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六十六 章 신비한 노인
오른쪽을 달리던 사내가 무겁게 한소리 기합을 내지르더니 급히 달려가려는 말을 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관도 앞뒤로 늙은 말이 끄는 한 대의 고물 마차 외엔 다른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것을 보고 불현 듯 얼굴에 놀라움과 의아한 빛을 띄우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서 다른 한 사내에게 말했다.
『피이제(皮二弟), 자네는 누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그 피이제라고 불리운 사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소이다. 누가 우리보고 걸음을 멈추라고 한 것 같았소이다.』
그 오른쪽, 몸이 비교적 건장한 사내는 천천히 말을 몰아 뒤쪽으로 되돌아오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히 마부석에 앉아 있는 전옥린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친구, 혹시 조금전에 당신이 우리를 불렀소?』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소제가 두 분 형씨께 좀 여쭈어 볼 일이 있어서 불렀소이다.』
그 사내는 전옥린을 아래 위로 훑어보았지만 전옥린의 얼굴이 문약하고 병색이 있어 보였으며 눈빛 역시 보통사람과 다름이 없는지라 속으로 퍽이나 놀랍고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먼 거리에서, 게다가 그토록 시끄러운 말발굽소리 속에서 음성이 그토록 멀리 뻗쳐나가서 상대의 귀에 똑똑히 들리도록 하려면 반드시 정순한 내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재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이 잿빛 옷을 걸치고 후줄근하게 마부석에 앉아있는 중년의 문사같은 사람은 전신 상하 어느 한 군데도 두드러지게 그가 무림 인물이라는 특징이 드러나는 곳이 없었으며 양쪽 태양혈마저도 전혀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볼 때 아무리 생각해도 내외공을 겸비한 무림고수라고 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음성을 그토록 멀리까지 보낼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어리둥절해져서 다시 그 옆에 있는 늙은 마부를 한 번 훑어보고서 무림의 고수가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경우가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는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노인장, 조금 전에 당신이 우리들을 불렀소?』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전옥린이 조용하게 말했다.
『소제는 두 분께서 남삼객 적군이 금응협객에게 도전했다고 이야기 하시는 것 같아서 실례일 줄을 알면서도 부득이 좀 자세히 여쭈어 보려고 불렀소이다.』
이때 다른 한 명의 사내도 어느덧 마차 앞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역시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전옥린을 한 번 바라보더니 입을 열어 물었다.
『친구, 당신도 강호에서 떠돌아다니는 사람이오?』
전옥린은 미미하게 웃었다.
『소제는 다년간 강호에 발걸음을 하지 않다가 최근에 와서야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나오게 되었소이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어떤 성함을 쓰시는지요?』
그 사내는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약간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래 형씨 역시 강호의 친구였구려. 실례가 많았소이다. 불초의 이름은 피득표(皮得彪)라고 하며 이 분으로 말씀드리자면 저의 큰형이신 양덕광(陽德光)이시지요. 저희들은 강호에서 태행이서(太行二鼠)라는 비호(卑號)로 불리워지고 있답니다.』
전옥린은 포권을 했다.
『오래 전부터 말씀은 들었소이다. 두 분께서 조금 전에 말씀하시던 일을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시지요.』
피득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대답했다.
『강호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놀랄 만한 소식이지요. 형씨께서 궁금해 하시는 소식 역시 남삼객 적군이 금응대협 전옥린에게 도전해서 한판 승부를 결하겠다는 것이 사실이냐는 것이겠구려? 이 놀라운 풍문은 개방의 제자들이 일제히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데 듣자 하니까……』
이때 양덕광이라는 사내가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친구, 우리들은 아직도 당신의 커다란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여쭈어보지 못했구려.』
전옥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소제는 성이 전가이고 이름은 옥린이라고 합니다.』
소위 사람은 이름이고 나무는 그림자라고 하지 않았는가. 태행이서는 강호 한쪽 변두리를 숨어 다니는 소위 삼류의 좀도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눈앞에 앉아있는 이 얼굴에 누런 병색을 띄우고 있는 문약해 보이는 사내가 스스로, 최근 무림에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금응대협 전옥린이라고 이름을 밝히게 되자 그만 두 사람이 똑같이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양덕광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소리쳐 물었다.
