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얼마전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쇼킹한 증언을 하여 체포당한 조웅 목사의 정보라인이었던
문명자 기자의 취재 파일(단행본) 전문(全文)인데 분량이 많은 관계로 편의상 1, 2편으로
나눠 게시합니다.
1편(1~3부 수록), 2편(4~7부 수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문명자 지음
- 백악관 출입기자 문명자의 40년 취재파일
제1부 워싱턴에서 봅 5.16 쿠테타
6.25가 터졌을 때 나는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1학년생이었다. 막 들어간 대학을 석 달도 다니지
못한 채 학업은 중단되었다. 그 후 전쟁 중인 1951년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피난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유난히 교육열이 높으셨던 어머니가 나의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무진 애를
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일본에서 메이지대학 경제학부를 마친 후 와세다대학 국제법 대학원에 다니면서 당시 한국
최대의 여성지였던 [여원]사의 도쿄지국장으로 1956년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1961년은 나에게는 여러모로 큰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우선 61년 1월 미국의 일간지 [존 크로니클]의 초청으로 두 달 간 미국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존 크로니클]은 오랜 전통의 지방신문으
로서 이승만에 대해 많이 보도했다. 그 때의 인연으로 나를 초청했던 것이다.
특히, 1월 20일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다. 나는 60년 11월 취임식 준비위원장인
험프리 상원의원에게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나는 한국의 [여원]이라는 여성지의 도쿄지국장이다. [여원]은 미국의 [레이디스 홈 저널]과
같은 성격의 품위있는 여성 잡지다. 케네디 대통령의 역사적인 취임식 광경을 우리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하고 싶다. 부디 나의 취재 신청을 허가해 주기 바란다."
편지를 보낸지 한 달 후 거짓말처럼 한 묶음의 초청장이 왔다. 취임식 및 그 부대 행사들에 대한
취재 초청장이었다. 일본 기자들도 "전에 없는 일"이라며 놀라워 했다. 내가 이 초청장을 받기
까지 사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펄 벅 여사가 애를 많이 써 주었다. 펄 벅 여사와의 인연에 대해서는 뒤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1961년 1월 16일 내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연일 내리는 눈으로 워싱턴은 은세계로 변해 있었다. 이미 대통령 취임식 축하 전야제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워싱턴 시는 물론이고 주변의 버지니아, 메릴랜드주의 호텔들까지도 미국 내는 물론 외국에서 온 수백만의 축하객들로 초만원이었다.
취임식장은 국회의사당 앞 광장이었다. 취임식 후 백악관까지 축하 퍼레이드가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백악관 정문 앞에 마령된 퍼레이드 접견대와 나무 의자들도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1월 20일, 무릎까지 눈이 쌓이던 날 나는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앞 광장에서 거행된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그 유명한 연설을 경청할 수 있었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묻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라."
좌석이 앞자리라서 젊은 케네디 대통령은 물론 그의 부인 재클린, 큰딸 캐롤라인의 모습도 자세히 지켜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후 나는 우여곡절 끝에 미국땅에 정착해
케네디, 존슨,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 부시, 클린턴에 이르는 장장 8명의 미국 대통령들의 취임식을 지켜봤다.
케네디의 취임식은 그 가운데 그다지 요란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클린 케네디는 취임식 두 달 전에 제왕절개 수술로 아들을 출산한 몸이었다. 그날따라 눈은 멈출 줄 모르고
케네디 대통령 부부는 오픈카로 백악관을 향해 퍼레이드를 펼쳤다. 연변의 시민들이 환호했다.
케네디 부부가 손을 흔들 때마다 군중들을 "와와" 더 크게 소리를 질렀고, 남녀노소의 시민들이
앞다투어 악수를 청했다. 젊은 대통령 케네디는 시종 미소를 지으며 '생큐'를 연발했다.
백악관 정문 앞에서는 전국 각 주의 특생있는 퍼레이드가 펼쳐졌고 이후 취임 축하행사가 펼쳐
졌다. 공식행사가 모두 끝났을 때 눈은 10인치 이상이나 쌓여 있었다. 교통은 마비 상태에 빠졌고, 참석자들은 자동차를 길가에 주차에 놓은 채 모두들 걸어서 각자의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그 때, 나는 워싱턴 16번가에 있는 YMCA 호텔에 묵었는데, 거기에서 기억이 인상깊다.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 페서디나 민주당 선거사무소에서 케네디 선거운동을 했는데 당시의 고충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케네디 선거운동 하는 동안 공화당측으로부터 얼마나 압력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공화당 대통령 전성시대 아니었습니까. 선거운동 하려고 책상을 가져다 놓으면 지방 주경찰이 와서 '여기에 놓지
마라' , '저리로 옮기라'는 둥 또 '이것도 선거법 위반, 저것도 선거법 위반'하는 바람에 운동도 제대
로 하지 못하고 기막힌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필자가 한국에서 온 기자라는 것을 알자 그녀는 말했다.
"우리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피땀흘려 개척한 땅을 백인들에게 모조리 빼앗긴 것입니다. 그 문제로 소송중인데 케네디가 당선돼야만 그 소송이 공정
하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케네디 당선을 위해 뛰었던 것입니다. 당신도 우리 인디언의 역사를
취재하러 한 번 캘리포니아에 와 주길 바랍니다."
