柳璋夏 洪泰福 金翼鉉 李鉉圭 洪鍾洙 李昌植 李麟均
洪在衡 李瑞雨 金彙契 李璟永 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