『귀하께서 바로 며칠 전에 무창성 밖에서 벌어진 혈투에서 괴면괴왕 위만리, 음양동자 종무군, 벽라도주 원현기, 유곡신마 다삼공, 이렇게 전대의 무림 사대마두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금응대협 전옥린이라는 말씀이오?』
전옥린은 가만히 웃었다.
『두 분께서 너무 과찬하십니다. 소제가 어찌어찌 하다 보니 그 마두들을 한꺼번에 만나서 힘을 다해 싸운 일이 있지요.』
백일서(白日鼠) 피득표는 눈알이 왕방울만 해져서 황망히 말위에서 굴러 떨어질 듯이 내려오더니 허리를 구부리고 포권을 했다.
『전대협, 저희 형제들이 눈이 있어도 태산을 몰라 뵌 점 용서해 주십시오. 대협께서 이곳에 계신 줄 몰라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예를 차리지 못했소이다.』
전옥린은 포권을 했다.
『두 분께선 강호인 이신데 그렇게 번거롭게 예를 차리실 필요가 없소이다. 말에 오르도록 하시지요.』
피득표는 재빨리 말했다.
『전대협, 지금 몰고 가시는 말이 지친 듯 합니다. 소인의 마필이 건장하오니 필요하시다면 쓰시지요.』
전옥린은 손을 흔들어 사양했다.
『아니오. 그럴 필요 없소이다. 저는 이미 이 노인장의 마차를 빌렸고 그렇게 급하게 말을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소이다.』
그는 재차 입을 열어 물었다.
『피형, 조금 전에 말씀하시던 일에 대해 여쭈어보고자 하는데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시지요.』
피득표는 그를 부르는 형이라는 소리에 마치 생각지도 못한 황상의 총애를 받은 사람처럼 황송해서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전대협, 이 소문은 절대 틀림이 없소이다. 소인 형제들이 아침에 한구(漢口)에서 왔는데 개방 제자들이 전해주는 말을 직접 들었소이다.』
양덕광 역시 서둘러 입을 열었다.
『소문에 들으니까 남삼객 적군은 칠지마존 고낙을 무창 개방 분타로 보내 도전서를 전하도록 했는데, 때마침 개방의 세 분 장로가 그곳에 있었답니다. 그 자리에서 칠지마존 고낙의 공격을 받고 하장로라는 분이 죽음을 당했고 그밖에 천지이로, 그 두 분의 늙은 장로들 역시 중상을 입었다고 했습니다요.』
갑자기 전옥린의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두 분의 증상은 어느 정도라고 했소?』
태행이서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앞에서 얼마되지 않는 곳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그의 전신에서 뭐라고 할 수 없는 강렬한 기세가 뻗쳐나며 주위를 압도하는 것을 느끼고 불현듯 놀라 일제히 뒤로 물러서며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기세에 양덕광의 음성은 벌벌 떨리기조차 했다.
『전…… 전대협, 소생들이 들은 바는 절대 틀림이 없습니다만 두 분 장로님들이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는 자세히 들어보지 못했고 다만……』
전옥린은 그들의 이같은 모습을 보고서야 눈빛을 속으로 갈무리하며 음성을 낮추어서 말했다.
『아, 두 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실례를 했소이다.』
양덕광과 피득표 두 사람은 서로 한 번 마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태도와 표정은 더욱더 공경스러워졌다.
그들은 이때서야 비로소 눈앞의 이 낡은 마차의 마부석에 후줄근하게 앉아있는 키가 크고 온 얼굴에 누런 병색이 도는 사내가 참으로 무림의 검도고수 전옥린이라는 것을 완전히 긍정할 수가 있었다. 그 전까지는 그의 풍모가 너무나 평범했기에 그가 일대의 고수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으나 그의 몸에서 순식간에 뿜어져 나오던 몸서리쳐지는 기세를 느껴보고서야 그들은 눈앞의 태산을 확인한 것 같았다.