그 할머니와의 만남을 계기로 필자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한 맺힌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중에 워싱턴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살펴보니 미국 정부의 내무성에 아메리칸 인디언 국
이 있기는 한데 간부자리는 모두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고, 예산도 인디언들을 위해 제대로 쓰이지 않고 있었다.
케네디 취임식 때 발생한 또 하나의 사건은 훗날 나의 남편이 된 최동현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
원과의 만남이다.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나는 우선 한국대사관으로 갔다. 당시 주미대사는 장리욱 씨였다. 나는 그가 서울법대 학장을 재직하던 시절 인사를 드린 일이 있었다. 장 대사는 나를 보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미스 문 참 대단하네. 케네디 취임식 초청장 가지고 워싱턴에 나타난 사람
은 미스 문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옆에 있던 최동현 특파원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봐요, 최 기자. 여기 미스 문은 한국의 애니 파일(미국 [UPI 통신]의 유명한 종군 여기자)이야.
미스 문, 우리 최 기자는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워싱턴 특파원입니다. 서로 인사하지."
최 특파원은 나의 안내역을 자청했다. 다음 날 그는 고물 폭스 바겐을 몰고 YMCA 호텔에 나타났다. 그 차를 타고 국회의사당까지 간것은 좋았는데 취임식 후 시내 미술관에서 열린 축하무도회에 갔다가 돌아노는 길에 그만 문제의 폭스바겐이 고장나 버렸다. 덕분에 나는 무도회 때 입었던 롱드레스 차림으로 신발을 벗어 들고 씨근덕거리며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숙소까지 걸어와야 했다.
하긴 차가 고장나지 않은 사람들도 폭설로 차를 세워 두고 걸어가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에서 도쿄로 돌아온 후 최 특파원으로부터 계속 편지가 날아왔다. 구혼의 편지였다. 인연이 되느라고 그랬는지 61년 4월 나는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백악관 출입기자로
등록도 했다. 백악관 출입기자증을 내주기 전에 미국 정보기관이 14세 이후 나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했슴을 알게 되었다. 주한 미대사관의 조사관이 통역자를 데리고 나의 본적지인 경북 김천에
까지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내가 워싱턴으로 간 후 최 특파원과 나는 급속히 가까워져 우리 집안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5월 6일 주미 한국대사관저에서 장리욱 대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집안에서 남편과의
결혼을 반대한 것은 그가 혈혈단신의 이북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은 이유는 우리가 결혼한 지 불과 열흘 만에 발발한 5.16 군사 쿠데타 때문이다.
5.16 당시 워싱턴에 주재하던 한국 특파원은 [합동통신]의 이용후, [한국일보]의 설국환, [동양통신]의 최동현, 그리고 [조선일보]의 필자 이 네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는 사실을 워싱턴에서 제일 먼저 안 한국 사람은 아마 남편 최동현이 아닐까 싶다.
남편은 "민족교육은 서울에서 받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제시대에 서울에 와서 중앙
고보에서 공부하던 중 해방을 맞았는데 3.8선과 곧이어 터진 6.25로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사람이다.
이남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그는 미국에 오기 전 기자 생활을 해서 모은 얼마간의 돈을 어머니
처럼 믿고 따르던 같은 평안도 출신의 하숙집 주인 차씨 아주머니에게 맡겨 두었다. 그런데 결혼
도 하고 해서 돈이 필요해지자 남편은 한국시간으로 61년 5월 16일 꼭두새벽에 전화통을 붙들고 그 아주머니에게 맡긴 돈을 보내 달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아까 총소리가 났는데 방송에서는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남편은 돈
보내라는 용건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황급히 전화를 끊더니 도널드 맥도널드 미 국무성 한국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데 아십니까? 모르겠다고요? 알겠습니다."
남편은 이번에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대사관에서도 깜깜부지였다. 결국 서울에
연락해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와 남편은 주동자들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 전화통에 매달렸다. 얼마 후 한 외신에서 "5.16의 주동자는 전직 공산주의자인 박정희, 김종필" 이
라는 보도가 나왔다. 남편은 깜짝 놀랐다. 그는 다른 이북 출신들처럼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했다.
그런 그가 박정희, 김종필 등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크게 우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무렵 남편은 5.16 주체들의 사상 문제 때문에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5.16이 일어난 지 한 달쯤 돼서 나와 같은 대구 출신이자 일본 유학생 동료이기도 한 동양 통신사 외신부장 김규환이 워싱턴에 왔다. 현 한나라당 고문 김윤환의 친형이기도 한 김규환은 서울대 사범대를 다니다가 6.25동란으로 중퇴했다. 그 후 그는 일본으로 밀항해 한국의 조선대 졸업장을 가지고 청강생으로 동경대에 다녔다. 50년대 일본에 있던 한국 남자 유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그 같은 '밀항패'였다.
그 뒤, 김규환은 동향 출신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김성곤의 후원으로, 자유당 시절 김성곤이 삼킨 동양통신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동경대에 다녀 한국 최초로 신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성곡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 4대 민의원 당선하여 정치 참여 이후 6,7,8대 국회의원 역임)
그는 4.19 이후 귀국해 동양통신 외신부장으로 일했다. 61년 6월 IPI(국제언론인협회) 총회가 유럽에서 열렸는데, 김규환은 사장 김성곤을 수행해 이 회의에 참석했다가 김성곤은 먼저 귀국하고
김규환은 미국에 들렀던 것이다.
