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가지산 보림사 소개
장흥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신라 경덕왕18년(759)에
화엄종 승려 원표대덕이 당나라와 인도의 불교성지를 두루 순례하고 돌아와 이곳에 가지산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한다.
사진 위로부터
보림사 주차장
주차장옆 약수
주차장옆 약수터
일주문옆 담장
일주문옆 안내판
보림사 안내도
창건 당시에는 화엄종 사찰이었지만 헌강왕4년(860)에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 맨 처음으로 가지산문을 개산하여 선종의 대가람으로 변신했다.
사진 위로 부터
보조선사 창성탑과 탑비
동부도군 원경
동부도군
동부도군
동부도군
보림사 동부도(보물제155호)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더불어 가지산 보림사는 세계 3대보림의 하나라고 한다.
보림사에서 처음 만나는 일주문격인 외호문은 화려하면서도 장중 하다.
사진 위로부터
보림사 일주문
보림사 일주문
일주문 현판
잉주문 내부현판
일주문 내부가구
일주문에서 보는 천왕문과 보림사 경내
천왕문은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집 구조로, 그 안에 안치된 사천왕상은 중종 34년(1539년)에 처음 조성되어 정조 때 (1780년) 중수된 것으로 우리나라 목각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인 만큼 보물제1254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하고 있다.
사진 위로부터
사천문 전경
사천왕상
사천왕상
금강역사상
사진 위로부터
사천문에서 보는 일주문쪽
사천문에서 보는 경내
사천문 현판
보통 사천왕상은 마귀를 짓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에서는 갈색 유리로 만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방지국천왕의 발을 들어 받들고 있다.
보림사에는 특이하게 마당 한가운데 수량이 늘 일정하게 나오는 약수가 있다.
이 약수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제는 "보림사" 자체 보다는 "보림사 약수"가 사람들을 더 끌어 들이고 있다고 할 정도다.
사진 위로부터
보림사경내와 약수각
보림사 경내 약수각
보림사 경내
보림사 요사의 장독대
보림사 외벽화
천년이 넘게 늘 한결 같이 물줄기를 뿜어내는 이 샘은 보림사의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수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물로 갈증을 풀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고승.명승과 대덕들이 이 물을 마시며 수도.정진하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을가?
특이한 맛이 없는 이 샘물은 가뭄에 마르거나 장마에 넘치는 법이 없어,
한국자연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한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물이라고 한다.
사진 위로부터
보조국사 창성탑에서 보는 경내
보림사 경내
보림사 경내
보림사 범종각
일주문과사천문 사이의 정경
가지산자락에 아담하고 포근하게 앉아 있는 보림사는 세상과 동떨어진 마음의 안식처 같은 곳으로 누구나 잠간 들러서 세속의 걱정과 근심을 털어버리고 올 수 있는 절집이다.
보림사에는 세군데 부도군이 자리잡고 있는 특징이다.
경내에는 보조국사 탑과 탑비가 있으며, 숲을 따라 200m 정도 걸어가면 동부도군이 있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서부도군이 있다.
사진 위로부터
보조국사 창성탑(보물제1157호)
탑신조각
탑신조각
사진 위로부터
보조국사 창성탑비(보물제158호)
창성탑비 줜경
목없는 불상
보림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신라로 돌아와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같은 절 지을 곳을 찾아 다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만들어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견디고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 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개 눈병이 돌게 한 뒤 이 연못에 흙과 돌을 던지면 낫는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몰려가 돌과 흙을 던지니 용이 더 이상 살수 없어 쫓겨갔고 그 자리에 보림사를 지었다한다고 한다.
그 옛날 흙과 돌맹이로 무자비 하게 용들의 보금자리를 빼았은 인간들이 이제는 댐건설로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수몰선 위쪽으로
쫓겨나고 억울하게 보금자리를 떠나야 했던 용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다시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게 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후 여러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법맥을 이어오던 보림사는 1951년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불을 질러 버렸다고 한다.
