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독후감 황시엽의 [미스터 씨] 2. 240217 쓰고 240321 올림
수영이와 같이 찍은 사진이 있어 나와 가까웠다는 의미로 올린다. 위 사진은 중학교 때 진관사로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이다.
고등학교 1학년, 1959년 12월 크리스마스 전날 수영이가 흑석동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해서 친구 몇 명(문도연 김건 등)이 같이 갔지. 친구들이 주머니를 털어 먹거리와 음료도 샀다. 방에는 흐릿한 백열전구가 방 가운데 길게 늘어져 있었다. 물론 집에는 아무도 계시지 않았다. 그렇게 수영이와 잘 지냈다. 1학년 때 나는 등산반으로 도봉산 선인봉과 주봉으로 암벽등반을 많이 다녔다. 수영이와는 산에 같이 다니지는 않았다. 수영이는 취미로 경복 1년 선배 이기택(36회) 형과 도봉산으로 암벽등반을 하러 다녔다. 그때 주봉(柱峰 기둥 모양)이라는 바위를 타러 다닌 것을 쓴 글이 立石 附近이다. 2학년과 3학년 때는 우리와 같은 학년이 아니었을 것이고 자연히 가깝게 어울릴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나와 수영이는 언제 만나도 잘 아는 친구였지. 다만 우리는 학교 공부하기 바빴는데 수영이는 교과서는 한 번도 펴지 않고 그냥 세계 문학 전집이나 우리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철학 문학 관련 전집 등을 아주 끼고 살았다. 그래 그때는 시험성적으로만 평가하던 시절, 수영이는 적응하지 못해 결국 학교를 떠난 것이다. 경복 37회 동창회에서 2022년 만든 수첩에 황석영 이름이 올라 있기는 하다.
황수영의 책 <審判의 집> 앞쪽 황석영 연보에 ‘1962년 봄, 경복고등학교를 퇴학당하다’로 나온다. 우리는 그해 봄에 졸업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못 만났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내가 광화문 근처 기원에 간 적 있었는데 바둑 두는 수영이를 만났다. 바둑판을 보고 있는 수영이를 부르니 쳐다보고 인사를 했다. 수영이가 하는 말 “나를 수영이라고 부르는 친구는 고등학교 친구”뿐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나야 중학교 2학년 때 사진이 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그의 흑석동 집까지 갔던 친구이니 쉽게 잊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영엽이 형님께서 수영이를 만났던 그 강연에 나도 갔던 모임인가 보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이 없어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도 잠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그 강연이 비중 있는 행사였는데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이라 나도 오래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수영이가 고등학교 1학년까지만 같은 학년이었고 우리가 2학년 때 그는 다시 1학년이었던 것이다. 그다음 해 우리가 3학년 때에도 또 1학년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니 그다음 우리가 졸업하던 1962년 봄, 경복을 떠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네 책을 다 읽은 지 30여 일이 지났는데도 제목만 독후감이라고 해놓고 딴 얘기만 늘어놓았나 보다. 다시 쓰려니까 이제는 읽은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시 뒤적이며 무엇을 쓸까, 찾는 중이다.
나는 2005년 2월 혜화여고에서 34년간의 교직 생활을 끝으로 정년 1년 전에 퇴직했다. 이유는 제2외국어로 불어와 독어 대신 일어와 중국어가 대세가 되어 독일어 시간이 자꾸 줄어들어 공통 사회과목 연수를 받으란다. 물론 겨울과 여름 방학 8주간씩 받으면 교사자격증이 나온다. 말이 그렇지 내가 사회과목 수업할 자신은 없다. 중학교로 발령이 날 것이고 윤리 사회 지리 등 사회과목 중 하나를 가르치기에는 턱없이 실력이 부족하다. 결국 우선 혜화여고에서 월~목요일까지 수업하고 금~토요일은 집 근처 태릉고등학교에서는 독일어를 수업하는 순회 교사가 됐다. 그래도 수업 시간이 적으니 혜화여고 1학년 12반 중 여섯 반에서 [주도적 자율학습]이라는 수업을 하란다. 2학기에는 나머지 6반에서 똑같은 수업을 하였다. 그래도 수업시수를 채울 수 없으면 중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또 혜화여고가 인문계 고등학교이지만 일부 학생은 3학년 때 직업반을 원하는 학생이 나온다. 그 학생들은 월요일만 혜화여고에 나오고 화~토요일까지는 직업교육 받으러 상업계나 디자인학교 등으로 수업을 받으러 가니 일반 수업을 할 수가 없어 나에게 1시간 직업반 수업을 하란다. 교재도 없고 내가 생각해서 모든 수업을 해야 했다. 직업반 학생이 7명 정도이니 보통 교실을 내어줄 수 없어 작은 교실이 배정되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처음은 망막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우선 부모님과 형제자매 이름과 월화수목금토일 같은 요일 또 1, 2, 3, 4 ~10, 백, 천, 만 같은 수사 등을 한자로 쓰기, 또 세계 여러 나라의 이름을 한자와 영어로 알아두기 등 나름으로 생각에 생각을 꺼내 가르치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을 보고 성적을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막판에 몰리게 된 내가 사회과목을 가르치기 어려워질 것 같아 정년 1년 일찍 미리 사직서를 내니 수리가 되면서 퇴직하는 날 보직 없는 교감 발령이 난다. 물론 나를 교감이라고 부르지만, 직위만 교감(퇴임식 이후 학교를 떠날 때까지 길어야 1시간 정도 교감 대우를 받는다)이지 실제 교감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웃으며 떠나지만, 실제는 이슬비가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34년의 교직 생활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퇴직 후 석 달이 지나니 학교에서 34년 근무로 인한 노무현 대통령 명의로 된 큼직한 대한민국[녹조근정훈장]을 준다고 하여 받았다. 어느 직장이고 떠날 때 받는 몇 개의 감사패와 송공패(頌功牌)만이 쓸쓸히 책장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