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과 저녁은 제법 선선하고, 한낮의 무더위도 슬슬 물러가고 있다. 하늘은 푸르고 높아 청량하다. 걷기에 좋은 계절, 가을이다. 제주에는 정말 걷기 좋은 길이 많다. 주로 해안가를 따라 섬을 일주하는 올레길과 길고 짧은 숲길 및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길 등 다양한 도보 여행 코스가 존재한다. 이번에 소개할 곳은 가시리에 조성된 갑마장길이다.
녹산장, 제주 최대의 산마장
제주를 대표하는 동물 중 하나가 말이다. 예부터 제주 말은 조공으로 바쳐질 정도로 가치가 높았다. 이 말들은 제주의 중산간 지역에서 길러졌는데, 표선면 가시리의 대록산(큰사슴이오름)은 앞 대평원은 여러 산마장(산간 지역의 목장)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이다. 조선 후기에 설치되어 녹산장이란 이름이 붙었던 이 산마장은 규모가 동서로 75리(약 30km), 남북으로 30리(약 12km)에 달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는 최고 등급에 속한 말을 ‘갑마’라고 불렀는데, 정조 때 녹산장이 갑마장으로 지정되며 한동안 갑마를 사육하기도 했다. 1860년경 녹산장은 둔마 수가 1,031필에 달했으나, 1894년 갑오개혁의 영향으로 공마제가 폐지되며 목장도 함께 폐장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터에 조성된 갑마장길은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 풍경을 만끽하며 거닐 수 있는 탐방길이다.
현재는 갑마장 흔적이 많이 사라져 목장이 있었다는 걸 알기 힘들 정도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잣성이 목장이 있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잣성은 목장의 구역을 나눠 경계를 만들고 말에 의해 농경지가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 쌓은 돌담으로, 제주 중산간을 다니다 보면 오름 등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잣성은 해발 고도에 따라 상잣성, 중잣성, 하잣성으로 나뉘는데, 이곳의 잣성은 중잣성에 속한다. 잣성은 제주 중산간에 국영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제주의 목축 문화를 잘 나타내는 유산이자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기에 그 가치는 더욱 크다.
따라비오름과 대록산 사이에 있는 잣성길
갑마장길 및 가름질
갑마장길의 정식 명칭은 갑마장길 및 가름질이다. 갑마장길은 갑마를 기르던 갑마장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가름질은 동네를 뜻하는 제주 방언인 가름과 길을 뜻하는 질이 합쳐진 말로, 작은 마을들을 잇는 길을 의미한다. 갑마장 터와 가시리 마을, 오름과 숲길을 연결해 탄생한 것이 갑마장길 및 가름질이다. 길은 다시 두 코스로 나뉜다. 총 거리 20km인 갑마장길과 총 거리 10.3km인 쫄븐갑마장길로 나뉜다. 갑마장길은 가시리부터 따라비오름, 대록산, 유채꽃프라자를 거쳐 다시 마을로 돌아 나오는 코스이며, 쫄븐갑마장길은 갑마장길의 안쪽 코스인 따라비오름과 대록산, 유채꽃프라자를 거쳐 따라비오름으로 돌아 나오는 짧은 코스이다.
쫄븐갑마장길 코스 지도. 주요 장소들이 이 코스 안에 모여 있고 갑마장길과 겹치는 구간이 많아 쫄븐갑마장길을 걷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대중교통으로 갑마장길을 걷고자 한다면, 가시리 마을에서 출발해 20km를 걷고 돌아나오면 된다. 그러나 7시간 전후로 소요되는 긴 코스인 만큼 아침에 출발해 해가 지기 전에 나오는 것이 좋다. 차량으로 이동한다면, 따라비오름 앞에 주차를 하고 쫄븐갑마장길을 걷는 편이 낫다. 소요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들며, 탐방길의 핵심 장소들이 쫄븐갑마장길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비오름
가시리에서 탐방을 시작하면 따라비오름을 먼저 만나게 된다. 따라비오름은 주차장이 있는 정면에서 보면 여느 오름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해 보인다. 정상에 올라가면 그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따라비오름은 세 굼부리(분화구)와 여섯 봉우리로 이루어진 오름이다. 굼부리가 세 개 겹쳐 있는 용눈이 오름과 흡사한 모습이다. 정상에 올라가면 여러 굼부리가 만들어낸 유려한 곡선이 아름답다. 그 넓이가 넓어 정상의 봉우리를 따라 오르내리며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다.
