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객의 눈을 현혹시키던 장소에 이르자 구불구불한 호수선이 한 폭의 그림이다. 경사가 완만한 주변은 황토색 띠를 허리에 찬 풍경을 선사한다. 이곳도 포토죤으로 손색이 없었다. ‘대청호오백리길’ 조형물과 대청호반을 한꺼번에 넣는다면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도 있겠다.
▼ 다음은 명상정원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이때는 호숫가를 직접 걸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대청호의 물이 찼다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만들어놓은 층층의 곡선 위에 오솔길이 나있다. 이 길은 올 가을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하는 ‘가을 비대면 관광지 100선’에 꼽히기도 했다. 그러니 천천히 음미하며 걸어볼 일이다.
▼ 잠시 후 도착한 ‘명상정원’은 쉼터로 꾸며져 있었다. 벤치는 지붕을 씌웠고, 식탁형의 의자는 아예 돌로 만들었다. 차분히 앉아 명상에 잠겨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대청호 물속에 잠겨버린 옛 마을 주민들의 심정이 되어...
▼ 명상정원의 끝자락, 휑한 공간은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무대가 된다. 이국적이라고도 평가받는 공간에는 ‘창궐’의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얼굴을 넣으면 극중 출연자로 변하는 기교까지 부렸다.
▼ 수몰민이 떠난 자리는 이제 오리 떼의 놀이터가 됐다. 실향민은 통일되면 고향땅을 밟는다는 희망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수몰민은 그런 희망조차 품을 수 없단다. 물 뺄 일이 없는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야 없는 노릇. 주민들은 하나둘 떠나갔고, 그 빈자리를 저 오리들이 채워나갔을 것이다.
▼ 호수와 맞닿은 언덕의 끝, 그 건너편에는 하얀 모래로 둘러싸인 섬 하나가 외롭게 떠 있다. 갈수기에만 길이 생긴다는 뜬섬, ‘홀로섬’이다. 물이 빠져나가면 해변을 연상시키는 모래사장과 섬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가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고 한다.
▼ 이곳은 일망무제의 조망으로도 유명하다. 코앞으로 다가온 ‘홀로섬’은 물론이고, 멀리 보이는 첩첩이 쌓인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그 위를 뭉실뭉실 떠가는 구름, 어느 유명화가가 저런 풍광을 화폭에 담아낼 수 있을까.
▼ 몇 걸음 더 걸으면 ‘슬픈 연가(권상우·김희선 주연)’ 촬영지다. 엇갈린 운명 속에 서로를 사랑하게 된 네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MBC에서 ‘공전의 히트’라는 사고를 쳤었다. 그밖에도 <나의 절친 악당들> <7년의 밤> 같은 현대물과 <창궐> <역린> 같은 시대물 등 수많은 작품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던 모양이다. 길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안내판들이 그 증거다.
▼ 세트(두 주인공이 어린 시절 추억을 쌓던 오두막집)는 철거된 지 이미 오래, 서너 곳에 세워놓은 푯말만이 이곳이 드라마 촬영지였음을 알려준다. 지자체는 그 빈자리를 액자형의 포토죤으로 채워 넣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으로도 모자라, 권상우와 김희선의 잔영까지 넣어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촬영지 부근, 대나무에 둘러싸인 담장과 장독대가 눈에 띈다. 대청호에 수몰된 옛 풍경을 복원해 놓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터를 잘못 잡았다는 생각은 나만의 편견일까?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물속마을 정원’이 제 자리일 것 같기에 넋두리를 늘어놔봤다.
▼ 시원한 호수바람을 맞으며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몰민의 옛 추억을 어루만지는 ‘물속마을 정원’을 만난다. 지난 1980년 대청호 건설로 수몰된 86개 지역 중 한 곳으로, 물에 잠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고 한다. 저녁이면 밥 짓는 냄새 가득하던 마을도, 친구들과 뛰어놀던 앞산과 뒷산도, 모두 물속에 잠겨 이제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단다.
▼ 이곳에 살던 사람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래선지 정원은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미로를 연상시키는 정원은 자그마했고, 그 주변에 이층의 정자와 물속마을 정원에 대한 안내판, 그리고 벤치 몇 개가 놓여있을 따름이다. 수몰의 기억보다는 그저 ‘관광 상품’으로 존재한다고나 할까? 참고로 1981년에 완공된 대청댐은 4075가구 2만6178명의 이주민을 만들어냈다.
▼ 몇 걸음 더 걸어 만나게 되는 삼거리는 헷갈리기 딱 좋은 곳이다. 오백리길 이정표(전망대 0.1㎞/ 물속마을정원 0.1㎞)는 100m 전방에 있는 전망대를 가리키는데, 또 다른 이정표(추동소한터 900m/ 명상정원 400m)가 이를 무시하고 곧장 ‘추동 소한터’로 가라는 것이다.
▼ 우리 부부는 오백리길 이정표를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100m쯤 떨어진 곳에서 데크 전망대를 만날 수 있었다.
▼ 전망대에 서면 반도처럼 호수 가운데로 길쭉이 나아간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방금 전까지 내 눈을 즐겁게 해주던 ‘명상정원’과 ‘슬픈연가 촬영지’다. 사람들은 대청호를 ‘내륙의 바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바다는 도시의 시끌벅적한 해수욕장보다는 외딴 섬의 고요한 해변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