사진 위로부터
보림사 대웅전
보림사 대웅전
보림사 대웅전현판
보림사 대웅전
보림사 대웅전앞 괘불지주대
당시 화마를 피한 건물은 일주문격인 외호문과 천왕문뿐이다.
사진 위로부터
보림사 대적광전과 동.서탑.석등
보림사 대적광전
보림사 대적광전내 국보제118호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보림사 대적광전 문창살
보림사 대적광전 문창살
대적광전 앞의 쌍탑과 석등은 일찍이 국보44호로 지정된 9세기 전형적인 양식이다.
특히 이 쌍탑과 석등은 상륜부가 완전하여 우리 나라 삼층석탑 복원의 한 기준이 되고 있다.
사진 위로부터
국보제44호 보림사 삼층석탑과 석등
국보제44호 보림사 삼층석탑과 석등
국보제44호 보림사 삼층석탑과 석등
국보제44호 보림사 삼층석탑과 석등
보림사 삼층석탑
보림사 석등
보림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보조선사 체징(體澄,804~880)의 비문에 자세하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래 원표(元表)대사가 창건한 절로 체징이 당나라 유학 후 설악산 억성사의 염거화상 문하로 들어가 정진한 다음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이곳 가지산 보림사에서 선종을 일으키니, 도의선사, 염거화상, 보조체징으로 이어지는 한국 선종의 종가로 된 것이다.
체징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헌안왕은 스님의 시호를 보조라 내리고 그 사리탑의 이름은 창성(彰聖)이라 지어주며
비문의 글씨는 첫 행부터 7행 중간 선(禪)자까지는
그것이 지금 보물 157호와 158호로 지정된 보조선사의 부도와 비석이다.
또한 보림사의 쌍탑은 헌안왕의 뒤를 이은 경문왕이 조성했는데,
그는 헌안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에 올라 헌안왕에 대한 보은과 극락왕생을 위하여 3층 쌍탑을 조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보림사란 이름도 그대로 옮겨 줌으로써 우리나라
사진 위로부터
보림사 삼층석탑
밖에서보는 대웅보전 뒤쪽
보림사 경내 동백나무
수몰되기 직전의 수몰예정지역
보림사 입구의 찻집
장흥 가지산 보림사의 문화재 소개
*국보44호 보림사삼층석탑및석등(寶林寺三層石塔및石燈)
보림사 앞뜰에는 2기의 석탑과 1기의 석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으며,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데 비해 아래층은 작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으며, 각 층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새겼는데,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석등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들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진 위로부터
국보 44호보림사 삼층석탑및 석등
동탑
서탑
동탑기단부…동탑의 기단부는 상층 기단이 큰 데 비하여 하층 기단은 작고 좁은 편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다. 탱주의 수가 하층 기단에 2개, 상층 기단에는 1개로 줄어 들었다. 상층 기단을 덮고 있는 갑석(甲石) 등이 얇아서 평판의 느낌이 든다. 기단부 정면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있다.
서탑기단부…동탑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상층 기단이 하층 기단에 비해 폭이 넓고 크기도 크다. 탱주의 수가 하층 기단 2개, 상층 기단 1개로 그 수가 줄어들었다. 상층 기단을 덮는 갑석 등 각 부의 석재가 전체적으로 얇은 느낌이 든다. 기단부 정면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다.
동탑 탑신부…. 3층으로 되어 있는 탑신은 모두 하나의 돌로써 층을 이루고 있다. 비례적으로 볼 때 1층 탑신에서 2층 탑신으로 가면서 급격히 탑신의 높이가 낮아지고 있다. 각 층 탑신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새겨져 있다.
서탑탑신부……동탑과 마찬가지로 3층으로 되어 있는 탑신은 모두 하나의 돌로써 층을 이루고 있다. 비례적으로 볼 때 1층 탑신에서 2층 탑신으로 가면서 급격히 탑신의 높이가 낮아지고 있다. 각 층 탑신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새겨져 있다.
동탑옥개석………각 층 위에 있는 옥개석 역시 하나의 돌로써 이루어져 있다. 옥개 받침은 5단으로서 통일 신라 전성기 때의 받침 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옥개석 네 모서리가 날카로우면서 귀끝의 반전이 심하며 자연스럽지 못하여 전체적인 둔탁한 느낌을 준다.