당시 남편은 동양통신사로부터 받을 밀린 월급도 받아낼 겸 해서 김규환을 집으로 초대했다.
"미스터 김, 그런데 이번에는 용하게 미국 비자 받았네요?"
- "하여간 미국놈들 굉장합디다. 공항에 떨어지자마자 FBI가 졸졸 미행하는데 혼이 났습니다."
자기 회사 외신부장이긴 하지만 김규환을 개인덕으로 잘 모르는 남편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서 눈이 둥그래졌다.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김규환의 애인이자 나의 친구인 ㅈ의 소식을 물었다.
"ㅈ은 지금 보스턴에 있어요?"
- "예."
"이번에 만납니까?"
- "못 만날 것 같습니다."
"이것 봐요. 미스터 김. 김성곤 씨가 지금 우리 남편 밀린 월급을 안 주고 있어요. 돌아가면 김성곤 씨에게 말해서 월급 좀 보내 주세요."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그가 돌아가고 난 후 남편이 물었다.
"여보, 아까 그게 무슨 소리요? FBI가 왜 그사람을 미행한다는 말이요?"
- "규환이가 옛날에 남로당 했거든요. 경북중학 시절 좌익 학생운동 리더였고 대구 10.1 사건 때도 가담했지요. 6.25 때는 인민군 군복까지 입고 행세했는 걸요."
"뭐요?"
-"규환이가 그것 때문에 경찰에 쫓겨 다닐 때 내 친구 ㅈ이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했어요. 그러다
그 애가 먼저 미국으로 유학갔는데 '미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대요. 규환이가 일본으로 밀항해 온 후 미국 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 비자가 안 나와서 결국 못 갔어요. 그러다 4.19 나고 나서
김성곤씨 덕으로 한국에 돌아가 동양통신 일을 하게 된거죠. 자유당 때 주일 한국대표부의 유태하 참사관에게 이화고녀 나와 미국 유학 간 외동딸이 있었는데 유 참사관 부인이 규환이를 사윗감으로 탐냈거든요. 동경대에서 박사를 딴 수재라고요. 그래서 미국 보내서 사위 삼으려고 미국 대사관에 알아보는데 '이 사람은 과거 좌익 전력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절대 비자 안 나온다' 고
하더래요. 그래서 규환이가 미국 오는 건 결국 포기 했다던데 이번에는 용케 비자를 받았네요."
"그런데 김성곤 씨가 어째서 그사람을 봐줬지요?"
-"김성곤씨도 빨갱이 하기는 마찬가지니까요. 그사람은 일제 때는 남대구경찰서 순사로 칼을
차고 다니더니 해방 후에는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들어가 대구 10.1 사건 때 경북도 인민위원회
재정부장을 지냈고, 부인 김미희는 여성동맹 위원장을 했어요. 김성곤은 경북 지역의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인 박정희의 형 박상희, 황태성과도 친한 사이였어요. 6.25 때 그 사람이 인민군 장교
계급장을 달고 서울 거리를 활보 하는 걸 본 사람도 있어요."
김성곤은 그런 좌익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6.25 때 이기붕이 대구로 피난 오자 그와 사귀어
자유당이 몰락할 때까지 재정부장을 지낸 수완 있는 인물이었다. 이기붕을 등에 업은 위세에다
한국 운크라(UNKRA - 국제연합 한국통일 부흥위원단) 단장 콜트 장군과의 친분을 이용해 금성
방직을 설립해서 기업가로 승승장구 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이승만이 '내 아들' 이라면서 뒤를 봐주던 연합신문사 양우정 사장과도 대구 피난 시절
친교를 맺어 연합신문 이사직을 맡았다. 그런데 연합신문 도쿄 특파원이던 정국은이 간첩으로 몰린 이른바 '정국은 사건'으로 양우정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틈을 타서 회사를 빼앗아 연합신문 사주로
취임했다. 그리고 이후 동양통신까지 인수했다.
자유당 재정부장에다 신문사, 통신사까지 소유하게 된 김성곤은 자식들을 모두 도쿄에 유학 시키면서 도쿄에 부지런히 왔다갔다 했다. 내가 김성곤을 처음 본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나는 그 때 [여원]사의 도쿄지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김성곤도 4.19 이후 마침내 부정축재자로 걸려 들었다. 그러나 그 때도 그는 법망을 무사히 빠져 나온다.
60년 12월 내가 미국 [존 크로니클] 신문사 초청으로 미국 방문을 앞두고 있던 무렵에 나는 도쿄에 온 김성곤과 다시 한 번 만나게 되었다. 그는 동양통신과 미국 UP통신사의 계약 갱신을 위해 자기도 곧 미국에 간다고 했다.
"그런데 문 기자, 내 처가 막내를 임신해 지금 만삭이라 곧 출산하러 미국으로 떠날텐데 말이오.
미국에서 출산을 하면 아이는 물론이고 부모에게도 시민권을 준다는게 그게 사실인지 좀 알아봐
주시오."