양덕광이 공손히 말했다.
『전대협, 마음 쓰지 마십시오. 대협께선 너무나 겸손하십니다.』
전옥린은 조용하게 부탁했다.
『두 분께 묻겠는데 상세한 사정을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피득표가 대답했다.
『소인 형제는 어젯밤 한구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이른 아침에 한구성 안에서 적지 않은 개방의 제자들을 만났지요. 그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 아침 남삼객 적군이 칠지마존 고낙을 시켜서 금응대협께 보내는 도전서를 전하게 했는데 용인들이 한 구의 커다란 관도 떠메고 왔다고 하더군요.』
전옥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 관 안에는 누가 들어 있었다고 했소?』
양덕광이 대답했다.
『그들 얘기로는 관속에 잠룡보주 주화무가 들어있었다고 했소이다.』
전옥린의 몸이 마부석에서 들썩 했다.
『뭐라고? 주보주가……』
그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주화무가…… 그가…… 그가 어떻게 되었소?』
『주보주는 이미 운명하셨으며 소문에 들으니까 그의 온 몸이 처참한 상처투성이였다고 하던군요.』
전옥린의 얼굴 근육이 한차례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주형, 내가 당신을 해쳤구려. 소제가 결국 당신의 목숨을 해쳤소이다.』
태행이서는 그의 눈가에 두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퍽이나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본 후 피득표가 입을 열었다.
『개방 제자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칠지마존은 관속에 숨어서 떠 메여져 왔는데 개방의 천지이로께서 일시 주의하지 못하고 관뚜껑을 열었다가 결과적으로 암산을 당했다더군요. 하장로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천지이로의 일신에 지닌 무공이 모두 칠지마존의 혈지마도 아래 완전히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전옥린은 이런 엄청난 일들이 모두 자기가 떠난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다. 만약 자기가 그 농가를 떠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하장로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천지이로 역시 그토록 심한 상처를 입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가슴 속을 에이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이빨을 깨물었다.
『아아! 내가 주보주, 하장로, 그리고 두 분형님들을 해쳤구려. 이 일을 어찌한다는 말인가?』
양덕광은 그가 마음 속으로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잘 모르고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개방 형제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칠지마존 고낙이 도전서를 가지고 와서 암산하려고 노렸던 인물은 바로 전대협이었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전옥린은 비통하게 소리쳤다.
『아아, 더 말하지 마시오. 그만 하시오.』
양덕광은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서게 되었고 피득표는 이미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정말 앞에서 보기에도 한 쌍의 쥐새끼 같은 모습들이었다.
마부석에 앉아서 줄곧 말이 없던 소원이 이때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전나으리, 비통해 하지만 마시고 먼저 마음의 평정을 되찾도록 하십시오.』
그의 음성은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그 음성이 전옥린의 귀속으로 스며들게 되었을 때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기묘한 힘이 서려 있었다.
전옥린은 이상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옆자리의 소원을 한 번 바라보았다. 소원은 얼굴 전체가 주름투성이가 되어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나으리, 일을 당해서 비통해 하고 화를 내면 오직 자기 자신을 해칠 뿐이라오. 먼저 마음의 평정을 찾은 이후에 다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십시오.』
전옥린은 직감적으로 이 앙상하게 쇠약하고 늙은 마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늙은 마부의 참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울분을 억누르며 애써 음성을 가라앉혔다.
『피형, 그 칠지마존이 주고 간 도전서에는 무슨 말이 씌어 있다고 합디까?』
피득표는 얼굴이 환해지며 용기를 내어서 말했다.
『그 일은 본래 지극히 은밀한 내용이었고 개방의 형제들이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아는 사람이 없을 뻔했지요. 그러나 그들은 전대협을 찾고자 방의 모든 힘을 다해서 일부러 그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남삼객 적군이 전대협에게 오일 후 무당산 진무대전에서 만나 결판을 내자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어왔다는데 개방 제자들은 혹시나 전대협이 그 날짜에 그 장소로 달려가지 못할까봐 걱정을 몹시 하더군요.』
전옥린은 기가 막혀서 코웃음쳤다.
