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크아악!]
자양혈마는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그의 머리는 완전히 피박살이 나 있었다. 그대로 비명을 끝으로 절명해 버린 것이다. 이에 나머지 마인들은 대경했다.
[저..저 놈이!]
[죽여라!]
그들은 망설이고 자시고도 없었다. 무조건 단엽을 향해 덮쳐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엽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아마 면전의 평범한 중년선비가 백의성주인 단엽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다리가 안보이도록 이곳에서 줄행랑쳤겠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죽음 속으로 뛰어 드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있었다.
[가소로운 놈들!]
단엽은 가볍게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단지 그 단순한 동작에 수십여 마인들은 이리저리 풍지박산 되어 날아가 버렸다.
[으악! 크악!]
그들은 뒤늦게서야 비명을 질렀으며 짓이겨진 혈육이 된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으...인간이 아니다.]
소흑자와 소백자는 눈을 비비며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들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 면전의 신비인처럼 무서운 무공을 사용하는 인물을...
(신선일 게다. 신선이 아니면 이런 가공할 무공을 사용할 수가 없어.)
(아아... 하늘이 우리 개방을 구원할 시선을 내려 주신 게다.)
그들은 감격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단엽의 앞에 오체복지를 했다.
[신선이시여. 신선을 몰라본 우리 두 비렁뱅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용서하시어 주시기 바랍니다.]
[개방을 도와주소서. 악마들이 우리 개방의 많은 형제들을 도륙하고 있나이다.]
단엽은 어이가 없다.
(신선이라고?)
그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말을 함부로 흘려버릴 수는 없었다.
[서둘러서 그 장소로 안내하여라. 내 개방을 도와 줄 테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흑자와 소백자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며 몇 번이고 단엽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신선께서는 저희들을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잽싸게 다시 수림으로 신형을 날렸다. 졸지에 단엽은 신선이 되어 버렸다.
단엽은 생각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내가 한발 늦은 것 같다. 천마교가 이미 풍운회를 대대적으로 공격한 것 같으니...)
공터.
이곳은 울창한 수림 내에 위치해 있었다. 한데 공터에 가득 널브러진 무수히 많은 시신들. 어림잡아도 수백이 넘어보였다. 그리고 그 시신들은 대부분이 비렁뱅이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바로 개방의 인물들인 것이다. 아직도 치열한 혈전은 거듭되고 있었다. 근 오백여 명에 달하는 개방의 비렁뱅이들과 삼백여명 천마교 마인들과의 혈전. 말이 혈전이지 일방적으로 개방의 인물들이 몰리고 있었다.
천마교 마인들은 강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개방의 인물들을 주살하고 있었다.
[크아악! 커억!]
수림을 가득 울리는 비명과 비명. 만약 이대로 일각의 시간이 더 흐른다면 개방인은 전멸할 판이었다.
개방의 비렁뱅이들은 허리에 매인 매듭으로 그 신분을 나타낸다.
육결이면 분타주급이고 칠결이면 총타주급. 그리고 팔결이면 장로급이며 구결이면 방주를 나타내는 것이다. 현재 개방의 방주는 낙성신개이다.
그런 인물이 있었다. 산발한 머리에 지저분한 몰골의 중년인.
그러나 지저분한 중에도 그에게는 일파종사다운 비범한 기질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가 바로 낙성신개였다. 이때, 그의 얼굴에는 처연함과 절망감이 진득하게 배여 있었다.
[결국... 개방은 오늘로써 막을 내려야 하는가? 아아... 이 모두가 나의 무능함 때문이니 내 죽어서 어찌 선조를 대한단 말인가...]
그는 울음보다 진한 통곡을 흘렸다. 그의 곁에는 장로급 팔결제자들이 밀
려오는 마인들을 상대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피투성이였으며 뒤로 연신 밀리고 있었다.
마인들 중에는 가공할만한 무공을 소유한 인물들이 있었다. 숫자는 십여 명 정도 바로 만겁노의 십팔 마인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 존재하고 있는 인물들이 전부 여기에 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한명.
