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성부인가?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을 봄이라고 부른 이가! 바야흐로 둘레길에 봄이 왔다. 쑥이 파릇파릇하다. 냉이도 땅을 비집고 올라왔다. 그뿐이랴! 시내에는 겨우내 언 물이 조금씩 흐른다. 아직은 시퍼렇게 날 선 바람이지만, 나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공을 비행했다.
둘레길은 '개척'하는 길이 아니라 열어가는 길이다. 끊어진 맥을 잇는 활로이다. 이 마을과 저 마을의 숨통을 트는 마실길이다. 운이 좋아 길을 만나면 다행이지만, 여차하면 길이 막히기 일쑤다.
이번 구간도 그랬다. 둘레길 취재팀은 3차례의 답사 끝에 코스를 정했다. 흙길과 돌담길, 숲길, 적절히 포장도로 등 여러 길이 섞였다. 온 나라를 흔드는 구제역도 이곳 길에 찾아왔다. 걸으면서 우리는 아픈 소를 생각하고, 산 채 묻힌 돼지들을 떠올렸다. 자식 같은 소 돼지를 묻어야 했던 늙은 주인의 한숨도 가슴 속에 담았다. 이 구간의 길은 아직 구제역 파동의 한 가운데에 있다. 하여 봄이 지나고, 구제역이 딴 세상으로 사라진 그 시절에 걷길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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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해운청소년수련원 앞 사거리에서 신발끈을 조였다. 60 평생을 양산 하북면에서 산 김영대(60) 씨가 이번 길을 함께 열었다. 김 씨는 "어머니 손 잡고 밀양 장에 가거나 학교에 갈 때도 이 길을 걸었다. 나는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한 촌로가 되었는데, 길은 오히려 화장한 듯 포장돼 더 말쑥해졌다"며 허허 웃었다.
길가 배추밭에 아낙네들이 바쁘게 김을 매고 있다. '감림산기도원' 안내 간판을 지나 10분 정도 걸었다. 오징어를 말리는 덕장이 있었다. 날씨가 차서 덕장은 잠시 휴업 중이다. 근처에 '피데기 도매' 간판이 서 있다.
군데군데 마을 입구와 이어진 소담스러운 길이 보여 김 씨한테 물었다. 하나 이 길은 나무를 하거나 논밭으로 가는 길이어서 둘레길로 적당하지 않다고 했다.
'삼감농촌건강장수마을'을 지났다. 마을은 몇 년 전부터 장수마을로 정비됐다. 게이트볼장과 청년, 부녀회 배구장을 만들었고 꽃동산휴게소, 노인공동작업장을 설치했다. 적당히 쉴 곳이 없던 주민들에게 마을 곳곳에 사랑방이 생긴 셈이다. 요즘엔 다른 지역 주민들도 견학을 온다.
7분 정도 앞으로 나아가 포구나무를 만났다. 수령이 100년은 거뜬해 보인다. 포구나무 아래를 지나 산 쪽으로 길을 냈다. 창건 20년의 능인정사가 나왔다. 아담한 현대 사찰인데 대웅전 대신 금당이 있다. 한 비구니 스님이 '마을 뒤에 괜찮은 길이 있다'고 알려줬다. 스님 말대로 마을 뒤편 언덕을 따라 걸었다. 언 땅이 녹았는지 땅이 약간 질펀했다. 25분 정도 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길이 조금 길다 싶을 즈음 시원한 대나무 밭이 나타났다. 대나무 밭 사이로 어른 키 높이만 한 골이 깊게 파여, 마치 협곡을 걷는듯했다. '이런 길이 있구나'. 둘레길 팀은 탄성을 질렀다. '쏴쏴'. 댓잎에서 울리는 청량한 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봤다. 파란 봄 하늘이 대나무 끝에 걸려 있다.
대숲에서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앞 논 한가운데에 큰 건물이 있어 둘러봤다. '삼감도예' 건물이다(길언저리 참조). 삼감은 물이 단 우물이 세 곳이라는 데서 따왔다. 지금도 물통샘, 복판샘, 아래샘이 있다. 300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을 수호하고 있다.