사진 위로부터
서탑옥개석…….. 동탑과 마찬가지로 각 층 위에 있는 옥개석 역시 하나의 돌로써 이루어져 있다. 옥개 받침은 5단으로서 통일 신라 전성기 때의 받침 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옥개석 전각의 심한 반전이라든지 얇아진 추녀 등에서 앞 시기의 장중한 조형에서 후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동탑상륜부………상륜부는 후대에 이르러 중수에 따라 보완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보주 등 상륜부의 부재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다. 네모난 앙화(仰花)의 네 모서리에는 문양이 새겨진 꽃잎이 각각 1장씩 마련되어 있다. 5개의 보륜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이 새겨져 있다.
서탑상륜부………. 상륜부는 후대에 중수에 따라 보완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보주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상륜부의 모양에 있어서도 여의두문이 새겨진 보륜 등 동탑과 차이가 없다. 하지만, 보륜의 수에서 동탑은 5개, 서탑은 3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석등
석등의
석등상대석…상대석 밑면에는 3단의 연꽃 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1단의 높은 화사 받침을 새겨서 마련하였다. 상하 2중으로 겹쳐서 조각된 연꽃 안에는 화엽문(花葉文)을 장식하였고, 연꽃잎 사이사이마다 다시 3중의 꽃잎으로 장식하여 마무리지었다.
석등화사석……8각으로 된 화사석(火舍石)은 불을 밝혔던 곳인데, 4면에 불빛이 외부로 퍼져나가게 하기 위하여 화창(火窓)을 뚫었다. 화창 주위에는 1단의 액(額)이 마련되고 거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이것은 바람으로 인해 불이 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창호를 고정시키기 위한 장치를 달았던 곳으로 보인다.석등옥개석과 상륜부…옥개석은 8각에 넓고 지붕이 약간 위로 쳐들린 형태인데 위에는 귀꽃이 표현되었으며 정상 주변에 연꽃을 조각하고 있다. 상륜부는 연꽃 받침 위에 위 아래가 눌린 공 모양의 보륜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을 축소한 보개를 얹고 다시 보주를 얹었다. 보개 밑면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국보177호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팽창된 체구와 가슴의 표현 등은 당당해 보이면서도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 들었고, 몸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손과 넓은 무릎은 불상의 전체적인 균형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사진 위로부터
국보177호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177호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제156호 보림사서부도
서부도 탑신부 .옥개석. 상륜부
*보물제156호 보림사서부도(寶林寺西浮屠) (사진 위)
보림사의 서쪽에 있는 부도 2기로, 보림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하나는,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네모반듯한 바닥돌 위로 3단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는 2겹의 연꽃무늬를 새기고, 두껍고 넓은 가운데받침돌은 모서리마다 구슬을 꿰어놓은 듯한 기둥을 조각해 놓아 독특한 모습이다.
윗받침돌은 아래받침돌과 그 크기와 넓이가 비슷하며, 8장의 연꽃잎을 새겨두었다.
탑신의 몸돌에는 한쪽 면에 문짝 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문고리 2개를 본떠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꽤 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살짝 들려있다.
또 다른 부도도 역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기단의 모습이 위에서 말한 부도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가운데받침돌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고, 윗받침돌이 오른쪽 부도보다 얇고 넓다는 점이 다르다.
탑신의 몸돌 한 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대부분 깨어져 있어 그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위의 부도가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지나치게 장식적인데 비해, 이 부도는 우아하긴 하나 장식성이 떨어져 전체적으로 위축된 것처럼 보인다. 2기 모두 마무리 수법이 같으며, 만들어진 때는 고려 중기로 짐작된다.
머리장식은 모두 온전하게 남아있는데, 1941년 사리를 두는 장치가 도굴되어 1944년 다시 만들어 놓았다.