그는 검은 유삼에 검은 섭선을 들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바로 만겁뇌주이자 천마교의 천마사존 가운데 일인이기도 한 사뇌였다.
그는 격전에 가담하지 않은 채 한쪽에서 느긋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그는 음침하게 웃으며 낙성신개를 향해 말했다.
[어떤가? 생각을 바꿀 의향은 없는가?]
낙성신개는 단호히 말을 잘랐다.
[없다. 모두가 죽기 전까지 우리 개방인은 싸울 것이다.]
[어리석은 놈!]
사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천천히 낙성신개를 향해 다가갔다. 개방의 몇몇 인물들이 결사적으로 그를 제지하려 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가벼운 사뇌의 손짓에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흐흐...네놈을 직접 내손으로 죽여주마.]
그의 신형이 허공을 날아 곧장 낙성신개에게 덮쳐들었다.
슈욱! 섭선이 허공에 흰 선을 무수히 그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낙성신개를 향해 폭사되었다.
낙성신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자신이 사뇌의 적수가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순순히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천마교의 종노릇은 할 수 없다.)
그는 손에 든 타구봉을 들어 사뇌를 향해 뻗어갔다. 그러나 미처 타구보을 다 뻗기도 전에 그는 무서운 힘이 타구봉을 퉁겨냄을 느꼈고 동시에 손바닥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과 함께 타구봉을 놓치고 말았다.
(도저히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구나.)
그는 절망했다.
섭선. 사뇌의 섭선은 어느새 그의 목에 닿아 있었다. 사뇌는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 일백 오십년 전에도 이 사뇌는 지금의 너보다는 강했다. 한데 네가 감히 나를 상대로 반항을 하다니...]
스스... 그는 가볍게 섭선을 그었다. 낙성신개의 목에 핏줄이 그어지며 선혈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이 와중에 그를 돕기 위해 수십여 명의 개방인들이 사뇌를 향해 덮쳐 들었으나 다른 마인들에 의해 제지가 되고 만다.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죽여라...]
낙성신개는 차라리 눈을 감고 만다. 이때다.
[야! 개자식아. 신선께서 네 놈을 죽이러 오셨다.]
[어서 방주님의 목에서 섭선을 떼지 못하겠느냐?]
언제 나타났는지 소흑자와 소백자가 사색이 되어 소리치고 있었다. 단엽은 장내의 끔찍함을 보고 탄식했다.
(잔인한 놈들...)
그도 모르게 살기가 꿈틀거리며 솟구쳐 올랐다 사뇌는 흠칫하여 시선을 소흑자와 소백자에게 돌렸다.
(신선이라고...)
그는 평범한 모습의 단엽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흐흐...완전히 돌아버렸군.]
그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단정하고 섭선에 힘을 주었다. 허나 섭선이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듯 꼼짝달싹도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런 괴변이...)
그는 이것을 괴변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힘을 주었다. 그러나 역시 섭선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에 낙성신개는 눈을 슬그머니 떴고 힐끔 단엽을 주시했다.
이때 단엽은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가 사뇌의 섭선을 제어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사뇌 역시 뒤늦게야 그것을 알았다.
그는 등골에 식은땀이 흐름을 느꼈다. 단엽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탄식했고 곧 그이 신형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스쳐 지나간다. 그의 신형이 빛처럼 천마교의 마인들을. 빠르다. 육안으로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그리고 비명은 참혹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악! 으악!]
추풍낙엽이란 말을 이런데 두고 하는 말인가. 천마교의 마인들은 그야말로 눈을 멀뚱이 뜨고 자신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었다.
수백여 천마교의 마인들. 그들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에 싸늘히 식어가는 시신이 되어 있었다.
소흑자와 소백자는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러나 나머지 개방의 인물들과 사뇌는 그야말로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뜬 채 경악실색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살까지 꼬집어보는 인물도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경악하고 있나를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행동이었다.
단엽은 사뇌의 면전에 나타나 있었다. 그는 사뇌를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떻소. 아직도 그 섭선이 움직이지 않소.]