『흥! 남삼객 적군은 참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어쩌자고 무당산의 진무대진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그러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두 분께서 혹시라도 잘못 듣지 않았소? 그가 참으로 닷새 후에 무당산 진무대전에서, 나와 결투를 하자고 한게요?』
양덕광은 이제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전대협, 저희들은 결코 잘못 들었을 리가 없소이다.』
피득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전대협,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다 퍽이나 이상하다고들 생각했소이다. 왜냐하면 진무대전은 무당파의 중추로서 오랜 무림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어째서 전대협을 하필이면 그 장소로 오라고 했는지……』
전옥린 역시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만난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참으로 이상한 일이오. 이제 곧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모두 무당산에 모여 무정산 세력에 대응할 모임을 갖게 되어있는데 그가 어째서 하필 진무대전에서 만나자고 도전장을 보낸 것일까?』
그렇게 스스로 물어보다가 그는 갑자기 마음 속에서 한 가닥 이상한 예감이 와닿는 것을 느꼈다.
'아, 잘못하면 큰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겠구나. 남삼객 적군이 혹시 각파 장문인들에게 어떤 불리한 조치를 취하려고 준비하는 것은 아닐까?'
양덕광은 전옥린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눈치를 살피며 넌즈시 물어보았다.
『전대협, 이번 도전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이신지요?』
전옥린은 아, 하더니 선뜻 그 말에 대답했다.
『물론 나는 반드시 그가 지정한 장소로 갈 것이오.』
그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리고 자기로서도 많은 일들을 차근차근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포권을 하며 말했다.
『두 분께서 이같은 중요한 일들을 알려주셔서 고맙소이다. 저는 이제 두 분께 그만 폐를 끼치고자 하오니 가시던 길을 가시지요.』
태행이서는 전옥린이 자기네 형제들에게 떠나가 달라고 인사를 하자 서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양덕광이 말했다.
『전대협, 저희 형제들은 지금 별다른 소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 전대협의 뒤를 따라다니며 자질구레한 심부름이라도 할까 합니다. 결코 전대협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터이오니 부디 저희들을 아랫사람으로 생각하시고 부려주십시오.』
전옥린은 포권을 하고 말했다.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제가 어찌 두 분께 그런 폐를 끼칠 수가 있겠소? 다음 기회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태행이서는 본래 이런 기회를 잡은 김에 전옥린의 뒤를 따름으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한 단계 끌어올려 보려는 욕심이 있었지만 전옥린이 이렇게 완곡하게 거절하게 되자 더 부탁을 할 수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함께 포권을 했다.
『전대협, 그럼 다음에 만나 뵙겠습니다.』
전옥린도 포권을 했다.
『두 분 고마웠소. 다시 만납시다.』
태행이서는 함께 몸을 날려서 말 위로 오르더니 분주히 떠나갔다.
전옥린은 그들이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더듬어보았다. 그는 끊임없이, 남삼객 적군이 자기에게 무당의 진무대전에서 결투를 벌이자는 초청에 자꾸만 무슨 복선이 있는 것 같아서 꺼림칙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이 소식이 완전히 확실한 것인지 끝내 마음으로부터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터무니없이 보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혹시 남삼객 적군은 무정산의 세력이 이번에 크게 손상을 입었고 이미 무림을 정복하겠다는 음모를 계획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어진데다가 내가 그의 일에 가장 큰, 눈의 가시라고 여기고 공개적으로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각대문파의 장문인들 앞에서 나와 결전을 하자고 초대를 함으로써 내가 그와의 싸움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이때 소원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전나으리, 전나으리……』
전옥린은 그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아, 하면서 물었다.
『노인장,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소원이 말했다.
『전나으리, 이 늙은이는 나으리께서 그렇게 이름 높은 강호의 대협인 줄을 전혀 몰랐소이다. 정말 눈이 있어도 태산을 몰라 뵈었소이다.』
전옥린은 담담하게 웃었다.