-"글쎄, 잘은 모르지만 그럴리가 있습니까?"
"하여간 좀 부탁하오. 뉴욕에서 만납시다."
나는 내심 '이 사람은 그런 전력을 가지고도 정권이 부침할 때마다 교묘하게 살아남더니 이젠 미국 시민권까지 필요한 모양이구나' 싶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남편은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에서는 도대체 어느 놈이 암까마귀고 어느 놈이 수까마귄지 알 수가 없구먼."
결국 남편은 특파원 임기 만료에 따라 귀국하려고 이삿짐까지 다 싸 놓았다가 회사로부터 밀린
월급 받는 것도 포기하고 미국에 정치망명 했다. 5.16 주동자들이 합헌 정권을 총칼로 뒤엎은 행위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데다, 그들의 사상전력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로써 한국인 정치망명 1호를 기록했는데, 이 때 그의 신원보증인이 돼 준 이가 바로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였다. 펄 벅 여사는 우리 부부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신 분이다.
내가 펄 벅 여사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1960년이었다. 당시 펄 벅 여사의 단편소설 [빅 웨이브]를 미.일 합작으로 영화화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작은 도에이 영화사에서 맡고 있었다. 감독은 다니엘스키라는 헝가리 출신 감독이었다.
촬영은 주로 규슈의 경치 좋은 해변가에서 진행되었다. 펄 벅 여사는 통역 겸 수행비서를 필요로
했는데, 그에게 나를 추천한 이는 사와다 미키 여사였다. 그는 한.일 회담에서 일본측 수석대표를
맡았던 사와다 렌조 전 유엔대사의 부인이다.
미키여사는 미쓰비시 기업의 창설자이자 초대 사장 이와사키의 장녀였다. 그녀는 당시 흔치 않던
미국 유학생 출신이자 크리스천이기도 했다. 그녀의 딸인 사와다 에미는 나와 가까운 친구 사이
였다.
미키 여사는 종전 이후 유산으로 물려받은 오이소(일본의 유명한 별장지) 별장에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을 위한 고아원을 차렸다. 그 같은 일을 하게 된 배경을 물었더니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패전 후 맥아더 점령군이 미쓰비시를 차압했는데 그 과정에서 오이소 별장도 차압당했다. 그것은 사유재산이니 돌려 달라는 운동을 하느라 내가 살고 있던 요코하마에서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까지 기차로 자주 왔다갔다했다. 한 번은 요코하마 역에서 내리려는데 내 머리 위 선반의 짐보따리 뒤에서 웬 아이 소리가 났다. 살펴보니 짐 사이에서 흑인 혼혈아가 하나 튀어 나왔다. 차장이 와서 '당신 애냐' 고 묻는데 고운 눈길이 아니었다. 옆자리에 있던 술취한 남자는 아예 '흑인놈이나 붙어
먹고 잘한다'는 식으로 쏘아 붙였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나 가련했다. 나는 '저건 내
짐도 아니고 내 아이도 아니지만 저 애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 후, 그런 아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에서 다시 찾은 오이소 별장을 고아원으로
만들었다."
미키 여사의 소개로 펄 벅 여사를 처음 만나러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장소는 도쿄의 제국
호텔이었다. 펄 벅 여사는 나에게 "지금은 바쁘니 내일 아침 8시에 만나서 아침 같이 먹으며 얘기
하자"고 했다. 그녀는 나를 시험해 볼 요량인 것 같았다.
나는 오전 7시 55분에 펄 벅 여사 호텔 방문 앞에 가서 섰다. 시계를 보고 있다가 2분 전에 벨을
눌렀다. "예에스" 하는 높은 톤의 소녀 같은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와요, 미스 문은 매우 정확하군요."
펄 벅 여사는 식사에다 커피가지 모두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을 같이 먹으면서 그녀는 내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 하는 듯 했다. 자신의 스케쥴도 설명하고 영화에 출연할 일본 여성들의 영어 발음이 시원치 않다는 등 여러가지 얘기를 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그녀가 "규슈(九洲)의 영화 제작 현장에 함께 갈 수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속으로 '드디어 합격인 모양이다' 싶었다.
내가 펄 벅 여사의 통역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은사인 숙명중고녀 문남식 교장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중학 시절, 그 분은 나를 포함한 몇몇 학생들을 모아 하와이 교포 출신인 한동삼 선생에게 영어회화 개인교습을 받도록 했다. 숙명고녀에 진학한 후 한동삼 선생은 필자에게 "소질이 있다"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여러모로 이끌어 주었다. 내가 일본에 유학와서 미국인들과
별다른 불편없이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 덕분이었다.
내가 펄 벅 여사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그녀를 모시고 한국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을 무대로 한 소설을 쓰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식민지로, 전쟁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지고 이승만 독재와 부정부패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꿈과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 후, 나는 펄 벅 여사를 모시고 규슈에 다녀왓다. 그런데 영화제작 중에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인 주연 여배우가 "감독인 다니엘스키가 나를 강간하려 했다"면서 문제를 일으켰던 것
이다. 당사자인 다니엘스키는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여배우가 기자들을 만나 그렇게 떠들어 대니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여배우는 당시 그다지 유명한 배우는 아니었는데, 그 같은 스캔들로 화제의 초점이 되어 보려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빅 웨이브'였다. 극성스러운 기자들 때문에
펄 벅 여사는 호텔 밖에 나가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병중에 있던 남편 워시가 위독하다는 전갈까지 믹국에서 날아왔다. 여사가 급히 미국에
다녀와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하네다 공항까지 펄 벅 여사를 배웅했다.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해 놓을테니 걱정마시고 다녀오십시오. 바깥분 간호 잘 하시고요."