사뇌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귀하는 뉘시오? 천마교와 원한을 사면 좋을 것이 없음을 알고는 있을 텐데...]
[핫하하... 감히 천마교 따위로 나를 위협하는가?]
단엽은 낭랑하게 웃었다. 이어 그는 차갑게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사뇌...자네는 너무 오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래 자네는 너무 오래 살았어. 만약 자네가 백오십년 전에 죽었다면 자네는 일세를 풍미한 마웅이란 이름 정도는 남겼을 것이야. 그러나 그대는 지저분한 생을 너무 질질 끌고 있어. 천마교의 개노릇을 하며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지.]
순간 사뇌는 무서운 압력이 풀어지고 자신의 섭선이 움직임을 느꼈다.
(마지막 기회다. 기습으로 이놈을 죽여야 한다.)
그는 내심 이빨을 갈며 섭선을 움켜쥐었다. 한데 그것은 오산이었다. 섭선은 움직이되 그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이다.
섭선은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목을 꿰뚫어 버린다.
[큭!]
비명조차 제대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사뇌는 섭선을 움켜잡고 비틀거렸다. 그의 칠공으로부터는 폭포수처럼 선혈이 분출되어 올랐다.
불신과 경악과 회의에 젖은 눈은 한순간 흐려져 갔고 손을 들어 단엽을 가리키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으나, 쿵! 그의 몸은 썩은 고목처럼 바닥에 먼지를 일으키며 나뒹굴었다. 너무도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
낙성신개는 혼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아직도 그의 목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그는 그 아픔마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소흑자와 소백자는 황망히 다가와 단엽의 앞에 다시 오체복지했다.
[신선님의 이 하해와 같은 은혜 어찌 보답해야 할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감격으로 인해 눈물마저 흘리고 있었다. 한편, 소흑자와 소백자가 오체복지하자 수백여 개방의 제자들도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단엽에게 감격해 하고 있었다.
낙성신개는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은인의 존함이 어찌되시는지요?]
[아니오. 그것보다 왜 개방이 이 지경이 됐는지 그 연유부터 알고 싶소.]
단엽은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서궁세가의 종노릇을 해왔습니다. 만박대선개가 실질적으로 우리 개방의 최고 실권자였기에 그가 서궁세가의 인물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분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개방의 제자들은 그 일을 원치 않았고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종노릇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계속하여 서궁세가의 요구를 거절해 왔습니다. 그리고 풍운회를 위해 기꺼이 개방은 한 팔이 되기로 결심을 하였던 것이며 그 동안 서궁세가에 주었던 모든 정보를 풍운회에 전달했습니다. 한데 서궁세가에서는 이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급기야는 이들을 보내 개방을 파멸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은인께서 개방을 도와주지 않으셨던들 개방은...]
낙성신개는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단엽은 부드럽게 말했다.
[잘 생각하시었소. 개방의 바른 결단은 도탄에 빠진 천하창생을 위해 큰 힘이 될 것이오.]
[감사합니다.]
낙성신개는 허리를 다시 깊숙이 숙였다. 단엽은 정색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현재 풍운회의 정황은 어떤지요?]
낙성신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절망적입니다.]
[그 정도이오?]
[그렇습니다. 천마교의 수만 고수들이 일시에 몰려 들었으며... 풍운회는
사면초가의 형국입니다.]
[음...]
단엽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서궁수와 적용운 또한 이곳에 이르렀소?]
[아닙니다. 천마교의 핵심인물은 아직 군산에 이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풍운회가 절망적인 상태란 말이오?]
낙성신개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배신자들 때문입니다. 만박대선개가 서궁세가의 인물이었듯이 지금 풍운
회는 수많은 서궁세가의 첩자들로 인해 크게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틈에 십만 천마교의 마인들이 공격해 온 것이니 군협천주이셨던 현 풍운회주 철군무 회주와 풍운회의구대장로 또한 손을 못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단엽의 얼굴에 초조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정중히 말했다.
[혹시 풍운회의 총단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인물이 있소?]
[무슨 일로?]