『제가 보기에는 노인장이야말로 강호에서 은거한 선배 고수인 것 같소이다.』
소원은 소리내어 껄걸 웃었다.
『하하하핫! 전나으리께서는 농담도 잘 하시는구려.』
그는 슬쩍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만약에 이 늙은이가 무림의 고수라면 저 늙은 말 노회 역시 고수지요.』
전옥린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노인장께서도 정말 농담을 잘 하시는군요.』
소원은 얼굴빛을 가다듬고 말했다.
『전나으리, 우리 우스갯소리는 그만둡시다. 그런데 그 누가 전나으리에게 결투를 하자고 도전하는 것인가요? 그 남삼객 적군이라는 사람은 강호에서 매우 유명하고 싸움을 잘 하는 사람입니까?』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일대검신(一代劍神)이라는 칭호로 불리워지는 강호 제일의 검객입니다.』
소원은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온 얼굴에 근심의 빛을 띄우고 말했다.
『전나으리, 그가 그토록 무서운 사람이라면 나으리는 어떡해야 하지요?』
전옥린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말했다.
『흥! 그가 아무리 무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기왕에 저를 무당산에서 만나겠다고 초청한 이상 저는 반드시 가야합니다.』
소원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나 전나으리는 지금 병을 앓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옥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몸에 상처를 입은 것이지요. 하지만 다시 며칠간 더 조섭을 하게 된다면 빨리 낫게 될 겁니다.』
그들 두 사람은 말을 몰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원은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전나으리, 이 늙은이에게 두 알의 영약이 있소이다. 예전에 어느 늙은 손님께서 특별히 주신 것인데 사람의 근본을 공고히 하고 원기를 돋구는데 특효가 있다고 하더구려. 제가 보기에 전나으리께선 몸에 상처를 입으셨으니 역시 나으리께서 잡수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면서 그는 품속에서 하나의 옥합(玉盒)을 꺼내서 전옥린에게 내밀었다.
전옥린은 그 옥합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하얗게 생긴 것이 한가닥의 잡색도 섞여 있지 않은 귀한 물건인 것을 보고 그만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노인장, 이 옥합은 참으로 보기드문 화전미옥(和顚美玉)으로서 가치가 적지 않은 보물인데, 누구한테서 받으신 겁니까?』
소원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 늙은이가 말을 한다 하더라도 전나으리께서 누구인가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물었다.
『전나으리, 이 옥합이 정말 값어치가 나가는 것입니까?』
전옥린은 그의 놀라거나 의아해 하는 표정이나 태도가 대단히 진지해서 일시에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말로 그 옥합의 가치를 잘 모르는가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웃으면서 그 옥합을 소원에게 건네어주고 말했다.
『이 옥합은 제가 보기에 적어도 은자 일만 냥의 값어치는 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노인장께서 이 물건을 파시면 평생 먹고 입을 것은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소원은 실눈을 뜨고서 의미심장하게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
『헤헤, 전나으리, 이 물건이 정말 그렇게 값어치가 나갑니까?』
전옥린은 어디까지나 고지식했다.
『제가 왜 노인장을 속이겠소이까? 노인장, 빨리 거두셔서 갈무리 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보고 나쁜 마음을 품지 않도록 말입니다.』
소원은 아, 하더니 옥합을 열고 안에서 두 알의 밀납으로 싸여진 알약을 꺼내고서 말했다.
『전나으리, 옥합은 제가 갈무리 할테니 이 두 알의 영약은 나으리께서 드시도록 하십시오. 제가 그 손님에게 들으니까 이 알약은 무슨 천산설련자에다 옥지(玉芝)를 배합해서 제련(提煉)해낸 것이라 매우 진귀하다고 했소이다.』
『아, 그렇소이까?』
그는 일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한 알의 밀납을 벗겨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밀납껍질 안에는 한 알의 새끼손가락 굵기만한 금황색 알약이 들어있었는데 껍질을 벗기자마자 그윽한 향기가 코에 스미는 것이 대뜸 몸이 가뿐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넋을 놓고 약을 구경하고 있는데 늙은 마부 소원이 갑자기 손을 뻗쳐서 말고삐를 잡았다. 그가 손목을 구부렸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전옥린의 손과 한 번 살짝 부딪치게 되었다.