-"그래주면 고맙겠어."
나는 펄 벅 여사의 영화 제작 일을 성심껏 도우면서 한국 방문 약속을 받아낸 바 있었다.
"저하고 하신 약속 잊지 않으셨죠? 한국 가시는 것 말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많다는데?"
"오히려 일본에 공산당이 많지, 한국에는 없습니다."
펄 벅 여사가 떠난 후 나는 우선 다니엘스키의 기자회견을 주선해 기자들 앞에서 사실을 밝히게
했다. 아울러 기자들에게 주연 여배우의 의도를 설명해서 그녀가 계속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검찰총장을 지낸 한 거물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는 나의 메이지대학 동창생의 아버지였다. 대학시절 그의 집에 놀러가면 친딸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곤 했다. 그는 평소 술을 많이 마셨는데
매번 그 때문에 고생했다. 서울 집에서 간혹 인삼을 보내오면 나는 생강, 대추를 넣고 달여서
그에게 갖다 주곤 했다.
"조선 인삼 안 먹어 보셨지요? 술 깨는 데는 조선 인삼이 최곱니다. 냉장고에 넣어 두시고 꿀타서
마셔 보세요."
그는 내 말대로 했더니 정말 술 먹은 다음날 머리도 안 아프고 좋더라면서 "분짱(문양)이 내 딸이다"며 고마워 했다.
전직 검찰총장이 나서니까 일이 상당히 수월하게 풀렸다. 그는 일본 영화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오카와 히로시(도에이 영화사 사장)를 만나 "자기가 유명하게 되려고 이런 근거 없는 일을 벌이는 것은 미.일 관계에 좋지 않다. 그 여배우 좀 잘 타일러 달라"고 부탁했다.
오카와의 "알겠습니다" 하는 한마디로 상황은 끝나 버렸다.
2주일 후 펄 벅 여사가 돌아왔을 때 모든 문제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영화 제작도 순탄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펄 벅 여사는 무척 고마워하며 나를 자신의 양딸로 삼겠다고 했다. 쥬리(Julie)라는 미국 이름도 그 때 그녀가 지어 준 것이었다.
"미국 이름이 꼭 필요한가요?"
-"미국에 와서 활동하게 되면 미국 이름이 필요해. 내가 지어주는 대로 하렴."
그녀의 예상대로 나는 미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백악관 동료 기자들은 나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했다. 노벨상 수상 작가가 지은 이름이니 아름다울 수 박에 없을 것이다. 한가지 문제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었다. 동료 기자들이나 미국 정계 인사들까지도 '문'이라는 내 성을 들었다 하면
"무니(Mooni-통일교도)하고 관계 있는가?" 라고 묻는 바람에 일일히 해명하기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4.19 이후인 1960년 10월 나는 마침내 펄 벅 여사를 모시고 한국을 방문했다. 펄 벅 여사는 이화
여대와 경기여고, 숙명여고에 들러 한국의 미래 여성 지도자들을 위해 감동적인 강연을 했다.
그리고 한국을 무대로 한 소설 [살아있는 갈대] (The Living Reed)를 출간했다.
필자가 61년 미국에 온 후에도 펄 벅과의 교류는 계속 되었다. 그녀는 펜실베이니아 벅스 카운티에 있는 350에이커 정도 되는 농장에서 살고 있었다. 서재가 널찍하고 마당에서 농구까지 할 수 있는 넉넉한 저택이었다. 그녀는 가정적으로는 불행한 편이었다. 첫 남편과는 이혼했고, 두 번째 남편은 사별했다. 첫 남편과의 사이에 장애인 아들이 있었는데 결국 죽고 말았다. 의사는 "부부간에 혈액형이 맞지 않아 장애아가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한다. 내가 결혼을 앞두고 최동현 특파원과 함께 펄 벅 여사를 찾아 갔을 때도 그녀는 조용히 "피 검사, 해봤니?" 하면서 걱정하기도 했다.
그녀의 집은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5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필자의 아이들도 펄 벅 여사를 좋아
해서 "그랜드 마더 가자"고 졸라대곤 했다. 한번은 펄 벅 여사가 나의 아이들을 위해 미국식 비프를 준비해 놓았는데 아이들이 "그랜드 마더, 밥 줘요" 하고 때를 썼다. 펄 벅은 물었다.
"밥? 그게 뭐야?"
나는 웃으며 가지고 간 쌀을 보여 주고 밥을 앉혔다. 그러나 펄 벅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앉혀
놓은 밥이 다 타 버려 결국 밥은 먹지 못했다.
백악관 앞 5.16 반대 시위자들 - 장리욱 신병현 최경록 강문봉 오세응
미국에 망명한 후 남편은 미국 영주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스크립터로 일
하면서 한편으론 워싱턴에 있는 한국 학생, 지식인, 예비역 장성 등 5.16에 반대하는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백악관 앞에서 반대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에 5.16을 인정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기 위해서였다.
