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수정은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한탄강 상류 물가 언덕에 있다.
1. 양사언 어머니의 재기(才氣)에 넘치는 지혜.
봉래 양사언은 그의 이름이 높은 만큼이나 풀리지 않는 여러 설화들이 따라다닌다. 한석봉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명필가 봉래의 어머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그의 어머니는 촌가 출신으로 13세 때의 일이다. 그녀가 혼자 집을 보고 있을 때 마침 한 길손이 대문을 두드렸다. 길손의 사연인즉 “말이 지쳐서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으니 좀 쉬어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소녀였던 양사언의 어머니는 “제가 말죽을 쑤어드리지요”하고는 돗자리를 들고 와 그 길손도 나무 밑에서 쉬게 하고 말죽뿐 아니라 그 길손에게 밥 한 상을 잘 차려 접대하였다.
소녀는 또 “말이 지쳤으면 손님께선 얼마나 더 시장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해 길손은 그 친절함에 더욱 반하게 되었다. 밥을 먹던 길손은 먼발치에서 그 소녀를 아무리 보아도 영리하고 심부름하는 맵시가 귀히 살 만하였다. 또한 몇 마디 물어봐도 나직하고 다소곳이 대답하는 품이 여간 귀엽지가 않았고, 조리 정연한 말솜씨에 놀랐다. 공손하고 절도 있는 소녀의 행실에 반하여 그 길손은 자기의 신분을 밝혔다. 다름 아닌 그 고을 사또였다. 사또는 가지고 다니든 애지중지하던 부채를 채단(采緞)처럼 생각하라며 선물로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후일에 그 고을 사또의 후실이 되였다.
2. 서자(庶子)에서 적자(嫡子)가 되다.
우리 역사에서 첩실의 아들이 봉래처럼 본실의 아들로 된 예는 아주 드문 일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정실이 죽으니 봉래의 어머니는 정실처럼 들어앉아 크나큰 살림을 맡게 되었다. 어느 세 두 아들을 낳아 사언, 사기 두 형제의 어머니가 된 부인은 전처 소생인 양사준 까지를 돌보면서 대. 소사를 주장하게 되었다. 성장할수록 부인이 낳은 양사언과 양사기는 물론 본실의 아들 양사준 삼 형제의 재주는 참으로 뛰어 났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재기가 넘쳐흘렀다. 특히 양사언의 재기(才氣)에 놀란 주위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적서(嫡庶)의 차이가 심하였고 서자는 한스런 신분으로 평생을 보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두 아들 사언. 사기 형제의 머리 위에 띄어진 서자의 너울을 벗겨 보자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위 사진- 포천 금수정 물 가운데 봉래 휘호 암각 문이 새겨진 바위)
때마침 양봉래의 아버지가 죽게 되었다. 집안은 장례문제로 분주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장례절차를 모두 보살핀 끝에 성복(成服-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날) 이 다가오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어코 그녀의 한스런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의 어머니는 지극한 태도로 눈을 바로 뜨고 본실의 아들 양사준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결심 한 듯 입을 열었다. "첩이 양씨 가문에 들어와서 두 아들을 낳았으나 우리나라 풍습은 적서를 심하게 갈라놓고 있으니 슬프기만 합니다. 아들이 재주 있고 풍채 비록 남다르다 하나 서자의 너울을 벗을 길이 없읍니다."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양사언의 어머니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첩이 또한 이 다음에 서모의 누를 가진 채 흙을 쓰고 죽는 날에도 우리 큰아드님(양사준)께서는 석 달 복밖에 입지 않을 터이니, 이리되면 그 때가서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소리를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영감님의 성복 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동하여 남들이 모를 것입니다.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하리까마는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란 말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봉래의 어머니는 고개를 들고 품속에 감추어 두었던 칼을 꺼내어 땅바닥에 폭삭 엎어졌다. 세 아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일으켜 세웠을 때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여 양사언은 서자에서 적자가 되었다.
명필로 이름난 봉래에 관한 이 설화는 여러 문헌자료집에 실려 있는 것으로 양사언의 출생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계서야담(溪西野談)에 2편, 청구야담(靑丘野談)·해동야서(海東野書)·동야휘집(東野彙輯)·기문총화(記聞叢話)·선언편(選諺篇)에 각각 1편씩 수록되어 있다. 또한 근년에 발간된 양사언부대야담연구(권태을, 상주농업전문대학 논문집, 1982), 양사언설화연구(김대숙, 梨花語文論集 7, 1984)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정조실록 2년 8월 삭(朔)조에 서얼(庶孼)에게도 벼슬자리를 요구하는 명문장의 상소문에도 양사언이 서자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3. 인물 양사언.