마을 신작로를 따라 걷다가 둘레길팀은 즉석 현장 토의를 했다. 아무래도 아스팔트 도로를 꽤 지겹게 걸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지도와 GPS(위성항법장치), 동행한 김 씨의 직감과 기억을 동원해 길을 찾았다. 다행히 30분 정도 탐색하다 썩 괜찮은 길을 발견했다. 이 길을 따라 7분 정도 걸었다. 시멘트로 만든 간이수영장이 보였다. 벽에 수영하는 거북을 뜻하는 '영귀(泳龜)'라는 한자가 쓰여있다. 아마 이 일대 주민들이 전에 공동으로 쓰던 천렵장인 모양이다.
100m 가량 걸었다. 쌍묘가 있다. 대리석으로 봉분을 아예 덮었다. 답답해 보였다. 비문을 보니 한 지역 국회의원의 부친을 묻은 묘이다.
묘에서 매실 과수원을 지나 임도 방향으로 걸었다. 20분 정도 오르막을 걸었다. 떡갈나무의 바스락대는 소리가 상쾌했다.
임도가 나타났다. 이 길은 해발 250~290m 중턱에 난 길인데 평탄해서 걷기에 그다지 무리가 없다. 임도를 따라 우회전했다. 2분쯤 뒤에 한 축산농장이 나타났다. 구제역 때문에 휴업 중이다. 임도를 따라가면서 농장을 쳐다봤다. 규모가 큰 축사에 가축의 울음소리가 없다. 흰 방역복을 입은 인부들만 부지런히 축사를 오갔다.
임도는 두 명이 나란히 걸을 만했다. 소나무, 상수리나무가 길가에 자라고 있다. 모퉁이를 돌자 염수봉, 사자평이 눈에 들어왔다. 산새들이 볕 좋은 곳에서 몸을 비벼대고 있었다.
45분 정도 편안하게 걸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임도가 끝날 무렵 석계오룡산공원묘지 후문을 만났다. 둘레길팀은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엄숙한 표정이었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못한 길'의 지엄함을 시로 노래했다. 하지만 지금 둘레길 답사팀 앞에는 사람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길'을 먼저 간 사람들이 놓여 있었다. 한 생을 마감하는 이름 석 자가 비석에 박혀 있었다.
공원묘지 입구에서 외석천을 따라 난 도로를 700여m 걸었다. 오른쪽 하천 아래 '연귀대(蓮龜臺)'가 있다. 쉬기 좋은 곳이다. 바위에 붉은 석각이 있다. 누군가 치성을 들였는지 양초 찌꺼기들이 보인다.
연귀대에서 15분 정도 걸어 오룡교를 지나, 1028번 지방도를 만났다. 머지않아 만날 밀양 땅에 가려면 이 길밖에 없다고 주민이 알려주었다. 드문드문 차들이 다녀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오른쪽으로 흐르는 내석천 시냇물 소리가 깔끔했다. 40분 정도 걸었다. 약간 지루하다 싶을 때 내석마을 체육공원이 보였다. 100m쯤 더 걸어 내석리 마을회관에 다다랐다. 이번 구간 종점이다. 12.4㎞, 쉬는 시간을 포함해 5시간 30분가량 걸렸다. 글·사진=전대식 기자 pro@
기점인 해운청소년수련원 입구까지 가려면 부산 명륜동에서 양산 방면 12, 12-1, 13번 시내버스를 타야 한다. 부산 북구에서는 구포나 덕천동 정류소에서 양산 방면 63번을 타면 된다. 요금은 1천400원. 버스 노선에 따라 1시간 10분~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자가 승용차를 이용한다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통도사IC를 빠져나와 국도 35번을 타고 통도사 방면으로 15분 정도 달리면 해운청소년수련원이 나온다.
4차 구간이 끝나는 내석리 마을회관에서는 10번, 107번 시내버스(세원버스 055-384-6612)가 양산시외버스터미널까지 운행된다. 오후에는 1시 40분, 3시, 4시 20분, 5시 10분, 7시 50분(막차)에 차가 있다. 소요시간 40~50분, 요금은 1천100원. 버스를 놓쳤다면 택시를 이용하는 게 좋겠다. 석계택시(055-374-7770), 요금 7~8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