이 때 열성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로는 5.16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리욱 박사, 주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 신병현, 국회 사무처장을 지낸 김문봉 박사, 최경록, 강문봉, 김응수 장군과 국회의원 양일동씨 등이 있다. 강영훈 씨는 5.16 직후에는 시골에 있어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워싱턴으로 온
뒤부터는 이 모임에 항상 참여했다.
강영훈씨는 5.16 당시 육군사관학교장 이었는데 쿠데타 세력이 요구한 육사생도들의 5.16 지지
시가행진을 거부하는 등 5.16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와 처남 매부지간인 김응수 장군( 전
제 6군단장), 장면 정권 하에서 육군 참모 총장을 역임한 최경록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최 장군은 5.16 당시 대구 소재 2군사령부 사령관이었는데 자기 밑에서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하극상 사태를 당한 셈이었다. 최경록은 [조선일보]등에
"군은 절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글을 발표하는 등 끝내 5.16을 반대했다. 이들 세 사람은 5.16이 기정 사실화된 후 미국측의 배려로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미국에 왔다. 이들은 사실상 미국이 키운 사람들이었다.
강문봉 장군은 자유당 시절 육군 정보국장과 작전 국장을 역임하고 5.16 무렵에는 중장으로 예편해 있었는데, 역시 같은 이유로 미국에 유학와 있었다.
신병현씨는 민주당 정권 때 워싱턴 주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으로 나와 있었는데, 5.16 발발 이후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특히, 신병현 참사관의 부인까지 백악관 앞 시위에 참여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때 워싱턴 조지타운 대학에 재학중이던 한국 유학생들도 시위에 많이 참여했다. 당시 열심이던 학생으로는 오세응(현 한나라당 의원)과 한광년이 기억에 남는다. 그 때 오세응은 워싱턴 지역 한국 학생회장이자 워싱턴 지역 '한국인 택시운전사 1호' 였다. 한광년은 불행히도 청년 시절의 신념으로 초지일관 하지 못하고 70년대 들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넘어가고 말았다.
5.16 직후 박정희는 민주당 정권이 임명한 주미대사관 공관원들을 모두 해임해 버리고 그 자리를 온통 자신의 수족들로 채웠다. 그가 특히 신경을 썼던 주미대사직에는 당시 하버드 대학 청강생으로 있던 정일권을 미국통이라고 해서 앉혔다.
사실, 정일권과 강문봉은 군부의 권력 암투 속에 56년 1월 발생한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암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관 허태영 대령이 모든 책임을 지고
정일권과 강문봉은 살아났는데, 그것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도움 덕분이었다.
정일권이 밴플리트에게 한국 처녀들을 계속 상납하는 등 채홍사 노릇을 했던 것이 효과를 본 셈
이었다. 박정희는 이 같은 정일권의 대미 인맥을 자신의 방패로 활용하려 했다.
정일권이 주미대사로 앉게 되자 백악관 앞 5.16 반대시위 참여자 중 여러 사람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우선 남편 최동현 부터가 정일권의 하버드 시절 그의 영어 가정교사를 했던 사람이었다. 영어
선생과 학생이 데모 대장과 진압대장으로 만난 셈이었다. 또 강문봉 장군은 정일권과 같은 함경도 출신으로 현역 시절부터 형님동생 해 온 사이였다. 그런 그가 백악관 앞에서 박정희 반대 시위를
하러 다니니 정일권이 닥달할 만도 했다. 그 때마다 강문봉은 "골프 치러 가려고 운동화 신고 나서
는데 마침 최경록이가 와서 같이 가자고 해서 할 수 없이 따라 갔어요" 하는 식의 변명으로 곤란한 자리를 모면하곤 했다.
나는 열심히 이 시위를 취재해 [조선일보]에 송고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조선일보]의 논조가
살아 있어서 백악관 시위 기사들이 간간히 실리곤 했다.
심지어 나는 펄 벅 여사에게 특별히 부탁해 케네디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게까지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박정희 군사 쿠데타 세력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두 통을
작성해 하나는 백악관에 전달했고, 다른 하나는 조선일보사로 보냈다. "힘으로 독재하는 정권은
오래 못 간다. 국민이 깨야 한다"는 등의 원문이 그대로 [조선일보]에 실렸다. 조선일보사가
펄 벅 여사의 친필 편지를 잘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펄 벅 여사가 편지를 냈을 때 케네디는 캐나다에 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인들이 우리
두 사람을 얼마나 바보같이 봤을까 싶다.
케네디는 죽기 전 마지막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그 한마디에 흥분한 나는 "박정희 쿠데타는 오래가지 못한다"라고 단정하는 기사를 송고했다.
케네디가 결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젊은 케네디의 이상, 정의감, 프론티어 정신. 그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미국의 국익이라는 것을 30대 초반의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5.16 당시 미국인들의 행적에 의문스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주한 미대사관의 대리대사로서 매구르더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5.16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던 마샬 그린은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케네디 행정부의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를 역임했다. 필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일이 있다.
"왜 미국은 5.16을 진압하지 못했나요?"