봉래(蓬萊) 양사언은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로 본관은 청주이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봉해(蓬海)등 다양한 필호(筆號)를 사용하였다.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글에 능하였다. 아들 만고(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왼편 사진- 봉래 선생의 휘호 암각문<경도(瓊島)>
봉래는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 여덟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하였으며, 만폭동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새겨진 그의 글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 군수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북변의 병란을 미리 예측하고 마초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함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 -조선 태조의 증조부인 익조의 능으로 함경남도 안변의 서쪽 서곡현에 있다.)에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해서로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 돌아오는 길에 병고로 인하여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봉래는 40년 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아니하였다. 그의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김구·석봉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한시와 글씨에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워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평을 받았다.
가사에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과 1555년의 을묘왜란 때 남정군을 따라 전쟁터에 나갔다가 지은 남정가(南征歌)가 있다. 이밖에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한편, 그는 남사고에게서 역술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봉래집(蓬萊集)이 있고, 그가 지은 〈미인별곡〉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4. 풀릴 듯 한 사생활의 의문들.
예술품이란 감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하여야 한다. 아무리 글씨를 모른다 해도 이 글씨를 보고 감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초서로서의 둥글게 돌아간 필획은 짜임세가 어느 한곳 모자라는 데가 없다. 왼편 사진은 포천시 금수정 한탄강 상류 물 가운데 바위 위에 새겨 져 있는 경도(瓊島)라는 글씨 탁본으로 글씨의 크기는 한 글자가 약 1 m 20 cm 가 조금 넘는다. 경도(瓊島)의 의미는 옥 바위섬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북경 북해공원의 호수 안에 있다. 경도(瓊島)라는 어휘의 유래는 본래에 북경의 고궁 서편 북해공원에 있는 황제의 궁원 안쪽 한 돌 섬이다. 북해공원은 바다가 아니라 아름다운 인공호수로 북경 서쪽 교외에 있는 옥천산에서 솟는 샘물을 끌어서 만든 호수 공원으로 그 규모가 자금성에 필적한다. 경도(瓊島)가 생긴 연유를 살펴 본다면 900 년 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금수정 앞 한탄강 상류 물가운데 바위에 세겨진 양사언의 휘호 <경도>
금 나라의 군대가 북송의 수도였던 지금의 개봉 시를 1128년에 무너뜨리고, 그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이름난 돌을 탈취하여 북경으로 가지고 돌아와 그것을 기념으로 조성한 바위 섬 이 바로 경도(瓊島)이었다. 그래서 북경에서 가장 오래된 900년 역사를 지닌 호수공원이다. 봉래는 그 유서 깊은 경도(瓊島)가 여기 포천의 금수정 아래 바위라고 여긴 듯 멋들어진 휘호를 남겼다. 보고 또 보아도 멋들어진 휘호임에 틀림이 없다.
의문스러운 문제는 봉래가 어떠한 사유로 이 물가에 여러 점의 암각 문을 남겼을까. 봉래 에 관한 연보(年譜)와 여러 전적을 들추어보아도 별 실마리를 찾지 못하였다. 사실 봉래는 만인에게 회자되는 시조 "태산이 높다하되"로 이름만 높았지 그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미약한 상태이다. 2001년에 간행된 홍순석 님의 강남대학교 출판부 간행 <楊士彦의 生涯와 詩>가 유일한 자료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하다. 그 이외에 봉래 선생의 서예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는 거의 없던 차, 2004년에 경기대학교 예술대학원의 강양희님의 석사학위논문 <봉래 양사언의 서예연구>와 2005년에 대전대학교 대학원의 조향진님의 같은 제목의 석사학위논문이 봉래의 서예에 관한 연구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자료에도 금수정 물가의 봉래의 휘호 암각 문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표현한 자료는 없었다. 그러한 의문을 품고 금수정 물가의 암각 문 휘호를 더듬고 다니는데 마침 근처 마을에 사는 초로(初老)의 안동 김씨 부인과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안동 김씨의 집성촌이었는데, 봉래는 안동 김씨 집안의 규수와 혼 외의 연을 맺으며 자녀를 낳고 살았다는 것이 김씨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란다. 공식적으로 봉래는 음성 박씨와 혼인하였으나 소생이 없이 죽자, 간성 이씨를 재취로 하여 독자 아들 만고(萬古)뿐이라고 전해온다. 그러나 봉래에게는 네 명의 서자(萬世, 萬善, 萬春, 萬祥)와 세 명의 서녀가 있었다는 기록을 여기 저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첫댓글 감동적인 글 읽었어요
더카님의 글에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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