[나는 풍운회를 돕기 위해 왔소. 늦었지만 서두른다면 풍운회의 위기를 막을 수가 있을 것이오.]
낙성신개는 격동의 표정을 보였고, 곧 소흑자와 소백자를 향해 소리쳤다.
[무엇들을 하고 있느냐? 어서 은인을 풍운회의 총단으로 안내하라.]
소흑자와 소백자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단엽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낙성신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단엽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러자 단엽은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방주께서는 백의성의 인물들을 찾아주시오. 그들도 이곳에 왔소. 그들은 백의에 백색복면을 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오. 그들을 찾으면 이렇게 전해주시오. 될 수 있으면 빨리 서궁세가의 첩자를 찾아내어 죽이라고. 백의성주의 이름으로 내리는 명임을 함께 전하기 바라오.]
이어, 단엽은 안개처럼 아스라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소흑자와 소백자
도 역시 사라졌다.
고성.
푸른 이끼가 자욱한 이 성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언제이던가. 이 성은 무림의 하늘로 우러름을 당했으며 또 언제이던가. 이 고성은 무림의 성역으로 불리웠던 시절도 있었다.
아름다운 화목림이 고성을 중심으로 울창하게 펼쳐져 있었으며 고성 내의 누각이며 대전이 지극히 우아한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고성은 황폐해지기 시작했으며 세인들은 이 고성의 존재를 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군협천의 종말이었다.
그러나 풍운회가 다시 이곳을 총단으로 삼으면서 예전의 위용을 되찾았다. 군데군데 허물어진 성벽이 다시 보수되었으며 천하인들은 다시 이곳을 우러르게 되었다. 한데 지금 이곳은 결코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고성의 처처에 처참의 극을 치달리는 혈전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또한 수십
여 전각에 불에 타고 있었다. 그야말로 끔찍한 지옥도가 여기에 펼쳐지고 있었다.
대전.
분위기가 정갈하고 웅장한 일면도 있는 대전이었다. 이런 곳에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인물이 존재한다 해도 그가 위대해 보일만큼 어떤 특이한 분위기가 이 대전에는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현재 존재하는 구인이 있었다. 가운데 태사의에 몸을 깊숙이 묻고 있는 인물. 그는 완숙한 기품의 중년인이었다.
일신에 걸친 청삼이 바다처럼 깊은 맛을 풍기고 그의 잔잔하며 깊은 눈은 저 푸른 창공을 연상케 했다. 이런 류의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인물은 천하에 단 한사람뿐이다. 바로 풍운회주 철군무인 것이다.
군협천의 이십일 대 천주로써 한때 천하평정의 대업을 이루었던 위대한 인물.
군협천 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그가 이제는 풍운회의 초대 회주로서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를 중심으로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팔인의 몸에서 한결같이 풍겨지는 저 물처럼 잔잔한 기도. 아니 그들 자체가 물과 같아 보였다.
비범한 기태에 절정의 기도를 풍겨내는 이들 팔인.
이들이 저 위대한 군협천의 구대장로 가운데 팔대장로이자 현재는 풍운회의 팔대장로들이었다. 인간한계를 넘어선 무공을 지녔다는 이들. 그러나 천마교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는 풍운회의 처지를 생각할 때 이들은 침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문득 풍운회주 철군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오. 군협천에서 풍운회로 이어지는 우리 형제들의 고통... 육체적인 고통은 참을 수 있소.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은 참기가 힘든 것이오. 우리는 당할 만큼 당해왔소. 군협천은 이제 잊혀진 전설이 되었으며 풍운회 역시 오늘로써 마지막이 될 것이오. 물론 많은 형제들이 희생을 당할 것이오. 그러나 무림을 위해선 그것은 아프지만 감수해야 하오.]
팔대장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 역시 처연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철군무의 말은 계속 되었다.