한가을 봉우리와 굼부리 안을 뒤덮은 억새는 제주의 바다만큼 광활하다. 두터운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햇살이 내리쬘 때면 억새 밭은 그 빛을 그대로 받아 눈부시게 빛나 아름다웠다.
갑마장길이 계속 이어지는 오름 뒤편으로 내려가면 따라비오름의 고운 자태가 두 눈에 부드럽게 들어온다. 군데군데 핀 억새는 오름을 치장해 풍경을 한껏 아름답고 멋들어지게 만든다. 다음을 향해 걷고 있으면 아늑한 정취에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든다. 과연 '오름의 여왕'이라는 별명다운 모습이다. 송당리 쪽에 있는 다랑쉬오름에 붙은 별명도 똑같다. '하나를 가려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당연한 관념에 사로잡혔지만, 두 오름을 모두 다녀온 후에는 '오름의 세계에선 그럴 수 있지'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다랑쉬오름과 비교하면 따라비오름은 잔잔하게 물결이 치는 듯한 곡선미가 좋았다.
대록산
따라비오름에서 잣성길을 지나 걸어가다 보면 두 번째 오름인 대록산(큰사슴이오름)을 만나게 된다. 따라비오름보다 고도가 높고 경사도 가파르지만, 등산로 대부분 구간에 놓인 나무 계단이 등산객의 발걸음을 한결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대록산으로 가는 길에도 억새로 가득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대록산 정상에 올라서면 쉼터를 가로질러 내려갈 수 있는 코스와 둘레를 한 바퀴 돌고 정상으로 향해 하산하는 코스가 있다. 갑마장길 안내판은 둘레길을 통과하는 코스를 기본으로 안내한다. 둘레길은 나무로 가득하다. 막 초겨울로 접어들 무렵 나무는 꽃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길게 뻗어 있었지만, 그 울창함은 살아 있었다.
둘레길을 빠져 나오면 나무 의자가 3개 있는 조그마한 정상 쉼터가 전망이 내려다 보이는 방향으로 나 있다. 한결같이 영험한 한라산을 비롯해 푸른 못을 앞에 둔 영주산이 눈에 띈다. 날씨가 좋을 때는 20km쯤 떨어진 성산 바다와 일출봉까지 거뜬히 보인다.
따라비오름
영주산과 성산읍
억새가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프라자
유채꽃프라자의 억새
가을엔 뭐니뭐니해도 억새다. 정상에서 정면 아래를 내려다 보면 억새가 빼곡한 밭이 당장이라도 달려가 몸을 던지고 싶게 만든다. 대록산을 내려가면 유채꽃프라자를 전후로 한없이 넓은 억새 벌판이 펼쳐진다. 봄에는 건물의 이름대로 화사하고 고운 노란 유채꽃이 만개하지만, 가을에는 은은한 억새가 흐드러지게 핀다. 갑마장길을 걷는 내내 쉽게 볼 수 있는 억새지만, 이 구간의 억새 밭은 개중에서 으뜸이다.
정오 무렵 가시리에서 탐방을 시작하다 보니 금방 일몰이 찾아왔다. 20km에 달하는 거리를 완주하기에는 버거워, 쫄븐갑마장길을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방향을 틀어 다시 따라비오름 쪽으로 향했다. 억새밭을 지나 따라비오름으로 돌아가는 길엔 제주의 정취가 가득한 숲길이 기다린다. 이곳은 머체(돌)위 나무에 꽃이 아름답게 핀다고 해서 꽃머체라고 불리는데, 세계적으로 희귀한 지질 구조와 그 위에 솟은 나무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신비하다. 여러 갈래로 곧게 혹은 구부러져 뻗은 가지는 붉게 타오르는 햇빛을 받아 신비하고 호젓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지나가는 이도 하나 없어 으슥했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따라비오름에서 다시 마을로 돌아나오니 검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또렷이 보일 정도로 어두워졌다. 걸은 총 거리는 16km였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올레길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와 운치를 느낄 수 있는 갑마장길은 바다를 제외한 제주의 모든 자연과 함께 여전히 살아 숨쉬는 소중한 문화유산까지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