전옥린은 근본적으로 소원이 그같이 움직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방심하고 있었는데 엉겁결에 손이 움직이면서 손가락에 잡혀있던 알약이 탁 튕겨지면서 약간 벌어져 있던 입속으로 절묘하게 쏙 들어가고 말았다.
그 알약은 지극히 이상했다. 입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즉시 사르르 녹아버려서 전옥린이 미쳐 뱉아내기 전 이미 한 모금의 향기롭고 약간의 쓴 맛이 있는 진액(津液)이 되어서 목구멍을 넘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얼굴색이 변하고 말았다.
『노인장, 이 무슨 짓이오? 저는……』
소원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얼굴로 도리어 물었다.
『전나으리, 왜 그러십니까?』
전옥린은 시력을 가다듬어서 그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정말 그의 표정과 태도는 진짜로 그러는 것인지 그런 척 하는 것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쓰디쓰게 웃었다.
『제가 부주의해서 이 진귀한 알약을 삼키고 말았소이다. 이것을 어떻게 배상해야 할까요?』
소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 두 알의 영약은 본래 이 늙은이가 전나으리께 드린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나머지 한 알도 함께 복용하도록 하십시오.』
전옥린은 미처 무슨 말을 하기 전에 갑자기 뱃속에서 한 가닥 특이한 뜨거운 흐름이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뜨거운 흐름은 신속하게 온몸으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대뜸 전신이 불에 타는 것처럼 견딜 수 없이 뜨거워져서 그는 학, 하고 숨을 내뿜으며 입을 벌려야 했다.
그는 목쉰 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노인장, 이게…… 이게 무슨 약이오?』
소원은 그의 안색이 불빛처럼 빨개지는 것을 보고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전나으리, 왜 그러시오? 마치 얼굴이……』
전옥린은 자기가 이미 암산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고 일시 그 노인을 공격할 여유 없이 몸을 솟구쳐서 길 옆으로 피하려 했다. 그는 우선 조용한 장소를 찾아 운기행공하여 몸속의 독을 억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일장쯤 몸을 날리게 되었을 때 별안간 한 가닥의 엄청나게 뜨거운 열기가 곧장 머리끝으로 솟구쳐 올라와서 그는 다시 진기를 끌어올리지 못하고 그만 그 즉시 허공에서 아래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몸은 허공 중에서 이미 혼미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사정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 떨어지게 되었고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원이라는 늙은 마부는 그가 땅바닥에 떨어지자 나지막하게 호통소리를 내지르며 마차를 길 옆으로 몰면서 몸을 날렸다.
그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허리를 구부리고 등이 꼽추를 연상시킬 정도로 굽었으며 가슴팍이 앙상해서 금방이라도 곧 죽을 사람 같았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몸을 날리는 동작은 빛살처럼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고 온 몸이 마치 무게가 없는 깃털처럼 사뿐하게 허공을 날았다. 그는 단 한 번 몸을 날려서 전옥린의 곁에 가만히 내려섰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 손을 뻗쳐서 전옥린의 코 끝에 대보더니 빙그레 웃고는 땅바닥에 떨어진 다른 한 알의 알약을 찾고는 전옥린을 안아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체구는 가냘프고 키도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큼직한 전옥린의 몸을 안아들 때는 마치 어린애를 안는 것처럼 조금도 힘겨워하지 않았다.
전옥린을 수레 안으로 들여다 눕혀놓은 그는 다른 하나의 알약을 전옥린의 입에 조심스럽게 넣어주었다.
그는 흐뭇하다는 표정으로 전옥린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가부좌를 틀고 옆에 앉더니 두 손을 뻗쳐서 전옥린의 백회혈과 명문(命門) 두 혈도를 짚었다.
까마득하고 요원한 꿈의 나라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 전옥린의 눈가에는 눈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