[언제까지 이런 고통을 당할 수야 없지 않소? 언제까지 이런 수모를 당할 수야 없지 않소? 그들은 완전히 우리를 농락하고 있소. 우리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그런 농락을 주고 또 주고 있소. 세상 사람들은 이 철군무를 가리켜 위대하다 하오. 그러나 이 철군무야 말로 군협천의 무능력자이오. 군협천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군협천을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했던 졸장부이오. 그래서 내가 한 일은 무엇이오. 풍운회를 세웠으나 역시 당하고만 있었소. 고통은 이어졌으며 군협천이 파멸하듯 풍운회의 파멸을 눈뜨고 지켜보고만 있는... 헛허... 나는 가지에 매달린 한 잎 낙엽을 두고 애태우고 있는 고목에 지나지 않소.]
그의 음성은 처량하기까지 했다. 팔대장로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상전의 처연한 절규를 그들은 더 이상 고개를 세우고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상전의 고통을 대신하지 못하는 자신들을 저주스럽게 생각했다.
철군무의 음성은 대전을 여운처럼 길게 울리고 있었다.
[군협천에서 내가 무력했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기에 자위할 수가 있었소. 서궁세가는 완벽하게 군협천의 문서와 명령서들을 조작하고 있었고 무려 이백년의 세월동안 지속되어 온 그것을 나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암살을 가장하여 풍운회를 창단했던 것이며 그것으로써 그들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소. 그러나 여전히 풍운회는 서궁세가의 힘에 억눌려 있었으며 그들의 조롱 속에 있었소. 더 이상 자위할 수도 없는 현실. 이 모두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소. 서궁세가는 오래 전에 풍운회의 출현을 예상했던 것이며 이미 상당수의 서궁세가 인물들이 첩자라는 이름으로 풍운회를 암중에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오. 그들을 통해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서궁세가의 인물에게 전해졌으며 풍운회의 모든 대소사가 그들에게 또한 전해졌던 것이오. 이런 상태에서 풍운회는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소. 발버둥치면 발버둥 칠수록 고통만이 가중될 뿐이었으며 때로는 서궁세가의 인물들에게 한을 품게 한 선조들을 원망하기도 했소. 꼭 그래야만 했던가?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었으며 문제는 현실이었소. 이대로 서궁세가의 농락에 무너질 수는 없다는 나름대로의 비장함 결심이었소. 그래서 본좌는 또다시 군협천을 버리듯 풍운회를 버리기로 한 것이오. 풍운회는 결국 그 종말을 고할 것이나 그 대가로 첩자라는 이름을 가진 서궁세가의 인물들을 찾아내게 될 것이오.]
철군무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흘렀다. 태사의의 모서리를 움켜 쥔 손은 무섭게 떨렸으며 그 순간 태사의의 모서리는 한줌의 재로 화해 날리운다.
[서궁세가의 인물들 역시 본좌가 지친 만큼 지쳐있을 것이오. 그리고 본좌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그들 역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런 그들은 이제 서서히 실체를 드러낼 것이며 본좌는 그런 그들을 찾아낼 것이오. 그리고 볼 것이오. 도대체 어떤 인물들이 가면을 쓴 채 나의 곁에 그토록 끈질기게 도사리고 있었는지.]
팔대장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숙연히 말했다.
[아마 그들은 모습을 드러냈을 겁니다. 노신들의 손으로 그들을 척살하겠습니다.]
[아니오.]
철군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더 기다려야 하오. 그들이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모두가 나타나야 하오. 한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역시 우리는 서궁세가의 농락에서 벗어날 수가 없소.]
[하오나...]
팔대장로 가운데 천공이 탄식을 흘리며 말했다.
[이대로 가면...풍운회의 힘 가운데 오할 이상이 사라지게 되나이다.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희생.]
[감수해야 하오. 어쩔 수가 없소.]
철군무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엇으로든 죽어가는 형제들을 위로할 수 없겠지만 반을 잃을지라도 모두를 잃을 수는 없지 않소? 이 순간을 넘기면 우리는 서궁세가의 농락에서 벗어날 수가 있소. 지금까지 당한 고통을 돌려줄 수도 있소. 이 순간을 넘기면.. 이 순간을 넘기면...]
철군무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그것은 피보다 진한 비애의 눈물.