-"코리안 전체가 한물 갔어요. 모두 기회주의자요. 내가 쿠데타 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고 하니까 윤보선 대통령의 답변은 '우리 군끼리 충돌하면 언제 북괴가 쳐들어 올지 모른다'며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군사 쿠데타와 같은 국가 위기의 순간에 총리라는 사람이 수녀원에 숨어서 나오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5.16은 장면 정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난 95년 위컴 당시 주한미군 부사령관의 측근으로부터 5.16 당일 반도 호텔에
있던 장면을 지프에 태워 혜화동 깔멜 수녀원으로 이동시킨 사람이 다름아닌 위컴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직책은 부사령관이지만 계통은 정보라인 이었다. 박정희 쿠데타를 뒤에서 봐줄 수 있는 위치였다.
위컴은 당시 반도호텔에 장기 투숙하고 있었는데, 5.16 직후 장면이 반도호텔 뒷문으로 나가서 준비된 지프에 타고 깔멜수녀원으로 옮겨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면으로 하여금 미 8군이 아닌
깔멜수녀원으로 가도록 한 것이 누구의 의사였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나는 어쨌든 위컴이 장면을 미 8군으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미국측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사실은 미국측이 장면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징표로 해석 될 수 있다.
앞서 말한 측근에 따르면, 위컴은 5.16 직후 그 살벌한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서울 시내를 활개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연평도에서 주재하며 목회하던 한 유명한 미국인 신부를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에게 보내 5.16 군사 쿠데타 세력들을 인정해 주라고 호소하게 한 것도 바로 위컴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미국인 신부는 여자 문제로 정보기관에 약점이 잡혀 있던 상태였다. 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한창일 때 프레이저 청문회장 방청석에 그 신부가 나타난 일이 있다. 나와 함께
청문회를 방청하던 시노트 신부(74년 한국에서 목회중 인혁당 사형수 처형에 항의하다 박 정권에 의해 추방된 메리놀 교단의 신부)는 흥분해서 "당장 저 빤질빤질한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면서 역시 머리까지 빨개졌었다. 두 사람이 모두 대머리였던 것이다.
그런 위컴의 행적을 미 국무성 사람들이 몰랐을까? 미국이란 나라의 생리상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겉으로는 주한 미 대사관과 미8군 사령관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내 합헌 정부를 지지한다는 명분을 확보하는 한편,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은밀히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5.16을 둘러싸고 '미국인들이 서로 짜고 쇼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지지만 믿고 자기 진영의 규합을 이루지 못한 장면 정권을 강화 시키기 위해 미 행정부가
상당히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미국무성은 부산 정치파동 이전부터 장면을 지지했다. 4.19 혁명
으로 장면이 집권한 이후에도 미국은 오랜 숙원사업인 환율 현실화, 한.일 관계 정상화 과정을 조속히 이루기 위해서 장면 정권을 할 수 잇는데까지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5.16 이후 미 국부성의 한 관리가 "장면 박사가 무력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쿠데타를 꾸
미던 세력이 다섯이나 있었다"고 말한 것을 놓고 볼 때, 미국측은 5.16 쿠데타 직후 장면 정권에게 쿠데타 기도에 맞서 내부를 단합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그렇게 안 될 경우 성공한
군부 인사들과의 협력의 길을 마련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워싱턴에서 5.16 군정 승인 문제, 공석이던 주한 미대사 부임(새무얼 버거), 박정희 장군 방미 등 주요 외교 문제가 거침없이 수행된 것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5.16 이후 이 사건을 미국민들에게 어떻게 홍보하는가 하는 문제는 케네디 행정부의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미 행정부가 4.19 혁명을 지지했던 기억이 미국민들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장 정권이 약하기 때문에 교체돼야 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 더구나 케네디를 지지해 준 스펠만 대주교 같은 인물은 장면 박사를 강력히 지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와 같은 사람을 납득 시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케네디 행정부는 한국 내의 사태 진전을 현지
보고 하는 방식으로 미국민들에게 5.16을 알렸다. 국무성 관리들이 그 문제를 다루게 하고, 케네디 자신은 태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63년 11월 케네디 암살 후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나의 기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당시 케네디의 시신은 장례식장인 국회의사당으로 가기 전까지 백악관 이스트룸에 있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단은 시신이 떠나기 전날 밤 시신 앞에서 마지막으로 추도식을 가졌다.
냉정한 기자들도 하나 둘 끝내 울음을 떠뜨렸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는 그의
마지막 기자 회견에 한없이 감동하고 있던 나 역시 그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떠난 케네디의
죽음을 한없이 애도했다.
나는 케네디 행저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국무 장관을 역임했던 딘 러스크에게 "한국이 언제 통일 되겠는가?" 라고 질문한 일이 있다.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이 살아서는 못 본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45년이 흘렀다. 그의 말이 사실이 되지 않은리라는
보장이 없다.
