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시간 여행을 떠났다. 다리는 안 떨리는데 가슴이 쿵닥쿵닥거린다. 장화 모양의 나라엘 갔다. 서유럽 패키지여행 이래 한 다스여 년만이다. 중세의 르네상스를 회상하는데 수박 겉핥기일 수밖에 없지만 일말이나마 관조하고 싶었다. 두 가족 넷이서 벤츠 9인승 신형을 렌트하여 거대한 반도를 누볐다. 밀밭 근처만 가도 취하는, 미국 유학과 유럽 여행의 렌트카 경험이 풍부한 L교수 덕분에 여정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는 대충 봐서 산지와 평야의 비율이 우리나라와 반대인 듯했다. 올리브의 주산국답게 고속국도 주변의 질펀한 넓은 들마다 녹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옥수수 재배도 많이할 뿐만 아니라 들판에 널려있는 사일리지를 보고 축산업의 비중이 큰 나라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나라는 듣던 대로 음식과 사랑, 예술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역할이 일행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탈리안 푸드로 파스타와 피자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출국하기 전에 파스타 면을 포크로 돌돌 마는 연습도 해봤다. 기대와는 달리 여행 중엔 이들 음식을 신물이 나도록 먹었다. 혼줄이 난 것은 무진한 염도 때문이다. 로마 교황청은 교황님 비만의 주범이 ‘파스타’로 단정하고 오죽하면 ‘파스타 금지령’까지 내렸을까. 날씨 또한 한낮 기온이 연일 38℃를 오르내렸다. 아마 동방의 여행자가 열사병에 대처하란 의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리 이름이 긴 것이 많았다. 피렌체의 최고 요리가 ‘피렌체 비프스테이크’인데 일명 ‘티본스테이크’를 ‘비스테카 알라 피오랜티나(Bistecca alla Fiorentina)'라고 했다. 소금과 후추만으로 간을 맞춰 참나무 숯에 구워 내 소고기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 고가임에도 후회없이 입이 분주했다.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고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H. 헤세의 〈싯달타〉에서 그린 말이다. 강의 생성도 소멸도 그렇지만 도시 형성에도 큰 몫을 한다. 서울의 한강, 대구의 금호강처럼 토스카나의 주도이자 중세 르네상스를 낳고 활짝 꽃피운 곳 피렌체에는 ‘아르노 강’이 흐르고 있다. 이 강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지만 그 중에 ‘베키오 다리’가 책으로 말하면 단연 압권이다. 《신곡》, 《향연》 등으로 널리 알려진 단테가 불과 9살 때 8살의 베아트리체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고 알려진 곳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랑의 자물쇠’는 본인들의 사랑의 결속뿐만 아니라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하늘나라에서도 인연이 되어 새삼 아름다운 이야기로 엮으라고 아르노 강물이 재잘거린다.
이탈리아에 와서 그도 피렌체에 와서 단테를 안만난데서야. 그의 조각상이 산타크로체 교회 앞에 지켜 서서 산타크로체 광장을 응시하는 그의 눈매에 상념이 가득하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고뇌하는 시인 단테를 염두에 두어 제작한 것이라면, 정작 단테상은 무엇에 초점을 두고 있으려나. 베아트리체와의 첫 만남일까 이별일까 아니면 중세를 돌체(Dolce)로 마감한 《신곡》을 쓰게 된 동기일까?
만물은 진화하고 발전하듯이 예술 또한 그러하다. 회화에서 마사초가 도입한 원근법이 보티첼리에 의해 원근법과 조화를 더욱 발전시키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정형화되어 르네상스 미술의 틀이 된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은, 북극 여행에서 백야와 오로라를 동시에 본 것 같은 행운에 사로잡힌다. 한편으로 지오토 디 본도네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가 고딕회화를 완성했데서가 아니라 서양 미술사 최초로 인간 내면을 작품으로 표현했다는 데 있었다. 겉으로 나타난 현상보다 내면의 본질을 갈구하는 것이 수필이 아니던가! 지오토 작품 앞에서 나도 모르게 다른 작품보다 더 오래 머문 것을 느낀 것은 아내가 일행 놓친다고 손을 잡아끌어서이다.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 미술의 보고다. 우피치(Uffizi)는 집무실이라는 오피스(Office)의 이탈리아어이다. 르네상스의 가장 큰 조력자는 상인 가문에서 출발하여 2백 50년 넘게 토스카나 지방의 권력을 장악했던 ‘메디치가문’이 있었다. 그 가문이 수집했던 예술품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나는 듬성듬성 맨 먼저 전시홀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지나치지만 다른 일행은 그들의 격조 높은 예술적 안목을 확인하는 듯했다. 주로 회화는 실내에, 조각은 복도에 전시되어 있다. 조각 예술에서의 고전이 고대 아테네라면, 회화예술의 고전은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라고 하지 않던가! 누드에서 여자의 곡선미나 남자의 근육미는 월등했다. 괴이하게 생각한 것은 여성의 유방이나 복부 및 하체는, 특히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 같은 작품은 풍만하고 우아하다 못해 10등신까지 표현하여 동공을 저절로 크게 하는데, 조각 작품에서 남성의 거시기는 어마어마한 덩치와 근육질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 연유가 궁금해진다. 그 시대상인 금욕주의? 남근을 사이즈와 스킬로 빗댄 말에 ‘금상첨화, 유명무실, 천만다행, 설상가상’ 이 있다. 어디에 해당되려는지.
전번에 방문한 로마를 제외하고 12일간 대·중·소 16개 도시를 더듬었다. 그 중에서도 피렌체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것은 르네상스가 태어난 시기에 대한 논란은 있어도 발생한 장소가 이곳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는 중론에, 그것을 선도한 인물들 또한 거의 피렌체가 아니면 인근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왼발 엄지발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오른발 앞부분에 뚝살이 맺혔지만 마음은 창공에 있고 몸은 구름 위에 있었다. 내일을 위해 우리 일행은 에어컨디셔너가 작동하는 카페에 들러 우리의 그림자와 발바닥을 쉬게 했다.
시원하고 안락한 의자 덕분에 잠시 4반세기 미래행 타임머신을 타게 되었다. 메디치 가문이 상업으로 재력을 축적하고 권력을 잡아 왕정도 이루었지만 돈과 권력이 있다고 르네상스를 꽃피울 수 있는 건 아니잖던가. ‘예술의 생산 방식을 바꿔 르네상스를 견인하고, 부의 목적을 재정립하여 가문의 명예를 남기자.’는 가문훈이 어두웠던 중세를 아침 햇살처럼 온 누리를 밝힌듯하다. 그 가문의 그 딸이랄까, 메디치가의 마지막 상속녀였던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국가에 기증하면서 현재의 우피치 미술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돈 있는 곳에 예술 있다.”는 이탈리아 속담을 어떻게 수용해야 탁월한 판단이 될는지. 우리나라의 재벌들은 어떨까? 그러는 사이 서울과 대구에 매머드 종합 예술관을 ‘우피치 미술관’ 못지않게 건립하느라 야단법석스럽다. 재벌들의 소장품과 시민들이 소장한 애지중지했던 작품도 함께…. 성금은 부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듯이 온 국민의 정성으로 문화 대한민국이 건립되고 있었다. 대구 종합 예술관에는 큼직한 별 3개의 로고가 펄럭이고 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에서 잠자던 르네상스를 잠시 흔들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한편 아원자 입자(亞元子 粒子)가 되어 타임머신에 승선해보니 더더욱 스릴을 만끽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