일대영웅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이다.
[아아... 회주이시여...]
팔대장로는 그런 철군무를 보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들은 철군무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그 성품이 인자하고 한 사람을 죽이면 사흘을 고뇌하는 철군무인 것이다. 그런 그가 형제의 죽음을 외면할 때는 그 마음의 고통은 어떠하겠는가. 그 누가 그 아픔을 짐작인들 할 수 있겠는가.
한데 이때였다.
[회주! 서둘러서 형제들을 구해야 합니다.]
돌연 한 줄기의 낭랑한 음성이 대전으로 흘러드는 것이었다. 이어, 마치 어둠속에서 불꽃이 솟아나듯 세 사람이 장내에 나타났다. 두 명은 어리둥절한 낯빛으로 대전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소흑자와 소백자였고 한명은 평범한 백의중년인 단엽이었다.
[누구인가?]
팔대장로는 대경하여 단엽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놀라고 있었다. 그들
의 이목을 피해 소리 없이 대전으로 스며든 단엽의 불가사의한 움직임. 이백년 이상 오직 무공에만 전념해 온 그들로서도 감히 흉내 낼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철군무 역시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을 뿐 그는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소?]
단엽은 정중히 말했다.
[풍운회를 돕고자 하는 사람 중에 한사람입니다.]
[우리를?]
철군무는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단엽은 그런 그를 직시하며 말했다.
[회주의 말씀은 본의 아니게 듣게 되어 회주의 아픈 마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번 일로 풍운회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됨은 막아야 합니다. 서궁세가들의 첩자들은 소생이 거의 파악하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무엇이?]
철군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팔대 장로 역시 표정이 크게 변했다.
단엽은 품에서 두툼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 철군무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그들의 명단입니다.]
[으음...]
철군무는 침음성을 흘리며 두루마리를 펴고 빠르게 명단을 살폈다.
[이럴 수가!]
철군무는 입을 딱 벌렸다. 그의 몸은 무섭게 떨리고 있었으며 표정은 무섭게 굳어들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이 명단이 사실 그대로라면 풍운회의 그동안의 고통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시선은 단엽에게로 향했다. 단엽을 빨아들일 듯이 주시하는 그 눈빛은 무섭도록 싸늘했으며 그 눈빛에 접한 단엽은 자신의 모든 것이 그대로 그 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대단하다. 저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가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무공의경지에 이르렀음을 내보이고 있다. 과연 군협천 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답다.)
이때 철군무가 무섭도록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이것을 사실 그대로 믿을 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소. 아니 이것은 모함일 수도 있소. 귀하는 무엇으로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시겠소?]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팔대장로의 시선을 또한 의식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해 보일 아무것도 없소. 그러나 맹세할 수 있소. 백의성주의 이름으로...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귀하가 백의성주란 말이오?]
철군무는 경이로운 눈빛을 발하며 물었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래도 믿을 수 없다면 단엽이란 이름으로 맹세하겠소.]
순간 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본래의 그의 진면목으로 이어 문사건을 벗어 내리자 치렁한 흑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그의 용모가 드러나자 대전에는 일대 동요가 일었다.
[부회주가 아니시오?]
팔대장로는 그가 누구임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그를 천엽성승이 행세한 단엽옥승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철군무만큼은 그가 천엽성승이 아닌 단엽임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만이 단엽옥승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단엽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회주께서는 삼년 전 마차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시고 계십니까? 그때 회주께서는 소생에게 적사도를 파괴하라는 부탁을 하셨지요.]
(틀림없다. 천엽이 말한 그의 아들이다.)
철군무는 이렇게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고 있네.]
[그렇다면 이제 그 명단을 믿으시겠습니까?]
[믿네.]
철군무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단엽은 빙글 몸을 돌려 팔대장로를 주시했다.
[그렇다면 이들 중 한명이 서궁세가의 인물임도 믿겠군요.]
[그것 역시 믿네.]
철군무는 생각하고 자시고도 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팔
대장로의 안색은 대변했다.
[우리들 가운데 서궁세가의 인물이?]