*보물제155호 보림사동부도(寶林寺東浮屠)
동부도는 보림사 동쪽 숲 속에 있는 여러 부도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각 부분이 8각으로 깍여져 있다. 3단으로 된 기단의 맨아랫단과 맨윗단에는 8잎의 연꽃잎을 둘러 새기고 각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얹은 모습으로, 가운데는 8각의 기둥을 낮게 두었다.
탑신은 한 면에만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새기고, 지붕돌은 다른 부분에 비해 좁고 낮은 편이다.
사진 위로부터
보물제155호 보림사동부도
동부도 기단부
동부도 문비
보물제157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
창성탑 기단부
창성탑의 탑신부 신장상과 문비
창성탑의 사천왕상
*보물제157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사진 위)
보림사에 세워져 있는 사리탑으로, 보조선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보조선사(804∼880)는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 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탑은 바닥돌부터 지붕돌까지 모두 8각으로, 통일신라 부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의 아래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하였고,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로 띠를 두른 약간 배가 부른 모습이다.
8개의 큰 연꽃조각 위에 놓여진 탑신의 몸돌은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그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겼다.
두터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서까래를 표현해 놓았고, 윗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파여져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완전한 모양은 아니지만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탑신의 몸돌이 지붕돌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지붕돌의 질감이 달라서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다.
일제시대 때 사리구를 도둑맞아 쓰러졌던 것을 복원한 바 있는데 이때 일부분이 손상되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보물제158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사진 위로부터
보물제158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
창성탑비 이수
창성탑비 비문
창성탑비 구름무늬
비는 거북받침돌의 머리가 용머리를 하고 있어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나운 모습이며, 등 뒤에는 육각형의 무늬가 전체를 덮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 장식해 놓았다.
비몸돌에는 보조선사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의 모습을 웅대하게 조각하였고, 앞면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영’이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다.
통일신라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비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보물제772-3호 금강경삼가해-권1(金剛經三家解-卷1)(사진생략)
이 책은『금강경』에 대한 주석서『금강경오가해』중 송나라 야보(冶父)와 종경(宗鏡), 그리고 조선 전기의 고승인 기화(己和)3인의 주석을 뽑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성종 13년(1482)에 세조의 비인 자성대왕대비의 명에 의하여 본문의 큰 글씨는 정축자(丁丑字)로, 풀이 부분의 중간 글씨와 작은 글씨는 을해자(乙亥字)로 찍어낸 활자본이다.
활자본은 글자를 하나하나 파서 고정된 틀에 끼워 찍어낸 것을 말하며, 정축년에 찍어낸 것을 정축자본, 을해년에 찍어낸 것을 을해자본이라고 한다.
책 끝부분에 있는
불경의 간행이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왕실사업으로 계승되었다는 점과 함께 한글의 표기형식이 혼용되어 있어 한글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보물제745-9호 월인석보<권제25>(月印釋譜<卷第二十五>)(사진 생략)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석보는 석가모니불의 년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 28년(1446)소헌왕후 심씨가 죽자 세종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명하여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 곧『석보상절』이다.
세종 29년(1447)세종은『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월인천강지곡』이다.『월인석보』는 완질이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전권의 수량은 확인할 수 없다. 이『월인석보』권 25의 편찬체제는 먼저『월인천강지곡』을 배열하고 이어 여기에 해당하는『석보상절』의 내용을 해설형식으로 실었다.
그렇지만『월인석보』편찬 때 기존의『석보상절』의 내용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 아니라 이를 수정, 보완하여 여러 경전에서 내용을 첨삭하여 싣고 있다. 이 권 25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권의 2장과 일부가 탈락되어 있다.
전체분량 5분의 2에 해당되는 전반부는 2∼4수로 추정되고, 후반부는『월인천강지곡』577∼583까지의 7수와『석보상절』권 24의 내용을 중심으로 싣고 있다.
월인석보』의 총 권수는 24권 혹은 25권으로 추정되어 왔는데 이번에 권 25가 새로이 발견됨에 따라『월인석보』가 전체 25권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 한국불교 및 문헌학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맞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보물제1252호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권제9∼10>(사진 생략)
자비도량참법은 경전을 읽으면서 죄를 참회하는 불교의식집을 말하며, 이를 수행하면 영험을 받을 수 있어 죄가 없어지고 복이 생긴다고 한다.