러스크 국무장관과 얘기하던 중에 38선 문제가 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38선은 내가 그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1944년 나는 미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 정책과의 대령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8월 10일
일본측이 자신들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미.영.소 3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한날 밤 늦게 정책과에 긴급 과제가 떨어졌습니다. 일본군에게 제시할 항복 문서중 한반도와 극동지역에 대한 초안을 작성해서 30분 안에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정책과장은 본스틸 대령이었고 나와 매코맥 대령이 과장보였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
해야 할 것은 소련이 수용할 수 있는 선을 그어 그 이남으로는 소련군의 진주를 저지하는 일이었습니다. 북위 40도로 분할하면 너무 북으로 치우쳐 소련측이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고 38도선 정도
라면 절반을 공평하게 분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다 38선이 이남에 수도 경성과 미군 포로수용소,
주요 항만시설등이 있다는 점이 우리에게 유리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38선을 그어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항복을 접수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초안을
30분 만에 작성해 전략 정책단에 보냈는데 소련놈들이 그걸 수용해서 뒷날의 38선이 된 것입
니다."
엄청나고도 어이없는 얘기였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분단문제를 한민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미 육군 일개 대령들이 30분 만에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훗날 이와 관련된 국무성
문서가 공개되어 이를 [동아일보]에 송고했던 기억이 난다.
백악관 앞에서 같이 5.16 반대시위를 벌였던 사람들의 그 후 행적을 살펴보면 여러가지로 생각되는 바가 많다. 박정희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회유해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미국에서 세계은행 이사를 지내던 신병현 씨는 그의 후배 김정렴이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된 후
본격화한 회유공작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그 뒤 귀국해 청와대 경제담당 특별 보좌관을
거쳐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최경록 장군도 "선배님, 그러실 것 없이 한국에 와서 손잡고 일합
시다"라는 박정희의 간청에 점차 흔들리더니 결국 귀국해 런던대사-교통부 장관등을 지냈다.
최 장군이 민주당 정권에서 육군 참모총장직에 있을 때 박정희가 관련된 영관급 쿠데타 음모가
적발 되었는데 최경록은 그들을 관대하게 처리해 주었다고 한다. 비록 최경록이 5.16을 반대했지
만 이같은 과거의 은혜를 생각해 박정희는 그를 심하게 박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 들어가도 다른 백악관 시위 동지들은 만나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최경록과는 가끔 만났다. 그는 자신의 적선동 옛날 한옥집에서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백악관 시위 동지'들 중 가장 부끄럽게 처신한 것은 강영훈이라 하겠다. 강영훈도 초기에는 깨끗
하고 꿋꿋하게 생활했다. 강영훈의 부인은 미장원에서 일했는데 독한 파마액 때문에 손가락이 다
헐 지경이었다. 이같은 생활고 때문이었던지 결국 70년대 들어 강영훈은 중앙정보부의 돈으로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것을 설립해 미국 언론계, 학계등에 친박정희 세력을 심는 역할을 담당했다.
백악관 앞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5.16을 반대한다고 떠들었던 몇몇 사람들의 행적도 기억해 둘 만하다. 장면 정권 하에서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낸 이석기와 나중에 야댱 당수를 지낸 이철승이 그들이다. 이석기는 주미대사관 국정감사를 위해 워싱턴에 와 있다가 쿠데타가 일어 났다는 급보를 접하자 장리욱 대사 방에 달려와서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부치고 "대사님! 미군을 동원 시켜야 합니다" 하면서 열을 올렸다.
그런데 5.16이 기정 사실화 하고 CIA 부장 매쿤의 초청으로 중앙 정보부장 김종필이 처음으로 미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한국 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 김동환의 집에서 김종필 환영 파티가 열렸다. 다른 특파원들과 함께 필자가 그 집에 도착했을 때 뜻박에도 이석기와 이철승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석기에게 대뜸
물었다.
"이 의원, 와이셔츠 걷어부치고 미군 동원시키라고 하던 분이 여긴 웬일이세요? 번지수를 잘봇 알고 오신 것 아닙니까?"
이석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을 늘어 놓았다.
"김부장하고 나는 한 고향 출신이라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입니다. 게다가 우리 김부장의 춘부장도 제가 잘 알고 김부장 형님도 내가 은행에 취직시킨 처지라 먼 길 오셨는데 몰라라 할 수도 없고..."
그의 말은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부터 잘 아는 그 인연을 통해 권력의 신주체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뒷날 김종필이 정계에 진출할 때 이석기는 자기 지역구인 부여를 그에게 주고 자신은 서울로 옮겨갔다. 그 점에서는 이철승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열렬히 5.16을 반대한다던 그가 그 자리에는 왜 왔겠는가.
5.16 당시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워싱턴에 와 있던 송요찬의 떳떳하지 못한 처신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재직중 4.19가 발발하자 계엄 사령관에 취임했는데,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집요한 정군운동에 밀려 3.15 부정 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루는 송요찬이 저녁 늦게 남편 최동현을 급히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돌아왔는데 별로 기분 좋은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물었다.
"그 양반이 무슨 일로 당신을 불렀어요?"
-"최기자는 장도영이하고 같은 평안도 출신인데 무슨 닿는 선이 없는가 합디다"
"그래서 뭐라 했어요?"
남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라기는? '그런선 없어요 하고 딸기만 한접시 먹고 왔지요."
5.16 후 박정희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명목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장도영과 닿는 선을 찾는다는 것은 곧 박정희에게 다가갈 길을 찾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박정희가 일으킨 하극상으로 육군참모총장직에서 밀려나 미국에 와 있는 처지면서도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권력을 쥐자 다시 그 밑으로 들어갈 궁리를 하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송요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