[첩자가 있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팔대장로는 회의의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려 이백 살이 넘은 그들이었고 서로를 알게 된 것은 이백여 년의 세월이다. 그리고 함께 폐관에 들어가 동거동락한 세월이 백여 년. 그들은 상대의 눈빛만 보고서도 그 마음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습관을 비롯한 비밀 일체에 대해 자신들의 손바닥보다도 더욱 자세히 알고 있었다. 만약 그들 중 서궁세가의 인물이 있었다면 어딘가 행동이 수상했을 것이고 하루 이틀도 아닌 근 백여년이란 세월을 함께 지낸 그들이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리는 만무했다. 한데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서궁세가의 인물이 있다니...
그들은 아연실색할 뿐이었다.
무후천로가 물었다.
[좋소. 부회주의 말대로 이곳 우리들 가운데 서궁세가의 인물이 있다고 칩시다. 그는 누구이오?]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소생은 백의성주이지 풍운회의 부회주는 아니오.]
[그럴 리가?]
팔대장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단엽은 담담히 그들을 쓸어보았다.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만큼은 내가 풍운회의 부회주가 아님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그가 바로 첩자이오. 그러나 그가 누구라는 확증은 없소.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이 첩자라는 것만을 알지 나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만박대선개조차도 그가 누구임을 알지 못했소.]
[만박대선개?]
[그렇소. 그는 바로 서궁세가의 첩자였소.]
[아아...]
팔대장로는 다시 한번 아연실색했다. 철군무는 이를 방관하고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눈길로 단엽을 주시하고 있었다.
(천엽의 아들은 뛰어나다. 내가 본 어느 누구보다도... 그를 지켜보리라.)
그는 단엽에게 관심있는 표정이었다. 과연 단엽이 이 사건을 어찌 처리할 것인지. 그것은 사실 자신으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단엽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내가 이곳에 이른 것은 일각 이전이었고 그동안 뒷전에서 당신들 팔대장로를 잠시 살필 수 있었던 점이오. 그래서 찾아낼 수가 있었소. 서궁세가의 첩자를...]
팔대장로는 크게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긴장했다. 한편으로 믿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부정하는 그들.
그러나 일단 자신의 주변에 서궁세가의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비통한 표정을 지을 때도 담담했으며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릴 때도 그는 웃고 있었소.]
단엽은 팔대장로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그에게는 사람을 짓누르는 위엄이 있었고 또한 여유가 있었다. 팔대장로는 숨이 막힘을 느꼈다.
(과거의 부회주는 분명 아니다. 과거의 그에게는 이런 기도가 없었다.)
그들은 이제서야 그것을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단엽은 대성녀의 앞에 섰다. 자애로운 용모의 사십대 미부인. 그녀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시오. 당신은 서궁세가의 인물이 아니오.]
대성녀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단엽은 이번에는 중원일정의 앞에 섰다.
[당신 역시 아니오.]
[고맙다고 말해야겠구려.]
중원일정은 씁쓸하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시, 단엽은 축융신군 앞으로 다가갔다.
자색전포를 걸친 중년거한. 그는 부리부리한 용안을 지니고 있었다. 단엽이 자신의 앞에 서자 그는 손을 내저었다.
[노부는 아냐. 노부는 서궁세가의 개자식이 아냐.]
그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팔대장로 가운데 가장 성격이 불같으며 단순한 사람...)
그는 축융신군에게 친근감을 느끼며 웃었다.
[유향신협 노선배께서 안부를 전하라 하시더군요.]
[그가 살아 있었나?]
축융신군은 격동의 표정을 지었다. 그와 유향신협은 형제나 다름없는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다.
[살아 있습니다.]
단엽은 빙그레 웃어 보인 후 다시 좌측으로 걸어갔다.
천백의 앞이었다.
이백살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삼십대로 보이는 인물. 그는 팔대장로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였다. 용모는 지극히 평범하여 그 어디 한 곳 특출 난 곳이 없었다. 단엽은 그를 직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바로 당신이오.]
[무슨 소리인가?]