나아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여 극락으로 인도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공덕 기원의 뜻을 담고 있다. 이 책은『자비도량참법』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착오가 생기고 잘못 전해지자 여러 고승들이 다시 바르게 교정한 것으로, 10권 가운데 권 제9와 10이다.
나무에 새겨 찍어낸 목판본으로 2권이 한 책으로 되어 있다.
세종 29년(1447)에 김구덕의 아들과 명빈 설월헌인(雪月軒人)등이 태종, 원경왕후, 소헌왕후 그리고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새긴 것을 세조 8년(1462)에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다시 찍어 낸 것이다.
이 책은 이와 유사한 판본의 간행연도 추정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조선초 불교의식 연구와 간경도감의 성격 연구에도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보물제1254호 보림사목조사천왕상(寶林寺木造四天王像)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사진 위로부터
서방 광목천왕
남방 증장천왕
북방 다문천왕
동방 지국천왕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은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얼굴은 분노한 표정을 하였으며, 복장은 갑옷과 천의(天衣)를 입고 있다.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으로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에서 부드러운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비파를 들고 있으며, 발 아래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다리를 받쳐들고 있다.
남방 증장천왕은 굳게 다문 입과 함께 근엄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고 있으며, 왼손은 무엇인가 쥐고있는 듯한 자세만을 취하고 있다.
당당해 보이는 신체는 수호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지르는 듯한 위엄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에는 깃발을 잡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모습인데 보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대부분이 중국식 갑옷에 각기 다른 상징물을 들고 있으며 발 밑에는 악귀를 밟는 형태상의 특징을 갖는다.
또한 무장한 분노상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보관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돌아 어깨 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자비로운 보살상의 모습이 추가되고 있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이러한 특성을 가장 앞서 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적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천왕문에 걸린 목판과『보림사중창불사기록』에 의하여 중종 10년(1515)에 조성되고 이후 2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각 부의 조각이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기본이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이하 설명.사진 생략)
*시도유형문화재 제194호보림사사천왕상 복장계초심학인문(腹藏戒初心學人文)
*시도유형문화재 제195호 보림사사천왕상 복장고봉화상선요(腹藏高峰和尙禪要)
*시도유형문화재 제196호 보림사사천왕상 복장금강반야론(腹藏金剛般若論)
*시도유형문화재 제197호 보림사사천왕상 복장대방광원각수다라료의경(腹藏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시도유형문화재 제198호 보림사사천왕상 복장대전화상주심경(腹藏大顚和尙注心經)
*시도유형문화재 제199호 보림사사천왕상 복장몽산화상육도보설(腹藏蒙山和尙六道普說)
*시도유형문화재 제200호 보림사사천왕상 복장불설사십이장경(腹藏佛設四十二藏經)
*유형문시도화재 제201호 보림사사천왕상 복장육경합부(腹藏六經合部)
*시도유형문화재 제202호 보림사사천왕상 복장언해판화관계불서(腹藏諺解版畵關係佛書)
*시도유형문화재 제203호 보림사사천왕상 복장진언ㆍ의식관계불서(腹藏眞言ㆍ義式關係佛書)
*시도유형문화재 제204호 보림사사천왕상 복장선종불서(腹藏禪宗佛書)
*시도유형문화재 제205호 보림사사천왕상 복장경전불서(腹藏經典佛書)
첫댓글 종봉형!!! 오래간만에 등극하셨오! 그 글쓰시는 솜씨와 사진 구도 잡아 구성하는 능력이 아마추어를 능가하는 숨은 인재이신데... 그 능력을 계속 발휘하여 주십사 앙망하나이다.
종봉형의 귀하고 좋은 자료 즐감했소이다. 자료가 방대하여 띄엄 띄엄 나누어 여러 차례에 걸쳐 감상해야겠소..앞으로도 계속 좋은 자료 부탁합니다.
감사...
이런곳이 또 있구나. 최근 오래 안보이더니 종봉 형 오랜만에 좋은 글 올리셨습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