천백은 흠칫 몸을 떨었다. 단엽은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당신만이 다른 사람은 처연해 할 때도 태연했으며 눈물을 흘릴 때도 웃고 있었고 절박해 할 때도 담담했소.]
천백은 담담했다. 아마도 놀라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심기를 천성적으로 타고난 듯했다.
한편, 단엽이 천백을 지목하자 나머지 칠대장로는 크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다음순간, 그들은 그럴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철군무만이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천백...그였던가? 그가 서궁세가의 인물이었기에 그 지혜 역시 뛰어난 것이었던가?)
그는 담담하면서도 싸늘한 눈길로 천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천백은 빙그레 웃기까지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부회주...당신이 나를 서궁세가의 인물이라 지목할 권리는 없소. 단지 그것만으로 나를 서궁세가의 인물로 낙인찍는 것은 어불성설이오. 만약 그래도 본인이 의심스럽다면 모든 사람이 수긍할 확실한 증거를 대주시오.]
물처럼 고요하며 한줄기 차가운 위엄마저 내포한 음성. 여느 사람 같았으면 단지 그의 음성만을 듣고서도 질려버릴 판이었다. 그러나 단엽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지극히 영리하오. 적어도 당신이 생각하기론 당신은 완벽한 팔대장로 가운데 일인이며 그 누구도 당신이 서궁세가의 인물임을 드러낼 증거를 지니고 있지 못할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오. 그렇소. 당신은 완벽했소. 물론 이백여 년의 세월동안 자신을 철저히 숨기며 산 당신이니...당신 자신조차도 서궁세가의 존재를 상실할 만큼... 당신은 철저한 팔대장로 가운데 일인이었을 뿐이오. 그러나 당신은 분명히 서궁세가의 인물이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신분을 지닌...]
천백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가. 여전히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단엽은 그의 그런한 태연함에 은근히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당신이 서궁세가의 인물임을 증명할 확실한 한 가지가 있
소.]
순간, 천백의 두 눈에 경련이 일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빨리 사라졌으며 때분이 그것을 눈치 채지는 못했다. 오직 단엽만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튼 이때 모두의 시선은 단엽의 입에 집중되어 있었고 또한 긴장하고 있었다.
[서궁세가는 그들만의 독창적인 무공이 있소. 그 가운데 한 가지의 무공인 청혈무영수. 이것의 위력은 실로 가공하기 그지없소. 일단 연성하면 소리없이 상대를 죽일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쌍수는 푸른색을 띠게 되오. 그리고 이 청혈무영수를 익힌 인물은 죽을 때까지도 지워버릴 수 없는 특징이 있으니 겉으로 드러난 쌍수는 평범해도 그 쌍수에 흐르고 있는 피는 적색이 아니라 푸른색이오.]
여기까지 말한 단엽은 의미심장하게 천백을 주시했다.
[당신이 서궁세가의 인물인 이상 청혈무영수를 연성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신은 쌍수에 푸른 피를 지니고 있을 것이오. 피를 내도록 하시오. 당신의 쌍수에서 나온 피가 만약 적색이라면 당신은 결백한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천백은 서궁세가의 인물인 것이다.
천백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 자루의 소도를 품에서 꺼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대로 해보이겠소.]
그는 담담히 말한 후 소도를 손으로 가져갔다.
[많은 것을 알고도 있군.]
돌연 그는 냉소를 흘리며 단엽을 향해 벼락처럼 쌍수를 뻗어내는 것이었다. 거리는 지척. 너무도 돌발적인 공격인지라 단엽은 도저히 그 쌍수를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칠대장로와 철군무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들은 느낀 것이다. 천백이 서궁세가의 인물임을. 그리나 그것을 알고 단엽을 구하려 했으나 늦어 있었다. 단엽은 담담히 웃었다.
[나로 하여금 피를 내달라는 것인가?]
그의 몸은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천백의 쌍수가 그의 몸으로 짓쳐들어오는 지극히 찰나적인 순간에 무려 아흔아홉 번의 방위이동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아흔 아홉 개의 환영이 동시에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든다.